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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는 아프리카가 없었다]
글:요한
출처: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코리아 미디어에 연재
검은 대륙 아프리카-
그 곳엔 아프리카는 없었다. 남아공 아프리카엔 분명한 두 개의 나라가 공존한 본질의 색채를 잃어버린 아프리칸스만 있을 뿐. 늘 미지 속에 남아 있던 그 곳에 첫 발을 들여놓은 느낌은 예기치 못한 상상의 배반이었다.
벤쿠버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0시간, 다시 독일에서 13시간을 비행한 긴 여정은 미지의 세계만큼이나 아득했다.
경유지 프랑크푸르트는 언제나 회색 빛이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로 나가는 첫 시험대에 섯을 때, 가장 먼저 자본을 제공했던 우방이면서도 배타적 문화의 이질감을 버릴 수 없음은 제국시절의 강한 이념 때문일지 모른다.
아프리카로 가는 길은 유럽을 경유하는 영국, 네델란드, 독일 등, 여러 경로가 있지만 프랑크푸르트를 택한 데는 음산함이 있는 그 도시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아프리카 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12시간 동안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곳곳을 돌아다녔다. 괴에테 생가를 구경하고, 하이델베르크 고전 카페에서 오래 머물렀다. 빛이 바래지 않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낮선 땅 쇼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은 언제나 이방인일 수 밖에 없어 도시의 잿빛 색깔 만큼이나 호젓함이 어린다. 중 유럽 종교 전쟁 때, 망명자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어 이상을 버린 채, 떠돌던 나그네들의 헛헛한 가슴처럼.
세계 7대 유명 관광지라는 명성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케이프타운, 잘 가꾸어진 도로, 주거환경, 최고의 교육, 의료시설, 관광문화 등, 어느 유럽도시에 뒤지지 않게 깨끗하고, 잘 정돈된 그 곳이 아프리카라는 것을 금새 망각하고 만다.
삼백년 전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그들만의 터전을 마련 한 남아공은 4천5백만 인구 중, 15%의 백인들이 오직 그들만의 세계를 건설하여 경제, 문화, 사회, 교육의 90%이상 장악해 왔다. 지금도 변함없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흑인들에겐 비극의 땅, 검은 대륙일 뿐. 흑인과 백인 그 분명한 색깔만큼이나 극과 극의 두 나라로 살고 있는 아프리카이면서 아프리카가 없는 미지의 세계다.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덴마크 출신의 여류작가 아이작 디너센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
그 광활한 대 자연의 풍경과 모짜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잊을 수 없게 하는 영화. 우리는 그 영화 한 편으로도 그 곳에 대한 동경과 상상의 세계를 이미 그려 놓았으리라.
아프리카 하면 부시맨이 살고 있고, 텔레비젼 속 동물의 왕국이나 정글 속 트래킹이 우선 떠올려지는 곳이 아니었던가. 문명과 동떨어져 야생동물과 더불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곳이라는 인식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혼란의 폭은 클 수 밖에 없었다.
캐나다에서 우연히 사귄 흑인 친구로 인해 흑인거주 지역에 일주일을 머물며, 새로운 체험(위험을 수반한)을 하였다. 철저한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진 그 곳의 현실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하루가 멀다 하게 살인과 폭력이 벌어지는가 하면, 오직 먹을 것이 우선인 흑인지역엔 아프리카이면서도 본질을 상실한 도회 속에 버려진 아프리칸스의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다.
판자로 얽혀진 한 평이나 될 듯한 공간에서 어떻게 6-7명의 식구가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과 인간의 생명 줄이 이처럼 모질구나 하는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들도 보다 낳은 삶을 위해 그들의 영토를 버리고 문물의 유혹을 좆아 도시로 몰려든 슬픈 군상들은 표정이 없었다.
3백년 만에 백인 통치에서 흑인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들은 개벽이라고 믿었고, 가난과 멸시에서 벗어난 평등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더 이상 굶주리지 말고 도회로 나와 보다 낳은 삶의 질을 찾자"고 외쳐 대던 흑인 리더들의 희망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오래지 않아 지금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온 세월 이었지만 흑인 집권 후 큰 소요한 번 없었던 데는 워낙 큰 빈부차이와 교육의 차이 때문이다. 정치, 문화, 사회 경제가 안정되어 있는 이유도 백인 사회에 이미 속박된 탓이리라.
