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호-영혼의 마음을 얻는 방법
1.우리가 던지는 파문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세상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꽃이 피어나고, 잎이 우거지고, 나무가 자라고, 나비가 날아가는 것은 다 그들 속에 약동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뿐만 아니라 그렇게 크고 광대한 우주가 유지되고 존재하는 것은 어떤 거대한 에너지가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위대하고 힘있는 생명의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근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풀잎 속에서 방긋이 웃으며 피어나는 들꽃을 보라! 창공을 노래로 가득 채우며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과, 비 개인 오후, 나뭇잎에 아직 맺혀있는 빗방울 속을 가르는 햇살의 찬란함, 그리고 젖은 풀섶에서 나와 태연하게 느릿느릿 차길을 가로질러 기어가는 여유있는 새끼 자라의 얼굴을 보라! 빛나는 아침이슬로 진주목걸이를 만들어 걸어놓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아침 거미의 미소를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 모든 만물 속에서 그들을 붙들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에너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에너지와 파동 우리의 삶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말은 모두 에너지이다. 사랑도 에너지이고 미움과 증오도 에너지이다. 그것들은 어떤 것을 살리기도 하고 해치기도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모든 에너지는 파동으로 나타나며, 이 파동은 1초에 몇번 진동하느냐는 진동수로 측정된다. 진동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자면, 어떤 진동은 지구의 리듬처럼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반면(지구는 1초에 약 7.5Hz 즉 7.5번 진동한다), 음악처럼 진동수가 16~20,000Hz에 달하는 소리들은 우리 사람들이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들이 들을 수 있는 범위의 소리들은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몸으로 느끼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파동을 가지고 있다. 우리 마음 속에 떠도는 생각이나 오늘 아침 회사 상관이 보인 불쾌한 기분도 모두 나름대로의 파동을 발산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들을 포함하여 모든 우주만물은 각자 고유의 파동을 가지고 있다. 캔데이스 퍼트 박사는 자신의 생화학 분야의 혁신적인 저서 <감정의 분자; In Molecules of Emotion> 에서, ‘감정에는 진동이 있고, 이 진동이 육체적인 것을 비육체적인 것과 연결시키며, 또한 이 연결 작용은 세포 안에서도 발생하는데, 우리 몸의 세포의 분자 수용체가 감정이 보내는 화학적인 반응에 춤을 추듯이 리드미컬하게 진동하며 반응한다’고 설명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곳은 우리 몸의 가장 기본적인 기관인 심장과 뇌이다. 칠드리 박사와 하워드 마틴 박사는 그들의 논문, <심장공식의 해법; The heart Math Solution> 에서 밝히기를, ‘만일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분노 같은)을 느낄 경우, 당장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지며, 이 혼란스럽고 불규칙한 심장 박동은 우리 몸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올라가게 하고, 높아진 고혈압은 심장발작과 뇌졸증을 일으키는 가능성을 급격히 증가시킨다’고 했다. 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경우 심장 박동은 규칙적이고 주기적이며 균형잡힌 파장을 나타내며, 평온하고 일정한 심장 박동은 심장 혈관의 건강에 도움이 되며, 면역기능을 향상시키고, 신경계의 기능을 원활하게 만들며, 홀몬의 균형을 가져온다고 밝혔다. 감사와 인체의 반응 감사하는 마음과 긍적적인 감정, 행복한 심정 등은 우리 몸과 주위에 강한 반응을 일으킨다. 최근에 두명의 여성이 그들의 실험을 토대로 쓴 “감사의 힘”이라는 흥미로운 책이 발간되어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그 두 여성들은 하나는 정신치료 전문가이고 하나는 임상정신분석 의사로서, ‘감사’라는 강한 파동의 에너지가 어떻게 우리 인체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생활과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에 대하여 수많은 실험을 한 결과를 그 책에 싣고 있다. 그런데 그 책에 보면,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행동은 뇌의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가 들어 있는데, 사람의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생각이나 감정, 기분에 따라 뇌의 혈액량이 달라지는 것을 실험에 의해 밝혀 내었다. 그 실험에서 방사선 단층 촬영을 통하여 본 결과,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뇌에 흘러드는 혈류량이 급격히 감소한 반면, 감사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갖는 동안에는 뇌에 흘러드는 혈류량이 현저히 증가한 것을 실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정신의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에이멘 박사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통합적인 움직임을 관장하는 소뇌의 기능이 거의 정지된다고 그의 실험을 통해 또한 말했다. 동조 현상 세상에는 동조 현상이라는 흥미로운 것이 있다. 동조 현상이란 하나의 진동이 다른 진동과 일치되거나 조화를 이루는 반응을 말한다. 동조 현상은 17세기 크리스천 호이겐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추시계 발명가이기도 한 호이겐스는 각기 다른 리듬으로 흔들리도록 추시계들을 조절해 놓아도, 곧 가장 강력한 리듬을 가진 시계추의 리듬에 따라 다른 추시계들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일치되어 똑같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동조 현상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우리 몸에도 동조 현상이 일어나 우리 인체의 심장박동과 뇌파가 일치하게 되고, 그럴 때 그 안정감으로 인해 우리 몸이 건강해 진다는 것이다.
동조 현상은 신비하게 생각되는 많은 현상들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울한 사람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면 기분이 우울해 지고, 반대로 행복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금방 따라서 행복해 지는 것을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동조 현상 때문이다. 모든 만물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파동은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 파동은 강한 것이 된다. 그리고 어떤 장소에 갔을 때 그곳에 가득 찬 사람들의 집합적인 파동은 대개 개인 혼자의 파동보다 강하기 때문에 개인은 대중의 파동에 동조하게 되기 아주 쉽다. 만일 그 개인이 자신만의 아주 강한 고유의 파동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던지는 파문 우리는 알거나 모르거나 서로에게 아니, 주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살고 있다. 우리가 마음 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희망의 감정을 품으면, 그로 인해 생기는 좋은 감정의 파동과 에너지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 자신에게 기쁨과 건강을 주지만, 만일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불신과 증오와 분노를 품으면, 그 부정적인 감정이 일으키는 좋지 않은 파동과 어두운 분위기가 다른 사람과 주위를 어둡게 만들고 음울함과 슬픔을 가져다 줌으로 결국 다른 영혼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현대의 과학은 알지 못했지만 그의 영감어린 마음의 눈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파동분위기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편지서에 이런 표현을 썼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표준 새번역 성경, 고후 2:15~16). 우리 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에너지를 받는 수용체이다. 마음을 비우고 열고, 우리의 안테나를 늘 하나님께 고정시켜 아름다운 사랑의 에너지를 많이 받아야 우리의 파동이 다른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 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파동과 분위기를 사진 사람인가? 맑은 영혼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영혼에게로 흘러가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의 기운을 막아 다른 영혼을 시들게 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가? 다른 영혼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분위기로 다른 영혼을 파멸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늘에 가기 전까지는 우리의 감화가 끼친 영향들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품었던 조그만 사랑의 씨앗이 얼마나 큰 열매를 맺었는가를... 그리고 그 감정이 낸 좋은 파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 할 수 있었는가를... 그리고 마음에 간직했던 조그만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막았는가를...
2.권두언
강병국 목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내가 가진 신앙을 나누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마지막 당부가 바로 당신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가르치기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르쳐 그것들을 지키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전해 주거나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전도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받는 사람에게 감화를 끼치어 그 사람도 그 말씀을 받아 드리고 따라서 행하도록 도와주어야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때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잘못된 태도나 부족한 성품들 때문에 오히려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과 진리를 거절하게 만드는 경우들이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진리의 원수가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잘못 믿고 있거나 아니면 그릇된 태도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장 유효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진리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 하는 태도입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하는 나의 태도, 자녀들과 친척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품성의 모습은 내가 믿는 바를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 짓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용서해 주며 또한 얼마나 신뢰해 주는지, 그리고 그들의 부족한 점들을 취급하는 나의 신앙적인 태도가 어떠한지가 전도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먼저 열 수 있어야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영혼의 마음을 얻는 길에 대한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기사들을 읽어내려 가시는 동안 성령님의 따뜻한 감화하심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3.하늘 왕을 맞을 아이들
수년 전 어느날 저녁, 나는 남편과 거실에 앉아 있었다. 벽난로에서 편안하고 따뜻하게 비춰나오고 있는 불빛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생애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반성해 볼 수 있었다. 남편이 물었다. “여보,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목표가 무엇이오?”
