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1~2)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얼마나 기다리다 얻은 아들인가?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이미 현실처럼 느껴지는 약속의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어느덧 의젓한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씀이 떨어졌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마치 아브라함의 심장을 후벼 파기라도 하듯이 그에게 이삭이 얼마나 소중한 아들인지를 확인해 가면서 하나님은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주셨다. 이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는 분이신가? 그것도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는 그런 신이 신가?
우선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경 종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식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통렬하게 비판한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은 물론이요 심지어 이스라엘에 거하는 타국인일지라도 자식을 신에게 바치면 "반드시 죽이고 돌로 칠 것"(레 202)이라고 명령하였다(레 18:21; 신 12:31; 18:10 참조). 그런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의 세계에 그런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있었다(왕상 16:34; 왕하 3:27: 미 6:7). 이에 선한 왕 요시야는 즉위와 동시에 인신제물을 드리는 산당의 석상들을 깨어 버렸다(왕하 23:10~14). 선지자 예레미야도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이 “명하거나 말하거나뜻한 바가 아니”(렘 19:5)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문제는 이런 분명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기사는 서두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 일을 명하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면서 시작된다. 그러니 이 시험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건이다.
그 전에 시험과 관련하여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두 구절이 있다. 첫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13)라는 주기도문 구절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을 시험하시고 예수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으니 혼란스럽다고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는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란 구절은 이어지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설명해 준다. 한마디로 '악에 빠지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야고보서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악에 빠지게 하는 시험을 주지 않으시며 그런 시험은 다만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약 1:14)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욕심 때문에 당한 시험을 하나님이 주신 시험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런 시험은 결코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시험은 그런 시험과 다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연단하기 위해 시험을 주신다. 왜냐하면 “연단은 소망을 이루”(롬 5:4)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은 피험자가 강하게 되도록 주어지지 망하게 되도록 주어지는 게 아니다. 예수께서도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히 5:8)우셨고,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히 4:15) 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험'과 마귀의 '시험'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시험에는 죄악으로 이끄는 유혹의 요소가 전혀 없다. 아브라함에게 임한시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유혹하거나 좌절시켜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시험은 그를 더 단단하고 굳게 서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는가? 그건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믿음의 길을 떠났지만 그는 가나안에 가뭄이 임하자 곧바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창 12장), 롯을 구출한 다음 불안한 마음에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겠다고 하였다(창 15:1~3). 아내의 재촉에 동의하여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다(창 16장),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웃다가 책망을 들었다(창 17장). 그랄 왕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창 20장).
그가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은 그의 믿음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것이었다. 본문이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창 21:1~2).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삭을 얻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2장의 사건이다. 화잇도 이 사건이 주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충성된 자들의 조상이 되도록 아브라함을 부르셨으므로 그의 생에는 후대 사람들에게 신앙의 모본이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그는 사라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감춤으로, 또 하갈과 결혼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나타내었다. 그로 가장 높은 표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사람이 견디도록 부름을 받은 시험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다른 시험을 당하게 하셨다."(부조, 146).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그를 통해 자손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충돌된다. 약속과 충돌되는 명령, 아브라함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고민하던 그가 해답을 얻는다. '그렇구나! 번제로 드리면 다시 살리시겠구나!'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7~19).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한다(창 22:9). 이후 '결박'이란 히브리어 아케다는 이 이야기를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아브라함에게는 별명이 있다. '하나님의 벗'(대하 20:7; 사 41:8)이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별명이 언제 그에게 주어졌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 설명이 야고보서에 나온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1~23). 왜 하나님은 이 아케다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불렀을까? 그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그의 마음과 독생자를 보낼 하나님의 마음이 서로 통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야말로 당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친구가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아브라함은 아케다 경험을 통해 '십자가를 만났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7)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시험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