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페에서 자카리아스 우루시누스가 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공동 저자인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는 덜 보았습니다.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을 신앙적 아버지 같이 여겼던 독일의 개혁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독일 개혁교회에 장로회정치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헌신한 분이었는데요. 올레비아누스와 칼빈과의 관계성은 구분선 아래에서 합신 이남규 교수님의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올레비아누스와 칼빈
칼빈은 올레비아누스에게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carissime pater)였다. 올레비아누스에게 끼친 칼빈의 영향은 그가 복음전도자가 되기로 서원한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히 절대적이다. 1556년 올레비아누스가 법학을 공부하던 중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가지고 스스로 공부했다. 1558년 제네바로 가서 칼빈에게서 배웠다. 그때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서를 프랑스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했다. 제네바에 대한 인상이 깊게 새겨져 제네바를 떠나기 전 동생 안톤을 불러 이제 막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트리어의 종교개혁이 암초를 만나 하이델베르크로 가서, 1561년부터 대학에서 교의학교수로 활동했을 때, 올레비아누스는 스스로 요약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헤르보른(Herborn)에서 교수로 사역하면서는 칼빈의 책을 출판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요약(1586), 칼빈의 설교 네편(1587), 칼빈의 욥기 설교(1587)가 그것이다. 1587년 세상을 떠나게 되니,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에 한 일이 칼빈의 글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올레비아누스의 신학은 칼빈으로 시작해서 칼빈으로 마친 것이다.
칼빈은 신성로마제국의 유력한 지역인 팔츠의 종교개혁 소식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하고 알고 있었다. 다테누스가 1560년 9월 칼빈에게 보낸 편지를 예로 들 수 있다. 다테누스는 팔츠의 상황을 정리해서 칼빈에게 보고했다. 즉, 팔츠가 개혁주의 노선을 걷게 된 것을 알리면서 루터주의자들의 행위와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주의자들을 내보낸 것을 보고했다. 퀴에르케타누스(Quercetanus)도 팔츠의 상황을 칼빈에게 알려주었다. 1562년 1월 16일에 보낸 편지를 보면, 팔츠의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상황들, 즉 선제후의 굳은 확신, 빵을 떼는 성만찬의 집례(하이델베르크에서 1561년 12월 7일부터 행해졌다), 그 때까지 아직 예배당에 있던 우상들의 철거 등을 보고했다. 올레비아누스가 교회권징에 대해 프리드리히 3세를 강하게 설득했다는 것도 덧붙여 알렸다. 이런 사실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보고 받은 칼빈은 참 종교에 대한 열정을 보인 프리드리히 3세에게 예레미야 주석을 헌정하면서 바른 성만찬교리를 다시 설명했다.
올레비아누스가 교회법에 대해 칼빈에게 여러 조언을 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올레비아누스의 편지를 통해 그가 팔츠교회법 작성에 크게 관여했다는 것과 팔츠의 교회법에 칼빈과 제네바 교회법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가장 먼저 1560년 4월에 올레비아누스가 칼빈에게 보낸 편지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올레비아누스는 제네바 교회의 치리회 규정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덧붙이기를 팔츠 교회위원회 몇 사람과 함께 살펴볼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올레비아누스가 하이델베르크에 온지 몇 달 되지 않은 때(그는 1559년 12월 말쯤 하이델베르크로 왔다)에 이미 교회법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팔츠교회의 교회법 작성에 대한 관심이 1560년 봄까지도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법의 핵심이 요리문답서가 자리한다고 했을 때 요리문답서 작성에 대한 관심도 이 시기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1560년 9월 올레비아누스가 다시 같은 부탁(제네바의 치리회 규정)을 하는 것을 볼 때, 4월의 부탁이 칼빈에게 전달되지 않았던지 칼빈이 어떤 이유로 보내지 않았던지, 어떤 이유로든 제네바 치리회 규정이 올레비아누스 손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편지에서 올레비아누스는 제네바의 환자심방의 방식, 개인에 대한 심사방식 등 제네바 교회법의 규정과 형식을 청하면서, 프리드리히 3세와 팔츠 교회위원회가 교회권징에 대해 적극적인 것을 밝힌다. 그해 11월에 칼빈은 답장하면서, 제네바에서 목사들을 세울 때, 성경해석 능력의 검증, 그 후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시험, 그리고 설교를 해보게 한 후, 비밀투표로 검증된 자들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천거한다는 사실을 알린다. 유아세례에 대해서는 집회 때에 세례를 베풀며, 아이의 아버지가 참석하며, 성만찬에는 신앙고백과 함께 나와야 하고, 일년에 네 번 심사한다는 사실, 그 외 교회생활과 권징 등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1562년 9월 24일 올레비아누스가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레비아누스의 교회권징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교회권징에 대해 적극적일 뿐 아니라, 교회권징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올레비아누스는 자신이 선제후를 설득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것을 밝힌다. 나아가 교회권징에 대한 팔츠교회 지도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언급한다. 딜러(Diller)는 권징에 대해 소극적이나 호의적이고, 출레거(Zuleger)는 적극적이다. 그러나 에라스투스는 여기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입장 차이는 다가올 팔츠교회의 길며 격렬했던 교회권징논쟁의 그림자다. 10월 27일 칼빈이 보낸 편지를 보면, 선제후 위원회에서 두 명, 대학이 두 명, 시에서 네 명, 그리고 목사들이 함께하는 권징을 위한 조직을 조심스럽게 제안하는데, 그 목적은 다양한 부분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칼빈이 하나가 되는 것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팔츠는 교회권징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격렬한 논쟁을 치르게 된다.
