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相)의 극리(極理)란 달과 바람과 같은 생시(生時)인 이 몸의 심성(心性)의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이니라.
작성자:세계광선유포
작성시간:2023.04.30 조회수: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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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相)의 극리(極理)란 달과 바람과 같은 생시(生時)인 이 몸의 심성(心性)의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이니라. 이 극락(極樂)이란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정보(正報)인 유정(有情)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의보(依報)인 국토(國土)가 화합(和合)하여 일체삼신즉일(一體三身卽一)이니라. 사토불이(四土不二)로서 법신(法身)의 일불(一佛)이며, 십계(十界)를 신(身)으로 함은 법신(法身)이니라. 십계(十界)를 심(心)으로 함은 보신(報身)이니라. 십계(十界)를 형(形)으로 함은 응신(應身)이니라. 십계외(十界外)에 부처는 없고 부처 외(外)에 십계(十界)가 없어서 의정불이(依正不二)이고 신토불이(身土不二)니라. 일불(一佛)의 신체(身體)임을 가지고 적광토(寂光土)라 하며, 이런 고(故)로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라 하느니라.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법성(法性)의 연저(淵底)·현종(玄宗)의 극지(極地)인 고(故)로 극리(極理)라고 하느니라, 이 무상(無相)의 극리(極理)인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심성(心性)속에 있어서 청정무루(淸淨無漏)이니라. 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생(生)과 사(死)의 둘의 이(理)는 생사(生死)의 꿈의 이(理)이고, 망상(妄想)이며 전도(顚倒)이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가지고 나의 심성(心性)을 밝히면 생(生)할 시초(始初)도 없는 고(故)로 죽게 될 끝도 없으니, 이미 생사(生死)를 떠난 심법(心法)이 아니겠느뇨.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수재(水災)에도 썩지 않으며, 검도(劍刀)에도 잘리지 않고, 궁전(弓箭)에도 맞지 않고, 개자(芥子)속에 들어가도 개자(芥子)도 넓어지지 않고, 심법(心法)도 줄어들지 않고, 허공(虛空)속에 꽉 차도 허공(虛空)도 넓지 않고, 심법(心法)도 좁지 않으며, 선(善)에 배반(背反)함을 악(惡)이라 하고, 악(惡)에 배반(背反)함을 선(善)이라고 한다. 고(故)로 심외(心外)에 선(善)이 없고 악(惡)이 없으며, 이 선(善)과 악(惡)에서 떨어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느니라. 선악무기(善惡無記)·이 외(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외(外)에는 법(法)이 없는 고(故)로 선악(善惡)도 정예(淨穢)도 범부(凡夫)·성인(聖人)도 천지(天地)도 대소(大小)도 동서(東西)도 남북(南北)도 사유(四維)도 상하(上下)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소멸(心行所滅)함이라. 마음에 분별(分別)하여 생각해서 말하여 나타내는 언어(言語)이므로 마음의 외(外)에는 분별(分別)도 무분별(無分別)도 없느니라.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 그러므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 가로되「마음은 솜씨 좋은 화사(畵師)가 종종(種種)의 오음(五陰)을 만들 듯이 일체세간중(一切世間中)에 법(法)으로서 만들지 않음이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衆生)도 그러하니 삼계(三界)는 오직 일심(一心)이니라. 