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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병의 시간
으스름한 달빛마저 무명고지 너머로 스러지자 연병장에는 짙은 어둠이 내리 덮였다. 병사들은 양철 지붕 막사 안에서 송장처럼 굳은 채 누워 있었다. 등화관제가 된 내무반 침상 위에서 몇몇은 부동자세로 옅은 잠에 빠져 있었고, 몇몇은 불쑥 꿈속으로 끼어드는 헛것에 놀라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어둠 속에서 아무도 소리를 내는 병사는 없었다. 복도를 순찰하는 불침번마저 벽에 기대어 고단한 육신과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무렵, 명부에서 호령하는 듯한 고함소리가 귓전에 파고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비상! 비상! 현시간부로 데프콘 쓰리, 데프콘 쓰리! 작계명령 1호를 발령한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멘트 바닥을 구르는 군홧발 소리와 쇳덩이끼리 부딪히는 소음, 전갈을 받아 외치는 고함들이 막사 안을 가득 메웠다. 오래 전부터 숙달되어 온 동작으로 병사들은 각자의 전투무장을 꾸린 뒤 경계 초소를 향해 흩어져 나갔다.
주둔지 울타리를 따라 이삼십 미터 간격으로 2인1조의 참호가 이어져 있었다. 병장은 무저갱처럼 어두컴컴한 바닥을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려디뎠다. 뒤따라 들어온 졸병이 돌부리에 걸려 움찔하다 주저앉았다. 졸병의 신음소리가 발밑에서부터 참호 벽을 기어오르며 저음으로 공명했다. 졸병이 소총을 지팡이 삼아 느릿느릿 일어날 때까지 병장은 아무 말 않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울타리 너머 거무스레한 능선위로 새벽 별이 하나둘씩 스러져가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어둠의 끝자락에 남아있는 희미한 별빛은 두 병사의 마음을 어득하니 가라앉혔다. 고참과 졸병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병장은 습관처럼 수첩을 꺼내들고 손바닥을 책받침 삼아 떠오르는 단상들을 긁적였다. 어둠 속에서 글은 쉽게 써지지 않았다. 그는 손끝의 느낌만으로 유념하며 글자들을 써나갔다. 첫머리에 어머니… 라고 쓰고 나서 몇 마디 더 적은 뒤에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다 머리를 흔들었다. 주머니 속으로 수첩을 접어 넣을 때쯤에야 병장은 곁에 있는 졸병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잠잠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졸음에 빠져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 있는 졸병의 모습이 보였다. 병장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나지막이 졸병을 불렀다.
"양귀동."
아무런 응답이 없던 졸병은 목소리를 높여 재차 호명했을 때에야 엉겁결에 반응을 했다.
"에에, 이병 양귀동…."
비상이 발령된 소란한 와중에도 졸병의 눈은 반쯤 감긴 채였고 경계초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발걸음을 가누지 못하고 질름대고 있었다. 병장은 자신마저 전염되어 가는 수면의 욕구에 단호한 제동을 걸어야 했다.
"별초!"
김병장은 위압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늘어진 신경에 일침을 가하는 자신의 별호에 졸병은 안간힘을 다해 눈을 뜨고 저항의 표정을 드러냈다. 피곤에 짓눌린 얼굴을 난감하게 바라보던 김병장은 그만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도무지 군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졸병의 행색을 체념한 듯 바라보았다.
별초. 양이병을 소대원들은 흔히 그렇게 부르지만 그의 본명은 양귀동 이었다. 내무반에서 전입신고를 하던 날 '성장과정에 대하여' 라는 의례적인 순서를 통해 그의 이름이 지어진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병환 중이었던 모친이 심한 난산의 고초를 치르며 그를 낳았을 때 울음을 터뜨리지 않아 사산인 줄 알고 촌습대로 산 속에 묻어버리려 했다고 한다.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조모가 그를 안아들고 삼신할매, 칠성신, 장군신 할 것 없이 온갖 치성을 다 드리며 몽고반점이 얼룩진 엉덩이가 시뻘게지도록 두들겼다는 것이다.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호흡이 이어져 웅얼대기 시작한 아기는 체념에 빠져 있던 식구들에게 환호성을 불러 일으켰고, 외조모는 그 즉시 그에게 지어줄 이름을 생각해 내었는데,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귀중한 아이'란 뜻의 '귀동' 이라 했다는 것이었다.
어눌한 입담으로 더듬적거리며 자신의 태생에 대해 얘기하던 양귀동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지만 짤막한 한마디를 이어나갈 때마다 에, 그, 저, 또를 반복하는 그의 지루한 언변에 소대원들은 답답함을 참지 못했다. 결국 그의'성장과정에 대하여'는 갓난아기 때에서 그만 마쳐져야 했다.
갑갑증 나는 언변만큼이나 외모 역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한 몫 하는 편이었으니 눈두덩이의 살집이 부풀어 주위를 살필 눈동자라고는 쥐발가락 만큼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비쩍 마르고 휘어진 몸에서 나오는 행동들은 늘 비뚝거리고 느럭느럭하기만 했다. 그의 외모를 살펴 군생활에서 생겨날 법한 잦은 사고들을 짐작해 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에 대한 불안한 선입견은 부대에 전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중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신병들이 그렇듯이 양귀동 또한 통제 당한 욕구들을 과다한 식욕으로 발산시키느라 식판에 가득 밥을 퍼 담아 남김없이 비우고, 점호가 끝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그날 한밤중에 일직사령의 오분대기조 모의출동 명령이 하달되었다. 인원결손으로 소대원 전체가 호된 기합을 받고 있을 때 양귀동은 느직하니 연병장을 두리번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양은 코흘리개 초등학생이 교실을 못 찾아 어리벙벙 헤매는 꼴과 막상막하로 보였다. 선임병들의 질타가 거듭 가해졌고, 처음 한두 번을 지나 거듭 계속되는 그의 굼뜬 행동들은 점차 소대원들의 눈총을 사기 시작했다. 그가 '별초'라는 불명예스런 별호를 갖게 된 것은 이후 한 달쯤 지나서였다.
