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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봉의서예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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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스크랩 중국 고대 문자 - 태산각석,낭아대각석
鳳儀墨硏 추천 0 조회 735 14.01.24 10:3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태산각석 중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자는 송대탁본에 의해 136자 라고 한다.

 

 

기원전 238년 秦진나라 秦王진왕은 親政진정을 선언하고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6國국(韓한,趙조,魏위,楚초,燕연,齊제)을 하나하나씩 멸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진왕은 자신을 秦始皇진시황이라 칭하고 全國전국을 5차례에 걸쳐 巡行순행을 하여 자신의 명실상부한 황제라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기원전 209년 순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진시황은 자신의 나라를 순례를 하며 그 행적을 7개의 비석에 새긴다.

기원전 219년 역산(역山). 태산(泰山), 낭야대(낭야臺)각석,

기원전 218년 지부(之부), 지부동관(之부東觀)각석,

기원전 215년 갈석(碣石),

기원전 210년 회계(會稽)각석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망실(亡失)되고 겨우 태산각석의 9자와  낭야대의 잔석만이 남아있을  뿐이며

그 후 세상에 전하여지고있는 것은 후에 복각(覆刻)한 것이다.

 

  泰山刻石태산각석은 2차 순례에서 세운 것인데, 태산에서 공덕을 빌고, 10년 뒤 진시황의 2세가 다시 태산에 가 그 문장을 새긴 것이 지금의 태산각석이라 한다. 글과 글씨체는 진의 丞相승상 李斯이사라고 하나 확실히 증명된 것은 없다고 한다. 비석에 3면은 진시황의 詔書조서와 1면은 2세의 조서와 신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글자수는 22행 222자인데 明명나라때 발견 당시 겨우 29자만 남아 있었고, 현재는 겨우 9자 정도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훼손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宋송나라때 탁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글자수는 총 136자이다.

 

  태산각석의 글자체는 앞 서 올린 石鼓文석고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시황이 제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문자통일을 하여 간소화된 글자라고 말 할 수 있다.

예전의 6국에서 쓰던 글자, 즉 복잡하던 大篆대전을 간략하게 재 정비하여 小篆소전이 쓰이기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글씨가 태산각석이다.

 

  태산각석의 글씨의 특징을 보면

첫째, 모든 획이 藏頭護尾장두호미이다.

둘째, 圓筆원필 위주로하여 필심히 항상 가운데를 지나게 운필한다.

셋째, 획의 굵기가 일률적이며, 骨골과 肉육이 적절하여 옥젓가락과 같은 자태를 보인다.

넷째, 독체자의 결구는 위쪽에 획을 밀집시켜 긴밀하게 하고 아래는 넓게 하여 시원스럽게 한다.

다섯째, 합체자의 결구는 변과 방이 서로 돌아보듯 호응을 이루고, 상하 결구는 중심축이 수직을 이루어 편안함 느낌을 주게한다.

  기타 등등 열거하면 끝이 없겠지만 이런 한글자 한글자 마다 橫횡과 縱종으로 行행과 列열을 맞추고, 자간의 간격과 행간의 간격이 일률적이게 縱勢종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단정하고 삼엄한 분위기를 이루어 그 당시의 법가사상으로 다스려지던 엄정한 상황과 진시황의 위엄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 直線직선과 曲線곡선의 자연스런 조화로 생동감을 잘 표현하여 역대 서예가들로부터 神品신품이라 칭송 받고 있다.

 

낭아대각석

 

태산각석 : 대태산비라로도 칭한다.

진시황 28년 태산을 순시하면서 세운비이다.

각석상 소전은 이사가 적었다고 한다.

청 건륭 5년(1740년)에 이 돌은 소실되었다.

가경 20년(1815년)에 다시 10자가 발견되고, 청말에 9자가 남아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좋은 탑본은 명 안국본으로 165자가 남아 있는데, 일본에 현재 있고, 손성연과 하소기가 소장하고 있는 탑본 219자가 불나기 전의 것으로 알려져 있 다.

낭아대각석 : 진대의 각석으로 남아있는 것 중 가장 믿을만한 것 중의 하나이다.

높이는 129센티, 넓이 67.5센티, 두께 37센티이다.

연존하는 원석탑본은 13행 86자이다.

서풍이 석고문과 비슷하고, 실질적인 진 소전의 대표격이다.

역산각석 : 역산비라고도 한다.

진시황제가 동쪽을 순시할때 세워진 것이고 이사가 역시 비문을 썼다.

원석은 산동 역산에 있었으나 위무제 조조가 역산을 오를 때 불태워 버렸다.

지금은 송 모각본으로 순화4년(993년) 남당의 서현 모각본으로 장안본을 최고로 여긴다.

높이218센티, 넓이 84센티, 양면에 모두 15행, 매 행 15자로 되어있다.

회계각석 : 진시황 37년 10월 이사와 함께 회계산을 순시하면서 세운비이다.

원석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원 정원년(1341년)에 구 탑본을 신도?가 다시 각해서 만들어 놨다.

12행, 매 행 24자, 후미에 갑씨의 제발 2행이 있고,

건륭 55년에 다시 신씨각을 이형이 돈을 내서 복각해서 이형과 옹방강,

완원등이 제발을 한 것이 지금의 회계각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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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01.24 10:30

    첫댓글 태산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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