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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의 세계를 그린 동시의 재미와 의의
—정지용과 윤동주의 동시를 중심으로
이승하
1. 동시의 역사 개관
아동문학이 성장세를 넘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창비ㆍ문학과지성사ㆍ비룡소ㆍ문학동네ㆍ상상 등 국내 주요 출판사들이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던 예림당ㆍ아동문예ㆍ우리교육ㆍ시공주니어ㆍ웅진주니어 등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아동문학 시장에 뛰어든 것도 전성기 구가에 일조하였다. 시집과 소설집 판매가 저조한 이 시대에도 아동문학은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동화에 비해 동시는 판매량이 낮다고 생각해 왔는데 굴지의 출판사들이 모두 동시집을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만큼 동심의 회복을 중요시하게 된 시대인 것이다. 소설가 이문구는 생전에 동시집을 여러 권 냈고 최승호 시인이 『말놀이 동시집』을 내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인 중 김용택ㆍ도종환ㆍ문인수ㆍ장옥관ㆍ안도현ㆍ김기택ㆍ이안ㆍ신현림ㆍ박성우ㆍ이정록ㆍ함민복ㆍ송찬호ㆍ김륭ㆍ유강희ㆍ함기석 등이 동시집을 냈다. 2003년부터 나온 동시 전문 문예지 『오늘의 동시문학』이 50호를 내고 문을 내리자 『동시마중』(2010년 창간 격월간지)이 고군분투하게 되었는데 『동시 먹는 달팽이』(2018년 창간 계간지), 『동시발전소』(2019년 창간 계간지), 『올챙이 발가락』(2021년 창간 계간지)가 연이어 나오는 것만 봐도 동시의 융성함을 알 수 있다.
이재철의 『아동문학개론』을 참고하여 동시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다.
이의가 있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1908년 『少年』 창간호에 실렸던 최남선의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동시 역사의 기원으로 삼는다. 바다가 소년에게 말을 건네는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1925년 무렵까지는 창가조의 동요가 대세였는데 손진태가 「옵바 인제는 돌아오서요」(1926, 『어린이』)를 동시라는 장르명으로 발표하면서 동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30년을 전후하여 형식면에서 3ㆍ4조나 7ㆍ5조의 정형을 벗어났고, 1933년 간행된 윤석중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로부터 사람들의 뇌리에 시와는 다른 동시라는 것이 심어졌다.
국내 아동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이는 방정환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고, 귀국하여 1923년에 『어린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아동문학의 보급에 앞장섰다. 그는 아동문학을 통해 아이들에게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펴나갔으며, 우리말과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활동만 하지 않았더라면 애국자와 민족운동가, 혹은 계몽운동가로 자리매김이 되었을 것이다.
이재철은 아동문학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내용면에서는 동시와 동화시로, 형식면에서는 동시와 산문동시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동화시란 동화적인 내용을 담은 동시로서, 시의 형식과 동화의 내용을 복합한 것이며, 이야기가 들어가므로 자연 그 형식이 길어지게 마련인데 윤석중의 『잃어버린 댕기』에 몇 편의 작품이 보이며 동화시만으로 작품집을 낸 것은 이석현의 『메아리의 집』(1966)이 효시였다.
산문동시는 산문시와 동일한 형식을 가진 동시로, 연이나 행의 구분이 없는 산문체로 된 동시이다. 유경환의 『아이와 우체통』(1957), 신현득의 『고구려의 아이』(1964), 박경용의 『애드발룬이 띄우는 하늘』(1966) 등이 산문동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원수ㆍ박영종(박목월)ㆍ강소천 등이 자유로운 형식의 동시를 썼고, 광복 이후에는 권태응ㆍ박화목ㆍ어효선 등이 활동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뒤 1950년대에는 최계락ㆍ이종택ㆍ이종기ㆍ박홍근 등이 활약하였고, 1950년대 말에 등단한 유경환ㆍ신현득ㆍ김종상ㆍ박경용 등이 본격적으로 동시운동을 전개하면서 이후 동시문학의 꽃을 피웠다.