그날 저녁을 회고해 보면, 그 때 우리 옆에서 분홍빛 파자마를 입고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던 우리의 어린 두 딸과 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때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게 해 준 “중요한”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곤 한다. 남편이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아이들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내 마음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넣어줄 수 있는 모성애가 끓어 올랐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내 마음의 고동에, 그리고 남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오, 나는 내 아이들을 꼭 하늘나라에 데려 갈꺼예요! 그리구 그 아이들이 구원을 받아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을 보고 싶어요! 그 아이들을 저주의 불에 고통당하고 영원히 멸망당하게 할 수는 없어. 비록 내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꼭 가야 돼요.”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엄숙하고 두려운 생각이 내 마음에 엄습하였다. “만일 네가 천국을 가지 못하면 네 아이들이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아이들이 어떻게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 아이들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너 외에 누가 그 아이들을 천국으로 인도 하겠는가?” 내 대답을 들은 남편이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우리가 아이들을 얼마나 진정으로 염려하오? 오늘 저녁 이런 우리의 결심이 그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적인 것이오, 아니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제 완전히 생애를 개혁하려는 것이오? 여보, 나도 너무 이 일을 하고 싶소. 그러나 나는 너무 현실주의자이고, 이, 삼일이 지나고 이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가 진정으로 이 일을 위해 결심하고 헌신하지 않는 한 옛날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 틀림이 없소. 그렇게 되면 우리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오. 그러니 지금 바로 우리 완전한 헌신을 합시다.” “예, 그래요!” 나는 대답했다. “그러면 지금 바로 합시다!” 우리 부부는 무릎을 꿇고 자녀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 우리의 잘못과 죄악들을 눈물로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그리고 위대하신 카운셀러이신 주님께 우리에게 지혜와 분별력과 용기와 이해력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우리 귀중한 두 딸과 아들을 하늘 왕국에 적합한 아이로 기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 순간 후로 우리는 한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다. 그날 이후로 우리의 자녀를 하늘 왕을 맞을 수 있는 아이들로 기르는 것이 우리의 생애의 목표가 되었다. 이 결심은 부모로서, 특히 내 자신에게는 어머니로서 많은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이루어지고 앞으로 계속 되어야 할 개혁을 세가지로 구분하여 정했다. 이 세가지의 “근원적이고 중요한 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여러분과 나누려고 한다. 그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께 의지를 완전히 복종시킴 (잠 23:26, 약 4:7). 2. 생애의 모든 일이 일관성이 있어야 함 -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약 1:7, 히 13:8). 3. 나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되던 간에 자녀의 구원을 위해 열심으로 일함(엡 5:16, 고전 10:13). 왕을 알아야 함 우리의 자녀를 “하늘 왕을 맞을 아이”로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교리와 성경의 진리를 줄줄 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자원하여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면 모든 일에서 내 의지와 길을 버리고 내 마음을 완전히 굴복하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말할 수 있을지를 배워야 한다. 이 굴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진행적이고 지속적인 것이며, 순간마다 내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내 자신 전체를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굴복하는지를 알았을 때, 나는 점점 더 이 완전한 항복에 대해 깨닫게 되고 경험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 생애에서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이 되었다. 습관의 개혁 하나님의 뜻이 내 생애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내게 고치라고 깨우쳐 주신 것은, 영원한 가치와 자녀들의 구원에 견주어 볼 때 너무도 가치가 없는 하찮은 잡담 전화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정말 필요할 때에만 전화를 사용하고, 어떤 사람이 용건이 있어 전화를 했을 때도 쓸데없는 잡담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실천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동안 항상 내가 전화통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내가 전화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내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도 방치해 두고 전화에만 매달려 있었는지를 보게 되었다. 내가 전화를 끊었을 때는 늘 둘 중에 한가지였다. 아이들의 성화 때문에 화가 나서던가, 아니면 그 아이들이 나의 도움을 필요하던 그 일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린 후던가 둘 둥에 하나였다. 실상 나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을 위해, 가장 중요한 시간을 몽땅 할애하고 있었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께서 왜 내게 전화를 하는 일에 있어서 내 자신을 굴복하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내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의 협력을 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깨달음의 빛을 내게 비춰주셨다. 그 다른 한가지는 쇼핑을 하는 습관이었다. 쇼핑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은 실제 필요한 쇼핑보다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쓸 데 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며, 필요없이 낭비되는 돈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이 계시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내 의지를 당신께 바치기를 요구하셨다. 변화가 찾아 옴 이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애에서 이루어야 할 큰 일을 위해, 자녀들의 생애를 위해 나의 시간을 아끼라(엡 5:16)고 명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원해서 행하기 위해 내 생애만 변화된 것이 아니고 남편의 생애도 변화되었다. 공놀이를 줄이고 필요 이상의 회의를 피하는 등, 그는 보다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나와 보내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제사장”과 “호주”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줄이거나 없애라고 지적해 주신 분야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가 “하늘 왕을 맞을 아이”가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어린 것들을 하늘을 위해 준비시키기로 결심하고 헌신한 이 헌신은 그 이후로 한번도 번복된 일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하고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에게 질문하였다. “부모로서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 생애에, 우리 자녀들의 생애에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며, 왕되신 그분의 특성을 주입시키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고 다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더해지도록 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데 정말 철저하지 못하고 질서가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가 시작되는 처음 한 시간을 그분의 뜻을 깨닫고 행하기를 구하는 시간으로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거기다가 우리는 우리의 세 어린 자녀들에게 그들의 하루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되는 질서있는 하루가 되게 하고,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에 대해, 한 날을 인도하시는 그분의 인도를 배우게 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실습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읽을 줄 모를 때, 무반주의 성경구절로 된 노래 테잎을 들려주고는 얼마나 많은 성경절을 그들이 외우는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하루 종일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무척 흐뭇했다. 나는 세살박이 우리 아들이 정원에서 풀을 뽑으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찬미하는 것을 듣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노래를 통해 기억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루의 생활을 지시할 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딸들이 자라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아침 예배로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어떻게 개인에게 적용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였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예수가 누구인지,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주님의 발 아래서 배우는 일이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하다. 이러한 작은 주의의 집중이 때때로 훈련의 시작이 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부모의 성품이 먼저 변해야 함 “하늘 왕을 맞을 아이들”이 되기 위해서, 부모된 우리가 먼저 성품에서 우리 구주되시는 왕과 같아져야 한다. 성경은 성품의 완전한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부모들과 자녀들의 생애에 필요하다. “좋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우리가 감추인 보화를 찾듯이 성경을 연구하다가 일반적이고 간단한 이야기에서 실제적이고 원칙적인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지식에 그치는 진리가 아니고 생애에 적용되는 진리가 말이다.
성경의 제일 첫장은 그리스도의 특성의 몇가지를 말해주고 있다. 창조의 간단한 기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정연하심과 단정하심과 철두철미하심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이 일을 끝마쳤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그처럼 우리의 일 모든 부분에 있어서도 “심히 좋은”일이 있어야 한다. 우리 손으로 행한 일이 단정하고 질서있고, 철저하게 되었는가? 우리 집의 마루와 선반과 가구와 서랍과 옷장은 잘 정돈되어 있는가? 집 안이 우리가 단정하고 질서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가? 우리의 자동차와 차고는 어떤가?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없는가? 만일 있다면 우리는 다른 방면에서도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그분의 표준에 비교해서 평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실생활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특성을 우리에게 주입시켜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 여기서 정지하면 안되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특성이 주입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남편과 나)는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길대로 하기를 자원하였다.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단정하고 질서있고, 철저하게 하기를 택했다. 자녀를 훈련시킴 처음에는 나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원칙을 배우게 되었을 때, 실제적으로 시간을 절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리 편의 계속적인 굴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성품이 변화될 수 있는지를, 우리의 일을 보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수준에 맞추어서 할 수 있을지를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를 “하늘 왕을 맞을 아이들”로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도 그들의 생애에 그리스도의 성품의 특성이 주입되어야 한다. 그들도 마땅히 이러한 자질을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지 알아야 하며, 또한 우리가 그분과 자원해서 협력하면, 하나님께서 단정함과 질서정연함과 철저함을 그들 속에서도 주입시켜 주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녀들도 가정에서 단순하고 실질적인 매일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길 이외에 이러한 특성을 길러줄 수 있는 다른 더 나은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는 자녀들을 가르칠 때, 그들에게 본을 보이고 개념을 넣어 주므로,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고 지시한다. 그런 후 아이들에게 그대로 해보라고 시키고 그들의 이해를 평가해 본다. 이러한 과정은 아이들의 성격과 나이와 이해도에 따라 몇번 반복해야 하며, 이 일에는 부모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된다. 우리는 아이에게 할 일을 가르치고, 그 아이가 일을 다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네 자신도 기쁠 것이라고 늘 가르쳤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 속해 있는 의무를 신실하게 행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을 줄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각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시키거나 자신의 쾌락을 구하거나 재미있게 놀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그들이 가족 사회에서 자신들의 본분을 다하고 부모 형제들의 무거운 부담을 나누어지려고 노력하도록 그들을 꾸준히 교육하면 그들은 진정 자신들이 가족의 유익한 일원임을 알고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작은 일을 수행하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며 선행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그들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그들은 일과 책임에 익숙하여질 것이며 일을 즐기게 될 것이며 인생에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판단을 따라 방종하고 자기 중심적이 되게 만드는 나태함이나 무료함 가운데 방치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므로 거장 큰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아이들의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모든 일에 단정하고 질서있고 예모있게 교육과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하늘 왕의 왕국을 위하여 잘 준비되는 아이들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부모의 모본에서 그들은 하늘 왕의 성품을 보고 닮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가르치고 본을 보이며,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질서정연한 생활과 태도를 가르치자! 부모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이 훗날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는 말을 왕으로부터 듣게 하기 위하여, 또 자녀들을 “왕을 맞이할 아이들”로 키우기 위해 헌신하지 않으려는가? 오늘 헌신하자!
4.스포츠와 품성 도야
오늘날 미국인의 생활구조는 불행하게도 경쟁적인 스포츠의 해로운 영향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요즈음 미국에 있는 거의 모든 마을이나 도시에는 십대 자녀들이 럭비, 야구, 축구, 그 밖에 다른 스포츠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려는 부모들을 위해 건설한 운동장이 있다.