주말 오후, 양귀동은 가족과 면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무반에 앉아 있었다. 전입 후 첫 면회라면 의례적으로 선임병들에 대한 자잘한 인사치레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술이나 소소한 안주거리 따위를 적당히 감추어 들여오는 정도면 무난한 편이었는데, 양귀동은 돌아올 때 빈손이었다. 그저 넘어 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내무반장은 특유의 비딱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가 쫄병 때는 돈 천원에 양주를 사오라고 시켜도 거스름돈까지 냄겨 왔는데 첫 면회 다녀온 놈이 두꺼비 한 병 추진 못해 온단 말여? 기상!"
불호령에 양귀동은 벌떡 일어나 죄인처럼 고개를 잔뜩 수그렸고 별반 관심 없어 하던 다른 병사들도 그간의 행태에 대한 불쾌감 때문인지 슬며시 그를 흘겨보았다. 양귀동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엉거주춤 말꼬리를 흐렸다.
"저저…, 동생 임미다. 그그냥 얼굴이나 좀 보려구 온 거라서…."
"야 이 새끼. 그럼 여동생 머리카락이라도 팔아서 고참 공양은 해야 할 것 아냐?"
내무반장의 비아냥거리는 농조가 짙어갈수록 이곳저곳에서 조소 섞인 웃음과 함께 구경꾼들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내무반장은 표정을 우그러뜨리고 더욱 도발적으로 을러댔다.
"어디 그럼, 동생더러 고참 수청이라도 한번 들라 해야지 않겠어? 어이, 처남. 안그래?"
"아, 아님미다. 안댑니다."
양귀동은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애원하는 몸짓으로 손사래를 쳐댔다. 다음 장면을 기대하는 호기심 어린 눈빛들과 불안한 표정으로 측은하게 바라보는 눈빛들이 그의 주변에서 교차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달리 나서서 참견하는 병사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내무반장의 통솔 체제에 누구도 반발하는 법은 없었다. 난데없이 희롱감이 된 양귀동만이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을 뿐, 모두 다 내무반장의 욕설과 농지거리에 이골이 날만큼 적응이 돼 있었다. 자신들이 그래 왔듯이 졸병의 자존심 따위는 하루가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숨 가쁜 일상 속에 묻혀 버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터였다.
"양귀동. 그동안 네 놈 것도 많이 녹슬었지? 입대하고 나서 맘 편히 딸 한번 잡아볼 시간도 없었지?"
"네? 뭐…."
양귀동의 어리둥절하면서도 당혹스런 표정에 내무반은 폭소의 도가니로 변했다. 내무반장은 구경꾼들의 웃음소리를 의식하며 짐짓 코믹극의 연출자가 된 듯 장난 반 위협 반으로 열주웅쉬엇! 하고 엄포를 놓았다. 양귀동이 화급히 놀라 다리를 벌리고 두 손을 뒤로 옮기자 내무반장의 입가에는 암상궂은 비소가 번졌다.
그의 손이 양귀동의 허리띠를 풀고 슬그머니 사타구니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때쯤이면 본능적으로 가학자와 피학자의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져 둘의 현란한 동작이 보는 이들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해주련만 양귀동에게서는 외마디 소리도 다급한 몸부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열중쉬어, 라는 항거불능의 명령상태에 묶인 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찡그린 눈에서 눈물만 짜내고 있는 그의 경직된 모습에 소대원들은 그만 웃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 게임이 진행될 실마리를 얻지 못한 내무반장도 흥미를 잃고 벌컥 된소리를 지른 뒤 그를 놓아주었다. 양귀동은 처참하게 구겨진 낯빛으로 비칠대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날 일석점호 시간에 양귀동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행적이 불분명해지자 부대는 개미집을 들쑤신 듯 벌컥 뒤집혔다. 총기 수를 확인하고 무장탈영이 아님을 확인한 중대장은 일단 부대 주변의 은신할 만한 곳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양귀동은 부대 뒷산의 유개호 벙커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 가득히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병사들의 등에 업히다시피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양귀동은 중대장과 면담을 하고 나서 자정이 훨씬 지난 무렵에야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그가 소리 죽여 모포 속에 몸을 누일 때까지도 김병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양귀동의 불협과 부적응도 문제였지만 내무반장의 폭압적인 선도방식에 대한 원망 또한 밤새 삐걱거리는 불면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런 행태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 중대장에 대한 의구심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번민들 중의 하나였다. 어쩌면 중대장의 암묵적인 비호 아래 숨겨지고 무마되어온 지난 일들 때문에 내무반장의 폭력적인 근성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병장은 잠을 자기 위해 생각을 멈추려 안간힘을 썼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난감하고 스스로 피곤해지는 일상이었다. 병사여, 5분전과 5분 후를 생각지 말라. 그는 오래 전에 전역한 병사가 내무반 벽에 써놓은 글귀를 밤새 되뇌었다.
