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81
감꽃 머리 잔상
트로트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앳된 여자가 ‘보릿고개’란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다. 밥숟가락 밀어내며 자랐을 아이가 깜부기는 아는지 모르겠다. 감꽃 머리라는 말이 있다. 보릿고개와 같은 의미로 춘궁기의 절정을 이른다. 쌀은 떨어지고 보리가 채 여물기 전 감꽃이 피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런 시절이 엊그제다.
축적하지 않는 개체는 죽는다는 생물학적 용어가 있다. 인간이 비만하도록 몸에 지방을 쌓는 것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생존전략이다. 냉장고가 없던 원시인류는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체내에 비축한 지방을 태워 에너지를 만들어야 했다.
돌도끼를 갈던 한국인은 쉬지 않고 먹는다. 먹고 또 먹고 야참까지 거하게 챙겨 먹어야 잠을 잔다. 먹을 것이 없으면 나이를 챙겨 먹고 그래도 배가 허하면 욕을 얻어먹고 돈도 떼어먹는다. TV에서는 온종일 먹고 마시는 장면을 틀어댄다. 한 집 건너 카페가 생기고 대리만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맛집 검색에 지문이 닳는다. 이젠 감꽃이 언제 피는지 잊을 때가 되었는데 나라가 온통 밥통만 만든다.
버리는 음식물도 엄청나다. 한국환경공단에 따르면 하루에만 음식물폐기물이 약 14,000톤 넘게 발생한다. 이 중에는 20% 정도가 먹기도 전에 폐기처분 된 것이라고 한다. 더하는 문제는 버리는 음식물은 염도가 높아 비료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폐기 음식물을 동물 사료화하는 것도 식품안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이를 처리하는 비용이 연간 1조 원에 가깝다.
한국인의 밥상은 탕반(湯飯)이 기본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찌개나 국이 없으면 밥알이 입안에서 겉돈다. 잔반에 염분이 많은 것도 국물 때문이다. 한국인의 식단에 유독 국이 발달한 이유의 유력한 설은 식량 부족에 기반한다.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이 닭 한 마리 잡아 나눠 먹으려면 국보다 효율적인 배분 방식이 없다. 국은 적은 재료로 배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유럽에서 시가총액기준 최대기업은 뜻밖에도 덴마크에 있는 노보 노디스크다. 당뇨병 치료제를 만들던 회사가 7월 10일 기준 시가총액이 천조원을 넘어섰다. 그 배경에는 ‘위고비’라는 비만치료제가 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비만 인구가 10억명이다. 골드만삭스는 앞으로 비만치료제 시장이 1,000억 달러 규모에 이를 것이라고 분석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입술에 기름 마를 날 없으니 지자체마다 살을 빼주겠다고 다이어트 댄스 교실에 사람들을 밀어 넣는다. 무슨 이유인지 공평한 신의 손은 게으르다. 먹은 것이 없어 인분조차 귀한 북한의 오물풍선은 그들로선 아까운 비료 자원의 낭비다. 지금도 7억명 넘는 사람이 끼니를 거른다.
섭식은 1차원의 욕구이고 생명 유지의 기초다. 배가 불러야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춘다. 먹는 것을 마케팅에 이용하여 춤을 춘 기업은 식품회사가 아닌 애플이다. 애플사의 로고는 몇 번의 변천 과정을 거쳤지만, 회사 이름대로 사과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것도 누군가 한입 크게 베어먹은 사과다. 이를 두고는 여러 버전이 있다.
깨물린 사과가 에덴동산의 사과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흥미로운 발상이다. 인류의 조상 격인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지혜의 눈)이 밝아진다는 뱀의 꾐에 빠진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다. 컴퓨터 또한 선과 악을 알려주는 눈이 되었고 음란물의 매개체가 되었다. 이성 간의 육체적 관계를 따먹었다는 속어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 말에만 있는 관용어가 아니다. 그리 보면 애플사의 로고는 진위를 떠나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한다는 말이 일리 있어 보인다.
먹는 방송으로 유명한 여성 유튜버가 뉴스거리다. 전 남자 친구로부터 4년간 뜯긴 돈이 무려 40억원이라는 주장이다. 목에 차도록 먹어야 돈을 버는 신종 직업에 눈이 가고 구독자가 천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입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두고 정치인들 수사에 나무늘보가 따로 없는 검찰이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며 치타처럼 달려드는 순발력에는 헛웃음이 나온다.
한국인들이 먹방에 혼쭐 놓는 현상은 감꽃의 잔상 때문인지 모른다. 쩝쩝거리는 소리와 터질듯한 볼과 게걸스럽게 씹는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대리만족감을 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여성의 괴이쩍은 식사량을 보면서 침 흘리는 꼴은 정상이 아니다. 굳이 1차원적 욕구에 집착한 천민문화라고 비하할 것도 없다. 지구촌에 아사자가 실재하는 현실에서 수인분의 음식을 혼자 먹어 치우는 행위를 넋 놓고 바라볼 일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못된 식습관을 조장할 수 있으며 어린이들에게는 왜곡된 가치관을 심어 줄 수도 있다.
음식물은 단순한 생명 유지 요소에 그치지 않는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 속에는 사회적 유대감이 내포되어 있다. 음식에는 문화와 전통이 녹아있고 창의와 예술까지 담아낸다. 물론 맛있는 음식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럼에도 로마가 그랬듯 온 사회가 탐식에 불타면 허기를 친구로 삼는 지성의 촛불은 빛을 잃는다. 지성이 실종된 사회는 동물적 본능으로 작동한다.
문화의 우열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나 대중음악만으로 문화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노벨상 후보조차 배출하지 못하는 문학의 빈곤, 미답으로 남아 있는 예술의 봉우리들이 아득한 우리다. 토굴 속에서도 촛불이 타오르고 밤새 종잇장 넘기는 소리로 바스락거릴 때 그 사회의 지성의 옷은 실크로 짜였다.
마른침 삼키던 진짜 먹방은 오래전에 있었다. 프로복싱 선수였던 홍수환이 먹방의 원조고 압권이다. 그는 1974년 남아공에서 아널드 테일러를 이기고 세계 챔피언이 되자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다. 헌법전문에 나오는 어머니의 전화통 레시피가 더 맛깔났다.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감꽃 머리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날의 국가적 먹방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