스포츠에 대한 사회적인 상징은 또한 통찰력 있는 전문가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선수 대기실의 교훈(Lesson from the Locker Room)> 이라는 책 가운데서, 연구자인 미러클과 리스는 오늘날 미국의 스포츠에 대한 집착은 자기 민족의 진정한 장기적인 필요와는 상반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미국이 오늘날의 지구촌 시장에서 경제적으로 경쟁하여 성공하려면, 필요한 것은 비상한 운동선수들이 아니라 기술력을 가진 일꾼들이다. 그러므로 스포츠가 계속해서 교육을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미국은 정상급의 직업 운동선수들에게 엄청난 연봉으로 보상하는 수십억 달러의 사업을 후원하는 스포츠 광들의 열광주의에 둘러싸여 있다. 많은 사람은 이런 후한 급료에 대해 운동선수들이나 구단주들을 비난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미국사회에 있다. 스포츠에 대한 광신적인 관심은 입장권과 TV광고 판매 수익을 통하여 높은 연봉을 줄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도록 한다. 스포츠 열광자들은 인기있는 선수들이 운동인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다수는 그것을 칭찬한다. 예를 들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농구선수들은 운동인답지 않은 행동으로 전례없이 많은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수많은 팬들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자기 지역의 영웅들에게 “디트로이트의 악동들(Detroit’s Bad Boys)”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런 칭호는 자동차 스티커나 티셔츠에도 등장하고, 신문이나 스포츠 잡지들에도 나왔다. 미국의 대중들은 대부분 과학적인 체육문서에서는 분명한 것처럼 보이는 다음의 두가지 결론을 기쁨에 겨워 잊어버리는 것 같다. 1. “스포츠는 품성을 도야한다”라는 말은 근거없는 통설이다. 2. 실제로 스포츠는 품성을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선수 대기실의 교훈”이라는 저서에서 미러클과 리스 박사는 그들의 저서 <선수 대기실의 교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포츠에 대한 도덕적인 이치를 심도있게 분석한 결과, 운동선수들은 도덕적인 결정을 그들의 의무가 아니라고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으며, 어떠한 폭력적인 행동이 적합한가를 판단할 때 자기 방식의 편견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운동선수들은 일반인에 비하여 공격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도덕적으로 덜 진보된 형태의 이론을 갖는 경향이 있다.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은 직업적이고 사회적인 개성을 발달시키고,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며, 고등학교 시절이나, 다른 환경에서도 품성을 도야해 준다는 주장은 전혀 정당화 될 수 없는 믿음이다. 그와는 반대로, 운동선수들의 도덕적인 이론에 관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인 모습을 그려야 하는 추세이다.” 사회적인 문제 미국이 한 나라로서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적당한 지출을 결정할 때까지는, 운동선수들이 여전히 많은 돈을 긁어모으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대학 등의 운동선수들을 위하여 투자되는 돈은 계속하여 교육적인 활동 기금을 축낼 것이다. 더욱이 이런 투자는 우리 젊은 이들에게 기술력 있고 생산적인 일꾼이 되려는 일의 중요성보다는 운동을 함으로 얻는 명예와 특권에 대하여 역설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땅에 걸려 있는 무지개 끝에 놓인 직업적인 운동선수들의 커다란 금항아리가 지속적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경쟁 세계로 유혹하여, 결국에는 그들의 품성을 망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민감한 문제임을 잘 알고 있다. 스포츠는 우리 사회의 광범위한 면에서 강한 지배력이 있지만, 우리 모두는 경쟁적인 스포츠가 우리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많은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운동을 하며 경쟁하도록 격려함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운동 장비를 사주고, 운동 시합과 경기를 연습하도록 후원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소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자녀들에게 줄 수도 있는 손상에 대하여는 거의 또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스포츠의 영향 어떤 종교 교육가는 경쟁적인 스포츠에 관하여, “미식축구나 권투처럼 몸이 부딪히는 운동은 야만성을 권장하는 도장”이라고 언급하며 가장 인기 있는 오락들은 야만성을 기르는 교육장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런 것들은 고대 로마 경기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성품을 길러 준다. 그리고 비단 몸을 부딪치지 않는 야구나 테니스, 배구처럼 격렬하지 않은 운동일지라도, 만일 그것들에 지나치게 빠질 경우,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부절제성 때문에, 쾌락과 흥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조장하고, 실제적인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는 기질과 유용한 노동을 싫어하는 습관을 길러줄 가능성이 있다. 경쟁적인 스포츠와 그런 스포츠에 너무 집착하는 일이 자녀들의 성품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 * 경쟁적인 스포츠에 의한 인성 파괴 1. 학생들의 학업 향상을 방해함. 2. 학구적인 연구에서 마음을 이탈시킴. 3. 쾌락과 흥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격화시킴. 4. 유용한 노동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킴. 5. 실제적인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려는 기질을 배양함. 6. 삶의 온건한 사실들에 대한 흥미를 파괴함. 7. 생애의 잔잔한 즐거움들을 손상시킴. 8. 불법을 증가시킴. 9.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강화시킴. 10. 생명을 무시하는 마음을 배양시킴. 11. 야만적인 힘을 자랑하는 마음을 배양시킴. 스포츠 열광의 또 다른 함정 스포츠는 직접 참여하여 열심히 하거나 TV를 통해 관전하거나 간에 어쨌든 커다란 기분 전환거리이다. 스스로를 “스포츠 팬(fan)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들을 스포츠에 열광적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사실 “팬”이라는 말은 “광신자(fanatic)” 의 줄임말이다. 스포츠에 마음을 두다 보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기가 어렵다. 그것은 “나의 영혼은 어떠한가?”를 스스로 살피고 자문하는 기회를 막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경쟁심과 시합에 대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심지어 자기와 저희 창조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조차 갖기 어렵다. 실제로 스포츠 행사에서 도덕적으로 고양시키는 내용은 거의 없다. 선수들과 관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똑같이 한가지 목적에 고정되어 있는데, 상대방을 이기고 그를 때려눕히는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는 사회폭력을 조장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알 수 있다. 미국이 당면한 문제들과 맞먹는 역사적인 사건 성경에는 비행과 폭력이 전염병처럼 일어났던 어떤 문화권에 대한 실례가 나와 있다. 그 사회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패의 물결 속에 떠내려 가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미국이 아직은 그런 형편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믿지만, 아주 두드러진 유사점들이 있다. 그 문제의 도시는 중동 지방의 소돔이었다. 폭력과 성범죄는 그 고대의 도시 지역에서 자행되던 으뜸 목록이었던 것 같다. 소돔의 네 가지 특징을 유의 해 보자. * 소돔의 죄악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에스겔 16:49). 1. 교만함 2. 식물의 풍족함 3. 태평함(나태함이 가득함) 4.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음(불행한 자에 대한 동정심 결여) 지면상 다른 문제에 대한 고찰은 생략하기로 하고 이 중에서 교만에 대해 살펴보자. 교만함은 흔히 알려진 “자존심”과 구분하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자존심의 근거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자부심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고, 그래서 자신에 대하여 좋다고 느낀다. 성경은 이런 종류의 자존심에 대해서 말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성구 사전에서 “교만(pride)”이라는 단어를 살펴 보면 그 위험성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남들에 대하여 우월하다고 느끼는 자들은 변덕스런 마음이나, 심지어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계략으로 남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어떤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열등한” 자들을 복종시키거나 심지어 없애버려야 될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자기가 “바르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한 두드러진 사례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있었던 노예제도이다. 그러나 어쩌면 놀랍게도 미국의 사회학자들이 경쟁적인 스포츠에 의하여 육성되는 “남성적인” 경향에 관하여 말하면서,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유용한 운동 만일 경쟁적이고 도전적인 스포츠가 젊은이들의 생활을 가득 채운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바람직한 성품형성이나 충만한 영적경험을 하므로 오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운동을 해야 한다. 나태함과 할일없이 빈둥거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병폐는 없다. 그러나 대개 경쟁적인 운동 경기들은 청소년들의 안녕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염려의 대상이다. 학생들의 시간을 그다지도 많이 점령하는 경기들은 공부에서 마음을 돌려 버린다. 그것들은 청소년들의 생애에서 실제적이고 진지한 일을 하도록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일 경쟁적인 스포츠 대신 청소년들에게 육체적인 노동을 하게 한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육체를 단련하고 한창인 에너지를 유용한 데 쓰도록 만들 수 있도록, 집 밖에서의 노동, 가정을 돕는 일, 어떤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프로젝트 만들기 등등으로 너무 경쟁적이고 성격을 사납게 만드는 격렬한 스포츠로부터 그들을 떼어 놓고 훈련시키는 일을 부모들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만일 스포츠를 해야 한다면, 경쟁심을 유발하지 않고 유익한 운동을 즐길 수 있는, 또 가족끼리 참여하여 함께 할 수 있는 경쟁적이지 않는 스포츠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쟁적인 스포츠가 우리의 품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 보았다. 하늘을 위하여 준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품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품성이다. 우리 자신들과 자녀들의 올바른 품성 형성을 위하여 해로운 것들은 과감히 개선해야 할 용기가 모두에게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용기있고 현명한 독자들이 되고, 또 독자들의 온 가족이 함께 협력하여 아름다운 성품을 이루는 가정들이 되기를 바란다. 경쟁적인 스포츠에 참여하거나 관전하는 대신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아래에 있는 방법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활동 > * 가족 예배 * 성경 연구와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토론 * 비경쟁적인 야외 운동 * 정원 가꾸기 * 천연계 탐사 * 캠핑 * 유적지 답사 * 음악회 참석 * 자연 비디오 시청 * 가족회의 * 감사함(기쁨)을 표현하도록 자녀들을 교육시킴 * 가정의 규칙을 따라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을 초청함 * 특별한 주말 식사 * 떨어진 가족과 지내는 특별한 기회 * 서명한 책 선물하기 * 가정생활을 비디오로 만들어 보기 * 도서관 방문 * 악기 연주법 배우기 * 매일 집안 일에 참여하기 * 남을 도와주기 * 함께 새로운 요리 만들기
5.영혼의 마음을 얻는 방법1부-영혼의 마음을 얻는 방법
“친절하고 예의바른 한 명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가 낳을 수 있는 가장 힘있는 논증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구원의 과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예술이 될 때까지 그것을 숙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전도는 큰 사명이자 특권이며, 자신이 발견한 하나님을 세상에 소개하고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값지고 기쁘고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기독교계에서 하는 선교나 전도는 진정한 의미가 퇴색된 전도, 즉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교인 수를 늘린다거나, 교회의 세력을 더 확장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강조하는 것같은 느낌을 종종 주어 아쉬울 때가 있다. 진정한 전도란 어떤 것일까? 전도는 하라고 권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이 해야하는 신앙생활과 똑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발로이고 결과여야 한다. 전도는 하려고 노력하고 힘을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전도를 하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려는 의욕이 없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도는 정말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열정과 성령의 감동의 충만하심 속에 산다면 저절로 되는 것일 것이다. 만일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크고 강렬하게, 그리고 충만하게 역사한다면, 그 사랑은 막을 길 없이 계속 밖으로 넘쳐 다른 영혼에게 흘러 갈 것이고, 그 사람의 성품과 생애와 생활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과 자비를 보고 영혼들은 그 사람에게로 이끌려 올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전도이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께로 이끌어와야 할 잃어버린 영혼들이 많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의 가족 중 한 사람 - 우리의 자녀, 배우자, 부모 - 일 수도 있고, 우리의 이웃일 수도 있다. 전도를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충만하신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으로 말미암아 생활자체가 자연스러운 전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올바로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어떻게 영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되어야 예수님처럼 영혼들을 멸망에서 구원해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번 호 신앙기사에는 하나님을 세상에 잘 소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은 전도를 한 목사님의 경험의 실례들, 또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기술을 터득한 사람이 되기 위한 전도 방법들에 대하여 다루어 보았다. 함께 연구하여 독자의 전도와 선교 사업에 큰 지침을 삼게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오직 예수님 “오직 예수”는 가장 위대한 세기적 발견이다. 이 발견은 원자폭탄보다도, 수소폭탄보다도 더 위력 있고 굉장한 발견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진정으로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이나, 또는 이 세상의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변화”라고 부른다. 증오와 원망과 원한과 교만과 악의를 가졌던 사람이 사랑과 평화와 용서와 기쁨과 만족과 겸손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는 것, 이런 마음의 변화는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완력으로도 할 수 없고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란 발견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들어 그분을 볼 때,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1900 여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의 “높은 산”, 따로 떨어진 곳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눅 9:36). 변화산에서 그들이 세상을 잊고 그들 눈에 오직 변화함을 입으신 예수님만 보였을 때, 그들은 그 발견을 했던 것이다. 