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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 로마서 9:30 ~10:13 -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구원을 받으리라 - 유기성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9장 30절부터 10장 13절 말씀입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잘 믿으십시다. 저희 교회 부목사님 한 분이 서울에 교회 담임 목사님 부임하셨을 때, 그때 축사 말씀을 하나님이 저에게 마음을 주시기를, 예수를 잘 믿으시라는 마음을 주셨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똑같은 마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잘 믿으시자고 우리는 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잘 믿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라고 하면 흔히들 생각하기를 열심히 믿으라고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바른 복음에 의하여 믿으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열심히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복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는 것으로 따지면 유대인들을 따라갈 민족이 없을 겁니다.
유대민족은 정말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바른 복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2절 말씀에 보면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여기 그들은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열심히만 믿지 바른 복음을 알지 못하면 유대인처럼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어떤 의로움을 가지고 나아와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의로움에 대하여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겨우 그저 양심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의의 기준은 양심입니다. 그 양심조차도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하고 이기심이나 욕심으로 그들은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죄가 되는 줄 몰랐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누구든지 그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면 그러면 구원받는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완전히 반대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잘 모르던 이방인들은 그 십자가의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들은 의롭다 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율법을 고집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반석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흔들림이 없는 확실한 구원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이 구원의 반석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리는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이 놀라운 복음을 그들이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일을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다 율법주의입니다. 계명을 지켜서 그렇게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계명을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모든 것이 다 사실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고 말을 하는 거죠.
왜 예수 믿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 것이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금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지 여전히 율법주의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보면 됩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면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해 주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형적인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내가 그런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으실 것이고 좀 혼란 스러우실 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그게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뭐가 잘못된 거죠. 아들과 종을 한번 놓고 봅시다.
가정일을 집안일을 하는데 종이 열심히 하겠어요? 아들이 열심히 하겠어요? 종이 열심히 하죠.
종은 정말 열심히 집안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종이 열심히 집안일을 하는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인이 자기가 열심히 하면 자기에게 잘해줄 것이고, 자기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자기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내가 열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거나 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종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죠.
여러분은 바른 복음을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들도 집안일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서워서 두려움 때문에 또는 주인의 어떤 상급이나 또는 벌을 생각해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 일이니까 집안일이 자기 일이니까 그래서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자기가 열심히 하면 아버지가 상을 주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망나니 같은 자녀도 있는 거죠. 그래도 여전히 자녀지 종하고 아들하고는 대화하는 게 완전히 다르죠.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게 되면 정말 예수님을 믿었는지 아닌지 내 마음속에 증거가 있는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 되었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믿음은 신앙생활을 하되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겁니다.
절대로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리려고 오늘 교회에 오셨는데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는 분이 있으실 겁니다.
그분은 예배 끝날 때 가장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끝났다.
이제 그런 분들은 안타깝지만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정말 믿으면 예배 그 자체가 가장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일은 쉽지 않지만 예배드리는 힘으로 삽니다.
이건 참 놀라운 일이잖아요. 그것이 바로 기쁨과 사랑인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내가 믿는 거죠.
이제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기쁨이고 감사고 그리고 그 속에 사랑이 넘칩니다.
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요구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하는 그런 노력을 하는 짐을 다 벗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기쁨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6절 7절에 보면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늘에 올라가거나 지옥에 내려가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
예수를 믿게 되면 그 눈이 뜨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8절 말씀을 보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가까이 있다.
내 입에 있고 내 마음에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은 저 멀리 오늘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시고 그리고 내 마음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구주이신 것을 고백하면,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마음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복음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놀라운 방법입니다.
9절 10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릅니다.
여기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말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오해하지 말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죽고 난 다음에 그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오해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이제 나중에 천국에 갈 거야.