『어린이』의 뒤를 이어 『신소년』 『새벗』 『아이생활』 『별나라』 등이 창간되었고, 윤극영ㆍ마해송ㆍ강소천ㆍ한정동ㆍ이원수ㆍ어효선ㆍ최요안 등이 아동문학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 이전에 정지용이 동시를 많이 썼다는 사실과 윤동주가 살아생전에 몇몇 어린이잡지에 동시를 발표했던 동시작가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아동문학사에서 정지용과 윤동주가 논외가 된 것은 시집 속에 동시가 들어 있기 때문인데, 지금부터는 두 시인도 아동문학의 역사 혹은 동시의 역사를 다룰 때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2. 우리 옛 동시의 세계
한시 중에 동시의 기원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쓴 한시를 이 땅 최초의 동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방아를 찧을 때마다 콩이 사방에 튀는 것이 신기하여 아래 시를 썼다. 김시습이 유모의 등에 업혀 보리방아 찧는 걸 보고 쓴 시라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無雨雷聲何處動 비도 천둥소리도 없는데 어디선가 움직이는 게 있어요
黃雲片片四方分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에 흩날리고 있어요
몇 살 때 쓴 한시인지 모르겠는데 세 살 때 썼다는 설이 있다. 한자를 아무리 빨리 배웠을지라도 세 살은 믿기 어렵고 대여섯 살쯤 썼을 것이다. 아래는 이황이 열다섯 살 때 쓴 시라고 한다. 이런 것도 동시의 기원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負石穿沙自有家 돌을 등에 지고 모래 파는 게는 스스로 집이 된다.
前行却走足偏多 앞으로 가고 뒤로 가는 게는 발이 많기도 하다.
生涯一掬山泉裏 일생을 조그만 샘물에서 살아가는 게는
不問江湖水幾何 강과 호수의 물이 얼마나 될까 묻지 않는다.
아래의 짧은 시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강항(姜沆, 1567~1618)이 다섯 살 때 쓴 시라고 한다.
脚到萬里心敎脚 다리는 만리를 간다. 그렇게 시키는 것은 마음이다.
어린아이가 쓴 시치고는 삶에 대한 고도의 이해력과 놀라운 통찰력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강항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갔지만 억류 중 일본의 문인들과 두루 교류하였고, 귀국할 때 외교적으로 노력하여 일본에 함께 끌려갔던 여러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 경험과 현지 사정을 기록한 『간양록』을 귀국 후 냈다. 강항을 통해 주자와 정자의 사서삼경 주해가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고 이는 에도 막부에 성리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과 강항이 포로 생활을 했던 일본 오즈시는 2001년부터 자매 결연해 교류하고 있다. 오즈시 중심가에는 홍유 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져 있는데 현창비 옆의 안내문에는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적혀 있다.
아래 두 편의 시는 선조와 광해군 때의 문신 박엽(1570~1623)이 쓴 것이다.
燈入房中夜出外 등잔불이 방에 들어오면 밤은 밖으로 나가는구나.
절묘한 시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동시 수준이 아니라 성인시 이상 가는 훌륭한 시다. 박엽이 과연 어릴 때 썼는지,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시가 있다.
主人山上山 客子口中口 주인은 산 위의 산이고요 손님은 입 속의 입이에요.
이 한시는 무슨 뜻이냐 하면, 산(山) 위의 산(山)은 출(出)이고 입(口) 속의 입(口)은 회(回)니 외출과 회귀를 갖고 파자 놀이를 한 것으로, 주인이 외출하여 집에 없어서 손님이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뜻이다. 박엽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광해군 때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했는데 북변의 방비를 공고히 해 여진족으로부터 해 외침을 당하지 않게 했다. 그러나 훗날 평안감사로 있을 때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이 탄원, 결국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한시 중에도 이렇게 아이가, 아이의 마음으로 쓴 것들이 있었고, 이런 한시를 동시로 쳐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 정지용의 동시
정지용 시인은 1924년에 일본 도쿄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에 유학을 갔는데 1926년 6월 창간된 유학생 동인지 『학조』에 아주 모던한 「카페ㆍ프란스」 등 시를 3편, 동시를 5편, 시조를 1편 발표한다. 그는 시 창작의 출발지점부터 동시를 썼던 것이다. ‘대학생이 동시를 쓰다니’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그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중,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까까머리.
삼월 삼질 날,
질나라비, 훨, 훨,
제비 새끼, 훨, 훨
쑥 뜯어다가
개피 떡 만들어.
호, 호, 잠들여 놓고
냥, 냥, 잘도 먹었다.
중,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상제로 사갑소.