눈에 오직 예수님만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대한 발견”인 예수님을 다른 영혼들에게 소개하고 그 영혼들을 살릴 수 있게 된다. 바로 자신의 이웃과 교회 교인들과 혹은 친척들의 죄와 약점은 보지 않고, 오직 나사렛 예수, 세상의 구주되신 분께로 그들의 눈을 드는 사람들은 이 변화의 비밀을 마음 속에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오순절의 능력 “오직 예수님”은 하루에 3천명을 회개하도록 한 오순절의 능력이었다(행 2:41). 그 3천명 이상되는 남녀들은 단지 베드로의 말에 의해 매혹된 것이 아니라, 베드로, 곧 변화된 베드로에 의해서 매혹된 것이었다. 그는 “오직 예수” 때문에 변화되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을 보았으나, 진정한 열린 눈으로 보지 못했다. 예수님과 같지 않은 그의 성품과 습성들을 그분께 완전히 굴복시키고, 그분의 변화시키시는 능력과 은혜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를 주저함으로, 처음에 그는 영혼의 눈을 온전히 열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 변화함을 받도록 성령의 감화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은 것은 그를 예수님을 온전히 알도록 이끄는 경험으로 인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필생의 소망이 되었던 메시야가 죽음으로 겪었던 갈바리의 최대의 비극(?)의 고난을 통과하고 난 후에야, 그는 비로소 영안을 뜨고 가까이 있어도 진정으로 보지 못했던 예수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스승을 부인하던 재판정에서 구주께서 그를 바라보시는 그 동정스러운 눈길에 의해서 거듭났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사람에게서 자신을 예수님을 위한 유력한 설교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그 한 이름, “예수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대한 발견으로 변화된 사람을 본 많은 군중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부르짖었으며, “회개하여...침례를 받고”라는 소리에 기쁨으로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것은 진정한 침례의 경험을 한 베드로의 생애와 회개로 인한 변화 때문이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소개하라 전도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경험하고 인생의 목표가 달라지는 사람은 너무도 적다. 그리고 스스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도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도를 하기 전에 먼저 진정으로 영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산 경험을 통해 만난 예수님, 자신을 변화시킨 예수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예수님을 다른 영혼들에게 전할 수 있으며, 그 때 자신의 생애에서 역사하신 “오직 예수님”을 남들에게 참되게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워하지만 예수님을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지 모르고 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교인들의 가정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C 목사님의 전도회에 참석했던 한 젊은이의 간증 이야기이다. “저는 가장 비판을 많이 하는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교인이었지만 늘 하는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아버지의 비판의 대상이었고, 사람들의 약점이 아버지의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저의 영적인 성장은 그런 저의 가정의 어둡고 비판적인 분위기 때문에 위축이 되었습니다. 종교 속에서 저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저는 종교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세상에 나가 저의 부서진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인생에 대해 완전히 실망하였고, 그것은 마치 제게 긴 악몽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분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말 속에서는 보이지 않고 그들이 교회에 있는 죄인들이나 종교 속에 있는 위선을 지적해 내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교리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 수록 모든 교리 속에서 예수님을 더욱 많이 전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전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많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생명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하는 까닭에 모든 교리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 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인 진리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되어야 한다. 누구나 전도할 때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빨리, 너무나 많은 교리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전도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논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논쟁으로 할 경우 상대방으로 하여금 문을 닫아버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친절하도록 노력해야하며 너무 독단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논쟁은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다. 전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다른 영혼들을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영혼구원은 사랑문제이다. 기도로 예수님과의 동행을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항상 마음 속에 기억해야 할 것은 복음을 전하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우리는 상대방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돕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일을 하시도록 늘 기도하면서 전도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전도할 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뿐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 모세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히 11:27) 모든 일에 행동하였듯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사랑과 빛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느낌이 제자들과 함께 하였듯이, 우리는 마음 속에 예수님의 임재를 늘 경험하며 주님과 동행하여야 한다.
C 목사님이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때때로 예수님의 그릇을 식탁에 따로 놓아서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다는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고, 그 그릇에 있는 음식을 잡수시지도 않으시지만 그 자그만 행동이 예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예수님과의 더 깊은 동행을 원하던 C 목사님은 그것을 참 좋게 생각하여, 좀 떨어진 곳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차를 운전해가다가 멈추고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뒤로 돌아가서 오른 쪽 앞문을 열고 예수님을 손님으로 차에 타시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흥 집회 도중에 그 작은 행위가 예수님이 그에게 얼마나 더 실제적인 분이 되시도록 했는지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한 부인이 또 그것을 좋게 생각하게 되어 실천을 하기로 하였다. 그 부인에게는 6살 짜리 딸이 있었는데, 이웃의 친구들과 놀면서 엄마에게 버릇없이 구는 행동을 배워와 속상하던 차라 이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하였다. “만일 오늘 식탁에 예수님 자리를 마련하면 우리 딸아이가 좀 덜 건방져질지 몰라.” 이렇게 생각한 이 엄마는 딸아이에게, “우리가 지금 식탁을 차리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자리도 마련할 거란다.” 라고 했다. “엄마, 예수님이 정말로 여기 앉으실까?” 라고 묻는 딸에게 “그럼, 예수님이 바로 이 자리에 앉으시지!” 라고 대답을 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식사를 하는 한참 동안 그 딸아이는 마치 왕 앞에 있는 듯이 행동을 했는데, 갑자기 예수님의 자리와 예수님의 그릇을 잊어버리고 옛습관으로 돌아간 아이가 말하기 를, “흥, 엄마, 그래 엄마는 엄마가 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그렇지?”라고 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그릇을 바라보며 아주 조용하게, “예수님, 저는 그 말이 썩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죠?” 그러자 그 아이는 정말 예수님을 본 것처럼 당황하여 엄마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엄마, 제가 정말로 그렇게 할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아시죠?” 라고 하며 미안해 했다. “오직 예수님”은 모든 생명과 능력의 비결이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의 연약함과 위선과 실패의 골짜기에서부터 우리의 눈을 들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놀라우신 그리스도께로 향하여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예수님과 늘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효과적인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먼저 이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정신 없는 이기심의 길을 멈추고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예수님께 반하라!
친구이신 예수님 “(그의)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이는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아 5:16).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친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떤 소년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친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친구를 자기와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요!” 그런 분은 예수님이시고 그분은 우리의 참된 친구이다. 독을 묻힌 독화살이 영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상처를 입혔다. 즉시 왕비인 엘리노어가 왕의 생명을 앗아갈 그 독을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입으로 그 상처에서 독을 빨아냈다. 6천년전 죄의 독화살이 인류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달려오셔서 그분에게 자기 자신을 맡기는 모든 사람에게서 죄의 독들을 빨아 내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고 그 일을 하셨다. 한 엄마가 어린 딸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재울 때 어린 딸이, “엄마, 어째서 엄마 손은 이렇게 보기싫고 비틀어지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오, 얘야! 네가 어렸을 때에 네가 자고 있던 방에 불이 붙었단다. 그래서 이 엄마는 네 몸에 불붙고 있는 네 잠옷을 찢느라고 이렇게 심하게 데어 비틀어졌지. 그러나 얘야, 나는 네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단다!” 그때로부터 그 엄마의 보기싫은 손은 그 아이가 보았던 것중 가장 아름다운 손이 되었다. 여러 세기 전에 우리는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우리가 죽게 된 동안 예수님은 하늘에서 그저 가만히 계실 수 가 없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우리를 구하시시 위하여 허겁지겁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전쟁이 한창 치열하여 우리가 죽게 된 때에 우릴 구하시기 위해서 그분의 이마는 팔레스타인의 긴 가시로 거듭 찔리셨고, 그분의 등은 상처입어 피가 터져 나왔다. 그분의 옆구리는 창에 찔려 벌어졌고, 그분의 손과 발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과 친척들은 그분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상하시고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입으신 영광스러운 상처는 우리에게 영원히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의 친구이시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 여기 10년 동안 같은 일에 종사한 스미스라는 양계가가 있다고 하자. 누가 묻기를, “스미스씨, 닭은 일년에 몇마리나 키워서 성공하십니까?” 라고 할 때, 만일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번 해에 키워서 좀 성공하게 되면 그것이 첫번째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10년 동안 양계에 종사한 사람이 10년 동안 한마리의 닭을 키우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좋을텐데...” 그와 마찬가지로 매 해마다 한 영혼도 에수께로 인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실패한 이유를 세상 사람들이 강퍅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막 몰아댔고, 잔소리를 해왔고, 꾸짖어 왔고, 비난해 왔고, 반대와 비판을 일삼아 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친구나 친척이나 이웃을 놀라우신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그들의 방법을 바꾸면 성공하게 되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할 결정을 자기네들이 해 주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이 각 개인이 결정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모른다. 각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결정을 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자기 친구들이 저들의 의지로 그리스도를 저들의 구세주로써 선택하도록 아주 매력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방법 잠깐 영혼구원의 두 가지 원칙 혹은 방법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내게 배우라”(마 11:28) 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를 개유하여”(호 2:14)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영혼을 구원할 때 호세아가 그의 방탕한 아내에게 취했던 태도로 영혼들을 대하기를 바라신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타락하고 방황하는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유하신다. 공동번역 성경에 보면, 개유를 “꾀어내다”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불충실하고 무가치하고 은혜를 모르는 가엾은 사람들을 찾으시려고 그들을 사랑하고 꾀어내기까지 하신다. 만일 우리가 호세아의 아내 같은 그런 여자를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우리는 “나는 그녀를 비난할거야. 그리고 그녀가 저지른 그 두려운 짓을 그녀로 알게 해줄거야. 아마 그렇게 하면 그녀가 정신을 차리겠지” 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내가 그녀에게 사실대로 다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더러운 죄인이었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인생을 좀 올바르고 진실하게 살아가시요’라고 했지요.” 라고 하며 개인 전도 기록부에 “한건의 선교방문”이라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다시 이끌어 구원하시는 방법을 보여주시는데, 그녀가 냄새나고 더러운 여자일지라도 그분은 “나는 내 마음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사랑을 모두 줄거야”라고 하시며, “내가 그녀를 꾀어내어”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철학이다. 그는 당신의 축복들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매혹적인 말로 아름다운 방법으로 사랑으로 나타내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본법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요일 4:8). 사랑은 선택 없이는 작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강요하실 수 없으시며,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단지 당신 자신과 당신의 축복들을 너무나 매혹적인 것들로 만드셔서 인간의 마음이 그분을 선택하도록 하신다. 