사실, 아프리카를 여행하게 된 것 계기는 벤쿠버에서 사귄 케이프타운에서 이민 온 흑인 친구를 만나면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그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동안 서로 자기 나라로 초대 하기로 약속하게 된 것이다.
먼저 그 친구를 한국으로 초대하여 우리 집에 15일간 머물렀다. 어떻게 그를 안내해야 한국을 잘 보여 줄 수 있고, 강한 인상을 남게 해 줄까를 참 많이 고민하고 준비했었다. 많은 한국의 지인들이 그를 위해 파티를 마련했고, 가는 곳마다 적잖은 선물을 마련해 주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다음 약속대로 아프리카로 떠날 것을 준비했지만 그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호텔에서 머물며, 스스로 여행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마지못해 자기집에서 머물것을 권유하여 흑인지역에 들어 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제 그를 이해할 것 같다. 나를 자기 나라에 초대하지 못한 심사를, 그들의 실상을 보고 난 지금. 그러나 그 건 모험이었다. 벤쿠버에서 그토록 친절하고 신사답게 보이던 그가 정작 자기 나라에 갔을 때, 그 표리부동함이란...
어느 종족이고 나름대로의 근성과 바뀔 수 없는 인종적 습성이 있다고 한다. 오랜 기간 핍박받으며, 호구지책을 목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본질은 그 친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우리의 겸손이나 예절을 그들은 자기들의 우월감으로 받아들이고 있거나 받는 것을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그 곳에서 오랫 동안 선교사로 봉사했던 분을 만나고서야 알 수 있었으니까. 오랜 식민지 생활에서 얻은 관습이리라.
흑인지역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그 한계를 느낀 나는 한국인이 있는 곳으로 옮기기로 작정했다. 흑인 친구만 믿고, 아무런 정보를 지니지 않은 채, 그 곳을 찾은 탓에 한국인을 만나는 길은 한국교회나 식당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한국인이 적은 나라일 수록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그 곳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교회나 한국식당이라는 것을 그 동안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며 터득한 체험이기에.
시내를 하루종일 돌아다닌 결과 우연히 한국 여학생을 만나 한국 식당 "고려정"을 찾을 수 있었다.
흑인지역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는 나를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정도로 그 지역은 위험지역이었다. 식당 사장의 소개로 내가 머물 수 있는 케스트하우스를 알게 되어 비로서 그 곳의 양면과 새로운 모습들을 속속히 볼 수 있었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다. 식당 사장은 나와 같은 고향 분이었다. 지구가 맨 먼저 생기기 시작하여 뻗어 나간 지구의 꼭지점이자 끝인 곳,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South Africa Kape Town)수 만리 타국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다는 게 정말 꿈만 같았다.
그는 16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어선 한 척을 몰고 스페인 모잠비크 등을 무대로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수 년 전 그 곳에 정착하여 자리를 잡아 한국인들의 사랑방이 되어 주고 있는 그는 우리나라 선박들이 항해 중 꼭 들리게 되어 있는 지형적 때문에 많은 선원들이 찾아 온다. 하루가 멀다 하게 찾아온 우리 동포들에게 무료로 도움을 주고 있는 훌륭한 민간외교관이었다.
우리가 말로는 세계화를 외치고 있었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는 현실에서 묵묵히 성공적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을 만났을 때, 긍지와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의 소개로 많은 백인 사업가들을 만나 회사와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의 문화와 사업여건, 사회적 분위기 등을 엿 볼 수 있었고, 환대를 받았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지는 우리 나라와는 정 반대인 Cape Town은 대서양을 향하여 남쪽 방향으로 구부러진 좁은 반도 위에 위치한 도시다. 반도의 동쪽과 서쪽 해변은 척추와 같이 자리 잡은 산들로 구성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산 중의 하나인 Table Mountain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세계의 아름다운 곳들을 조금씩 모아 놓은 내면의 신비스러움이 있다.
