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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
불교의 도입은 씨족 중심적 세계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도입을 의미하였다. 불상으로 뚜렷하게 형상화된 숭배대상이 생겨났고 세속인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승려들과 승가 공동체, 심오한 철학적 사상을 담은 경전들, 계율에 근거한 새로운 보편적 윤리관, 그리고 건축 공예 학문 서예 등 대륙의 문물이 함께 들어온 것이다.
삼국의 불교전래
고구려 소수림왕2년(372년) 중국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順道라는 승려와 불상과 경전을 보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374년에는 아도(阿道)화상이 왔으며 이듬해에 최초로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웠다. 이것이 한국 불교의 최초의 사원이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년)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와서 불법을 전했으며 신라는 눌지왕 때(417-458) 이미 불교가 들어 왔으나 국가적 공인을 받지 못하다가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 때(527년)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는 인과로 교시하고 화복으로 설유하였다 한다. 소수림왕에 뒤이은 18대 고국양왕은 불법을 국가적으로 권장하였으며 19대 광개토대왕은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용수의 중관사상을 받아들인 고구려의 승랑(僧朗)이나 인도에서 계율에 관한 경전을 가져오고 이를 번역한 백제의 겸익과 같은 승려들의 이야기라든지 일본에 불법을 전해준 승려들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고구려는 승랑이 삼론에 탁월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삼론을 성실론과 완전히 분리한 승려였다고 하고 혜관은 길장에게서 삼론을 배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므로 고구려는 삼론학이 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龍樹의 중심사상은 {中觀論}에 있으며 그 사상을 체계화한 것이 {中論} 4권, {十二門論}, 그리고 용수의 제자 제파(提婆)의 {百論} 一卷 등을 합한 三論思想이다.)
백제의 불교에 대해서도 율학이 강하였다는 정도이다. 백제 율종의 비조인 겸익은 중인도의 상가나 대율사에 이르러 5년간 범문을 배우고 율부를 깊이 공부하였다. 성왕 4년(526년) 귀국한 겸익은 인도에서 가져온 법본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 백제는 한편으로 삼론 천태 열반학도 있었으며 백제 말엽 무왕 때는 미륵사를 건립함으로써 미륵신앙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익산의 미륵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무왕이 용화산 사자사로 참배하러 가다가 그 산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을 발견하였다. 왕은 그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미륵사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용화세계의 미륵불의 삼회설법을 표시하여 불전석탑등을 모두 삼소로 배치하였다. 미륵사의 창건이념은 미륵불의 세계를 백제에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미륵이 앞으로 올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가 미륵이 도래한 세상이라는 미륵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불교
신라는 불교의 도입부터가 삼국 가운데 뒤떨어졌고 그 도입과정도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토착신앙으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극복하고서야 가능하였다. 법흥왕은 이차돈과 더불어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天鏡林이라는 무속신앙의 본거지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자, 거짓 왕명을 발하여 절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이차돈을 죽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때 나타난 이적으로 불교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어떻든 왕의 명을 거스르는 자는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귀족에게 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러고도 7-8년 뒤에야 본격적이 사찰 건립작업을 할 수 있었고 그러고서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서야 흥륜사(興輪寺)라는 이 절이 완성된다. 한편 그간에 불교도 공인되었다.(이차돈의 사형이 집행된 해는 법흥왕 14년(527년)인데 이 때 처음 터를 닦고 22년(535년)에 천경림의 나무를 크게 베어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진흥왕 5년(544년)에 완공되었다. 이민수 역, 삼국유사 245-254)
불교의 공인 이후 신라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불법의 수호자이자 전륜성왕으로서 왕은 귀족들의 합의체적 국가 운영방식을 넘어 왕권을 강화하고 왕 중심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은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하고 스스로도 말년에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승가의 일원이 되었고 왕비도 뒤따랐다. 이것은 왕법과 불법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로서 국가종교로서의 불교의 위치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진흥왕은 국가적 사찰인 황룡사를 지었으며, 왕자들의 이름을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이 지닌 보물인 금륜 동륜이라 지어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전체가 불교 정신에 입각해서 호국운동적 성격의 불교활동을 벌려 나가기도 하였다. 백고강좌(百高講座)와 팔관재회(八關齋會)는 그 예가 될 것이다. 백고강좌란 {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입각하여 거국적인 법회를 보는 것이다. 인왕경은 국토를 지키고 국난을 퇴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국난의 근본원인은 각자의 마음이 어지럽기 때문이며(心亂) 심난의 원천은 鬼神의 장난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국난을 일으키는 百部諸神과 千部諸神을 위안 선도하기 위하여 諸有佛像(佛寶)과 百菩薩像과 四部大衆像(僧寶)을 모시고 仁王經(法寶)을 강독케 하는 법회를 백고강좌라 하였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도록 요구되었으며 그 방법으로 불교의 계율 가운데 기초적인 것들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진흥왕 때는 八關齊會라는 단체를 만들어 법회를 보게 되었다. 승려들이 주체가 되어 팔관회를 거행하였고, 계를 지키고 악을 범하지 않도록 설하였다.