우리의 방법 앞의 예화에서 성공하지 못한 양계가처럼 실패했던 우리의 방법을 다시 한번 살펴 보자. * 강요: 많은 경우에 신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표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강요하는 방법들을 사용할 때, 그것은 우리의 신앙, 우리의 철학이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지금까지 우리의 방법들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했다면 그 방법들은 우리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 대신에 강요하고 비난하며, “온 전체가 사랑스러우신” 그분을 가리키는 성공적인 철학인 유혹 대신에 꾸짖는 것은 가짜 신앙이다. * 경고: 성경에는 사람들에게 발해야 할 많은 경고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간에 하나님의 모든 기별을 전해야 하는데, 경고를 해야 할 때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조심스럽고, 재치있고, 충만한 지혜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처럼 되려면, 자부심, 자아만족, 남보다 낫다는 태도를 주님 발 앞에 겸손히 내어 놓고, 우리가 가진 만큼의 큰 복음의 빛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불친절로 인하여 용서를 먼저 구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방법을 따름 * 사랑은 선택하게 함: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법은 사랑이다. 사랑은 선택이 없이는 작용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는 것은 신앙을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내어 사람들이 그 “신앙”의 축복들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전체가 사랑스러우신 분”으로 묘사함으로, 그분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므로, 또 복음의 아름다운 점들을 보여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나 그분의 복음을 드러내는 것 외에 더 좋은 법칙은 없다. * 사랑은 변하게 함: 20년 동안 남편을 인도하려고 노력했지만, 똑같은 낡은 방법으로는 할 수 없었던 어떤 부인이 C목사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어 사랑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다음은 부인의 전도로 마침내 교인이 된 그 남편의 간증이다. “목사님! 제 처가 그 집회에 참석한 다음, 저에게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여보, 저를 용서해 주셔요. 20년 동안 저는 당신에게 그릇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라고 하더니, 정말 변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었어요. 우리 집에서 문제되는 것 중에 하나가 개였는데, 저는 개를 좋아했고, 제 아내는 개를 싫어했지요. 제 아내는 저에게 묻지도 않고 개 집을 밖에다 두었습니다. 저는 마치 제 아내가 저를 개와 함께 밖으로 몰아내 버렸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항상 개가 불화의 씨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한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아, 글쎄, 제 아내가 뒷뜰에서 개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 남편은 그의 아내가 종교를 바꾼 것을 알았다. C목사님과 그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전에 바가지나 긁는 낡은 방법을 쓴 어리석었던” 날들을 후회하는 놀라운 편지를 받았고, 그 남편은 20년 만에 교인이 될 수 있었다. 진실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우리로 애완동물에게조차 친절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반하게 만들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친구와 이웃, 지역사회와 국가들 사이에 향기로운 우정을 갖도록 해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랑의 마음을 주신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전도의 방법을 바꿀 수 있다. 그 목사님은 자기 가족을 인도해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만일, 당신의 가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싶으면 가족들을 사랑하십시오. 남편이나 아내에게 더욱 더 잘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고 감사와 사랑을 많이 표현하십시오!” 그 일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이 새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3부-예수님께서 준비시키심
술주정뱅이에서 위대한 부흥사로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은 가능한 것이다. 2년 동안 2000명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자.
“5년전에 저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둘 다 하나님이나 종교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아주 큰 방직회사의 경영자였지요. 그러나 저의 술 마시는 습관은 날로 심해져 하나님도 희망도 없는 알콜 중독자로 전락해가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제가 술 먹는 습관을 고치라고 여기 저기로 전근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지요. 마침내 그들은 저를 더 이상 경영자 자리에 둘 수 없다고 알려주었어요. 그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회사에 사정을 했고, 회사는 내가 평사원이 되어 새파란 사원으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해주었지요. 비참해진 저는 정신을 차렸고, 제 아내와 의논하다가 교회를 다니기로 했습니다. 저는 침례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더이상 술독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칵테일과 술은 때때로 마셨으며, 담배도 피우고 영화관과 춤추는 곳에도 갔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교회에서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네 귀퉁이를 메고 들것 위에 실고 온 이야기를... 그 날 목사님은 말씀하기를, 그 네 친구들 중 아무도 그 중풍병자를 고칠 수 없었고, 그를 가르치거나, 노래를 하거나, 설교를 할 수 없었지만, 그를 예수님께 데려올 수는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순간, 저는 주님께 마음을 진정으로 바치는 경험을 했고 주님께로 영혼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 기도도, 노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들것의 모퉁이를 잡고 누군가를 주 예수님께 데려올 수는 있습니다!” “저는 철물점에 가서 큰 공을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그 공을 교회에 있는 한 젊은이에게 주면서 ‘자, 다음 주에 교회에 오고 싶지만 차가 없어서 못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름을 이 공에다가 적어주게. 그러면 내 차에 그를 태워 교회로 데려오도록 하지’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런 계획을 철물점 점원에게 설명했더니, 그는 공을 하나 더 주겠다고 해서, 저는 그 공들을 두 젊은이에게 주었습니다.
첫번째 주일에는 두명을 교회로 데려갔고, 오래지 않아 사람이 너무 많아 저는 두번 왔다 갔다 해야만 했지요. 저는 틈이 나는 대로 저를 변화시키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일을 시작으로 친구와 다른 교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여 저의 교회는 마침내 버스를 사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몇 주가 지나자 더 여러 대의 버스가 필요하게 되었고, 지금은 열대의 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음향기와 필림과 영사막을 사서 ‘내가 말을 못하면 이 기계들이 증거하게 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제 말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지요. 제가 처음으로 진짜 설교를 한 때는 감옥소에서 제 경험담을 들려 달라고 요청이 왔을 때입니다. 하나님께 들것을 들고 영혼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오겠다고 결심하던 날 아침에, 저는 ‘주님, 이제 저는 더 이상 영화관에 가고 춤추고 담배를 피우고 칵테일을 마시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마음 속에 주님과 약속을 했지요. 그때로부터 저는 한번도 불미스런 쾌락에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흥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 오는 일을 합니다. 저는 어디든지 그분과 함께 다닙니다!” 전도자가 된 비결 어떻게 술주정뱅이가 전도 부흥사로 변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함께 생각해 보자. 첫째, 그는 자기 자신을 불신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책임있는 지위에서 쫓겨난 패배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께로 나왔다. 셋째, 그는 자기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을 하나님의 힘과 연합했고, 자기의 무지함을 하나님의 지혜와, 자기의 무가치함을 그리스도의 공로와 합쳐서 그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하려고 앞으로 나갔다. 이 세 단계는 매우 단순하며, 누구나 하려고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다. 영혼구원에 있어서 첫번째 취해야 할 단계는 “자아불신”이라고 어떤 종교 저술가는 말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첫째로 배워야 할 일은 자아를 불신하는 교훈이다. 성공의 비결 = 겸손 자아 불신은 겸손이다. 그렇다! 성공적인 영혼구원자들이 가졌던 성공의 비결은 “겸손”이었다. 전도자들 중 가장 위대한 분이셨던, 인성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자아를 불신하며,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했고, 그 때 예수께서는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위하리라”(눅 5:10)고 약속하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고 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부르짖었고, 그의 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가 숯불을 댄 후 하나님께서 일꾼을 찾으시자, 자신의 무가치함으로 떨면서도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감동되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주님께서는 “가라”고 하셨다. 에레미야는 주의 말씀을 듣고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며 자신을 불신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입에 대시며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고 하셨다. 또한 침례 요한은 자아포기의 절정의 경험을 한 사람으로 자신은 주님의 신들메를 끄를 만한 자치도 없다고 고백했으며,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서도 “내가 괴수라”고 말했다. 효과적인 전도자가 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자부심이나 교만을 버려야 한다. 그런 사람은 십자가 앞에 쓰러지고 자신이 낮아지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은 자기 자신을 죽이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겐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교만과 자부심 이상으로 하나님께 더 가증한 것은 없고, 사람의 심령에 그 이상 위험한 것이 없다. 교만은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 윌리의 경험 윌리 브리닝거는 말더듬장이었다. 그는 말을 너무 심하게 더듬거려서 그가 하는 말을 알아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윌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했고, 또한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했다. 한번은 교회 소식란에 기독교 문서들을 팔며 전도하는 문서전도인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수양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윌리도 거기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 훈련이 끝나자, 딕커슨 목사님을 제외한 모든 지도자들은 “윌리는 하나님의 사업에 수치를 가져 올 것이라”며 윌리에게 문서를 팔 자격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딕커슨 목사님은 “우리는 공식 서한에 약속을 했고, 또 그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는 책을 팔며 전도할 때 필요한 말을 다 외웠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하여 문서전도인의 자격을 받게 되었다. 얼마 후, 윌리로부터 어마어마한 실적의 보고가 오자, 그 보고를 믿을 수 없는 본부에서 상관을 한 명 파견하여 윌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팔며 전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였다. 그 상관과 함께 문서전도를 나간 윌리는, 전도할 첫집을 방문하기 전에 길 옆의 나무 밑에 무릎을 꿇고 더듬 더듬 중얼거리며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첫 집을 방문한 윌리가 더듬거리며 겨우 책에 대한 설명을 마쳤을 때, 그 부인은 주저 없이 그 종교서적을 사기로 하고 주문서에 즐겁게 싸인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집, 또 그 다음 집을 방문할 때도 어김없이 윌리는 무릎을 꿇고 더듬거리는 말로 기도를 했고, 윌리가 방문하는 집집마다 사람들이 그 책을 사는 것이었다. 상관이 본부에 와서 윌리에 대해 보고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겸손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만큼 하나님께서 유용하게 사용하시는 전도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윌리가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우리는 자주 우리의 힘과 하나님의 힘을 연합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힘(강력한)을 연합시켜야 한다. 위대한 전도자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 어떤 문맹인의 전도 경험 서인도 제도에 있는 한 교회의 교인들이 그들 주위의 강퍅하고 편견있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평범한 전도자 말고 아주 특별하고 전문적인 전도자를 보내달라고 그들의 본부에 요청했다. 그런데 그 교회에는 한 문맹인이 있었다. 본부에서 그들이 원하는 전문 전도자를 찾고 있는 동안 이 문맹인은 그 교회 장로님을 찾아가서 말했다. “여기 제 성경이 있습니다. 제 성경에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교리들을 서로 다른 색으로 밑줄을 그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것은 그 장로님이 두 주일 동안이나 해야 하는 일거리였다. 그 장로님은 그 무식한 사람이 그만 가주기를 원했지만 그 사람은 계속 졸라대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 문맹인은 또 다른 교인에게 가서 한 전도용 노래책에 있는 수많은 찬송들의 제목들과 장수를 배웠다. 마침내 그는 손에는 줄쳐진 성경을, 팔에는 여러 권의 노래책을 끼고 도시로 나갔다. 그는 거리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노래 부를 때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그의 용모와 노래에 반사되어 나오는 것 같았고, 그의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노래 책을 나누어 주고, “우리는 지금 제 1장, ‘예수를 더욱 배우고’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고 미소를 지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청중들과 함께 즐거운 노래 시간을 가진 후에 그는 옆에 서 있는 낯선 신사에게 “이 성경을 가지고 창세기부터 빨간 줄로 쳐진 것은 모두 읽어 주시겠어요?” 라고 요청했고, 그 신사가 그 성경절을 읽자, 비록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문맹인이었지만 그 성경절의 뜻을 설명했다. 그 다음 밑줄 쳐진 성경절도, 그 다음의 것도 그는 훌륭하게 설명을 했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 집회를 가지게 되어다. 그 집회가 마친 후에 그는 다음 집회시간을 말해 주었고, 이런 방법으로 그는 일련의 집회를 하게 되어, 그 교회가 전문적인 전도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 문맹인이 교인 수를 배가시켰다. 그는 교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면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성공의 공식 첫번째 공식;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자아를 부인하게 된다. 두번째 공식; 우리의 굴복한 생애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도록 한다. 세번째 공식; 우리의 연약함과 그분의 강함(힘)이, 우리의 무지와 그분의 지혜가 서로 합침으로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한다. 우리가 강하다고 느낀다면 우리의 유용성은 끝이 나고, 우리가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봉사는 엉터리가 되고, 또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의롭게 되면 즉시로 하나님과의 동역이 깨어진다. 오직 인간이 연약하게 될 때에야 하나님은 인간을 강하게 하신다. 왜? 그 이유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고전 1:29)다.
