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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성령에 푹 빠진 사람들
Baptized With the Spirit
찰스 피니의 회심
찰스 피니 Charles G. Finney 는 미국 종교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뉴욕주에서 자란 그는 처음에는 교사였고, 다음에는 법학도, 마침내는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놀라운 회심을 경험했다.
스물여섯 살에 그는 “거의 이교도와 같이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1818년의 모든 사람이 그러했듯 그도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도 다녔지만 설교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회심, 성화, 심지어는 믿음이라는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기도에 대해 별반 믿음을 갖지 않았는데, 그것은 확실한 응답을 거의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점, 다시 말해 그가 결론을 내린 것처럼 "무한히 중요한 그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찰스 피니의 자서전>, 8,10
어느 일요일 밤, 찰스 피니는 자신의 구원에 관한 답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꼬박 이틀 동안 성경을 통독했다. 화요일 밤, 별다른 가시적 결과가 없자 걱정이 들었다. 자신이 죽어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법무 사무실에 가려 했을 때, 어떤 "내면의 음성이 그에게 이르러 왔다.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있는가?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너는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찰스 피니의 자서전>, 15
바로 이 순간, 찰스 피니의 마음은 태양을 향한 수천 개의 창문처럼 열렸고, "속죄의 실재성과 충만함" 그리고 그 구원은 이미 받아들여진 제안" 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한 질문이 강력하게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너는 오늘, 지금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는 대답했다. "네, 저는 오늘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찰스 피니의 자서전>, 15 찰스 피니는 사무실로 가는 대신에,기도하려고 그 도시에 있는 숲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그는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기도 그 자체보다 자신의 기도를듣고 계시는 그분에 대해 더 관심이 있었다. 즉시 이 성경절이 그의마음에 떠올랐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만나리라." 렘 29:12~13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즉시로 이 말씀을 마음에 굳게 붙잡았다. 나는 전에 성경을 지성적으로 믿었지만, 믿음이란 지성적인 상태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신뢰라는 이 진리를 마음에 담지 못했었다. 어쨌든 나는 그것이 성경 구절임을 알았었지만, 내가 그것을 읽은 적이 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분께 부르짖었다. '주님, 내가 당신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찰스 피니의 자서전>, 17~18
그날 저녁,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 그는 다시 한번 깊은 회심을 경험했고,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 원했다.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만난 것 같았다. 내가 실제 사람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분을 직접 본 것 같았다. 그분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시는 것이 내가 바로 그 곁에서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그 발 앞에 엎드려 내 영혼을 그분께 쏟아 내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크게 울었고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기까지 고백했다."..
이와 같은 만남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내가 일어나 화로 옆에 앉으려고 하는데, 그만 강력한 성령의 침례를 받게 되었다. ・・・성령은 내 몸과 영혼을 꿰뚫는 것처럼 내게 임하셨다. 나는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그것은 사랑의 물결이 파도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날개로 나에게 불어오는 하나님의 숨결 같았다.
어떤 말로도 내 마음속에 퍼져 가는 놀라운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크게 울었다. 나는 말 그대로 내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울부짖었다. 이러한 파도가 계속해서 나에게 몰아쳐 왔고, 나는 '이 파도가 계속해서 제게 몰아치면 저는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나는 '주님 제가 더 이상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지만 죽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늦은 밤, 교인 중 한 사람이 피니가 크게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교인이 피니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나는 너무 기뻐서 살 수가 없어요.” <찰스 피니의 자서전> 21~22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전에 받았던 침례가 같은 방법으로 다시 나에게 임했다. ・・・나는 기쁨으로 울부짖었고, 성령의 침례에 압도되어 내 영혼을 하나님께 쏟아 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이런 상태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현제의 경험으로 배웠다. 내 잔이 축복과 사랑으로 넘쳤다" <찰스 피니의 자서전〉, 24~25...