1563년 4월 올레비아누스는 다시 칼빈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팔츠의 교회법에 제네바 교회법이 큰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보여준다. 올레비아누스는 제네바 교회법이 독일어로 번역된다는 것을 칼빈에게 보고한다.
| “당신의 요리문답이 며칠 안에 나보다 언어 능력이 뛰어난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에 의해 잘 번역된 독일어로 오게 됩니다. 거기다 성례의 실행방식과 기도 등이 추가됩니다. 모든 것이 신실하게 고려되어서, 독일 사람들이 읽는 것을 거절하지 않도록 당신의 이름과 당신들의 도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이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프랑스 개혁교회 전체에서 행해지는 방식: 성찬의 실행, 혼인, 기도, 요리문답 등. 요리문답의 명칭: 프랑스 교회의 요리문답.” |
실제로 제네바 교회법은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랑스 개신교회 법”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내용은 공동기도, 성례의 실행, 혼인예식, 환자방문, 기독교요리문답이다. 프랑스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적대적인 자들에게 책이 거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번역을 우르시누스에게 돌리고 있지만 올레비아누스에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1563년 팔츠의 교회법의 세례, 성만찬, 기도, 혼인예식, 환자방문 등에 대한 규정은 제네바 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이남규, “올레비아누스의 장로회 정치를 위한 여정”, 『갱신과 부흥』Vol.20, pp.91-95.
첫댓글 카스파 올레비안(Caspar Olevian, 1536년 8월 10일 - 1587년 3월 15일)
카스파 올레비안(Caspar Olevian, 1536년 8월 10일 - 1587년 3월 15일)는 종교개혁 시대에 중요한 독일의 개혁신학자이며,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와 함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의 공동저자였다. 참된 저자인지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이 논쟁을 하고 있다.[1][2]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난 그는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의 요청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후에 루터만을 고수하는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의 아들 루드비히 선제후에 의해서 학교를 떠나게 된다.
구속 언약이라는 용어를 언약 신학에 새로 첨부하였다. 창조언약, 법적언약, 은혜언약등의 언어도 사용하였다.
이하 위키 백과 링크 참조하세요.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C%8A%A4%ED%8C%8C_%EC%98%AC%EB%A0%88%EB%B9%84%EC%95%88
좋습니다. 올레비안의 라틴어식 이름이 올레비아누스입니다.
@장코뱅 당시 라틴어는 유럽 모두에게 공용어 같아요.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에게 직접 신학을 독일 최고의 개혁주의 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선생으로서의 저력은 새신자 양육에도 잘 적용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새가족반>
교보문고 등에서 시판 중이니 읽어 보면 도움이 크게 될 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9538
아. 좋은 책이네요. 흘륭한 개혁주의 신학자입니다.
사도신경 해설 새가족반에 대한 소개를 잘 보았습니다. 특히 추천사를 보니 꼭 사서 공부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교인들의 기독교 기초교육의 필독서라는 느낌이 듭니다.
공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주역이자 언약 신학의 개척자군요!
카스파 올레비안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공동 저자로 알려진 독일의 개혁신학자로, '구속 언약' 개념을 신학계에 처음 도입하며 언약 신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 같습니다.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신학적 논쟁과 박해 속에서도 '은혜 언약'의 가치를 지켜낸 올레비안의 열정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교리문답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구속 언약이라는 귀한 개념을 정립해 주신 덕분에, 창세 전부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아멘!
우르시누스와 더불어 종교개혁 시대에 독일의 개혁교회의 기초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던 올리비아누스를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법학을 전공한 신학자, 목회자로서 칼빈의 제네바교회를 독일에 접목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군요. 한창 서적들을 발간하던 시기인데 5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게 아깝게 느껴집니다.
네, 공감합니다. 더 오래 살고 책도 더 냈으면 좋으련만요.
@노베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