4부-논쟁하지 말고 비난하지 말라!
흥미있는 경험 한번은 훌륭한 전도 목사이신 C목사님께서 전도 집회를 하고 있는데, 한 불신자가 참석했다.
매 집회를 시작하기 7분 전에 C목사님은 늘 질의 응답시간을 가지곤 했는데, 그날 저녁 질의 응답시간에 사회자가 어떤 사람이 타이프로 4페이지에 걸쳐 쓴 28개의 질문들을 목사님에게 건넸다. 그것을 쭉 훑어본 목사님은 그 질문이 불신자가 쓴 것임을 알 수 있었고, 그 사람이 논쟁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질문자는, “제 질문들을 청중들에게 크게 읽어주시고 답변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라고 덧붙이고 있었다. 그는 목사님이 자기의 설교를 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C목사님은 그 사람과 논쟁을 하여 그 불신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바로 그 때, “너처럼 행동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렴”하는 음성이 목사님의 마음 속에 들려왔다. 그날 저녁 질의 응답시간 내내 목사님은 그 소리를 생각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라”는 소리를. 여러 짧은 질문들에 대답을 하느라고 할애된 7분이 거의 지나려고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께서 목사님의 마음에 계속 역사하셨고, C목사님은 예수님의 도움으로 다음과 같은 아주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었다. “친구 여러분들이시여, 저는 여기에 4페이지로 된 놀라운 질문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가장 지성적인 질문들입니다. 제가 확신하기는 이 질문들이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이 질문들을 성의있게 쓰신 분께 현재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짧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들을 고려해 볼 때 한 시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저는 이렇게 중요한 질문들을 이 짧은 시간에 답변하려고 시도함으로 이 질문을 하신 분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몇날 밤을 지난 후 목사님은 바로 질문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목사님! 지난번 저녁 때에 목사님께서 제 질문에 그렇게 답변하신 것이 제 마음을 녹여 버렸습니다. 저는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저는 어머니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라난 후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서 떠나 방황하게 되었고, 불신자들의 저서를 읽고 성경에서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인들은 위선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지난번 밤에 제가 그 교회에 소동을 일으키려는 생각으로 갔으나, 제 질문에 대한 목사님의 태도와 답변으로 제 마음이 녹아 버렸고, 그 후 집에 가서 너무나 오랫만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제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저는 목사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영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고, 목사님 같은 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났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편지를 읽은 목사님은 팔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예수님의 정신대신 논쟁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영께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보여주심 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혼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은 그분의 생애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시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셨다. 전도하고 가르치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눈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론은 불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훌륭한 전도자가 되기 원한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품성을 지닌 살아있는 드라마가 되어야 한다.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고, 고상한 품위가 외모에 풍기는 사람이었다. 부인은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믿었으나 그는 부인과 같이 교회에 나온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 사람을 보고 신기하여 어떤 사람이 물어보았다. “무엇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든 동기였습니까? 당신 부인이 교리를 잘 가르쳐 주던가요? 아니면, 좋은 설교를 많이 해주던가요? 그것도 아니면, 부인이 예수를 믿으라고 잔소리를 많이 하던가요? 혹시 교회에 나가자고 당신을 성가시게 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나요? 당신 부인이 어떻게 해서 당신을 인도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이 좋은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서요.” 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 아내는 저에게 늘 잘 해주었어요.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이지요. 한번도 날카로운 잔소리나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러날 밤동안 저는 자다가 깨곤 했습니다. 저는 한마디도 듣지는 못했지만 제 아내가 침대 옆에서 숨을 죽이고 흐느끼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어느 날 밤, 저는 호기심에 귀를 기울이고 아내가 무엇을하나 들었지요. 저는 제 아내가 저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녀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흐느끼며 저를 위하여 호소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제 아내가 수많은 기도를 드려 온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저로 하여금 예수님께 마음을 바치게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할 때 늘 성령님께서 감명을 주시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성령님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이다. 마치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를 드러낸 것처럼... 두 극단 미국 동부 어떤 시골 마을에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 종종 어려운 일이 생기곤 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눈이 많이 쌓여 길을 분간할 수가 없어 자주 길을 잃고 도랑에 빠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높은 말뚝을 길과 양쪽 도랑 사이에 쭉 박아놓아 아무리 눈이 높게 쌓여도 길의 윤곽을 드러나게 만들어 놓았다. 그 후로 눈이 많이 왔을 때 길의 흔적은 알 수 없어도 박아놓은 말뚝 때문에 길의 중앙으로 갈 수 있었으며, 도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하실 때에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말뚝을 박아 놓으셨다. 그 길의 양쪽에는 큰 원칙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첫번째 말뚝으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 8:11)이며, 그 말뚝은 우리로 하여금 비난의 도랑에 빠지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또 다른 극단의 도랑으로 빠지지 않도록 두번째 말뚝을 박아 놓으셨는데, 그것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는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높이지 (죄에 동의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죄인을 비난(정죄)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며, 또한 죄를 높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모두 다 극으로 치우친 위치이며, 그 둘 사이가 길이며, 그 길이 곧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3:16은 성경에 있는 아주 위대한 주제 성경절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즉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는 말씀이 뒤따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방법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인은 영적으로 감옥에 갇힌 죄수이다. 감옥의 창살 속에 갇힌 죄수가 원하는 것은 출옥하는 것이다. 조롱이나 비난은 그를 감옥에서 나가게 할 수 없다. 그 죄수에게 필요한 것은 열쇠이다. 우리는 모두 죄의 감옥에 갇혀있는 영적인 죄인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감옥의 문을 열고 사로잡힌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통회하는 자를 비난하지 않으신다. 어떤 영감적인 종교서적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비록 그것이 정당한 책망일지라도 잘못을 책하는 대신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를 바라신다”(복음 사역자, 368).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소문내려고 동네를 돌아다닐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의 부정직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죄인을 끄집어 낼 권위를 주지 않으시고, “전체가 사랑스러우신” 분을 드러내도록 하신다. 만일 우리가 악한 사람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한다면, 그런 식으로는 우리는 평생 한명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사람들은 “응, 저 여자는 남편을 다섯씩이나 가지고 있어”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전에는 네가 가졌었다”라고 하셨다.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시작할 곳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도록 하시고 소망을 주시려고 노력 하셨다. 그분은 정죄하시지 않으셨고, 또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옹호하시지도 않으셨다. C목사님의 간증 전도 부흥사이신 C목사님이 한 지역교회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교회에 부속된 학교의 재무처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사님! 빨리 좀 오셔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지금 아주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목사님이 서둘러 학교로 가서 2층에 있는 재무처장의 사무실로 들어 갔더니 한 학부형 여자가 그에게 벼라별 소리를 다하며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잠시 그 소리를 들은 후, 그 여자의 태도를 봐서 그 여자가 잘못이라고 생각한 목사님은 의분이 솟아올라 재무처장에게 말하기를, “제가 당신이라면 저는 이런 여자와는 이 방에 같이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비난의 소리를 그 여자는 들었고, 그 재무처장은 목사님이 한 권면 때문에 기뻐했다. 목사님은 재무처장과 함께 서둘러 그 방을 나와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한 반쯤 내려갔을 때, 주님께서 목사님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얘야, 너는 그 여자를 비난했어.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야.” 목사님은 즉시 재무처장을 바라보며, “형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된 권면을 드린 것 같군요! 저는 그 여자분에게 다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 아니요. 목사님은 아주 좋은 권면을 주셨습니다. 돌아가고 싶으면 목사님이나 가셔요.” 목사님은 “아, 내가 그 방에서 한마디 말만 하지않았더라면...” 뼈아픈 후회를 하며 그 여자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계단은 너무나 밟기 어려운 긴 계단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목사님은 층계 끝까지 올라갔고, 그 방에 다시 들어간 목사님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표정은 정말 참기 힘든 것이었다. 목사님은 기도하며 용기를 내어, “자매여, 제가 한 말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그래요? 얼마나 잘못했는데요?” 하며 쏘아보았다. 목사님은 마음 속으로 “주님, 저를 도우소서, 잘 견뎌서 이 문제를 바로 잡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다시 “자매여, 대단히 미안합니다. 저를 좀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목사님, 정말이에요? 저-엉-말요?” 하며 계속 목사님을 비웃는 것이었다. 얼마동안이나 그 여자가 비웃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은 상당히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목사님은 진심으로 “자매여, 저는 자매의 마음 속에 있는 부담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처리하실 수 있는 부담을 해결해 드리지 못하고 당신을 비난했군요! 미안합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도왔어야 할텐데... 저는 지금이라도 당신을 위해 당신과 함께 기도를 드리려고 올라왔습니다.” 그 여자는 새로운 눈빛으로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럽시다. 당신이 진정 그렇다고 한다면” 하고 말했다. 목사님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 때 성령의 포근한 임재를 느꼈다. 목사님의 정죄하는 정신이 남을 도우려는 정신으로 바뀌었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진심으로 그 여자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자, 그 여자가 기도를 했는데, 그녀는 마음을 찢고 울며, “주님! 저는 이 목사님의 기도를 듣는 중에 이 모든 일이 저 때문에 생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제 잘못입니다!” 그 여자는 진심으로 회개하며 자기의 마음을 예수님께 재헌신하는 경험을 그 자리에서 가졌다. 당신은 혹시 적그리스도? 사단과의 싸움과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그 바참함 가운데서 건질 수 있는 것은 비난이나 정죄가 아니다. 우리는 형제에게 고통을 더 심하게 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옳지 않게 행하는 데도 “형제여, 그대가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려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면 거기에는 기도와 그 영혼을 살리고 싶은 사랑과 지혜가 꼭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것을 보면, 강한 적용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형제의 동기를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우리가 다른 형제를 판단하거나 비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그 형제와 같은 행위로 죄는 짓지 않았을지라도, 만일 우리가 그 죄를 지을 만한 환경과 조건에 처하게 되었다면 혹시 똑같은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같은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은 서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만이 모든 사람의 동기를 아시므로... 또 성경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마 5:22)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다 아들에게 주셨다. “심판을 다...”라는 뜻은 80%가 아니고, 90%도 아니고, 100% 주셨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4절에는, 심판석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밀어내고 예수님 대신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고, 그 대적하는 자가 곧 적그리스도라고 나와 있다. 정말 두려운 일 아닌가? 하찮게 생각한 판단과 비난이 예수님의 심판석을 넘보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비난대신 격려하는 예수님의 전도의 정신을 배우자!
