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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26 사건 이전
1919년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본산리에서 아버지 최양오와 어머니 이응선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문에서 할아버지 최재민에게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 만주국 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졸업(1부 15기)하였다. 졸업 후 만주국 길림성 통양현에서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다. 당연히 친일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뚜렷하게 드러난 행적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는 경성사범대학 영문과 조교수로 영어를 가르치던 중 1946년 4월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국제회의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 활동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어,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고 1959년에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외무부차관이 되었다. 1959년 12월 21일 조정환 외무부 장관이 재일교포 북송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1960년 4월 25일 허정이 외무부 장관에 임명될 때까지 외무부 장관 대리로서 업무를 수행하였고, 4.19 혁명으로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서고 얼마 뒤 5월 11일 차관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외무부장관 대리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3.15 부정선거에 관여되었을 수 있다하여 수사를 받았고 당시 고위공직에 있었다고 하여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따라 공민권을 제한받았다.
박정희는 최규하가 이승만 정권 시절의 외무부차관이었다는 이유로 싫어했으나 이동원 외무부장관의 강력한 추천으로 1964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기용하였다가, 그 후 1967년 외무부장관,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국무총리로 중용하였다. 전임자인 김종필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하자 박정희가 정치적 야심이 전혀 없는 관료출신 최규하를 후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2. 10.26 사건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다만, 최규하가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5년의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최규하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이던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열어, '대통령 궐위 시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한다'는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모든 국민의 환영을 받았으며, 이 선언으로 인해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선거를 치러 다음 정부에 무사히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3. 최규하 정부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으나, 5.17 이전까지는 전두환이 부장 서리로 직접 입안한 중앙정보부 개편에서 최규하의 지시로 차장 직이 2개로 유지되는 등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최규하를 이어 국무총리직을 맡은 신현확은, 1980년 초 당시 최규하가 신군부를 등에 업고 권좌에 남아있으려는 욕심을 은근슬쩍 내비쳤다고 증언했다. 첫째 증거로는 신현확이 배석자도 없이 독대해서 김재규로 인해 쑥밭이 된 중앙정보부를 수습하고 전두환의 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민간인 부장을 임명하라고 요청했는데, '대통령은 군인을 중정 부장에 임명하려고 하는데 총리가 민간인을 요구해서 늦어진다'라는 기사가 뜬금없이 해외 언론에 나왔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신군부에 영합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규하측이 직접 흘린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 둘째로는 4월 24일 기자들과의 총리 공관에서의 만찬에서 신현확은 자신을 비난하는 거리의 시위대의 비판에 대응하여 '우리 과도기의 관리 정부는 사명을 다하고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바로 다음날 득달같이 청와대 사람이 달려와서 우리가 무슨 뜻이냐고 캐물었다고 한다.
당시 국민들은 최규하를 '최 주사'라고 비하해서 불렀는데, 하루는 최규하가 주 독일 대사를 지냈던 비서관 권영민에게 국민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권영민이 솔직하게 국민들이 최규하를 '최 주사'라고 부른다고 말하자 최규하가 분기탱천하여 엄청나게 화를 냈고, 살면서 그렇게 최규하가 화낸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를 그만 둘 생각을 했다고. 한편으로 갑자기 대통령이 된 이후 누가 자신에게 총을 쏘겠냐면서 대통령으로의 의전을 상당히 귀찮아 했는데, 대통령은 경호 없이 산책을 할 수 없지만 경호실에 알리지 않고 늘 조용히 산책했고 기겁한 경호실장이 쫓아오면 그냥 일보라고 쫓아내는 등 대통령직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묘한 모습을 보였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사망하는 바람에 정말로 흑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기의 최규하의 굼뜬 행동에 대해서는 다수의 동시대인들이 비판했다. 김영삼은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정치 일정을 단축해서 3개월 내에 선거를 실시했다면 5.17 내란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실제로 당시에 그렇게 요구했고 대답도 받았지만 뭉개버렸다고 2000년대에 나온 회고록에 썼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고건 또한 정치일정 가속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신현확은 최규하가 제대로 일을 했다면 민정 이양이 제대로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심지어 입장이 정반대인 노태우도 "최규하는 능력도 없이 시간만 끌었다", "정치 일정을 길게 잡는 바람에 혼란을 가중시켰다"라고 비판했다.
결국 신군부가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을 최규하는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중동에 순방을 나갔던 최규하는 거센 민주화 시위에 5월16일 급히 귀국했으나 신군부측 군인들에게 포위된 국무회의장에서 5.17 내란의 단초가 되는 비상계엄전국확대에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었고, 이후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나서는 5월 25일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광주에서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당시 국무총리 신현확은 5월 17일 당일 아침에 대통령 - 총리 동시 사퇴 선언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자고 제안했으나 최규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0년 8월 16일 오전 10시 최규하 대통령은,
제10대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특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책임정치의 구현으로 불신 풍조를 없애고,
불행했던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또한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하여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하야 애국충정과 대국적인 견지에서
나 자신의 거취에 관한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나는 오늘 대통령의 직에서 물러나
헌법의 규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대행권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에 있어서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에게
대립과 분열이 아닌 이해와 화합으로 대동단결하고
불퇴전의 의지와 용기로 부강한 민주 국가를 건설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의 입각한 평화통일의 기반을
착실히 구축해 나가도록 간곡히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약 10개월간 국가원수의 직무를 담당해온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에 따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후임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습니다
최 대통령의 이번 사임은
새 지도 세력에게 새 역사를 이끌어갈
책임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사임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인 8월 18일 오전에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
서울 서교동의 사저로 이사했습니다.