그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을 진짜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는 지금 바로 천국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오른편 왼편에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강도가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 주여 오늘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는 정말 평생 좋은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
얼마나 나쁜 사람이면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마지막 죽는 순간에 예수님에게 구원해 달라고 요청한 것 때문에 그는 그냥 바로 천국에 갔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저렇게 참 놀라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강도만 예수 믿고 바로 천국에 간 게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 믿는 순간에 바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갔던 그 강도와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기차표만 끄는 게 아닙니다.
천국 가는 기차표는 이제 천국 갈 때 필요한 거지, 기차표 가지고 늘 살다가 이제 죽을 때 그 기차표 내고 천국 가는 거라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는 천국 가는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이제부터 천국을 향하여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의 삶을 여기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과 감사와 사랑인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바로 은혜의 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예수를 믿었지만 그 기쁨과 감사와 사랑의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다시 주님 앞에 서야 됩니다.
약속되어진 이 은혜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다 주십니다.
여러분이 받지 못했는데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주님께 물어야 됩니다. 주님 저에게 구원의 진정한 축복을 주십시오.
미국의 어느 여성도가 남편을 일찍 여이었습니다.
아들이 돌이 되었을 때 그 아들 돌을 기념하는 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장을 보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그만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는 재혼하지 않고 그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들이 잘 자라주어서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쟁이 나는 바람에 미국에서 한국에 파병하기 위하여 징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미국 군에 입대를 하여 한국의 파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보가 오기를 금화 전투에서 그 아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거 온 교회가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결국은 죽었습니다. 전사통지서를 받는 날 이 부인은 기절했습니다.
목사님에게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온 교회 다 합심하여 그렇게 기도했을 때 우리 아들이 그 죽음의 사경을 헤매면서 군인 병원에 그렇게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것을 저에게 좀 알려주십시오.
그 부인의 편지를 받은 목사님은 너무너무 난감했습니다.
성경을 몇 구절 뒤적거려보기는 했지만 시원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도 역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탐이라고 하는 이 청년이 그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온 교회가 함께 그 탐이 사경에서 다시 깨어나기를, 다시 살아나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셨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목사님에게 뭐라고 대답을 주시지 않으셨어 그래서 철야 기도가 됐습니다.
목사님도 정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아침 역쯤에 목사님의 마음에 뭔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종이를 꺼내서 급히 그것을 메모했습니다.
아침에 그 부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메모한 것을 가지고 그 부인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왜 당신과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릴 때 그 타이 병원에서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셨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는지도 난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게 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2천년 전 갈보리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이 부인의 마음속에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고 그랬어요.
그 부인은 그동안에 수도 없이 들었던 말씀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날 아침처럼 그 부인에게 놀라운 능력이 되어진 적은 없었다고 그랬어요.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 그 부인에게 있어서는 그날 아침은 그 이전에 수없이 지나갔던 아침과 다른 아침이었다.
그랬어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 자신의 아들이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아들을 내어준 사람, 그러면서 느꼈던 엄마로서의 마음의 고통.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셨대 십자가에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아들을 내어주실 때 그때 하나님의 마음, 그 부인은 도무지 그동안에는 알지 못했었다는 것.
내 아들이 한국에 가서 그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잃었을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구나.
참 이 부인은 놀랍게도 자기 아들이 한국을 위해서 죽었던 그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아들을 보내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어.
그는 그날 아들만 바라보던 눈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더 뜨였다고 그랬어.
그리고 그 부인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 나가서 모든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섬기는 삶을 그 남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대해서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확인해야 될 것은 여러분들이 그 복음을 많이 들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복음이 여러분의 인생을 바꿨냐 하는 것.
