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고개 끄덕일 수 있는 작품 쓰고 싶죠"
[광주작가] '볼링선수 출신 시인' 서애숙씨
문학과 음악 넘나들며 대학 뒤늦게 들어가 성악 공부
"운동선수 시절 한번도 ‘문학의 끈’ 놓아본 적 없다"
16년만에 제2시집 펴내…"자연과 하나되는 시 쓸터"
서애숙 시인은 “자연과 하나되는 시를 쓰고 싶죠. 제가 이름있는 시인을 쫓기보다는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만능 엔터테이너 혹은 멀티 엔터테이너라고 할 밖에 없다. 한 방면에서 소질을 발휘하기도 어려운데 예술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인터뷰하는 동안 질문 가짓수가 많아 내용이 풍족해지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실제 그는 그 많은 분야를 무리없이 일상에 녹여내고 있다.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 싶다.
중심을 잡고 서기도 어려울 것 같아 보이는데 그는 거짓말같이 여러 분야들을 섭렵하며 하루 하루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며 나아간다.
그를 봐온 지 20여년 앞두고 있지만 한결같이 엔터테이너적인 삶을 구가 중이다. 그의 첫 시집이 인연이 돼 처음 만났을 때 ‘볼링선수 출신 시인’라는 별칭이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됐었다.
그런데 그가 섭렵하는 예술분야가 더 늘어난 형국이고, 이런 연유로 인해 그가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더 늘어난 듯 보였다. 인터뷰 후 그를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전직 볼링선수와 시인에 멈추지 않고 음악과 소리, 시낭송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음악과 소리를 위해 대학 음악학과에 입학해 성악을 전공 중이다. 이처럼 그는 대충 대충 맛만 보는 정도로 하지 않는다. 뿌리는 물론이고 밑동까지 파내는 끈기를 발휘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해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전남 목포 출생 서애숙 시인. 그는 한 분야도 어려운 현 예술세태 속 복합장르를 내심 즐기고 있다. 해외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우리의 풍토는 여전히 한 장르, 한 분야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여러 장르를 할 경우 ‘한 가지라도 잘 하라’라는 핀잔 아닌 핀잔이 돌아오지만 서 시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서 시인은 자신이 걸쳐져 있는 장르 하나 놓치지 않고 프로로서 기질을 유감없이 발현하고 있어서다. 필자에게 이런 엔터테이너적인 그의 기질은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문학을 시작했을까 궁금했다. 앞서 그를 ‘볼링선수 출신 시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볼링 선수보다는 시(詩)를 먼저 시작했다. 볼링은 고등학교 3학년 이후에 시작했다. 시는 유년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각종 글짓기에 나가 입상을 하면서 문학적 골격을 갖춰나간다.
이미 초등학교 때 신아일보 글짓기 대회에 참가해 입선을 하는 등 각종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그냥 돌아온 경우는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고, 부모의 뒷받침까지 더해져 글쓰기는 탄력을 낼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각종 백일장 대회에서 좋은 결과들을 잇따라 거두게 된다. 고등학교 때는 당시 은사였던 국어과목 김재희 선생으로부터 ‘넌 글 소질이 있으니까 커서 문인이 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문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의 부친이 군산 미군부대에서 볼린장을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볼링을 접한다. 볼링의 신세계에 빠진 그는 이것이 계기가 나중에 볼링 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광주전남우리가곡부르기’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우리 가곡을 부르고 있는 서 시인.
20대 때 광주 덕영볼링장을 연습장 삼아 훈련을 하면서 볼링선수로 활동을 본격화한다. 서른이 되던 해에 광주시 볼링 선수 대표가 돼 ‘제1회 KBS 전국 볼링대회’ 2등, ‘KBC 제1회 볼링대회’ 챔피언과 여성볼링 2등, 팀전 1등, ‘광주MBC 토요볼링대회’ 챔피언전 우승 등의 수상 이력을 쌓는다. 마흔 무렵까지 그의 볼링선수 생활은 계속된다. 선수 생활을 할 당시 첫 여성 코치와 선수로는 처음으로 지원금을 받으면서 활동하는 등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나서 볼링 선수의 생활은 끝이 났다.