신라는 늦게 불교를 받아 들였지만 불교를 매우 숭상하였다. 신라불교의 중요한 특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신라불국토 사상이었다. 신라는 전불들과의 인연이 있는 전불유연(前佛有緣)의 국토이며 신라야말로 참된 가장 뛰어난 불국토이며 나아가 신라 이대로가 불국토라는 현실정토 사상을 가졌다. (전불가람터 일곱 곳, 황룡사 장육불상) 신라에는 많은 부처와 보살들이 머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양양 낙산은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머무는 진신상주처로서 의상이 바닷가의 암굴 속에서 관음을 만났고 그 가르침에 따라 낙산사를 세웠다고 한다든지,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인데 자장법사가 그 곳의 문수진신을 만나보았으며, 태자 보천과 효명 형제가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 동서남북중의 오대에 각각 일만의 관음 세지 지장 나한 문수 등의 오만진신이 몸을 나타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라는 신라인들의 성불이 이루어지는 곳 즉 현신성불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백월산 남쪽의 이성(南白月二聖)으로 명명되어진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미륵불과 미타불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 예이다.
불교 사상에 있어서는 의상이전에는 법상종이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주류를 이루었다. 의상이 화엄종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신라불교는 화엄종 중심으로 바뀌어 간다. 원효와의 당유학길에서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시는 사건으로 중도에 돌아왔지만 의상은 당으로 건너가 화엄종 2대 조사인 지엄의 문하에서 수제자가 되었다. 당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 귀국에 해동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의상의 화엄철학은 華嚴一乘法界圖를 남겼다. 이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상태인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지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210자의 글자로 구성되어있다.
화엄철학에 있는 이법계 사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의 4법계는 10현문 속의 모순과 무질서를 조화와 안정의 세계로 이끄는 변증법적 세계관으로, 이것이 그 유명한 법계연기설이다. 법계연기설이 뚜렷이 표현된 것으로 흔히 다음의 구절이 말해진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안에 모두가 들어 있고 많은 것 안에 하나가 들어 있다.
一卽一切多卽一 하나는 모든 것을 전제로 이루어지며, 많은 것은 하나를 전제로 성립한다.
一微塵中亦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하나의 티끌 속에 세계가 담겨 있고, 모든 티끌 속 또한 그러하다.
이런 내용의 화엄종을 단순히 종교적 이념만을 표방한 것으로도 당시의 지배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념만으로도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중대와 하대의 화엄사상의 내용이 다르지 않았음에도 종단과 왕실의 유착은 하대에 들어 일반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종정유착(宗政癒着)이 중대의 사상적 경향 위에서 성장하였으며 화엄승들이 정치적 현실 속에서 지배집단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구로서의 기능을 어느 정도 하였다는 점에서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화엄종의 법계연기설을 해석해보면
세계(一切)란 복잡(多)하면서도, 어떠한 사물일지라도 모두가 불성이나 진여(一, 理)와 관계가 있다. 사물 각각(事事)은 불성과 진여의 한 측면을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영상이자 체현도 된다. 체현된 개별존재(事)와 일반원리(理)가 조화(無碍)되며, 더 나아가 개별 존재들(事事)끼리도 안정과 조화를 이룬다.
이것을 사회와 연관을 시켜 해석하면, 신도와 승려, 농민과 지주, 민중과 지배계급은 사회관계의 그물(緣起)에서 빠뜨릴 수 없는 그물코가 되어, 모든 사람이 원만무애하게 평화공존하는 생활(事事無碍法界)를 영위하는 것이 법계연기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엄의 사유는 이 이념을 수용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빛을 발한다. 통합전쟁의 긴 전역을 거치면서 황폐화된 농업의 복구와 안정적 경작에의 희구, 사회적 긴장의 조절이 필요하였다.
