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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길따라 추억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금곡영화마을 축령산 정상에서 정 북쪽에 자리한 금곡마을. 영화촬영지로 주목받아 명소가 된 곳이다. 가구 수 50호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번잡한 바깥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고요하고 한적함이 찾는이의 기분을 편안하게 한다. 거기에 축령산에서 내려온 시원한 편백향 내음은 심신을 맑게 한다. 골목길을 걸으며 이곳에서 촬영된 작품을 상기하노라면 옛 분위기가 마을에 덧칠되면서 향수를 자극한다. 이 마을이 촬영지로 이름날 수 있었던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이다. 장성은 임권택 감독의 고향이다.
축령산 삼나무·편백나무 숲 장성 축령산 기슭에는 독림가 임종국선생이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에 30여 년 동안 나무와 함께 살면서 가꾼 삼나무·편백나무 숲이 있다. 1만㎡당 평균 목재의 양이 우리나라 평균의 4배에 가까운 260㎥이며 부분적으로는 400㎥인 곳도 있으니 흔한 숲이 아니다. 삼나무와 편백은 일본 고유의 수종으로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란다. 임종국선생은 인근 숲에서 이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1만㎡에 삼나무와 편백 5천 본을 시범으로 심어 보았다. 결과가 좋게 나타나 1956년부터 20년 동안 260만㎡에 78만 본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나무를 심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고 수십 년간 수확을 할 수 없어 선뜻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1968년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나무가 말라 죽자 물지게를 지고 일일이 물을 주어 키웠다고 한다. 아직 30~40년생이라 고목은 아니지만 숲에는 생장이 한창인 젊은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가득하다. 이 숲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홍길동생가(洪吉童生家)와 홍길동전시관(洪吉童展示館)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산69-1번지. 홍길동테마파크 내에 있는 전시관이다. 2002년 복원한 홍길동생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홍길동테마파크에는 홍길동생가터(洪吉童生家)·산채체험장·청소년야영장·분수광장 등도 있다. 2004년 5월 3일 개관하였다. 부지면적 6,248㎡, 건축총면적 602.14㎡의 지하 1층(사무실)·지상 1층(전시관) 건물이다. 홍길동 관련 국내외 학술자료 600여 점, 홍길동생가터에서 출토된 유물 10여 점, 생가 모형, 홍길동 캐릭터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홍길동 관련 영상물을 상영하는 영상관이 마련되어 있다. 홍길동은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선 연산군 때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선조실록> 등에 도적 홍길동이 등장하며, <증보 해동이적>이라는 문헌에는 ‘조선 중엽 이전에 홍길동이 장성 아차곡에 살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허균(許筠)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1440년(세종 22) 장성군에서 태어난 역사상 실존인물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홍길동 출생지를 복원한 관광마을이다. 아치실마을 입구에서 약 2백 여m를 올라가면 홍길동 캐릭터를 담은 안내판이 있으며 울창한 대나무숲과 삼나무, 편백으로 둘러싸인 생가터가 있다. 생가 울타리는 유사시에 화살로 사용할 수 있는 시누대가 심어져 있다. 생가터에서 200m 더 들어가면 암탉골(밤골) 입구 개울가에 홍길동이 어려서 먹고 살았다는 길동샘이 있다. 1997년 홍길동 사업의 하나로 생가터 가는 길을 홍길동로라 이름하였으며 생가터 발굴 작업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생가 복원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홍길동전(洪吉童傳) 조선 광해군 때 좌참찬(左參贊)을 지내다가 반역죄로 능지처참된 교산(蛟山) 허균(許筠)이 지은 소설. 활자본. 1책. 중국소설 《수호전(水滸傳)》에서 영향을 받아 임진왜란 후의 사회제도의 결함, 특히 적서(嫡庶)의 신분 차이의 타파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그의 혁명사상을 작품화한 것이다. 주인공인 길동은 홍판서와 시비(侍婢) 춘섬(春纖) 사이에서 태어나 늘 천대를 받고 자란다. 그는 총명한 재주에 학식이 뛰어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법과 둔갑술(遁甲術)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사람들의 멸시를 참지 못하여 집을 뛰쳐나와 적굴(賊窟)에 들어가 괴수가 되어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한다. 각 지방의 탐관오리(貪官汚吏)들과 토호(土豪)들의 불의(不義)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양반계급을 괴롭히고 가난한 양민을 돕다가 조정의 회유로 부득이 병조판서까지 되었으나 마침내는 고국을 하직하고 난징[南京]으로 가다가 율도국(硉島國)에 정착해 이상적 왕국을 건설한다.
나비 날개로 모자이크했다.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 사적 제242호. 전남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필암리에 있는 서원.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廓然樓)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그 뒤편 서쪽에는 숭의재(崇義齋)가 있고, 동쪽에는 진덕재(進德齋)가 있으며, 숭의재 옆에는 3칸의 경장각(敬藏閣)이 있어서 인종의 어필묵죽(御筆墨竹)을 소장하였다. 매년 4월에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열린다. 이어 1786년 양자징(梁子徵)을 추가 배향하였다. 청절당(淸節堂)의 처마밑에는 병계(屛溪)윤봉구(尹鳳九)가 쓴 ‘필암서원(筆巖書院)’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同春)송준길(宋浚吉)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廓然樓)의 현판은 우암송시열(宋時烈)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敬藏閣)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학자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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