마음 외(外)에 다른 법(法)이 없고, 심불(心佛) 및 중생(衆生)·이 삼차별(三差別)이 없느니라」이상(已上). 무량의경(無量義經)에 가로되「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에서 무량의(無量義)를 출생(出生)함」이상(已上), 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일념(一念)의 마음 이것이니라. 문구(文句)에 석(釋)하여 가로되「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이 없는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이승(二乘)의 유여(有餘)·무여(無餘)의 두 가지의 열반(涅槃)의 상(相)을 떠나는 고(故)로 불상(不相)이라 하느니라」운운(云云), 마음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가지고 경론(經論)의 전요(詮要)로 하느니라. 이 마음을 깨달아 앎을 이름하여 여래(如來)라 하며, 이를 깨달아 알고나면 십계(十界)는 나의 몸이고, 나의 마음이고 나의 모습이니라.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신심(身心)이기 때문이니라. 이를 알지 못하는 때를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하며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고 읽느니라. 나의 마음의 모습을 분명(分明)하게 깨닫지 못함이라. 이것을 깨달아 아는 때를 이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니, 고(故)로 무명(無明)과 법성(法性)은 일심(一心)의 이명(異名)이니라. 이름과 말은 둘일지라도 마음은 오직 하나의 마음이며, 이런 까닭에 무명(無明)을 단절(斷切)해서는 안 되느니라. 꿈의 마음인 무명(無明)함을 단절(斷切)하면 생시(生時)의 마음을 잃게 되는 고(故)로 통틀어 원교(圓敎)의 뜻은 일호(一毫)의 혹(惑)마저도 단절(斷切)하지 않으니 고(故)로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에 가로되「여시상(如是相)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상호본각(相好本覺)의 응신여래(應身如來) 여시성(如是性)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성(心性) 본각(本覺)의 보신여래(報身如來) 여시체(如是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신체본각(身體本覺)의 법신여래(法身如來)」이 삼여시(三如是)로부터 후(後)의 칠여시(七如是)가 출생(出生)하여 합(合)해서 십여시(十如是)로 되었느니라. 이 십여시(十如是)는 십법계(十法界)이며, 이 십법계(十法界)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法門)으로 되느니라. 한 사람을 본보기로 하여 일체중생평등(一切衆生平等)함이 이와 같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총감문(總勘文)으로서, 어판(御判)이 확실(確實)하게 찍힌 정본(正本)의 문서(文書)로다. 부처의 어판(御判)이란 실상(實相)의 일인(一印)이며, 인(印)이란 판(判)의 이명(異名)이니라. 나머지의 일체경(一切經)에는 실상(實相)의 인(印)이 없으므로 정본(正本)의 문서(文書)가 아니라, 결코 실(實)의 부처가 없으며, 실(實)의 부처가 없는 고로 몽중(夢中)의 문서(文書)로다, 정토(淨土)에 없기 때문이니라. 십법계(十法界)는 十이지만 십여시(十如是)는 一이니라, 비유(譬喩)컨대 수중(水中)의 달은 무량(無量)일지라도 허공(虛空)의 달은 하나임과 같다. 구법계(九法界)의 십여시(十如是)는 몽중(夢中)의 십여시(十如是)이므로 수중(水中)의 달과 같고, 불법계(佛法界)의 십여시(十如是)는 본각(本覺)의 생시(生時)의 십여시(十如是)이므로 허공(虛空)의 달과 같으니라. 