법계연기설은 절대적 존재(一)가 전제된 조화와 평등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당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상반된 현상과 세력관계의 협동적 상호보완적 상호요구적 관계의 그물(事事無碍緣起)에 관한 치밀한 논리적 사고를 일깨워 주었다.
원효
원효(617-686)는 진평왕 39년에 押梁君 南佛地村 薛氏門中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妚)장에서는 "學不從師"라 하여 일정한 스승이 없이 공부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으로 불법을 구하러 가던 중 당항성을 지나다가 한 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먹는다는 것이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이튿날 일어나 보니 옆에 해골이 뒹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부처의 '심생고 종종법생 심멸고 종종법멸'의 가르침을 크게 체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의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과 헤어져 돌아온다.
원효는 그 무애행으로, 대중불교를 실천한 이로, 더 나아가 불교의 경전들을 하나로 설명하고자 하는 회통의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발달되었던 불교의 여러 파들은 각자의 주장이 진리라고 하며 다투었다. 그의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이러한 각 교파들의 철학을 통합하고자 한 것으로 원효의 주장은 각 종파의 철학들은 불교의 진리의 어떤 측면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 자체가 모든 것일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원효가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당시 중국의 교학적 불교가 크게 보아 중론학과 유식학으로 나누어져 있던 까닭으로 이 양자를 화쟁하는 일이었다. 원효는 중론이 사물이 비어있는 면(空性)을 강조하였다면 유식은 현상 그대로의 사물의 개별성(有性)을 강조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각각은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근본 부분(체)와 언어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용)을 보완적으로 밝히고 있다고 주장한다. 원효가 이 양파를 통합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경전이 {대승기신론}이며 여기에 원효가 주해한 것이 원효의 {大乘起信論疏}이다. 불경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이 중국에도 알려져 원효는 중국 화엄종의 3대조사인 법장(法臟)은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달 때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원효에게 서면질의를 하였다고도 한다.
신라에는 원효이전에 이미 민중지향적 불교와 불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귀족생활을 포기하고 민중과 20년을 같이 지낸 혜숙(惠宿), 노비의 아들이면서도 교학수준이 높아 원효가 주석서를 쓸 때마다 물어 보러 갔다는 혜공(惠空), 남루한 차림으로 구리 밥그릇을 두들기면서 저잣거리를 활보하였다는 대안(大安) 민중 속에서 말없이 실천과 수행을 한 사복(蛇福) 등의 승려들이 있었다. ("태어나지마라 죽는게 괴롭다. 죽지마라 태어나는게 괴롭다." "죽음도 태어남도 괴로워라" 활리산 기슭 환하고 깨끗한 땅 속 세계)
도당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바로 승복을 벗어던지고 세속으로 돌아간다. 요석공주와의 짧은 결혼 생활 후 원효는 무애박을 매고 무애가(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를 부르면서 저자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술집과 창녀집을 드나들면서 광대들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산 속에서 좌선을 하기도 하고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경전의 주석서를 쓰기도 하였다.
원효는 파계후 자신을 거사(卜姓居士)라고 부를 뿐 스님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민중들에게 가르쳤던 불교신앙은 정토신앙이었다. 당시 교학적 신라 불교의 어려운 내용들을 민중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원효는 민중들이 나무아미타불만 암송하게 하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불교가 대중적 수준에서 확산되고 받아들여지는 데는 원효의 이러한 노력의 공이 지대하였다.
정토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광덕과 엄장이 서방정토에 갔다는 이야기며 남산 피리촌 피리사에 살며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했다는 이름없는 승려의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義湘
의상(625-702)은 당에 들어가(661) 입당한 다음해 662년 終南山 至相寺의 智儼和尙에게 7년간 수학하면서 화엄사상을 익혔다. 지엄의 뒤를 이은 賢首法藏과는 지엄의 쌍벽을 이루는 제자로서 스승 지엄은 이들 가운데 의상에게는 지엄의 뜻을 소유하였다는 의미에서 義持라는 별호를 주었고 현수에게는 지엄의 글을 소장하였다는 의미에서 文持라는 별호를 주었다. 의상과 법장 사이의 교류는 의상이 귀국한 후에도 계속되어 끊임없이 서신왕래를 하였다.