실제로 피니는 하룻밤 사이에 놀라운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사역이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 그는 "누구와 이야기했는지도 기억하지못했다. 그 사람은 곧 회심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위스키에 의지해살아가는 어떤 젊은이와 저녁을 함께하면서 식사를 위해 기도하자,갑자기 그 청년이 방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다음 날 회심하여 돌아온것이 아닌가. 피니는 자신의 기억을 회상하며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놀라운 능력을 드러냈고, 나는 어떤 한 사람에게 전한 몇 마디의 말이 그의 마음에 화살처럼 꽂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찰스 피니의 자서전>, 29, 31, 32 그 후 30년 동안, 그는 뉴욕주의 수많은 도시를 다니면서 설교하고 기도하며 무수한 사람을 회심시켰다. 그가 타고 있는 기차가 그 기차역을 지나가고 있던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지금까지 전해진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찰스 피니의 경험을 진짜 성령의 침례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증거물 1호처럼 여긴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위한 두 번째의 축복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성령의 침례는 오늘날 신학계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성령의 침례란 무엇인가? 먼저, 그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역사적 배경 속에 나타난 성령의 침례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성령의 침례의 증거를 강조했던 첫 번째 사람들은 2세기의 몬타누스주의자들 Montanists 이었다. 이교의 제사장이었다가 회심한 몬타누스 Montanus 는 교회가 영적으로 죽었으므로 오순절 초대 교회의 황금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표적과 기사가 따르는 교회를 보기 원했고 성령의 영감을 성경의 권위를 뛰어넘어 확대시키려고 갈망했다. 그는 자신을 "성령의 대변인"The Mouthpiece of the Holy Spirit 이라 부르면서 일단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공동체를 조직했으며,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와 주님의 오심에 대해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와 두 명의 여선지자는 최면과 광란의 상태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언하여 1인칭으로 말했다. 이 현상으로 인해교회는 '사도적 계승' 개념을 정착시키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스스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고 선포한 자들과 교회가 신뢰할 수있는 지도자를 분별하기 위하여 그들은 안수 혈통이 초기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주교들을 선택했다. 로저 올슨 <기독교 신학의 이야기>,31~32
그 후 몇 세기 동안은 기독론과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면서 성령의 사역과 위격은 다른 신학적 논쟁 뒷전으로 밀려났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다른 중요한 논쟁들과 함께 성령의 사역에도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자들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보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하이퍼 칼빈주의 HyperCalvinism 는 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성경은 자유 의지를 가르친다고 믿는 존 웨슬리 John Wesley 와 다른 알미니안주의자들 Arminians 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아야 했다. 웨슬리는 개혁주의 전통 칼빈주의자들이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법적 칭의에 반대하여 신자들의 성화를 강조했다. 다시 말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법적 칭의 롬 5:1 가 필요할 뿐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성화도필요하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도록 믿음으로 마음을 열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의롭게 하신 자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진실로 구원하신다는 증인으로써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7 라고 가르친 통합적 개념이다.
성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미국에서 성결 운동 The Holiness Movement 을 탄생시켰다. 많은 단체와 교회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법적 칭의 뿐 아니라 성령의 전인 우리 안에서 그분이 행하신 일에 전에 없던 관심을 기울였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마침내 전통적인 오순절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대 오순절 운동 The Modern Pentecostal Movement 의 창시자는 찰스 폭스 퍼햄 Charles Fox Parham 으로 성결 운동의 설교자였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으로써 성령의 부어 주심인 "늦은 비"를 갈급했다. 그는 성령의 침례에 대한 증거는 '방언' glossolalia 이라고 확신했으며, 성경 학교 학생들에게 그런 경험을 갈급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 학생들 중 하나인 아그네스 오즈만 Agnes Ozman 이 1901년 1월 1일 방언을 경험했다. 이후로 그날은 이 운동이 시작된 날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순절과 은사주의 운동의 새 국제 사전〉, 955~956
이 현상은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1906년에 이 운동은 아주사거리의 부흥 운동 Azusa Street Revival 이라는 표제로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언론에 보도되었다. 1930년까지 수십 개의 오순절 교단이 탄생하였다. 소위 '제1의 물결 오순절 운동' First Wave of Pentecostalism 은 다음으로 1960년에 등장한 '신은사주의 운동' Neo-Charismatic Movement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전형적인 주류 교회들인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공중 예배와 개인 예배에서 방언과 치유와 다른 '성령의 증거들이 나타나는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제3의 물결' The Third Wave이 도래했다. 이 마지막 물결은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즉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해 왔던 교회들이 이제는 전형적인 오순절 교회에서 받아들였던 그런 현상들도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은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운동이다. 100년 남짓한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6억 명의 교인이 생겨났는데, 이는 전체 기독교인의 1/3의 숫자이며, 그 성장률은 1세기 초기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성령 침례에 관한 세 가지 견해
수세기 동안 성령 침례에 관한 오순절 교회의 개념은 분명했다. 그러한 '침례'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 회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남녀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굴복하게 될 때 성령의 침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는 경험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분을 영접할 때 그들은 삶에서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는다. 이러한 침례가 바로 신약 성경에서 가르치는 침례이다. 엡 4:5; 고전 12:13 물의 침례는 새 신자에게 일어나는 내부적인 변화의 외부적 상징일 뿐이다. 이 두 침례는 서로 별개가아니라 하나이다.