—「딸레와 아주머니」 전문
이 동시는 시집에 실을 때는 「삼월 삼질날」이란 제목을 고쳤다, 마지막 행에 나오는 ‘상제’는 절의 상좌上佐로 동자승을 가리킨다. 머리카락이 아직 나지 않은 아기 동생을 향한 손위 형제의 동생에 대한 질투심이 느껴진다. 삼월 삼짓날 쑥을 뜯어다가 개피떡을 만들어 동생이 잘 때 먹었다는 것도 그렇고, 내 동생이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으니 절간으로 보냈으면 좋겠다는 것도 부모님의 내게 대한 관심과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긴 데서 오는 질투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 질투심이야말로 솔직한 동심이리라.
우리 옵바 가신 곳은
해님 지는 서해 건너
멀리 멀리 가셨다네.
웬일인가 저 하늘이
피ㅅ빛보담 무섭구나!
날리 났나. 불이 났나.
—「서쪽하늘」 전문
하늘 우에 사는 사람
머리에다 띄를 띄고,
이땅우에 사는 사람
허리에다 띄를 띄고,
땅속나라 사는 사람
발목에다 띄를 띄네.
—「띄」 전문
두 편 동시 모두 동시로 보기에는 조금 어려운 지점이 있다. 오빠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도 그렇고, 저녁노을이 핏빛보다 무섭다고 하는 것도 그렇다. 하늘 위에 사는 사람이 머리에다 띠를 띤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는 시편이다.
오리 목아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목아지는
자꼬 간지러워.
—「湖水 2」 전문
손바닥을 올리는 소리
곱드럏게 건너간다.
그뒤로 힌 게우가 미끄러진다.
—「湖面」 전문
비ㅅ방울 나리다 누뤼알로 구을러
한밤중 잉크빛 바다를 건늬다.
—「겨을」 전문
‘게우’는 거위다. ‘누뤼알’은 우박 알이다. 바다 위로 밤이 걸어온다고 하니 동시라고 볼 수 없지만 오리가 호수에 동그란 파문을 일으킨 것을 오리의 목이 호수를 감는다고 한 「호수 2」 같은 시는 동시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한 백년 진흙 속에
숨었다 나온 듯이,
게처럼 옆으로
기여가 보노니,
머언 푸른 하늘 알로
가이 없는 모래밭.
—「바다 2」 전문
외로운 마음이
한종일 두고
바다를 불러──
바다 우로
밤이
걸어 온다.
—「바다 3」 전문
시인 특유의 감각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이런 짧은 시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지양하고 정지용 식의 ‘우리 것 찾기’에 나섰기에 쓴 것이라 여겨진다. 『정지용시집』에는 『신소년』이나 『어린이』에 발표한, 출전이 확실한 동시도 여러 편 싣는다.
산넘어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꾹이 영 우에서
한나잘 울음 운다.
산넘어 저쪽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 맞아 쩌 르 렁!
산넘어 저쪽에는
누가 사나?
늘 오던 바늘장수도
이 봄 들며 아니 뵈네.
—「산넘어 저쪽」 전문
이 동시는 『신소년』 1927년 5월호에 발표된 것으로서 김동환의 「산 넘어 남촌에는」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쓴 동시는 아니지만 어린이 잡지에 실렸고, 시어 선택과 표현이 단순한 것으로 미루어 동시로 간주할 수 있다. 같은 지면에 실린, 더욱 ‘확실한’ 동시가 있다.
할아버지가
담배ㅅ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믄 날도
비가 오시네.
—「할아버지」 전문
일기를 알아보고 도롱이를 쓰고 나간 것인데 아이가 보건대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쓰고 나가자 비가 온다. 그날의 일기를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에 감탄한 아이의 시선으로 쓴 전형적인 동시다. 이런 동시를 여러 편 자신의 시집 중간중간에 넣음으로써 정지용은 한국시문학사상 아주 희유한 예를 보여준 것이다.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담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 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감고 한밤 자고 나면
이실이 나려와 가치 자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해ㅅ빛이 입마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 시약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깩!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고리 고놈이다.
—「해바라기 씨」 전문
정지용의 이 동시는 『신소년』 1927년 6월호에 발표된 것으로서 화자가 소년이다. 해바라기 씨를 담모롱이 밑에 심어놓고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방해하는 것들이 많아서인지 도무지 피어나지를 않는다. 장난꾸러기인 화자의 성격을 잘 살려 썼고 내용이 무척 해학적이다. 정지용 시인을 현대 동시의 시발점에 있는 이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어린이』 제4권 10호(1926. 11)에 발표했다 시집에 넣은 동시를 보자.