이튿날 아침, 모포를 개던 병사들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양귀동은 허겁지겁 감추려했지만 동물적인 후각이 최상으로 발달에 있는 야전부대의 병사들은 그것이 배설물의 지린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양귀동…."
"에에…, 이병 야양귀동."
내무반장이 야전삽 자루를 움켜쥐고 후들거리는 양귀동의 발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씨팔 조까튼 군대생활 였지만 말년에 너 같이 별나게 초월한 놈은 처음 본다. 썩을 놈의 새끼!"
내무반장의 눈에 비릿한 섬광이 괴는 순간 야전삽이 허공을 가르며 양귀동의 허벅지에 작열했다. 양귀동은 그 자리에 허물어져 나뒹굴었다. 한동안 둘은 고함과 절규를 내지르며 시멘트 바닥 위에서 굿판을 벌이듯 뒤엉켰다. 양귀동이 몸을 비틀고 지렁이처럼 경련을 일으킬 때쯤에야 내무반장은 야전삽을 팽개치듯 던져 버리고 나갔다. 그 사이 머리를 박고 있던 소대원들의 질타가 양귀동에게 거듭 퍼부어졌다.
"양귀동! 너 이 새끼, 너 정말 막가기로 작정했냐? 너 혼자 별나고 초탈하기로 작정했냐고!"
누군가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 나온 뒤부터인가, 양귀동에게는 그예 별초란 호명이 따라붙게 되었다. 이후 선임병들의 물리적인 폭력은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집단의 규율과 요구에서 소외되고만 그는 아무렇게나 욕설을 해도 그만인 일종의 놀림 상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둔지 경계임무가 해제되고 동이 트는 연병장에 하나둘씩 병사들의 대열이 모여들었다. 장비와 인원 점검을 마친 부대는 인근 철도역으로 이동하였다. 병사들은 여러 대의 열차에 나누어 탔다. 수십 킬로미터의 접적이동을 한 뒤 그들은 해가 중천에 떠있을 무렵, 군사 도로가 인접한 야산 중턱에 전초 집결지를 편성했다.
잠시 통제가 허술해진 틈을 타 몇몇 고참병들은 작전 지역 내의 인근 마을로 빠져나갔다. 마을의 젊은 노동력이 오래 전에 이미 도시 공장 지대로 떠나버린 듯 밭두렁 마다엔 잡초가 무성했고 논두렁과 배수로에는 지난 홍수로 퇴적된 흙더미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폐가가 된 빈집들 사이로 간간이 늙은 아낙들이 낯선 방문객들을 구경하느라 밖에 나와서 기웃거렸다. 동네어귀의 매점을 찾은 고참병들은 곧 있을 집합명령에 초조해하며 갈급하게 술병을 비웠다. 멀리서 전령의 전갈이 들릴 때쯤 그들의 얼굴은 벌써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참병들은 철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키가 큰 졸병들을 앞줄에 세웠다. 중대장은 뒷줄을 눈여겨 바라보다 슬며시 외면하며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부대는 월남 패망을 교훈 삼아 한미간에 최초로 전개하는 대규모 합동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북한 괴뢰집단의 남침 위협에 맞서 총력안보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섰다. 이곳은 원주에 인접한 치악산 산줄기의 아랫산전 마을이다. 근무지 이탈 및 음주사고, 민원신고가 발생할 시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중히 처벌한다. 대항군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경계근무에 만전을 기하라. 지금부터 훈련교범에 따른 야전축성을 실시한다. 이상!"
중대장은 줄줄 외는 듯한 몇 마디에 대충 강약을 실어 말을 마치고는 CP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후방고지를 중심축으로 건너편 도로 저지선과 개활지가 주사격 방향이 되는 참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김병장은 별초와 함께 마을에 인접한 청음초로 진출하여 소총용 입사호를 파게 되었고 그보다 백여 미터 뒤쪽에서 내무반장이 부사수와 함께 경기관총호를 구축하였다. 부지런히 파낸 흙무더기 위에 방벽과 총좌를 세워 참호의 형태를 대략 완성해 갈 즈음 내무반장이 김병장을 향해 다가왔다.
"어이 김병장. 날도 추운데 두꺼비나 한잔 더 하자구."
내무반장은 김병장의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옆에 있는 별초를 향해 대뜸 소리쳤다.
"별초! 뭘 멍청히 쳐다보고 있나? 얼른 새꺄!"
"에에, 이병 양귀동. 알겠습미다."
별초는 성난 멧돼지를 만난 듯 혼비백산하여 산 위로 뛰어올라갔다. 잠시 후 그는 텐트에서 꺼내온 수통 두 개를 내무반장과 김병장 앞에 꺼내놓았다.
"별초! 불 좀 피우게 가서 나무 좀 해와."
별초는 헐떡거리며 산으로 다시 뛰어 올라갔다. 내무반장은 목을 꺾어 입안에 가득 찰 때까지 소주를 부어넣었다. 수통은 김병장에게 넘겨졌다. 땀을 흘린 뒤라서 순도 높은 알코올은 혈관을 따라 금방 온몸으로 퍼졌다. 내무반장은 쉴 새 없이 거듭 수통을 들었다.
"중대장님께서 방금 전 엄명을 내리셨잖습니까? 이제 술은 그만 하십시요."
