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처음으로 「푸시킨」의 시(詩)를 접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간 어느 날 교내의 이발소에서였다. 오늘의 삶에 절망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세월과 함께 이 시는 삶의 고비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격려하는 무언의 다짐으로 자리하였다.
익히 소설과 영화를 통해 알려진 「푸시킨」의 『대위의 딸』은 1773년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주인공이 변방의 요새에 부임하여 그 곳의 사령관인 대위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혼란한 「푸가초프」의 반란 속에서 그녀와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즉, 러시아의 시골 귀족 청년의 성장 이야기로 불굴의 신념, 명예심, 사랑, 관용에 대한 작가의 의도 등을 알 수 있다. 그가 근무지를 찾아가다가 들판 한가운데에서 뜻밖의 눈보라를 만나 고립되는데 한 나그네의 도움으로 동사(凍死)할 위험에서 목숨을 건진다. 주막에서 나그네에게 술을 대접하고 헤어지기 전에 어머니가 자신에게 준 토끼가죽 외투를 선물한다. 그 외투로 인해 맺어진 끈끈한 나그네와의 인연이 나중에 주인공의 목숨까지 구하는데 그 가 바로 「푸카초프」였다.
하지만 러시아 문학사에서 『대위의 딸』은 근대 장편소설의 첫 출발이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으로 이어지는 대하 역사소설의 단초를 제공한 소설로 평가된다. 작가는 자료수집과 사실 확인을 위해 발품을 팔아가며 전적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푸카초프 반란사』를 쓰기도 했다. 물론 현재의 기준으로는 다소 황당한 전개와 세부 인물에 대한 미흡한 묘사는 작품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최근 한동안을 「푸시킨」을 잊고 지내다가 그의 작품을 소개한 박학다식한 문예비평가인 친구의 글을 읽게 되었다. 사실 이 작품에 대한 러시아 문학사에서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는데 늦게나마 알게 되어 다행이다. 그 작품이 바로 『예브게니 오네긴』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마치 밀고 당기는 사랑과 거절을 주고받으며, 당대의 문학, 역사, 철학, 사회상에 대한 온갖 논평과 경험담을 곁들인 작품이다. 이는 19세기 초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과 다양한 삶을 보여주어 ‘러시아 문화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푸시킨」은 무려 8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이 작품을 집필하였다. 전 5,500행의 운율을 모두 살려 장편의 소설을 썼다는 면에서 「푸시킨」의 천재성은 물론이고, 왜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번역문으로는 러시아 운율을 잘 살려낼 수 없는 점은 매우 아쉽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네바강 가에서 태어난 귀족청년 「예브게니 오네긴」과 시골 마을의 순박한 처녀 「타티아나」의 어긋난 사랑 이야기이다. 운명적으로 만났다가 헤어지는 이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두 청춘남녀가 시대가 주는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전반부에는 순박한 시골처녀 「타티아나」의 실연 이야기가, 후반부에는 「오네긴」이 겪는 사랑의 좌절과 실패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 속에는 부정적인 형상과 긍정적인 형상 두 가지 인간유형이 제시된다. 남자 주인공은 소위 잉여인간으로서 귀족으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으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물이다. 반면에 여주인공은 점차 성숙해가면서 방황하는 인간의 구원자이다. 옛 사랑의 그림자를 딛고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그녀를 통해 ‘러시아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다. 나아가 ‘불꽃같은 열정, 진실하고 순수한 감정의 진지함, 청아하고 신성하게 일어나는 고결한 정서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소설이 4음보로 이루어진 운문(韻文)소설이라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운문으로 쓰여 진 시(詩)가 문학의 주류였다. 산문 소설은 이제 막 서구로부터 유입되어 유행하기 시작하던 단계였다. 따라서 작가 스스로가 이 작품을 ‘시로 쓴 소설’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를 의식한 표현이었다. 시의 몰락을 예감한 「푸시킨」이 과거의 문학 장르인 시에 작별을 고하고, 미래의 문학 장르인 소설을 환영하는 비유인 것이다.