존 웨슬리가 두각을 나타냈을 때 그는 삶에 성령의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고 더욱 강조했다. 롬 8:13~16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필수적이며 보완적인 경험이 되는 '성화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성령의 침례를 신자들의 삶에 일어나는 두 번째 은혜의 사역이라고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성화의 필요성을강조했다. 하지만 신학적 발전과정 속에서 종종 일어나듯이, 웨슬리이후의 일부 감리교 지도자들은 성화를 '성령의 침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감리교에 뿌리를 둔 성결 운동은 이것의 강조를 받아들였고 더욱 확장시켰으며 추가적인 '회심의 경험을 위한 장을 마련하였다.
후기 웨슬리주의자들과 성결 운동주의자들은 성화를 강조하였다. 종종 '즉각적 성화' instant sanctification 라고 지칭함으로 일부 사람들은 즉각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것을 갈망하도록 만들었다. 반면, 그 뒤를이어 등장한 오순절 운동은 '능력'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들은 성령의 침례를 일종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역사와 동일시하였다. 즉 방언을말하고, 예언을 하며, 기적을 행하는 것을 성령의 침례라고 보았다.
독자들은 발전의 과정을 보았는가? 3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성령의 침례는 회심이었다. 150년 전에 성령의 침례는 성화 내지는 즉각적 성화, 다시 말해 신자들을 위한 은혜의 두 번째 사역이었다. 100년 전에 성령의 침례는 은혜의 두 번째 사역이자 능력의 사역, 곧 신자와 그것 경험하지 못한 자들을 구별하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게 되었다.
무엇이 진리인가?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신약 성경의 증거
성령의 침례가 은혜의 두 번째 사역이든 아니든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첫 번째 사역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구원의 서정' ordo-salutis 혹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의 적절한 순서라고 부른다. 특별히 종말을 이해하는 방법의 차원에서 보면 이쪽을 믿느냐 저쪽을 믿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증거를 연구해 보아야 한다.