여러분이 들었던 그 놀라운 복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그 상상이 안 되는 그 은혜와 복음의 말씀 때문에 여러분이 이제 기쁨으로 살게 됐고 감사로 살게 되고 사랑으로 살게 되었느냐고 하는 것은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기는 했었지만 여전히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사랑도 없고 그저 열심히 교회 다니는 거 하나밖에 안 남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은 유대인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은
여러분 예수를 믿는 우리는 13절에 보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건 정말 멋있는 이름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여러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니까 주님 이렇게 부르는 거죠.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을 부를 때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주님을 바라보면서 정말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면서 주님이라고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
그렇기에 주님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정말 부르기만 하면 주님이라고 부르면 그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바꾸십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기쁨으로 감사로 사랑으로 살도록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성도의 누리는 축복이고 능력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해야 됩니다.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사랑도 없고 열심만 남아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꽤 많이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유대인들과 같이 되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교만했고 정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열심이 많았지만 그 마음의 내면은 너무나 메마른 사람들이었어요.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율법주의자가 언제나 은혜의 사람을 내쫓고 기 때문입.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습니다. 육신의 자녀가 약속의 자녀를 핍박했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내내 증언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르는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늘 은혜가 충만한 교회로 지켜야 되는 이유는 율법주의자가 은혜의 사람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은혜로 교회를 지키지 않으면 어느새 교회는 율법적인 교회가 돼버리고 맙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성공회 신부였습니다. 그분이 1738년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의 눈이 뜨였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응했습니다.
영국 안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영국 성공회에서는 존 웨슬레 목사님과 그 따르는 무리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성찬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게 감리교회입니다.
그러나 감리교회도 어느 순간부터 율법적인 교회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경향에 있는 교회는 은혜 받은 사람들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 영적인 분위기를 도무지 감당을 못합니다. 한국교회가 참 안타까운 것은 율법주의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율법적인 어떤 경향을 가장 대표적으로 따지는 것이 바로 분열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싸우고, 교회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싸우는 것이 왜 문제입니까?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부부 싸움을 말릴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이 생겼다는 말은 왜 싸웠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이미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빠져 있다는 것이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경향 중에 또 하나는 직분을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것.
권사는 집사보다 높고, 장로는 권사보다 높고, 목회자든 교인들, 평신도들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거는 완전히 세상적인 기준인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왕으로 마음에 계신 것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
예수님이 마음의 왕이시면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는 자이십.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교회가 은혜가 충만하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믿음의 회복을 얻습니까? 그러나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정말 믿음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에 교회에 실망했거나 교인들에게 실망했다면 그건 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던 것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이 자리에서 성령집회가 열렸을 때, 이번에 예멘에서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탈출할 수 있었던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간증도 하고 말씀도 전해주셨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간증하시면서 자기는 나이가 50세에 미국 교포로서 치과 기공사였는데, 딸이 13살, 아들이 9살일 때 그 예멘이라고 하는 나라로 선교사로 들어갔습니다.
폭탄이 떨어지고 총소리가 나고 창문 바깥을 내다보면 사람이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어 있는 이런 살벌한 형편에서도 그곳에서 선교사님들이 모여서 찬송하고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기쁨도 주시고 평안도 주시고 그렇게 지켜주셨다는 겁니다.
극적으로 예멘을 떠나야 될 상황에 하나님의 은혜로 떠날 수 있었지만 떠나는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 예멘에 있는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로 그냥 떠나야 하는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그분이 간증하는 마지막 부분에 그냥 정말 흘려 지나가듯이 잠깐 언급한 부분이 하나 있었어.
그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처음 와봤습니다.
예멘 선교사님들과 다 함께 한국으로 왔을 때, 여기 와서 한국 교회를 보았습니다.
근데 자기가 한국 교회에 와서 느낀 느낌이 모든 것이 다 가식적이고 거짓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모습들이 가식적이고 거짓인 것처럼 느껴진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지요? 우리는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 선교사님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모습 뭔지 모르게 좀 가식적이고 거짓이 많이 섞여 있는 것 같으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히 율법주의화되어졌다는 거.
노벨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지니 그의 조국은 러시아입니다.
근데 러시아를 떠나서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랬던 솔제니친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을 떠나서 그분이 쓴 서방 세계에 대한 경고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러시아의 혁명사만 50년 연구한 사람입니다.