"어이, 김병장. 왜 그래? 군대생활 원투 해 하냐? 중대장도 이미 다 짐작하고 있다는 걸 자기만 모른단 말여? 사병들 하는 일에 일일이 참견해 봤자 골치만 아프고 이런 일쯤이야 평소처럼 서로 눈 가리고 아웅하면 그만이란 걸 중대장도 잘 안다구. 그래서 내무반 규율이고 뭐고 지금까지 나한테 다 맡겨두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까진 별탈이 없었지만… 그래도 지켜줄 건 지켜주고 또 졸병들을 너무 강압적으로 다루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김병장은 취중을 기회 삼아 심중에 갈무리해 두었던 생각을 넌지시 비쳤다. 내무반장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언성을 높이며 눈알을 부라렸다.
"이봐, 김병장! 여태 내가 좀 심했다고 생각하나 본데 쫄다구들 새나가지 않게 다스리려면 어쩔 수 없는거야! 무슨 단체나 조직이든 강력한 힘으로 잡아 쥐어야 질서가 서고 체계대로 돌아가는 거라고. 중대장도 괜히 나를 잘한다고 떠받드는 줄 알아?"
내무반장의 거친 행동마다 뻣세게 솟아있는 그런 신조는 소대원들에게 오래도록 힘겨운 질곡이었다. 얼마 전부터 김병장은 내무반장의 언동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한 우격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만취한 내무반장은 참호바닥에 판초우의를 깔고 벌렁 드러누웠다. 김병장이 상체를 들어 올려 참호 벽에 기댈 수 있도록 뉘어주자 그는 곧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김병장은 사납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맥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별초의 헐렁하게 구부러진 등이 보였다. 그는 별초와 내무반장을 남겨 두고 부사수만 혼자 남아있는 경기관총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겨울 오후의 싸늘한 양광이 능선마다 내리쬐고 있었다. 김병장은 술로 데워진 온몸이 나른해 졌다. 그는 낙엽과 잔풀을 긁어모아 바닥에 깔고 경기관총호 뒤편에 몸을 누였다. 별다른 명령이 없다면 저녁 식사시간 전까지 얼마간의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호흡이 느릿해졌다. 마을로 이어지는 밭두렁 사이로 뭔가 하얀 물체가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고 있었다.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그의 망막은 조금씩 흐려지고 시나브로 실낱같은 호기심조차 무의식의 저편으로 해체되었다.
별초만의 시간이 왔다. 항상 귀찮은 소음과 외압으로 존재하던 고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참으로 오랜만에 그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별초는 차라리 시간이 이대로 정지해 버리기를 기원했다. 저들이 더 이상 깨어나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그만의 평온한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별초는 '어머니.' 하고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그러자 따스한 기운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어머니, 하고 그는 다시 천천히 불러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젖에 뜨거운 덩어리가 끓었다. 그는 한참 동안 묵묵히 참다가 이번에는 '아버지.' 하고 나지막한 소리를 내어보았다. 가슴 속 깊은 곳이 안타깝고 쓰라렸다. 하지만 정신은 조금씩 맑아지고 어깨도 가벼워졌다. 귀옥아, 그는 좀 더 소리 내어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그의 얼굴에 어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별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귀옥아…, 조금만 더 참고 있어라. 오빠가 제대하믄 돈 벌어서 다시 학교 보내 주께.'
입대 전에 별초는 읍내의 연탄 공장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전답 한 평 없는 소작농이었기에 수입이 변변치 않았고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병이 중하여 늘 누워 계셨다. 오누이는 남달리 우애가 두터웠다. 기운도 약하고 언행도 느린 그였지만 동생의 학비와 가계를 돌보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공부도 잘하고 알뜰한 동생만은 고등뿐 아니라 꼭 대학까지 가르치겠다는 게 그의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가 입영통지를 받고 나서부터 귀옥도 나름대로 고민을 해왔던 모양이었다. 첫 면회를 오던 날 귀옥은 활짝 웃으며 늘 자랑스럽게 보여 주던 성적표나 상장 대신 월급봉투를 보여주었다. 어머니를 이전보다 더욱 가까이서 보살펴야만 한다는 얘기가 조심스레 더해졌을 때, 별초에게는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애써 노력해 왔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귀옥을 그리 탓할 수만은 없었다. 공장에 나가면 싸나운 사람들도 많은디 어린 나이에 어찌 견들라고…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는 귀옥의 손을 한사코 물리치고 면회소를 나올 때 별초의 발걸음은 캄캄하고 무겁기만 했다. 기다리고 고대했던 가족과의 첫 면회 날이었거늘 어찌 그런 괴로움을 안고야 말았던가? 내무반장에게 농락당하고 어딘가로 도망치지도 못하여 어두운 콘크리트 벙커 속에서 몸을 숨긴 채 울던 밤, 소스라치는 꿈속을 헤매다 야뇨까지 해버린 자신이 서럽기만 했었다.
한동안 억념에 젖어 있던 별초는 먼발치에서 뭔가 어른거리는 기척에 두 눈을 치켜떴다. 낯선 방문객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참호 앞 밭두렁 근처에서 하얀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열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참호 쪽을 향해 걸음을 내딛다가 잠시 눈치를 살피는 듯 멈추어 서곤했다.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한 거리쯤에서 소녀는 애써 부끄럼을 감춘 어색한 미소를 건넸다.
"어이. 학생 뭐여? 여그 오믄 안되어. 저리가요. 저리가."
별초의 경고에 소녀는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와 주기를 바라고나 있었다는 듯이 반갑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는… 학생 아니래요. 여긴 다 우리 동네 밭인디에…."