성령과 함께 혹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 관한 신약 성경의 기록은 불과 몇 구절뿐이며, 대부분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예수님의 침례이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 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1~22
예수님은 회개해야 할 어떤 죄가 있어서 침례를 받아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의를 이루시기" 마 3:13~15 위해 침례를 받으셨다. 분명히 주님은 물의 침례와 성령의 침례를 동시에 경험하셨다. 하나가 먼저 있고 몇 년 후에 다음 것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침례를 받는 때와 목적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또 다른 예는 오순절의 제자들이었다. 그날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베드로는 충만함을 받은 것을 약속하신 성령" 행 2:33 이라 말했고, 예수님은 이 약속을 성령의 "침례" 행 1:4~5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성령의 충만함과 침례가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은사주의자들이 순차적'인 것과 '동시적'인 것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그들은 다락방에서 이미 그리스도께 헌신한 120명에게 침례가 이뤄졌고, 성령의 충만함은 개인적 회심 이후 어느 시점에서 이뤄지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세 번째 예는 두 장 뒤에 나온다. 다시 한번 제자들이 모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기본적으로, 이 진술은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다만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충만함이 침례와 동시에 발생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시작이 아닌 이전의 경험이 이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다음 예는 사마리아인들의 회심에 관한 기사이다. 빌립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무시하고 구원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한다. 그의 설교에는 치유의 기적과 귀신이 물러가는 일이 잇달아 일어났다. 행 8:57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말을 "믿고 남녀가 다 침례를 받았다. 12절 자, 여기에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그 시점에서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언급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받은 침례는 오직 물에 잠그는 침례가 전부였다. 사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에게 안수하고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 14~17절 이 구절은 '2차 축복 신학자들' Second-blessing theologians 이성령의 침례가 '은혜의 두 번째 사역' Second work of grace 이라고 주장하는 강력한 논거가 된다. 그 결론은 분명히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이 구절을 살펴볼 것이다.
다섯 번째 예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일어난 결과이다. 바울이 삼 일 동안이나 앞을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교회를 통하여 그분께서 무엇을 보여 주시려는 것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아나니아가 바울의 치료와 성령 충만을 위해 파송되었다. 행 9:17 바울은 시력이 회복되자마자 침례를 받았다. 18절 이 구절은 죄를 회개해야 할 사람이 자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받아야 할 물의 침례를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바울은 회심하였기 때문에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시력이 회복되었을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동시에 일어난 경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일이 다음 장에서 일어난다.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베드로가 전한 기별을 받아들였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행 10:44~45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에티오피아 내시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초대 교회의 역사상 최초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에게 "성령 부어 주심이 자동적으로 일어났다. 제자들이 이 이방인들 또한 공개적인 의식으로서의 물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분명한 증거이다. 47절
성령 받음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분명한 사건은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발생하였다. 바울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열두 사람쯤 되는 제자를 만났다. 즉시 그들이 믿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행 19:2 놀란 바울은 그들에게 어떤 침례를 받았는지 물어보았고, 그들은 “요한의 침례" 3절 라고 대답했다. 바울은 그들이 받은 침례는 회개의 침례이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4절 그때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셨던 일'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또한 예수님이 하실 일'에 관하여도 알려 주었다. 침례 요한도 예전에 이것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침례를 받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5~6절 이 사건은 물의 침례는 부족하거나 불충분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침례는 오직성령의 침례이기 때문이다!
언제 성령의 침례를 받는가?
신약 성경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는 성령의 침례가 회심 이후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회심이나 물의 침례와 '동시'인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narratives 은 명확한 설명이나 직접적인성경의 가르침보다 올바로 해석하기가 더 까다롭다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이는 개신교의 해석에서 항상 유의해야 하는 점이다. 반면 은사주의 해석학에서는 이야기들에 더 많이 주안점을 두고 있다. 성령님은 신약 성경에 교리적 가르침이 풍성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렇기에 신약의 절반 이상은 바울, 베드로, 요한, 야고보, 유다에 의해 주어진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의 이런 책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기별을 이스라엘과 유다에 전했던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직접적인 교훈들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그의 청중들을 향해 말했던 것을 들어 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그들이 죄를 깨닫고 무엇을 해야 할지 물어보았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 잠시 생각해 보자 베드로가 언급한 침례는 무엇인가? 물의 침례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물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행 19:4; 1:5; 막 1:4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이방인들에게 하신 것이라." 행 2:38~39 우리는 이미 "이 약속이 성령의 침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여기서는 "성령의 선물이라 지적하고 있으므로, 베드로는 회개하고 물로 침례를 받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은 전체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선물은 회개한 후 몇 년 혹은 몇 십 년 후에 받는 것이라 추론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가르침은 분명하다. 회개와 함께 성령의 선물이 이르러 온다.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에 대한 가장 많은 자료가 있는 장은 로마서 8장이다. 8장 전체를 정독하면 정말 유익할 것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9절 라고 말한다.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성령님은 지금 현재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 혹은 성령의 침례와 회심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예수님에게 자신을 드렸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그대에게 침례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앤드루 머레이 Andrew Murray 는 이렇게 설명한다.