6천만 명의 희생자를 낸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온 비극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실망해서 조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을 보니까 러시아가 과거에 갔던 길을 지금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도 러시아 같이 될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다 자유롭게 믿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그분이 한국교회에 오면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고 주님과 함께하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있는 모습을 우리는 지키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자신이 율법주의에 빠지면 안 되고,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지켜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분별할 수 있는 거죠.
율법주의가 아니고 은혜 생활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거죠?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소문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열심은 있지만 절대로 사랑으로 소문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그 속에 있는 본성으로는 사랑으로 소문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는 사랑으로 소문 안 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가정에서나 여러분의 일터에서나 또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항상 점검해야 됩니다.
나는 사랑으로 소문났는가 여러분의 선한 목자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안 좋은 교회인지는 기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 주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이나 어려운 교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소문났는가 하는 거.
그러면 이 교회는 은혜가 있는 교회 그러나 사랑으로 소문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예배당이 크고 교인이 많아도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참 잘하시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한 번은 교인이 보낸 편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교인이 목사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 아주 고통스러운 마음 아픈 그런 내용을 담으셨다는 겁니다.
당신은 목사님은 바리새인입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입에서는 악취가 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지독한 혹평은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혹평입니다.
이 목사님은 스스로 자부하기를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바리새인이라고 할지라도 나만큼은 바리새인이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런 자부심을 가졌던 분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교회 교인으로부터 당신은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지적을 받은 것.
그 목사님은 그날 밤에 도무지 잠을 자지 못했어. 너무 분하기도 하고 그 교인에 대해서 너무나 화가 나고, 그리고 만나서 자기를 변명하고 싶고 따지고 싶고, 그 교인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써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그랬어.
그런데 갑자기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신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꺾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바리새인적인 모습을 그 교인을 통하여 지적하신 것이 아니겠나 나는 그 교인을 나의 가치관으로 보았습니다.
나의 취향대로 그분을 대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그분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서 어찌 그분이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지 못했겠습니까? 설교는 번지르하게 잘하면서 그분을 대하는 나의 말은 그러지 못했으니 어찌 그분이 나의 입에서 나오는 악취를 냄새 맡지 못했겠습니까? 저는 잘 믿으며 산다고 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인의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버리지 않고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아파서 두 번 다시 읽을 마음이 없으면서도 저는 그 편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편지가 저를 계속해서 깨우쳐 줄 것이기 때문입.
그 편지가 저를 바리새인이 되지 않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
저는 이 목사님이 훌륭하게 목회를 마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것 같았어.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놓아야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바리새인인 줄 잘 모릅니다.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항상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
내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충만하십니까? 가족들로부터 동료들로부터 교인들로부터 정말 사랑으로 소문나셨습니까? 마음에 응어리가 있고 여전히 마음이 굳어 있다면 여러분 오늘 주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냥 주여! 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진짜 믿고 정말 믿음으로 그렇게 주님 이렇게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힘들고 때때로 제 마음을 추스리기 어려운 순간이 올 때마다 계속해서 주님을 부릅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저에게 저와 함께 계심을 항상 깨우쳐 주세요.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들이라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주님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함께 계시는 주님 믿음으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진짜 믿으시고 주님 그렇게 부르시면 주님은 누구든지 다 구원해 주신다고 그랬어.
여러분의 마음에 굳어진 것이 풀어지게 해주십. 여러분 속에서 은혜의 샘이 나오게 하시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흘러가게 하시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는 것은 오늘 이 시간 우리 같이 정말 주님을 찾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원합니다.
혹시 여러분 어느 순간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기쁨도 감사도 사랑도 다 사라지고 열심만 남아 있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굳어져 있어서 느껴지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는 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 주님 주님 저를 만나주십시오.
주님 제 마음을 풀어주십시오. 은혜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