의상은 화엄사상을 가르치는 일, 제자를 기르는 일에 치중하여 원효처럼 많은 저작을 남기지 못하였다. 의천의 저작으로 현재까지 전하여지는 것은 화엄일승법계도, 법계도기, 백화도량발원문 등이 있다.
의상은 지엄의 화엄교학을 전수받는 한편으로 같은 종남산에 거주하면서 계율사상을 전파하던 남산 律宗의 初祖인 道宣律師와 깊이 교류하였다.(삼국유사 권4 前後小將舍利條: 宣律師, 天供하늘의 공양, 齋에 의상 초청, 神兵) 의상은 도선에게서 영향을 받아 수행자 일반을 위한 大乘戒行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의상은 說行을 중시해 도선을 청하는 것 외에는 정근 수련하였으며 춥고 따뜻함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였다. 또 義淨의 洗穢法(세간에서 묻은 때를 깨끗이 씻는 계행)을 행하여 수건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서서 건조하기를 기다렸다. 세 法衣와 甁 鉢을 가진 것 외에 다른 물건을 가지지 않았다.
문무왕 8년 668 화엄일승법계도를 작성하였다. 스승 지엄이 입적하기 몇 개월전의 일이다. 스승 지엄의 73印이 있었는데 의상은 이를 하나의 근본인으로 작성하였다. 이것이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이것은 총 210자 밖에 되지 않는 도형화된 글이지만 그 내용은 화엄사상을 압축하여 정교하게 잘 그려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원효 국맛)
의상은 화엄 性起論的입장에서 근본적인 일(一)을 중시하였고 그것을 통해 전체를 이해하려는 橫盡法界觀을 가졌다.
당의 唐 高宗의 신라침공계획을 알리기 위해 670(671)년 귀국(신라는 明朗으로 하여금 密壇法으로 물리치도록 함, 神遊林 사천왕사)
귀국하여 낙산사를 건립하였다. 관음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알려진 서역의 보타낙가산의 이름을 따서 관음진신처로서 낙산이라 이름한 낙산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적혀져 있다. 7일재계후 좌구를 물에 띠우니 용천의 팔부시중이 의상을 인도하여 해룡으로부터 염주한꾸러미 여의보주 한 알을 얻었다. 다시 7일재계후 관음진신을 보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신을 보기위해 바다에 몸을 던지니 관음보살이 떨어지는 의상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관음이 산정의 쌍죽이 나는 곳에 낙산사의 불전을 지을 것을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낙산사의 주존은 관음보살이 된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의상은 화엄의 법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좋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장소로서 발견한 부석사에는 이미 다른 종파의 무리들이 있었다. 선묘용이 너비 1리의 부석으로 변해 부석사지의 상공에 떠 있음으로서 권종이부의 무리500 여명을 위협하여 쫓아 내었다고 한다. 실제는 왕권과 결탁된 권력으로 절집을 빼앗은 경우일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화엄종의 사찰로서 아미타불을 모셨다는 것은 당시 일반인들의 신앙의 형태를 짐작케하며 실천적인 화엄관행을 강조한 의상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의 사례도 의상의 대승계행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문무왕21년 681년 왕은 경성을 새로이 하고자 하였다. 의상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비록 초야에 초옥이 있어도 정도를 행한다면 복업이 길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더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삼국사기 권7 문무왕21년조)"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불교
고려조에 불교가 융성하였던 것은 창건자가 불교에 의지하여 나라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에 크게 기인한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겼다. 그 내용은 불교를 국교로 하여 정교를 융성케 하라는 것이었다.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하고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은 오직 불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도와준 道詵王師의 힘을 빌고 도참에 의거 전국 사찰을 정리하였다. 신라가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웠듯이 개성에 7층탑을 세웠으며 법왕사 자운사 왕륜사 내제석원 함나사 천성원 신흥사 문수사 원통사 지장사 등 16가람을 창건하였다. 왕건은 도선의 제의에 따라 전국사원도 정리하였다. 전국을 36구로 나누어 사람의 혈맥처럼 비보처에 사원을 세웠다.