이런 고로 불계(佛界)의 하나의 십여시(十如是)가 나타나면, 구법계(九法界)의 십여시(十如是)의 수중(水中)의 달과 같은 것도 하나도 궐감(闕減)없이 동시(同時)에 모두 나타나서 체(體)와 용(用)이 일구(一具)로서 일체(一體)의 부처로 되느니라. 십법계(十法界)를 서로 구족(具足)하여 평등(平等)한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이므로 허공(虛空)의 본월(本月)도 수중(水中)의 말월(末月)도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에 구족(具足)하여 궐(闕)함이 없는 고로 십여시(十如是)는 본말구경(本末究竟)하여 동등(同等)하며 차별(差別)이 없느니라. 본(本)이란 중생(衆生)의 십여시(十如是)이고, 말(末)이란 제불(諸佛)의 십여시(十如是)이니라. 제불(諸佛)은 중생(衆生)의 일념(一念)의 마음에서 나타나시므로 중생(衆生)은 이는 본(本)이고, 제불(諸佛)은 이는 말(末)이니라, 그러함을 경(經)에 가로되「이제 이 삼계(三界)는 개시아유(皆是我有)이며, 기중(其中)의 중생(衆生)은 모두 이는 나의 자(子)이니라」고 이상(已上), 부처가 성도후(成道後)에 화타(化他)를 위(爲)하는 고(故)로 적(寂)의 성도(成道)를 부르고 생사(生死)의 몽중(夢中)에서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설(說)하시느니라. 지혜(智慧)를 부(父)에다 비유(譬喩)하고, 우치(愚癡)를 자(子)에다 비유(譬喩)하여 이와 같이 설(說)하셨느니라. 중생(衆生)은 본각(本覺)의 십여시(十如是)일지라도 일념(一念)의 무명(無明)이 수면(睡眠)과 같이 마음을 덮어 생사(生死)의 꿈에 들어가서 본각(本覺)의 이(理)를 잊고 아주 약간 과거(過去)·현재(現在)·미래(未來)의 삼세(三世)의 허몽(虛夢)을 꾸느니라. 부처는 생시(生時)의 사람과 같으므로 생사(生死)의 꿈에 들어 가서 중생(衆生)을 놀라게 하시는 지혜(智慧)는 꿈속의 부모(父母)와 같고 꿈속에 있는 우리들은 자식(子息)과 같으니라. 이 도리(道理)로써 실시오자(悉是吾子)라고 말씀하셨느니라. 이 이(理)를 생각하여 이해(理解)하면 제불(諸佛)과 우리들과는 본(本)에 있어서도 부자(父子)이고, 말(末)에 있어서도 부자(父子)이며, 부자(父子)의 천성(天性)은 본말(本末)이 같으니라. 이런 사유(事由)로 기심(己心)과 불심(佛心)과는 다르지 않다고 관(觀)하는 고(故)로 생사(生死)의 꿈을 깨고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로 돌아옴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지금 나의 신상(身上)의 천성(天性)·지체(地體)이며, 괴로움도 없고, 장애(障碍)도 없는 중생(衆生)의 운명(運命)이고 과보(果報)이며 명가(冥加)이니라. 대저 생각해 보건대 꿈의 때의 마음을 미혹(迷惑)에 비유(譬喩)하고, 생시(生時)의 때의 마음을 깨달음에 비유(譬喩)하였다, 이로써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각오(覺悟)함에 흔적도 없는 허몽(虛夢)을 꾸고서, 마음이 괴로워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 보면, 자신(自身)도 집도 잠자리도 한 곳으로서 다르지 않으며 꿈의 허(虛)와 생시(生時)의 실(實)의 이사(二事)를 눈으로도 보고·마음으로도 생각하지만 곳은 오직 한 곳이니라. 몸도 오직 일신(一身)으로서, 이(二)의 허(虛)와 실(實)의 일이 있으니 이로써 알았노라. 구계(九界)의 생사(生死)의 꿈을 꾸는 나의 마음도 불계상주(佛界常住)의 생시(生時)의 마음도 다르지 않으며, 구계생사(九界生死)의 꿈을 꾸는 곳이 불계상주(佛界常住)의 생시(生時)의 곳으로서 변(變)함이 없고, 심법(心法)도 다르지 않으며, 재소(在所)도 다르지 않지만 꿈은 모두 허사(虛事)이고, 생시(生時)는 모두 실사(實事)이니라. 지관(止觀)에 가로되「옛날 장주(莊周)라는 자(者)가 있어, 꿈에 호접(胡蝶)이 되어 일백년(一百年)을 지났는데, 고(苦)는 많고 낙(樂)은 적으며, 땀투성이가 되어 놀라서 보니, 호접(胡蝶)으로도 되지 않고 백년(百年)도 지나지 않았으며, 고(苦)도 없고 낙(樂)도 없고, 모두 허사(虛事)이며 모두 망상(妄想)이니라」이상(已上)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