5부-예수님을 증거하고 소망을 불러 일으키라!
단지 증인이 되는 것 “저는 짐이 저를 떠난다고 해서 그를 나무라지 않아요” C목사님과 영혼구원에 대한 공부를 마친 도로띠가 슬프게 말했다. 도로띠는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아주 성실한 아내요, 헌신적이고 사랑스러운 엄마였다.
그러나 도로띠는 많은 진지하고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을 범했다. 그녀는 남편 짐에게 단지 예수님을 증거하는 대신에 짐의 나쁜 잘못과 나쁜 습관들을 비난했다. 그녀의 비난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부드러웠을지 모르지만 남편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수는 없었다. 도로띠는 가끔 짐을 성가시게 했고, 그에게 설교했고, 타일렀으며, 그를 비판했다. 그런 방법으로는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사 43:10,12)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천국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며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마 24:14). 영적인 법정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업무가 있는데, 그것은 검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가 되어 변호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도로띠는 영혼구원에 있어서 증인이 되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성가시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 세상에 전하라고 하신 복음은 단지 증인이 되는 것을 통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 비난이나, 성가시게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검사나 피고인이 변호사가 종종 상대편을 대항할 때 쓰는 방법이다. 심판관은 매우 날카로울 수가 있고, 배심원들은 가혹한 처벌을 내릴 수 있지만, 증인은 단지 그가 본 것과 그가 아는 것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이다. 종교는 우울한 노새를 만들지 않는다 어떤 때에 우리는 종교라는 것이 청교도식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울과 굳은 표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한숨과 눈물과 고통과 신음과 고개를 푹 떨구고 다니면서 하는 사람은 복된 복음의 즐거운 소식을 알리는 증인이 아니다. 차라리 그는 가짜 증인이라고 해야 맞다. 종교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소위 “종교를 갖게 된” 한 소년이 집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의자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 제가 종교를 갖게 되었어요!” 라고 소년이 기뻐서 소리치자, 이미 예수를 믿고 있던 사고방식이 다른 할아버지는 “네가 종교를 갖게 되었으면 정신차리고 조용히 앉아 있으렴” 하고 말했다. 그래서 소년은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애썼지만 아이여서 가만히 있는 것이 어려웠다. 그 때 고양이와 개가 나타나자 무릎위에 놓고 쓰다듬어주며 놀다가 둘의 꼬리를 묶어 버렸다. 야단법석을 치는 고양이와 개, 그리고 소년을 보고 할아버지는 소리를 질렀다. “무엇하는 거냐! 여기서 썩 물러갓!” 소년은 마굿간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서 한쪽 귀는 앞으로, 또 다른 한쪽 귀는 뒤로 쳐져있고, 한쪽 눈은 위로, 한쪽 눈은 아래로 향하고, 입을 삐죽히 내밀고 있는 노새를 보았다. 소년은 “아, 저기 한 그리스도인이 있다!” 고 소리쳤다. 이것이 우리가 더 잘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사람을 너무 엄숙하게 만들어서 하늘 아버지 집까지 가는 동안 늘 한숨만 지으며 길을 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가족들과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신앙생애가 너무 기쁘고 즐거운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증거해야 하는 아주 멋지고도 적극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면밀히 관찰한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신앙을 가지고 싶어 하도록... 만일 종교가 별 볼일 없는 식의 소극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단지 율법주의자나 소화불량자, 혹은 조금 슬프고 우울한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일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애가 지속적인 신실함, 친절, 온유, 순결, 순종, 세련됨, 기쁨으로 특징지워질 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잘 증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비난, 비판, 이기심 등의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거짓 증인들이다.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 “우리들의 남편을 인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C목사님의 전도 부흥회에 참석한 쌍둥이 자매가 물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동생이 먼저 진리를 받아들인 후 언니를 인도했는데, 동생은 형부를 비난하고 있어서 서로 말도 하지 않는 사이였고, 동생의 남편은 종교에 편견이 심해서 부흥회에 나가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당신들 둘 다 집에 가셔서 당신들이 남편들을 오로지 사랑해 보셔요. 절대로 논쟁하지 말며, 열띤 토론을 하려고 하면 대꾸조차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다. “제가 형부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셔요?” 동생의 말에 목사님은 “아마 그렇게 하도록 성령께서 당신을 감동시키실 거예요. 가능하다면 다음 집회에 와서 당신이 남편에게 특별히 잘해 드린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고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이틀 후 저녁 집회때였다. 그들 둘은 아주 행복한 모습으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집회가 끝난 후에 목사님에게 왔고, 동생이 흥분된 어조로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집에 가서 목사님이 시키신 대로 비난이나 판단을 하지 않고, 논쟁을 피하고 무조건 사랑으로 대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종교를 싫어하고 편견을 가진 남편이요, 글쎄 저에게 돈을 두둑히 주면서 ‘이돈으로 차에 기름을 넣고 그 집회에 다시 가서 당신이 그저께 배운 것을 좀 더 배워 오시요’라고 하지 않겠어요?” 이제 우리는 재판관이나 검사가 되는 것을 멈추고, 다만 놀라운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들이 되자! 그리고 종교가 우리를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세련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도록 하자!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구원하게 될런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는 소망이 필요함 영국 런던의 태이트 화랑에는 왓츠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그 그림에는 한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이 가려진 채로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류우트라고 하는 현악기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 줄들 중 하나만 빼고는 전부 다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표정은 진지하고 강렬하였고, 하나 밖에 없는 줄을 팽팽하게 하여 거기에 활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림 바로 밑에는 “소망”이라는 낱말이 적혀있었다.