새삼나무 싹이 튼 담 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 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의 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이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에서 온 새」 전문
도회지에 온 새가 우는 것이 산에 두고 온 형제와 친구들 생각이 나서라고 한다. 어른이 어린이의 시각으로 쓰는 것, 어린이를 독자로 상정하고 쓰는 것이 동시라고 한다면 이 시는 동시에 정확히 부합한다. 애초의 발표지면은 모르지만 첫 시집에 실린 아래의 작품도 영락없이 동시다.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왼통 빩애젔네.
내사 아므치도 않다.
호 호 칩어라 구보로!
—「바람」 전문
바람이 불어 귀가 빨개진 아이가 바람에게 묻는다. 네가 내게 오는 바람에 귀도 코도 손도 빨갛게 되었으니 너는 내가 그렇게 좋으냐고. 그런데 아이는 이 정도 추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큰소리친다. 호호 웃기까지 한다. 왜? 구보를 하면 추위를 떨쳐버릴 수 있으므로. 최소 10편의 동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바로 『정지용시집』이다.
4. 윤동주의 동시
윤동주가 정지용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탐독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윤동주 소장본 『정지용시집』이 증명하고 있다.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는 “도처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고, 곳에 따라서는 적절한 촌평도 가해져 있는 등, 그가 얼마나 정독한 책인지를 알 수 있다.”고 썼다. 정지용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애독해 마지않은 것은 연희전문 친구들이 증언한 바도 있다.
윤동주가 발표한 최초의 동시로 알려져 있는 「조개껍질」을 쓴 것이 1935년 12월이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10월에 『정지용시집』이 나왔다.
아롱아롱 조개껍대기
울언니 바다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대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대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잃은 조개껍대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대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소리
—「조개껍질」 전문
조개껍질은 2개가 있어야 짝을 이루는데 하나가 사라진 다른 하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하나만 있는 조개껍질처럼 물소리, 특히 바닷물소리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왜 여기는 바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북쪽 나라이기 때문이다. 화자 아이의 고향마을이 바닷가에 있었나 보다. 그리고 조개의 고향인 남쪽은 3면이 바다인 조선이고 화자는 북간도에 있다. 즉, 이산가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동시를 시발점으로 하여 윤동주는 1936년부터 『가톨릭소년』이나 『아이생활』 『어린이』 등에 동시를 간간이 발표하는데, 정지용의 시집이 그랬듯이 시집 준비를 하면서 동시를 중간중간에 싣는다. 동시라는 구분이 없다. 윤동주는 시 끝에 쓴 일자를 써 놓는데, 아래 2편은 1936년 1월 2일에 쓴 것이다.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눈」 전문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 걸.
—「참새」 전문
1936년에 『카톨릭소년』에 발표한 두 편의 동시다.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심리상태를 잘 파악하여 이와 같이 재치 있는 동시를 쓰던 윤동주는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현실로 눈을 돌린다.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 전문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해바라기 얼굴」 전문
앞의 동시는 고아 신세가 된 형제 이야기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만주로 돈 벌러 가서 영 오질 않는다. 오줌싸게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형은 철이 들었지만 언제까지 고아처럼 살아가는 이 상태가 이어질까. 뒤의 동시는 누나를 불쌍히 여기는 동생이 화자다. 누나는 공장에 나가는 것일까 밭에 나가는 것일까. 무척 힘든 노동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방직공장과 군수공장에 가서 일하는 이 땅의 여성 인력이 적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이 동시는 현실 고발의 메시지까지 담보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어린이들의 굶주림에 대해 들려준 동시가 있었으니, 바로 윤동주의 동시다. 궁핍했던 당시 현실을 아래와 같이 다루고 있다.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껍질째로 송치까지
다― 나눠먹었소.”