산골 사투리가 섞인 앳된 음성이 별초의 귓가에 간질거렸다.
"그래도 여기 오는 거 아녀. 아저씨들한테 혼나요. 얼릉 가요 얼릉."
"왜요? 나가 맨날 와서 놀던 덴디… 놀던 데서 놀면 왜 안디예?"
소녀는 주변의 밭뙈기와 둔덕을 손짓으로 빙 둘러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려? 안되여? 그럼 저기 가서 불이나 좀 쬐다 얼릉 가."
별초는 앉은걸음으로 비실비실 모닥불 가로 자리를 옮겼다. 소녀는 입가에 잔뜩 번진 웃음을 작은 손으로 감추며 뒤따라왔다. 꺼져 가는 불더미 위에 소조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으와, 구덩이 파놨네예. 으하하. 겨울도 다 지났는데 머가 춥다고여."
소녀는 참호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잘거렸다.
"그렇게 입고도 안 추워? 집에 있지 머뭐로 나왔어?"
"오빠들하고 언니들은 공장일 하러 다 나가고 여긴 할비 할미들밖엔 없시예."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별초는 처음 보는 예쁜 소녀가 자신을 거리끼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앉자 괜스레 기분이 흐뭇해졌다.
"너너 이름 뭐니… 이름 물어봐도 되니?"
"민애숙 이래요. 오빠는 요?"
"나는 귀동이여. 이병 양귀동. 그렇게나 심심해여? 너 친구 없어?"
애숙의 얼굴에 잠깐 동안 쓸쓸한 기운이 감돌다가 이내 활짝 웃음이 나왔다.
"집에는 어매 혼자 계시구 아바지는 먼 데 가셨드라예."
"왜왜 어어디… 가셨는데?"
"아버진 사우디에 가셨다예."
별초는 자신의 출생기와 가족사를 떠올리곤 애숙의 집안 내력이 자신과 여러모로 흡사한데 놀랐다. 어쩌면 귀옥 또한 애숙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있을 터였다. 처음 볼 때부터 나이와 동그스름한 얼굴 생김이 귀옥과 썩 닮았다고 느꼈는데 그러자 친근감이 물씬 생겨났다. 원래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애숙은 금방 쑥스러움이 사라진 밝은 표정이었다.
애숙은 산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상사들을 풀어놓으며 별초의 표정에 나타나는 반응에 맞춰 연방 재잘거렸다. 적어도 이 순간 애숙에게 만큼은 별초 또한 문제 사병이 아닌 늠름한 청년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별초의 시간이 꿈결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참호 안에서 내무반장이 뒤척이다 다시 코를 골곤 했다. 그럴 때마다 별초는 바싹 긴장이 되었지만 이내 애숙의 귀여운 수다에 빠져들었다. 애숙은 재미있는 군대 얘기를 들려 달라고 졸라대기도 했다. 하지만 별초의 기억 속에서 떠올릴만한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은 낙후된 산골의 소녀보다 훨씬 외롭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거울같이 맑은 눈망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돌리곤 했다.
별초는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뜻밖에 다가온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이제 또 다시 고난과 수모의 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차츰 음울하게 젖어 가는 청년의 눈빛을 순박하기만 한 산골 소녀는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집결지에서 전갈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초는 단꿈을 깨는 소리의 진원지를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달, 전달! 전 중대원 지금 즉시 소초 앞으로 식사집합! 이상 전달 끝!"
별초는 복명복창을 한 뒤 참호로 내려가 내무반장을 흔들어 깨웠다.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내무반장은 숙취가 남아 핏발이 선 눈으로 별초와 애숙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애숙은 불시에 일어난 소란한 사태에 몹시 당황했다.
"지지금 지집합 해야 되는데 애숙아. 그그럼 다음에 언제 또…."
"오빠, 그러믄 일 끝나고나서 저기 무당집 앞에로 나오셔에. 위문편지 보내께 잇따가 나와서 주소 꼭 써주셔예. 네?"
별초는 뒤통수에 꽂히는 내무반장의 사나운 눈초리에 질려 선뜻 대답을 못하고 미적미적 거렸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아무런 필기구도 없었다. 배낭이 있는 텐트까지 다녀오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별초의 불안한 몸짓에 애숙은 울상이 되어 발을 굴렀다.
"응, 응. 그그래어…."
애숙은 고개를 까닥 숙이고는 손을 흔들며 밭두렁 샛길로 뛰어갔다. 별초와 내무반장이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그녀는 이내 마을 쪽으로 사라졌다.
"별초!"
"네! 이병 양귀동."
"저거 어디서 갑자기 솟아난 계집애야? 고참 잠자는 동안 경계나 잘 서랬더니 민간인이 작전지역까지 출입하도록 놔뒀어?"
"아닙미다. 혼자 심심하다고 해서 그그냥 말동무 좀 했습미다."
"육군 특전 고문관 새끼가 그래도 계집애 꼬시는 재주 하난 있구면그래."
흐흐흐, 내무반장의 입가에 뭔지 뜻을 알 수 없는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별초는 발걸음을 내처 집결지를 향해 달렸다. 별초의 가슴은 놀이동산에 들어선 어린아이처럼 방망이질 치며 한껏 부풀어 올랐다. 저녁점호가 끝나면 김병장을 졸라 함께 다녀오자, 잠깐 만나 주소만 전해주고 오는 것은 허락해 줄 테지, 초번 근무자는 김병장 보다 후임이니까 무난히 위병초소를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그는 내심 환호성을 지르며 잠시 뒤 다가올 밤의 계획을 셈하였다.