Table Mountain을 감싸고 있는 해변 곳곳엔 개인 골프장과 헬기장을 갖춘 초인류 별장지대와 그림같은 집들, 더 이상 땅을 허락하지 않는 지구의 끝에서 바라 본, 남극의 수평선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시내 중심 테이블 마운틴에서는 각 종 야생동물들이 자연스럽게 풀을 뜯는 광경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누구나 꼭 들리게 되어 있는 Cape Point(땅의 꼭지점)는 지구가 태초의 생성된 경이로움과 장대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신이 분명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지구의 꼭지점 안내판에는 뉴욕, 북경, 인도 등, 지구의 방향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결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으나 남쪽은 아무런 표시가 없다. 남쪽은 지구의 끝인 남극이기 때문이다. 그 곳 지구의 끝에도 인터넷이 설치되어 디지탈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가족에게 보내 주는 서비스가 있어 나도 한껏 폼을 잡았다.
Camps Bay는 1700년대 후반의 Ravenstevn 농장의 소유주였던 Frederick von Kamptz의 이름을 따서 Campas Bay로 알려졌다. 아늑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곳으로, 해변의 모래가 카리브해의 휴가 팜플렛에서 나오는 눈부신 하얀 모래로 되어있다. 해변을 등지고 자리 잡은 12개의 봉우리는 Camps Bay의 절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Table Mountain의 서쪽 부분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따라 열두 제자봉우리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 곳에서 세상의 설계를 그렸으리라. 시행착오와 적잖은 혼돈이 신에게도 태초에 있었음을 산과 바다, 땅에서 느낄 수 있기에.
매년 4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는 자연보호구역의 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 단 한 개의 입 출구만 있다. 생태계 보존이 아주 훌륭하게 되어있는 그 곳은 길가에서 쉽게 만나는 Baboon(개코 원숭이)무리들이 있다. 호기심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익숙해져 있어 누가 관광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차도 중심에 떡 버틴 채로.
또한 그 지역은 약 8천 Hectare의 면적에 천여 종의 식물과 특별한 야생 생물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비교적 작은 동물들은 Dassie, Cape여우, 개코원숭이 등을 만날 수 있고, 커다란 포유동물들은 얼룩말, 멸종위기에 처한 bontebok(남서 cape에만 서식)과 Eland 등이 있으며, 바다에는 고래, 돌고래들을 볼 수 있다.
V&A Waterfront, 최근 Cape Town이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아프리카의 출입구인 Table Bay일 것이다. Table Mountain을 배경으로 한 Table Bay는 이제 여행과 여가를 즐기기에 최고의 장소가 되었다. 밝고 가벼운 유리로 덮여진 이 곳은 고급 가게들과 세련된 간이식당들, 지역사람들과 관광객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창고를 개조한 곳곳은 좋은 음식과 특별한 공예품, 명품들이 즐비하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콘서트가 열린다. 토착민들의 공연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소리쳐 돌아보니 바다표범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순방 때, 머문 곳도 이 곳의 호텔이다.
그 곳의 수많은 유명지를 다 돌아보며, 느낀 것은 도로공사장이나 식당 주방에서 노동하는 흑인들을 보았지만 여유롭게 여행을 하고 있는 흑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직 백인들의 세상을 만들어 주기위해 변두리에 살면서 백인들의 영역으로 들어와 가정부나 가든 관리, 잡역노동자로 일하며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 가고 있을 뿐.
가난한 수 많은 나라를 다녀 보았지만 이처럼 극명하게 두 갈래로 갈라진 곳은 처음이다.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꿈을 잃어버린 군상들일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삶에서 자주성과 주체의 이념이 왜 중요한가를 실감 할 수 있었다.
이 번 여행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새로운 체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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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초 심장 이식 수술이 케이프 대학병원에서 이루어 졌고, 역대 4명의 노벨상을 수상한 곳이 남아공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터. 그러함에도 그 곳이 미지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은 백인 그들만의 철저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에 홍보를 하지 않았던 탓이다. 만델라 흑인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외부의 시선을 크게 받지 못했던 점도 그 이유다. 그 곳은 남의 땅을 점령한 사람들의 이상형이자 별천지였기에 가능했으리라.
관광지를 둘러본 후, 농장지대를 방문 할 기회가 있었다. 채소농장과 포도 농장이었다. 한가지 품종으로 100-2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사실이 새롭다. 세계 와인 생산 3번째로 유명한 곳이 케이프타운이다.