지난 2006년 9월에 모스크바에 간 일이 있다. 하루는 모스크바 젊은이들의 성지라고 하는 「아르바트」 거리를 찾았다. 이 거리는 보행자 중심의 거리로 상당히 깨끗하고 긴 거리인데 각 종 상점은 물론이고 거리의 화가, 소규모 악단과 악사, 가수 등 가난한 예술가와 그 지망생들이 활동하는 공간이었다.
1990년대 초에 이 거리에서 활동하면서 인기를 누리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 한국계 가수인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곳이 있다. 벽면에는 그의 사진과 그에 대한 애정 어린 낙서가 빼곡하였다. 상당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를 추억하는 러시아인들이 많아 매우 놀라웠다. 이곳에서 러시아의 문화에 취해 산책과 구경을 겸하여 여러 시간을 보냈다. 거리의 무명화가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얼마나 꼼꼼하게 정성을 다 하던지 훌륭한 기념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입구 초입에 러시아가 자랑하는 「푸시킨」의 동상과 그의 모스크바 자택이 있다. 그의 부인이었던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함께 서있는 부부의 동상은 관람객의 손길이 닿아 부인의 치맛자락이 번질번질하였다.
바로 건너편에는 집은 「푸시킨」부부가 3개월가량 신혼생활을 했던 곳으로 2층 구조의 단아한 건물이다.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데 지금은 「푸시킨」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푸시킨」의 초상화와 친필유고, 「푸시킨」이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들, 시계, 테이블, 의자, 피아노 등이 전시돼 있다. 1층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결투용 권총이 전시되어 있다. 부인의 염문설로 인해 결투로 38세에 목숨을 잃은 시인의 운명을 애도하는 무거운 발길이 쌓여가는 곳이다. 2층의 한쪽 벽에 걸린 「나탈리야」의 초상화는 상당한 미인으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우리가 애송하는 그의 시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주제는 어긋난 사랑에 괴로워하고 슬퍼했던 청춘남녀에게 바쳐진 아름다운 위로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면서 부닥치는 슬픔도 고통도 기쁨도 순간이며, 이 모든 것 다 지나가리라 믿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에게 이 시는 일제강점기시대와 한국전쟁이후 핍박한 세월을 보내면서 그나마 한 가닥 위로를 주던 희망의 시였음은 누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래 이 시는 그와 친분이 있었던 「데카브리스트(Dekabrist:1825년 12월의 반란으로 후일 러시아 혁명의 단초를 제공)」에 가담했던 사람들에게 바친 것이라는 다수의 견해가 있다. 청년 시절 러시아의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친 「데카브리스트」의 구성원들과 교류를 가졌던 「푸시킨」은 자유로운 감성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적 특질이 강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p,97)』에 의하면 「데카브리스트」의 실질적인 지도적 역할을 했던 「파벨 이바노비치 페스텔(Pavel Ivanovich Pestel)」과 1821년 무렵에 만 22세의 청년 시인 「푸시킨」 사이에 짧은 만남이 있었다. 「푸시킨」은 자신의 일기에 “「페스텔」은 글자 그대로 현인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독창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썼다. 따라서 많은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 처형되고 유배를 가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현한 시라고 보는 견해에 충분한 일리가 있다.
지난 2013년 11월 13일 「푸틴」대통령도 참석하여 한·러 우호의 상징으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앞에 러시아 작가동맹에서 세운 「푸시킨」 동상이 있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러시아인들이 찾는 성지라고 한다. 그 하단부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새겨져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호혜의 보답으로 이후 2018년에 「국립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교정에 우리나라 『토지(土地)』의 작가인 「박 경리」여사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혹시 향후에 어떤 열혈인사가 출현하여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적대국가 시인의 동상을 세웠다고 철거에 앞장서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문화의 힘은 바로 국력의 힘이고 국가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다. 일반가정에서도 그 집안의 가풍이 있어 소리 없이 휘황한 광채가 빛을 발하듯 국가의 위상도 마찬가지다. 자국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문화유산보다 값진 고차원의 생생한 자료는 없다.
과거와는 달리 우리나라도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에 많은 노력을 하여 커다란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외국의 다양한 문화시설을 보면서 자각한 측면이 많은 것 같다. 물론 관광자원을 확대하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졸속으로 빈약한 근거와 주장에 의지한 무리수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격이 떨어지는 미화는 자칫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3.1.30.작성/2.15.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