저녁 점호를 마치는 맹렬한 함성과 군가소리가 땅거미가 진 산 아래 작은 마을로 포격되고 나서 병사들은 뿔뿔이 잠자리로 흩어졌다. 별초는 텐트 안에서 조바심을 억누르며 동숙하는 그의 선도병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밖에서 내무반장과 뭔지 모를 긴 얘기를 주고받던 김병장은 불침번 정위치 명령이 하달되고 난 뒤에야 들어왔다.
"귀동아. 네가 초번 근무다. 복장 챙기고 빨리 나가라."
"어? 아님미다. 오늘 첫 근무자는 박철호 상병인데요?"
"뭐가 어때서 그래? 일찍 근무 서고 푹 자는 게 한밤중에 일어나는 것 보다 훨씬 좋지. 내무반장이 너 생각해서 특별히 봐주는 거라드라."
"네 네? 뭐 뭐…."
별초는 일순간에 캄캄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당혹감에 빠졌다.
"양귀동, 뭐해? 순찰 돌기 시작했어. 잔말 말고 빨리 나가."
별초는 갈피를 잡을 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내무반장의 음흉한 얼굴이 뇌리에 닥쳐오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1소대! 전원 기상하고 싶나? 초번 불침번 총알같이 튀어나와서 정위치 하라!"
텐트 밖에서 순찰사관의 매서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별초는 소총과 탄띠를 둘러메고 황급히 밖으로 튀어나갔다.
별초의 눈에 어스름한 들판과 맞닿은 산자락 가까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이 보였다. 마을은 낮보다 훨씬 더 멀어져 있었고 애숙이 가리켰던 정자나무와 무당집은 산그림자에 가려 희미한 윤곽조차 분간 할 수 없었다. 별초는 폐병 환자처럼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어둠 속에서 뭔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하얀 점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지금쯤 자신을 찾아 마을길을 오르내리고 있는 애숙 일지도 모른다고 별초는 생각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렸다. 착각이었는지 언뜻 눈에 띄었던 그 흰 물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별초는 초소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 소총을 길게 부여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애숙아! 애숙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닥쳐 올라오다가 되삼켜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숨기는 것을 철칙으로 교육받은 초병의 몸이었다.
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논둑길에 키가 큰 짐승 하나가 얼씬대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우거진 잡풀 사이로 은밀히 숨어드는 그림자. 검은 그림자는 둔덕을 넘어 짙은 어둠 속으로 몸을 은폐시키고 있었다. 별초는 불안한 상상에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둠에 적응된 그의 눈앞에도 그 움직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두렵고 막막한 시간이 오랫동안 그의 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별초는 자신이 염려하는 그것만은 제발 아니기를, 설령 근무시간을 바꿔 훼방을 놓았을망정 지금의 불안한 상상만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별초는 교대할 다음 불침번을 깨웠다. 그는 내무반장과 같은 텐트를 쓰는 부사수였다. 하품을 하며 그가 느릿느릿 다가올 때까지도 달초는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있었다.
"별초. 욕 많이 봤다이. 그만 들어가 쉬라."
"저…, 내무반장님은, 내무반장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신니까?"
"아니 내무반장이 어디로 행차를 나가시든 니가 뭔 상관이야? 야밤에 말도 안하고 담요를 두 장씩이나 싸들구 나간 지 한참 됐는디 그걸 알아서 뭐 할려구?"
별초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절벽의 끝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머릿속에 묶여있던 장면들이 자물쇠를 풀고 소용돌이쳐 왔다. 야수의 거친 숨소리와 사냥 당하는 어린 소녀의 비명, 사슬에 묶여 바라보고만 있는 초라한 자신의 몰골. 등줄기의 세포 구석구석마다 극심한 한기를 느끼며 별초는 소리쳤다.
"저 제발 저도, 저도 한번만 대녀오겠습니다. 한번만 좀 나가게 해 주십시오. 네?"
"잇 자식이 누구 영창 가는 꼴을 볼려구 작정을 했나? 안 돼!"
부사수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내무반장님도 나갔지 않습니까? 내무반장님은 그러면 안댑니다. 제발 잠깐만 나갔다 오게 해 주십시오. 네?"
"고참하구 쫄다구하고 같냐? 새끼야. 헛소리 집어치고 지금 즉시 텐트 안으로 겨들어간다. 실시!"
별초는 밤새 온몸을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무렵 초소 근방에서 경례 붙이는 소리와 수런대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 혹시 내무반장이 돌아왔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의 심신은 피로감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불면의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전차 부대가 이동하고 난 뒤 보병들도 수송트럭에 몸을 실었다. 별초는 지난밤 번민에 시달려 초췌해진 모습으로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내무반장과 다른 고참병들도 득의의 웃음을 주고받으며 탑승했다. 전원완료! 복창소리와 함께 낡은 디젤 트럭이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완전무장을 한 삼십여 명의 소대원들은 밀집한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하, 그러니까 내무반장님. 판초우의에 모포까지 준비해 나갔으니 야전에서 특급호텔이 따로 없었겠네요. 혹시 훈련 나온 게 아니라 신혼여행 오신 건 아닙니까?"