그에게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창작은 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놀라운 답이 돌아왔다.
“운동을 하기 때문에 문학을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단 한번도 문학의 끈을 놓아본 적은 없습니다. 대통령배 등 각종 대회에 참가하러 가도 창작노트를 가지고 갔어요. 훈련 외 시간을 활용해 동료들이 여가활동을 하자고 해도 저는 숙소에 그대로 남아 시 창작을 하는데 온전히 시간을 사용했죠.”
보통은 그런 여건이라면 어쩔 수 없이 볼링선수로서 활동에 치중할 텐데 그는 달랐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악바리 같은 근성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2001년 첫 시집 ‘세상 뜨는 일이 저렇게 기쁠 수 있구나’(문학과경계 刊)를 펴낸 뒤 16년만에 지난해 두번째 시집 ‘죽림 풍장’(문학과경계刊)을 펴냈다. 여기서 그의 끈기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사전에는 지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기가 없는 듯했다.
시와 운동의 병행에 대한 그의 입장이 궁금했다.
“볼링은 일반 운동과 차이가 있어요. 굉장히 섬세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죠. 섬세하지 않으면 볼링을 할 수 없습니다. 아마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하루 4시간씩 자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요. 복잡하지만 치열함 속 저만이 뚫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요란한 소리가 이는 공간에서도 혼자 조용하게 앉아 있을 수 있잖아요.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공간과 상황 때문에 시 창작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지금도 운동 선수로 활동을 하면서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 끌고 왔다는데 대해 안도해 한다. 만약 시 창작을 하지 않았더라면 운동 선수를 접은 이후 시 창작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운동선수를 하지 않으니 바로 시 창작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글쓰기가 유년시절부터 이뤄진 것처럼 유년 때 이뤄진 것이 하나 더 있다. 음악이었다. 피아노와 음악을 접한 것이다. 물론 합창으로 음악적 삶을 끌어 왔다. 그러다 클래식을 좋아해 전문적으로 공부해보자는 욕심이 발동, 오십이 넘은 나이에 광신대 음악학과에 들어가 성악을 전공중에 있다. 이 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만학도이기도 하다. 여러 장르들을 따로 따로 해온 것이 아니라 동행해 온 것이다.
그의 음악적 삶은 현재 그의 삶 곳곳에서 드러난다. 전라도와 경상도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결성돼 활동 중인 문화예술단체 ‘꾼앤꾼’의 회원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주전남우리가곡부르기’운영위원 등을 맡아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도 광주오페라단의 ‘우리 가곡의 향기’(11.21∼22일 유·스퀘어문화관 금호아트홀)라는 음악무대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 어렵게 시간을 빼내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는 재능시낭송협회 광주지회장을 맡아 남광주지하철역 시낭송 무대를 시민들과 함께 연 장본인이다. 그의 시낭송은 그냥 저냥 아마추어가 낭송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낭송가의 솜씨 그 자체다. 그의 낭송을 접한 사람들은 시인의 보통 시낭송과 차원이 다른 낭송에 놀라워한다.
그는 다방면에 걸친 예술활동을 쉼없이 추구해나가고 있다. 여전히 강단있게 꾸리고 있는 셈이다. 그의 앞에서는 예술을 하느라 피곤하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자신에 관대하지 않은 채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시적 행간이 어떻게 채워질 지 궁금해졌다. ‘어떤 작품을 창작하고, 어떤 시인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는가’라고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자연과 하나되는 시를 쓰고 싶죠. 제가 다육식물 600개를 키우고 있는데 모두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이를 사진으로 담아 하나 하나 글을 붙여주고 싶은 희망이 있구요. 그래서 시사집이나 시화집을 펴낼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가 이름있는 시인을 쫓기보다는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광남일보 2018년 11월 30일(금) 11면 기획 / 고선주 기자 -
첫댓글 우와 ~~^^엔터테이너 이시군요 (multi cultural person !!!)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잡지 전라도인 12월호엔 우리가곡부르기를위주로
사진 올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