오늘 날 세계는 불화가 있는 곳에 하모니(조화)를 이루려고 모든 노력을 다 해왔다. 전쟁 대신에 평화를, 슬픔이 있는 곳에 행복을 갈구해 왔으나, 그 갈구는 채워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실망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흑암 가운데 갇혀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다.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기 원하는 사람이 꼭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면, 영혼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4).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롬 15:4). 모든 성경공부나, 모든 설교나, 영혼방문, 전도의 목적은 투쟁하는 영혼에게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 소망을 불어넣은 이야기 1 루씨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C목사님은 그녀를 방문하여 불신자와 결혼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그녀가 불신자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주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혼구원의 효과적인 원칙 중의 하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은 루씨를 나무라기보다는 격려하며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으므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성경절을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서 루씨에게 말을 시작했다. 서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5마일 떨어진 곳에 사는 그녀의 언니 제니가 놀러와서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도 불신자와 결혼한지 5년이 되고 있었다. “목사님! 제 동생이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제가 그렇게 말려도 말을 안 들어요!” 언니인 제니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며 슬프게 말했다. “저는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불신자와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동생에게 누차 얘기해도 듣지를 않아요! 5년 전에 어떤 교인이 제게 와서 말하기를, ‘불신자와 결혼하면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이 정말인 것처럼 저의 결혼생활은 별로이고 저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곳에 보내신 것 같네요”라고 목사님이 말하자, 제니는 희망을 얻는 듯 했으나, 곧 “제겐 소망이 없어요. 저는 많은 세월동안 소망 없이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어요!”라고 했다. “그래요? 제니씨, 당신 마음 속에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드나요?” “그럼요!” “만일 당신이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직도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서 때때로 당신 마음 속에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뛸듯이 기뻐하면서 “그동안 5년 동안이나 아무도 제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모두들 질책의 눈초리를 던질 뿐이었지요! 오늘 저는 용기를 얻었어요.” 소망을 주는 말씀들을 나누는 동안 성령의 역사로 두 자매는 하나님께 마음을 재 헌신하는 기회를 가졌고,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되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책보다는 소망을 주는 한마디의 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 소망을 불어넣은 이야기 2
C목사님이 부임해 간 새 교회에는 자기 부인과 아이들을 다 버리고 집을 나간 남자가 있었다. 그는 부인과 싸운 뒤 집을 나가서 가까운 도시에서 아파트를 세로 얻어 살고 있었는데, 어떤 날, 교회 장로 중에 하나가 목사님을 찾아와, “목사님, 그 블랭크씨 있지요, 그 사람에게 즉시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장로는 매우 강경하게 말했으므로 마치 그를 혼내주거나 제적해버리자는 이야기 같았다.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 아십니까? 제가 전화해서 약속을 한 후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보죠” 라고 목사님이 말하자, 그 장로는 “맙소사! 목사님이 전화하시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만나주지도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을 만나려면 갑자기 그 사람의 집으로 급습을 해야 되요” 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성경의 약속을 의지하며 기도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요일 5:16). 기도가 마친 후, 목사님은 전화를 걸었다. “블랭크씨, 저는 새로 온 목사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는데, 당신이 들으시면 아주 좋아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단 둘이 해 진 다음에 차 안에서 만나고 싶은데요” 하자, “그럽시다”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주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그 잃은 양에게 “소망”으로 감동을 주셔서 교회 장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몇초 만에 해결된 것이다. 약속시간이 되었을 때, 그와 목사님은 차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목사님은 계속 기도를 하며 그 형제에게 소망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형제여, 전화에서 말씀드린 대로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생애의 죄를 승리하고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목사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표현, 즉 “죄를 승리한다”는 표현이 그를 압도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 사람은 30~40분 중 몇 번만 목사님을 쳐다 본 후 고개를 돌리고 계속 앉아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목사님이 나를 친구로 삼으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나를 괴롭히려고 정보를 수집하려고 왔는가?” 목사님은 하나님과 협력하여 그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그 영혼을 위해 계속 기도하며 자신이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려고 왔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하며 말을 했다. 목사님은 마음 속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성경절을 계속 외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목사님은 그 사람과 비슷한 경험을 했으나 승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었는지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하며 그 사람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이 목사가 다른 교인들과 똑같이 나의 자백을 받아낸 후에 나를 교회에서 제적시키려고 할꺼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시간만 흐르자, 사단이 목사님을 실망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감사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목사님은 20분, 30분, 40분 동안 확신을 가지고, 희망에 넘치는 말로, 친절하게 계속 이야기 하였다. 목사님은 자기가 그의 친구라는 것을 확신시키느라고 40분이란 긴 시간 동안 계속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 목사가 자신의 친구가 되어주려고 왔는지, 아니면 어떤 비밀을 캐어낸 뒤 자신을 괴롭히려고 정보를 수집하러 왔는지 의심쩍어 하며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던 블랭크씨는 약 40분이 지난 후에 목사님이 정말로 자기를 도우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그는 얼굴을 자기 손에다 파묻고 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목사님! 저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을 제가 압니다” 라며 울먹였다. 사실 블랭크씨가 엄청난 마음의 고통으로 투쟁하고 있을 때 그를 격려해주는 교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를 조롱하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너는 소망이 없어. 너는 위선자야” 이 말은 사단이 오랫동안 사람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목사님은 슬픔에 북받쳐 우는 블랭크씨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어루만지며 소망에 찬 성경절들을 읽어 주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블랭크 형제여, 형제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형제의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당신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과거는 과거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너희 죄가 진홍같을 지라도 양털같으리라’(사 1:18) ,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 하리라’( 요 6:37),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8).” 성경절을 읽을 때에 목사님의 마음이 사랑으로 따뜻해 짐을 느꼈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다. 목사님은 열렬하게 “형제여, 당신은 지금 거듭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금 당신에게 승리를 주고 계십니다. 당신은 지금 그분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지금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 57:15)고 덧붙였다. 그 때 눈물을 흘리던 블랭크씨가 목사님을 바라보며 외쳤다. “목사님! 저,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실망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다. 흑암 가운데 앉아 낙망하여 앉아 있는 이들에게 사단은 속삭이고 있다. “너는 너무 늦었어. 별 수 없이 너는 멸망이야!” 그러나 주님께서는 실망하고 낙담한 영혼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으신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는 예수님의 인내와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위대한 전도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6부-예수님의 사랑과 믿음을 본받자!
1. 예수님의 믿음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사랑과 믿음을 갖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늘 그분의 제자들에게 믿음을 표시하시고 그들을 신뢰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믿음을 표시하셨던 제자들 중 한 명은 “마귀”(요 6:37)였고, 또 한 명은 의심장이였다 (요 20:24,25). 그리고 예수께서 시련을 당하실 때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부인했다. 거기다가 또 다른 둘은 “우뢰의 아들들”(막 3:17)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늘 누가 더 크냐고 싸웠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같은 무리들에게 어떤 종류의 확신을 표현하셨는가? 그들 중 한 명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다음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얼마나 놀라운 믿음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표현하셨는가! 믿음을 표현하는 길 -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만일 죄 없으신 예수께서 그런 허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확신을 가지셨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그런 확신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전도할 때 믿음을 표현하자. 목회를 하거나 전도를 하여 어떤 영혼을 결심시킬 때, 그들이 결정을 내리도록 여백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방법은 그들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방문하여 헌신을 호소할 때나 성경을 공부할 때,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보다는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시지요?”가 좋은 질문이다. * 지혜롭지 못한 표현 C목사님께 잘 차려입은 부인이 두 남자를 소개했다. “목사님, 제 남편과 아들입니다.” 목사님은 아주 호감이 가는 그 멋진 신사분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부인이 다시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좀체로 저와 함께 이런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으려고 해요, 목사님”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아마 그 집회는 그들이 첫번째 참석한 집회였고, 틀림없이 마지막 집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부인의 말 속에는 지혜롭지 않은 의심의 표현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 가련한 롸이트씨 “아아, 참 아름다운 시가의 전경이군요!” C목사님이 롸이트씨 집을 방문하여 모두 멋진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에 아주 양심적인 그의 부인이 목사님을 돌아다 보며,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제 남편을 우리 교회에 데리고 갈 수 있을지 좀 말씀해 주셔요. 이 이는 바른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아름다운 시가 전경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 부인은 다시 묻기를, “목사님, 목사님이 제 입장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 남편은 좋은 남편이어요. 그러나 그이는 아주 고집장이예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 부인이 자기의 믿지 않는 남편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를 정말 원했다면 그녀의 남편에 대하여 신뢰심을 표현했어야 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여러 사람 앞에서도, 비단 혼자 있을 때에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절대로 의심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죄”(롬 14:23)이기 때문이다. * 믿음을 표현 하는 길 - 믿음의 기도 ABC C목사님 집회에서 어떤 골초 청년이 나와 담배를 끊기 원해 앞으로 나왔다. 목사님은 “당신이 만일 담배를 끊는다면...”이라고 표현 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승리하는 비결인 ABC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 에이(A)는 ask로서 성경의 약속을 따라 구하는 것입니다(마 7:7). 비이(B)는 believe로 주님께 당신이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막 11:22~23). 씨이(C)는 claim으로 당신이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는 것입니다(롬 10:10, 고전 15:57). 이제 당신은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그것을 전부 믿었고, 그날 밤 이후로는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 믿음의 보상 문제아 학생들 때문에 혼이 나고 있는 어떤 여선생님이 너무 골치가 아파 교직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그녀가 그런 결정을 하려고 하는 그 날, 점심을 먹으려고 집으로 향해 걸어가는데, 말썽꾸러기 학생 중에 가장 골칫덩어리인 아이와 같이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 만일 선생님이 저였다면 선생님이 자라서 무엇이 되셨을 것 같애요?” 전혀 뜻밖의 생각을 들은 선생님은 놀랐지만 태연하게, “너는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했었니?” “네에, 선생님, 만일 선생님이 제가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라고 소년이 말했다.
이 여선생님은 다시 놀란 것을 감추며, “그래? 그것 참 좋은 생각인데!” “제가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셔요?” “그으럼, 그렇게 믿어” “그럼 됐어요. 저는 의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어요.” 그 대화 이후 그 학생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변했고, 선생님도 더 열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훗날 그 학생이 의대를 졸업하는 졸업식장 맨 앞에 앉아 있었다. 의심의 말 대신 나타낸 믿음의 대답은 훌륭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믿음은 아주 큰 배당금을 받게 한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믿음은 죄인에게 소망을 건설하는 믿음이다. 영혼을 위하여 애정어린 믿음이 행사된 곳 어디에서나 따르는 결과들은 참으로 놀라울 것이다. 2. 예수님의 사랑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원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렘 31:3)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뜻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 6:36)는 뜻이다. 영혼을 인도하기 원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 브링크 부인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는 브링크 부인에게 아주 큰 부담을 주는 딸이 있었다. 그 딸은 브링크 부인이 비난하고, 위협하고, 엄격하게 해도 엄마의 소원이나 표준에는 눈도 깜빡 안했다. C목사님과 영혼구원에 대하여 공부한 그녀는 지시사항을 실천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얘야, 내가 지금까지 너를 대해 오던 모든 방법들을 좀 용서해 줄래?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는 꾸짖거나 비난하지 않을 꺼야!” 그 겸손한 엄마의 사랑의 태도는 딸을 180도로 변화시켰다. * “겸손” 부인 “너보다 거룩하다” 자매가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열성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때문에 교회에서 물러간 한 청년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 형제가 자기에게 무슨 감정이 있는 것을 알았다. 부흥회에서 새롭게 다시 거듭난 그 자매는 그 형제를 예수께로 이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절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형제에게 전화를 걸어 겸손하게 사과를 하였다. “너보다 거룩하다” 자매는 “겸손”부인으로 변하였고, 그 다음 주일 그 형제는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많은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원한다. 그러나 전도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정말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었는가, 겸손한 사랑으로 옷입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고, 친절하며, 예의바르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며, 동정심 깊은 사람이 된다면 지금 단지 한 명이 있는 곳에 진리로 개심하는 영혼이 백명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드러워진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영혼을 향하여 불타는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 친절과 동정과 예의있는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고 온유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과 태도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이며, 영혼들을 대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증거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아름다운 향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