지난밤의 일은 이미 내무반장의 입에서 전리품인 양 떠벌려졌고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거리낌 없이 옮겨 다니고 있었다. 야살스러운 농담이 오가는 중에 간혹 엇갈리는 심각한 표정들도 있긴 했지만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조심스러운 나머지 분위기에 거스르는 속말을 토해내지 않고 무관심한 척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김병장 역시 그간 익히 겪어왔던 내무반장의 행태로 미루어 그저 과장된 꾸밈으로 치부하는 축에 속했다. 누구도 사건의 진위를 살펴 양심을 분별할 이유는 없었다. 별초만이 주변의 엉너리를 틀어막듯 무릎 사이로 깊숙이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그 때, 트럭 후미에 앉아 있던 한 병사가 난데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저기 봐! 누가 우릴 쫓아오고 있어!"
병사들은 자욱한 흙먼지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트럭이 출발했던 부근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손을 흔들며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야, 혹시 저 여자가 내무반장님이 말한 애숙이란 여자 아냐?"
아침부터 몇 번이나 귀에 익어 있던 이름을 한 병사가 토해냈다. 안쪽에 있던 내무반장이 몸을 세워 희뜩 뒤를 돌아보았다. 별초도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틀림없는 애숙 이었다. 애숙은 트럭을 세우려는 듯한 절실한 몸짓을 되풀이하며 온 힘을 다해 무슨 소린가 외쳐대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 비친 애숙의 모습은 내무반장이 말한 간밤의 여자라기보다는 작고 여린 소녀에 불과해 보였다.
"야! 운전병, 차 세워. 차 세워."
별안간 후미에 있던 한 병사가 소리쳤다.
"애숙아! 힘내라. 운전병, 차 세워! 씨팔."
개머리판으로 트럭의 상판을 내리치는 굉음과 함께 또 다른 병사의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트럭은 요란한 엔진 소음을 내며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애숙은 힘겨운 뜀박질을 계속했다. 그 애절한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마음속에 뭔가 억누르기 힘든 동요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총을 거머쥔 손아귀에 불끈 힘을 주고 소리를 질러 댔다. 운전병, 차 세워! 민애숙, 힘내라! 급기야 병사들은 소총을 번쩍번쩍 쳐들어 트럭의 상판이 부서지도록 두들기며 소리쳤다. 누가 지휘하는 것도 아닌데 병사들의 외침과 타격은 응원의 함성과 박수 소리처럼 일사불란하게 통일되어 갔다. 민애숙, 꽝! 민애숙, 꽝! 민애숙, 꽝… 고막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금속성 파열음과 외침이 빠르고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 소리는 꽹과리, 북, 장구, 징이 어우러진 휘몰이 장단처럼 별초의 심장을 거세게 진동시켰다. 그의 가슴 한편에서 분노의 불길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내무반장은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둘의 피할 수 없는 눈길이 병사들의 어깨 위에서 마주쳤다. 별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앞은 열광에 휘말린 과격한 동작들로 첩첩이 가로막혀 있었다. 별초는 꺾이듯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트럭은 둔한 경사 길을 넘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애숙은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멈추어 섰다.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의 고함소리도 가라앉았다. 트럭은 흙길을 벗어나 도로로 접근하고 애숙은 황토색 위의 하얀 점으로 작아져 갔다. 병사들은 그들의 망막에 얼룩처럼 남은 하얀 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훈련기간 내내 병사들은 늦겨울의 추위와 피로에 시달렸다. 3주간의 장거리 원정훈련을 마친 병사들은 본래의 주둔지로 복귀했다. 얼었던 땅이 녹고 새봄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내무반장은 고대하던 전역 대기의 특명을 받았고 중대에는 새로운 지휘관이 부임해 왔다.
대위 임관 후 처음 야전군 중대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의욕이 넘치는 젊은 장교였다. 그는 취임하던 날 전 중대원들을 모아 놓고 낭랑한 목소리로 훈시했다.
"전임 중대장님의 말씀처럼 최정예 무사고 중대로 부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모범중대로 키워 오는 동안 여러분의 고충과 노고 또한 많았으리라 짐작한다. 앞으로 본관은 내무생활이든 교육훈련이든 최대한 민주적으로 부대를 지휘할 방침이다. 이전까지의 모든 불만, 부조리 사항은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알겠나?"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말한 바대로 부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어갈 세부지침과 젊은 장교로서의 패기 넘치는 좌우명까지도 밝혔다.
"모두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민주 군대. 신임 중대장이 반복해서 강조했던 생소한 단어와 자신감 있는 어투에서 병사들은 뭔가 예전의 중대장과는 다른 류의 훈시란 느낌을 받았다. 뚜렷이 갈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의 고참들에게는 낯설고 거북한 것이었고 후임병들에게는 잠시나마 안온한 희망이 움터오는 그런 메시지였다.
일주일간의 정비와 휴식이 끝나고 사격 집체교육이 시작되었다. 무릎과 팔꿈치의 살갗이 다 벗겨져 나갈 만큼의 혹독한 PRI 사격 집체교육이 연일 주야로 계속되었다. 신임 중대장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세심하고 열성적으로 지휘감독에 임했다.
별초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에 에워싸여 표적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화약이 폭발하고 허공을 찢고 돌진하는 쇳덩이의 굉음이 그의 뇌리에 얼룩져 있던 혐오의 기억을 자꾸만 되살렸다. 귓속을 파고드는 총소리에 섞여 고함 소리와 금속성의 거센 파열음이 멈추지 않고 울려왔다. 흙먼지 뒤로 쫓아오는 애숙의 하얀 모습도 보였다. 애숙의 얼굴이 어느새 여동생 귀옥의 얼굴로 바뀌는가 하면 내무반장의 우악스런 모습이 사격장을 둘러싼 산그림자처럼 거대하게 밀려오기도 했다. 총성이 멈추고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 가라앉을 때까지도 별초는 머릿속을 뒤흔드는 소음과 영상에 시달렸다.