—「사과」 전문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무얼 먹구 사나」 전문
모처럼 사과 한 개가 생긴 집의 식구는 넷.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지라 그 사과 속 고갱이까지 다 먹는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사과를 하나 먹게 되었을 때 제일 가운데 것까지 다 먹었을까. 동시는 짧지만 식민지 시대의 궁핍한 현실을 은근히 반영하고 또 이를 비판하고 있다. 뒤의 동시는 별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별나라는 저승이고 별나라 사람은 죽은 자이다. 산 자는 먹을 것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한다. 사자는 무얼 먹고 사는지 알 수 없지만 물고기와 감자조차도 없는 현실에서는 도대체 무얼 먹고 살아가야 하는가? 동시임이 분명한데,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교묘하게 암시하고 있는 아래의 작품을 보자.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가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편지」 전문
눈이 오지 않는 나라는 식민지 조선도 아니고 만주도 아니고 연해주도 아니다. 저승이 아니면 남쪽의 나라이다. 저승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동시로 쓴 작품에서 이런 고도의 상상력과 지적 능력을 동원해서 생각하라고 아이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누나는 눈이 오지 않는 나라에 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연구자는 일제에 의한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의 개정(1937.9.29.)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중일전쟁 이후 대량의 일본군이 중국에 투입되자 일본군은 군의 시설로 위안소 설치를 중요한 일로 삼았다. 일본군은 일본 내무성ㆍ외무성 등 중앙정부와 조선총독부ㆍ대만총독부 등 식민지 권력기관을 통해 위안부 동원을 요구하였고 이후 관련 기관의 협조로 군 위안부 동원 시스템이 작동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1938년부터 강제모집이 시작되므로 윤동주가 이 동시를 쓴 1936년과는 시차가 있다. 하지만 꼭 일본군 위안부를 염두에 두고 쓴 동시가 아니라 하더라도 1937년에 나온 『재상해일본총영사관경찰서연혁지』라는 책을 보면 1936년에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여성의 수는 900명, 남성의 수는 897명인데 여성 중 290명이 사창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자료를 백 프로 못 믿는다고 하더라도 조선에서 타국으로 먹고살 길을 찾아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상해는 매년 눈이 오지 않는데, 올 때도 좀 내리다 만다고 한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이 42세 때인 1886년에 아내 진씨와 4남 1녀의 어린 자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자동에 자리를 잡았다. 1990년쯤에 북간도 명동촌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이 모여 ‘촌’을 이루고 있었다. 북간도에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북경이나 상해 같은 대도시로 이주해 갔을 것이다. 마카오나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지로 내려간 ‘누나’가 있다면 편지를 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이 아주 교묘하게 그려져 있는 동시가 바로 「편지」다.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에 나오는 어린이는 해맑고 천진하기보다는 쓸쓸해 하고 아파한다. 세상 풍파에 갖은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 시적 자아는 차라리 어른 쪽에 가깝다. 그런 윤동주 동시의 가장 큰 두 가지 주제는 이향(離鄕)의 쓸쓸함과 경제적 빈곤이다.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는 비록 동시이기는 하지만 1930~40년대에 나온 어떤 시작품에 못지않은 현실비판의식을 지니고 있다. 「아우의 인상화」나 「트루게네프의 언덕」 「기왓장 내외」 「애기의 새벽」 「햇빛ㆍ바람」도 그렇고, 아이들의 밝은 꿈을 그리기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암담했기에 이런 슬픈 동시를 계속해서 썼던 것이리라. 평범한 일상에서 가져온 소재를 아이다운 엉뚱한 생각에 담은 전형적 동시도 있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동시만 보더라도 윤동주는 현실을 몰각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든 동시대인들의 아픔을 보듬고 증언하려는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의 편린이 내보이는 동시를 썼다. 게다가 어린이도 읽고 어른도 읽을 동시를 통해서 실현했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
교토의 도시샤대학 교정에는 두 시인의 시비가 앞뒤로 서 있다. 윤동주 시비가 앞에 있고 뒤에 정지용의 시비가 있다. 윤동주의 시비에는 시 「서시(序詩」가, 정지용의 시비에는 「압천(鴨川)」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압천은 동지사대학 이마데가와 교정 근처에 있는 가모가와 강의 한자 표기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대학 교정에도 유학생 2명의 시비를 나란히 세워놓은 예는 없다. 1942년 3월에 일본에 가서 4월 2일에 도쿄의 릿쿄[立敎]대학에 입학, 잘 다니던 윤동주였다. 1924년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한 정지용을 흠모하여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그해 10월 1일부터 도시샤대학에 다닌 윤동주는 전학을 갔기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나이 차는 15년이고 정지용이 18년 선배다. 지금도 교정에는 두 사람의 시비가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있다.
[출처] 정지용과 윤동주의 동시|작성자 이승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