처음 방문한 포도 농장은 약 200에이커(약 24만평)로 포도와 채소(부로컬리, 당근, 양파)가축을 다소 가꾸는 곳이었다.
그 곳 주인은 200년 전부터 대대로 이어져 온 농장이라 한다.그 곳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은퇴를 하자 도시에서 약사를 하던 둘째 딸이 농장을 물려 받아 흑인들을 데리고, 일하고 있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대 단위 농장이 밀집되어 있는 우리의 면 단위에는 관련 전문대학이 있고, 규모가 큰 농장에는 자체 연구소를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각 농장에서 수거한 포도를 자체적으로 설립한 공장에서 직접 포도주를 생산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한 발 앞선 선진농정이 아닐 수 없다.
온난한 기후와 강렬한 태양, 그러면서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빠른 기류, 맑은 공기로 인해 각 종 채소, 과일은 세계 온 갖 종류가 우수한 품질로 생산되고 있었다. 간이 판매장에서 포도, 옥수수, 고구마 등을 한 보따리 사 보았다. 우리 돈으로 약 1만원정도, 우리 보다 약 3-4배 싸다는 계산이다.
어느 곳이나 포도주 공장에는 잘 꾸며진 식당과 놀이서실 휴양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시음장과 판매장을 동시에 갖춰 놓아 외국 관광객이나 도시 사람들이 주말이면 나들이하는 관광코스로 손색이 없었다.
농협에서 특별한 지원정책은 없고(영농자금, 농기계 지원자금)스스로 마을 단위로 공동체를 조직하여, 생산, 가공, 수출, 내수 판매 등을 자체적인 네트워크를 이루어 놓고 있었다.
각 농장들은 2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채소나 포도주 등을 자체 상표를 쓰고 있는데,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한다. 상표 자체가 품질이며, 품질 보증서였다.
시골 농장역시 99%가 백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원초적 삶이 되었던 농촌에서 조차 흑인들은 한 갖 고용자의 그 한계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도 안타까운 일이다.
떠나 올 때, 백인 농장 주인이 하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은 정부에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어 농촌이 잘 살게 되었고, 오늘 날 한국이 부자가 된 게 아니냐"라고
물어 올 때, 대답을 미루고 떠나 올 수 밖에 없었다.
농촌의 현실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수긍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 백인들이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놓은 관광지나 주거지역, 도로환경 등을 보지 않더라도 삶의 근본 이라고 할 수 있는 농촌의 현장들을 보고 누가 아프리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작 이 땅의 주인인 흑인들은 그들의 역사나 문화, 삶의 터전, 원초적인 자연 마져도 온전히 지배자들에게 내주고 생명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체 살아가고 있다.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이 왜 중요한지 눈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누구든지 한 번쯤 그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어 왔을 테다. 그 곳을 가려면 최대 도시인 조하네스버그로 향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행정수도 로보스역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블루 츄레인),
"프라이드 오브 아프리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기차이지 초호화판 크루즈 여행을 연상하면 된다.
객실에 앉아 먼 초원위로 달이 떠 오르는 풍광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테니.
남아공 행정수도가 있는 로보스 역에서 출발한 꿈의 열차는 휘트뱅크 벼랑해안을 지나 초원지대로 이어지고, 유명한 크루커 공원을 들어서면 아프리카의 본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와질랜들와 스톤캠프를 거쳐 훌르훌르에서는 하얀 물소 떼들이 반긴다. 옛날 왕실의 사냥터였던 그 곳은 현재는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온갖 종류의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는 집단 서식지다. 케이프타운이 가까워지는 가든루프의 그 아름다움은 당신의 인내를 시험하게 될 것이다. 그 황홀함에 탄성을 지르지 않는 이가 있을지?
분명 아프리카엔 아프리카의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오직 그것들은 그 땅의 주인들에겐 환상일 뿐이다. 내 눈에 비친 아프리카는 정신의 역사마져도 사라져 버린 수명이 다한 백열전구 껍데기처럼 아프리칸스만 있을 뿐.
그런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연출하고 있는 케이블마운틴 신비스러움만이 아프리카의 영혼, 그 본향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