사격- 중지.
통제관의 느긋한 음성이 성우의 내레이션처럼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잔탄이 남은 사수 손들어."
별초는 방아쇠를 몇 번 당겼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탄피가 튀어 오르고 힘없이 당겨 잡은 소총이 가스의 반작용으로 쇄골 부위를 밀치는 것을 간간이 느꼈을 뿐이었다. 건너편 사로에서 두 병사의 손이 들려졌다.
"나머지 사수 5보 뒤로 물러나서 대기하고, 준비된 사수, 200사로 봣!"
두 발의 총성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별초의 심장이 총성의 파장에 맞춰 울렁거렸다. 그의 얼굴은 석고처럼 굳어 버렸다. 사격을 마친 병사들은 소총을 비껴들고 사선을 빠져나갔다. 전역을 열흘 앞에 둔 내무반장이 교육에서 열외 되어 안전 점검을 맡고 있었다.
"좌우로 정렬, 안전 확인! 자물쇠 풀고 우로 어깨총. 격발."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비어 있는 약실을 노리쇠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별초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무심결에 탄피 수를 확인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지만 손아귀의 감각만으로도 그것이 열 개가 채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장전 손잡이 후퇴, 전진."
그때 분명히 탄알 하나가 배출구로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별초는 엉겁결에 받아 쥐었다. 어쩌면 또 다른 한발이 장전되어 뇌관을 때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에 휩싸인 별초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에 쥔 탄알에 진땀이 배어 미끈거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신도 가누지 못할 묘한 쾌감과 흥분이 일어났다. 지시하는 내무반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야릇한 떨림마저 드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일거에 폭군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로 어깨총, 격발."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이제 다른 병사들은 총을 내리고 느슨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별초는 여전히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총구를 하늘로 향한 채 굳어 있었다. 내무반장이 힐끗 그를 흘겨보았다. 별초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떨리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제발 이대로 모르고 지나갈 수 있기를, 일부러 어쩌려고 총알을 남긴 건 아니니까, 단지 어지러워서 다 쏘지 못한 것일 뿐, 탄피수가 모자란 것은 어찌 되든 남은 실탄을 안 보이는 곳에 버려버리면 그만이야….
"별초!"
내무반장이 심상치 않게 경계하며 그를 불렀다. 별초의 미간에 팽팽한 긴장이 씰룩거렸다.
"별초, 총 이리 줘봐. 이 새끼, 아직 탄창도 안 뽑고 뭣하고 있는 거야!"
내무반장은 황급히 한발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별초는 부들부들 떨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포식자에게 마지막 생명력을 다해 저항하는 짐승처럼 어느새 자신이 가진 등털을 모조리 곧추 세우고 상대방을 사납게 쏘아보고 있었다.
"양귀동…."
내무반장은 허겁지겁 총을 빼앗으려 두 팔을 휘둘렀다.
"안 돼!"
별초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내무반장의 가슴팍에 깊숙이 총구를 찔러 넣었다. 내무반장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돌린 것과 옆에 있던 김병장이 총을 걷어 찬 것은 거의 동시였다. 허공을 찢어발기는 단발의 총성이 울렸다. 소총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비명소리가 병사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내무반장의 군복 바지섶에서 붉은 피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호각 소리와 날카로운 고함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별초는 주저앉아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무반장은 곧바로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중환자 병실에 누워 치료를 받다가 불구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신임 중대장은 장교로서의 앞날에 돌이킬 수 없는 중징계를 받았다. 사건에 대한 모든 지휘책임을 지고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가져왔던 청운의 꿈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양귀동은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혼자 가진 채 형무소에서의 긴 세월을 보냈다.
몇 달 뒤 군복무를 마치던 날, 김병장은 양귀동을 면회하러 육군형무소로 향했다. 김병장은 거기서 예전의 바보스럽고 유순하기만 한 양귀동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갇혀 있는 굴레였지만 그도 스스로 상처를 달래며 외부로부터 자신을 수호할 두터운 껍질을 키워가고 있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김병장은 지난날의 병영수첩을 꺼내보았다. 색이 바랜 종이위에 얼룩이 번진 촘촘한 글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저 별처럼 언제까지나 맑고 깨끗하게 깨어 있고 싶습니다. 지금 제 마음의 별빛은 불안하고 흐리지만 돌아오는 나중에는 정금처럼 빛날 것입니다. 훈련이 시작되던 날 새벽, 참호 안에서 쓴 글씨는 몹시 난필이었다. 김병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수첩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맨 끝 페이지쯤에서 그는 멈칫하며 이마에 힘줄을 세웠다. 갑자기 그는 매우 화가 난 사람처럼 불펜으로 그 글귀들을 주욱주욱 그어 버렸다.
정든 전우들이여, 안녕. 고대하고 고대하던 전역의 날이 다가왔다. 불면의 밤은 지나고 이제야 새 아침을 맞는 나는 말번초. 저 울타리 밖을 나가면 거기에는 나의 펼쳐나갈 신세계, 나를 반겨 주는 새로운 시작이 있으리니.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김병장은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버스는 국도를 지나 도심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연병장을 가로지른 산그늘처럼, 즐비한 빌딩의 그림자들이 도시의 길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200字 × 10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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