“두 개의 상이한 것은 한 번에 그리고 동시에 같은 자리에 위치할 수 없다. 그대 자신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이 동시에 심령을 채울 수없다. 그대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대의 생명이 쫓겨날 때, 하나님의 생명이 그대를 채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여전히 귀하게 여긴다면 예수님은 모든 것이 되실 수 없다. 자신의 생명은 추방되어야만 한다. 그제야 예수님의 영이 들어올 것이다." <오순절의 온전한 축복〉, 65
사마리아인의 사례
사마리아인들의 경우는 어떤가? 물의 침례 후에 성령의 침례를 받지 못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성령의 침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순서에 영향을 끼친 다른 사안들이 있었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들로부터 정확한 교훈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문맥이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이 사도행전 1장에서 위대한 사명을 선포하실 때,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는 물론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들 중 초기 제자들의 갈릴리 문화에 속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의 경우를 보면 성령의 부어 주심이 지체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사마리아인들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사역하도록 쓰신 제자가 열두 제자 중에 하나도 없었음을 주목하자. 그들은 갈릴리 출신 유대인들로서 사마리아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에 여전히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헬라파 유대인인 빌립을 사용하신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고 침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행 8:14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으로 파송하였다. 그런데 요한을 보낸 것은 과연 좋은 생각이었을까?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때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심한 편견으로 인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숙소를 거절했다. 그러자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당장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불살라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눅 9:51~56 하지만 하나님의 역설적인 섭리 가운데 주님은 이제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사역하도록 요한을 보내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이 이미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소멸시키는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그들 위에 성령의 불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했다. 그것이 지체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혼란스러운 이유
그래도 여전히 이 부분에 관해 혼란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엘렌 화잇이 이미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강력히 당부한 글들을 그토록 많이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혼란스러운 이유 중 하나가 용어의 사용 때문일 수도 있다. '침례'는 그리스도인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는 자아를 죽이고, 옛 자아를 장사 지내는 표상으로 물속에 잠그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롬 6:3~5 그러므로 침례 예식은 새 생명의 상징이다. 침례를 계속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세족 예식에 참여한다. 요 13:8, 13~15 이런 이유 때문에 재침례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지만 '충만' 혹은 '채움'은 우리가 매 순간 계속 호흡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일 끊임없이 필요하다. 모태에서 출생하면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일생 동안 필요한 호흡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 호흡의 시작을 시작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만일 숨을 계속 쉬지 않는다면 사람은 죽게 된다.
나는 연구를 하면서 신약 성경에서 성령님의 동일한 사역을 가리키는 상이한 표현들을 30가지도 넘게 발견하였다. 이는 예언의 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침례', '영', '은사', '채움', '부어 주심', '기름 부음' 등과 같은 단어는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킨다. 엘렌 화잇은 자주 이 표현들을 아무 의도 없이 바꾸어서 사용하였다. 아래의 인용문을 통해 화잇 여사가 짧은 문단에서 성령을 의미하는 다양한 표현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살펴보자.
“오늘날 그대는 그릇들을 정결하게 하여서 하늘의 이슬을 받을 준비를 하고, 늦은 비를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늦은 비의 강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은 온갖 더러움에서 정결케 된 영혼을 충만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심령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임재로 새롭게 되는 때, 곧 성령의 침례에 적합하게 될 것이다."복음, 702
이 문단에서 화잇 여사는 동일한 것을 말하면서 다섯 개의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하늘의 이슬"과 "늦은 비는 성령의 부어 주심에 대한 유사한 표현이다. 감리교인들은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성령 침례의 표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엘렌 화잇이 감리교 집안에서 성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롭게 되는 때" 행 3:19, 한글킹제임스 라는 표현은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에서 나온 말인데 그것은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인 오순절 설교의 반복이었다. 행 2:38~39 그리고 그것은 물론 "성령의 침례를 말하는 것이다.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가 "날마다 성령의 새로운 침례를 받으셨다"실물, 139 라고 기록했을 때, "침례"라는 단어 대신에 엄밀히 말하자면 보다 더 정확한 단어인 "충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화잇 여사는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침례를 받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하여 성령으로 충만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침례"라는 말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요점은 이것이다. 성령의 침례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굴복할때 우리에게 주어진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굴복할 때마다 성령의 침례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역사임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기 바란다. 그대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갈 3:2, 14; 행 19:2 또한 그대가 매 순간 그대의 구세주를 신뢰할 때마다 그분은 또다시 그대와 거하신다.