대한뉴스 제 1295호 - 최규하 대통령 사임
결국 1980년 8월 16일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임 대통령이 되었다. 그 직후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한 번 더 열어 대통령에 취임한 뒤 바로 헌법을 바꿔서 제5공화국의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4. 사임 이후
사임 후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내고 1991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현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2대 의장을 지내다가, 1993년부터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에게 의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로 연금을 받았으나, 평소 유교 정신을 실천하는 검소한 성품이었기에 서교동 사저에 30년 이상 거주했으며 1953년에 일본에서 산 선풍기를 50년 동안 사용했다. 총리 시절 광산을 방문해 광부들의 노동실태를 보고 "평생 연탄을 땔 것" 이라고 약속했는데, 이 말을 실제로 지켜 말년까지 직접 연탄을 날라 보일러를 땠다. 2004년까지 때다가 이 후에는 교체하였는데, 이유도 더 이상 연탄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부득이하게 바꾼 것이라고 한다.
1989년 5공특위로부터 국회증언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고, 문민정부 때인 1994년 9월 및 1995년 12월에 서울지검으로부터 참고인 조사 요청을 받은 데 이어 1996년에도 신군부 일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서울지법으로부터 증인 소환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하여 이기창 변호사가 "전직 대통령이 국정행위에 대해 증언이나 해명을 하면 후임 대통령들이 책임있는 국정수행을 못한다"고 그 사유를 대신 말해줬다. 이 때문에 당시 풍자의 대상이 되거나 신문만평에서는 입에 자물쇠가 채워졌다거나, 김영삼이 최규하 대포를 쏘려는데 총포구가 꼬여서 발사가 안 되는 것처럼 최규하의 침묵을 표현한 만평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후에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전직 대통령 오찬에 참석하는 선에서 대외적인 활동을 했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과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 및 기념만찬에 참석하였으며 김대중 정부 시절 이루어진 전직 대통령 기념만찬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2004년 무렵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해 대외활동이 줄어들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횟수가 잦아졌다. 같은 해 7월에는 영부인 홍기 여사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2005년 8월에는 대퇴부 골절상을 입어 한 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고, 이 무렵부터는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면담조차 사절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되어 인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시간 뒤인 오전 7시 37분 사망 판정을 받았다. 향년 87세.
사망 당일 병원 측은 그의 사인이 급성 심부전증으로 추측된다고 밝혔으며, 10월 26일엔 장례는 국민장 형식으로 서울 경복궁 흥례문에서 치러지고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유품 중 1천여점은 2009년 원주시청이 인수해 원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기증했고, 이외 유품 653건 /1,822점은 2013년에 유족들이 서울시청에 기증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임 당시 신군부에 관련된 일을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갔다. 1995년 검찰의 소환 시도 당시 회고록이 있다는 소문이 복수의 측근들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런데, 최홍순 비서관은 이를 부인하며 외교관료 때부터 많이 썼던 메모는 있다고 밝히며, 이 메모를 정리하는 것이 회고록을 집필하는 것으로 오해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에선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서라도 최규하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해당 기록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결국 정치적 부담과 최규하 측의 강력한 반발로 불발되고 말았다.
2006년 사망 직후 조문을 온 전두환은 비망록이나 회고록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고, 이에 대해 YTN 취재 결과 사실 관계 위주로 정리한 비망록이 있으며, 회고록 집필 의사도 있었으나 측근들의 우려로 그만뒀다고 한다. 갖고 있던 메모들 역시 수해로 일부 손실됐다고 전해진다.
이를 종합해보면, 형식이 메모이건 비망록이건 최규하 대통령이 나름대로 정리한 기록은 분명히 있으나, 생전에 공개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 공개 여부는 전적으로 유족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족들이 2013년 사저를 서울시에 기증하면서 대부분의 유품 역시 함께 기증, 공개했는데 그 중에 비망록이나 회고록은 없었다. 다만, 해당 기록들을 1026과 1212의 50주년이 되는 해에 공개하라는 최규하의 유언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말이 있는데 연금과 공직생활 중 모은 돈, 그리고 본인 내외의 생활습관으로 봤을때, 검소하게 살았던 모습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원도 지역사회에선 2012년에 그의 청백리 정신 등을 기리기 위해 '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가 창립됐으나, 생전 기록을 남기지 않은 행보 등이 오히려 발목을 잡게 되어 사업이 지지부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