잘못된 신학이 잘못 인도할 때
왜 이것이 중요한가?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느 순간 초자연적으로 임하시리라 기대하는 것은 아주 매력적이고 멋진 생각이지만 진리와 거리가 먼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떤 '경험'이나 '감정'을 찾게 된다. 그것을 실제로 느끼든 느끼지 않든 간에 말이다. 그것은 분명히 은사주의자들이나 오순절 교파의 생각이다. 불행하게도 선한 의도에서 사람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오류들이포함된 책들이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
성경은 "두 침례"가 아닌 "한 침례를 가르친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순간은 두 국면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붙잡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분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2차 축복 신학이나 소위 '은혜의 두번째 사역을 믿는다면 기독교는 그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로 선택했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셨고 이루실사역에 관해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에 대한 증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분은 분명히 이루실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로마서 6장에서 다룬다. 그는 앞의 세 장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은혜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는지를 설명한 후에, 논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 물론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전부 망가뜨릴 것이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침례에 담긴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장사되셨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침례는 그리스도의 경험을 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자아가 죽어야 한다. 마치 땅에 묻어 버리듯 자아를 버려두어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우리는 새 생명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롬 6:3~5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의 부활하신 생명도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론은 이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많은 경우에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고 느끼지 않는다. 독자는 어떠한가? 그래서 사도는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consider 라고 말한 것이다. 영어성경 흠정역은 "간주하라" reckon 라고 번역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보임"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성령의 침례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침례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그리스도인다운 어떤 경험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적" 경험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보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감각적인 해석에 의지하는 것이다 '2차 축복을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이미 마련해 주신 것을 다시 기다리는 것이며, 주신 것을 여전히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이 죽은 상태인지 아마도 의문이 들 것이다. 죽은 자와 마른 뼈의 예언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도 다시 살기 위해 성령의 침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겔 37장 그렇다. 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당한 자"라는 사실이 그들의 심령 속에서 행하신 성령님의 초기 사역이 불충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받았던 성령님을 계속하여 받기를 그만두었음을 뜻한다. 성령의 침례는 시시때때로 반복적인 성령의 채움이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엘렌 화잇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금이 가서 새는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마음, 102 우리의 죄 된 품성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새는 그릇들이 충만하려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채워야만 하는 것이다.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찰스 피니가 경험한 성령의 침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당신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2. 존 웨슬리와 다른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하이퍼-칼빈주의를 어떻게 수정했는가? 왜 이것이 중요한가?
3. '즉각적 성화' 개념의 오류는 무엇인가? 성령에 의한 '능력'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오순절주의자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4. 성경 자체의 설명이나 직접적인 성경의 교훈과는 달리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해석할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5. 신약 성경에 따르면 언제 성령의 침례를 받는가? 왜 그런가?
6. 자신의 삶을 예수님에게 드린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의 침례가 지체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7. 만일 우리의 삶을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이 침례를 받은 것이라면 왜 엘렌 화잇은 매일 성령으로 침례 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일까?
8. 침례와 성령 충만에 관한 다양한 표현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것이 당신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9. 성령의 침례가 일어나는 때를 분명히 이해하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10. '2차 축복 신학'이나 성령의 '은혜의 두 번째 사역'을 믿는 것이 왜 기독교를 무효화시키는가?
11. 로마서 6장은 우리가 성령의 침례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12. 이 장에서 발견한 교훈들을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키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