태조 왕건의 이러한 정책은 태조 26년 말 후사들을 위해 남긴다고 하면서 말한 훈요십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제1조에서 "우리나라의 대업성취는 반드시 諸佛의 호위함이 있었으니 마땅히 불교사원을 開創하여 주지를 파견, 각각 그 업을 닦게 할 것인바, 후세에 간신들이 집권하게 되면 사찰 내에도 쟁탈하는 자 있을 것이니 의당 이를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제2조에서는 "新創한 諸院은 모두 도선이 推占한 것이니 山水順逆을 거역하는 일은 地德을 못볼 것이라 함부로 창설치 말 것이요 만약 함부로 창설하면 祚業이 장구치 못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제6조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燃燈會와 八關會를 통해서 이루었던 것인바 연등은 佛에 봉사하는 것이요 팔관은 天靈 五嶽 名山 大川의 諸神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후세 간신들이 神紙에 향하는 의식의 가감을 건의하면 마땅히 切禁토록 하라."고 하였다.
훈요십조 가운데 제1조가 통일왕국의 설립의 바탕에 불교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고 3개조가 불교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왕건의 불교관에는 풍수도참사상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불교는 이로 인해 왕실을 비롯하여 전국가적인 종교로서 자리잡는 것이다.
호국신앙으로서 불교가 위치를 확립함에 따라 승단과 불사는 국가적 보호 아래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승려층은 사회의 지배세력에 흡수되어 준귀족적인 위치에 놓였다. 왕실과 귀족의 자제들도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문종의 세 왕자 숙종의 넷째 왕자가 승이 되었으며 당대의 권세가 이자연의 장남, 장손자, 둘째 증손이 승이 되었다. 해동공자라 일컬어졌던 최충의 1曾孫과 3高孫도 승이 되었다.
불교도 개인적 신앙보다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신앙이 주가 되었다. 의천에 의해 교선합일의 입장에서 오교양종으로 정리개편되기도 하였지만 신앙의 주류는 불법이 국가를 비보하고 불법의 융흥에 의해 국가가 번영한다는 데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된 경 즉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약사여래경 인왕경 등을 중시하고 이들을 강설 독송 사경하는 것이 불의 가피력을 얻는 일이라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국태민안을 비는 불사와 법회를 크게 일으켰다. 사원을 창건하거나 크게 중수하였으며 消災道場 金剛經道場 仁王般若經道場 등의 齋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특히 인왕반야경도량의 의식은 불보살상 나한상 비구상 각각 100을 받들고 100인의 법사를 청하여 송경(誦經)함으로써 내란외환을 막고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이것은 3년에 한 번씩 개설함이 원칙이었으나 때로는 수시로 행하기도 하였다. 이 때 京에 1만 州府에 2만의 僧飯이 恒例로 행해졌다.
의천
의천(1055-1101)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11세 되던 문종 19년에 출가하여 13세에 영통사에서 강학을 하였을 정도로 일찍 출가하여 일찍 교리를 터득하였다. 의천은 삼국통일 후의 정신적 통일이라는 과업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불교는 화엄종, 계율종, 법상종, 열반종, 법성종, 원융종, 선적종 등등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들을 통합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의천은 처음 화엄의 원융사상에 빠져들었으나 훗날 송에 유학하여 천태종의 본산인 國淸寺의 從諫에게서 천태사상을 배운 후 천태사상이야말로 불교종단의 상이점들을 화합시키고 상통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천태종의 宗祖 智者大師는 慧文, 慧思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론적인 敎相과 실천법인 觀心(3관: 空 假 中)을 관련시켜 천태종을 창립하였다. 지자대사는 금릉에서 법화일승의 법을 강의하고 천태산에서 일심삼관의 법을 강의하였으며 법화경을 깊이 연구하였다. 587년 光宅寺에서 법화경을 강하고 제자 관정(灌頂)이 이것을 기록하여 {법화문구} 20권을 만들었으며 수문제 13년(593) 형주 옥천사에서 {法華玄義}를 강론하였고 다음 해에는 {摩訶止觀}을 강론하였다. 여기서 법화문구와 법화현의는 敎相에 속하고 마하지관은 觀心에 속하는 것이다. 지자대사의 사상은 선의 입장에서보다 교의 입장에서 선을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천태종은 敎觀兼修를 주장하였고 여기에서 의천은 불교 사상계를 융섭(融攝)할 도구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교관겸수는 교상과 관행을 겸전한다는 의미이다. 교상은 {천태사교의}에 말하였듯이 藏敎(三藏敎, 二乘의 方便敎), 別敎(權大乘의 方便敎), 通敎(頓入融通敎), 圓敎(華嚴 法華의 圓融敎) 등의 四敎를 일승으로 만드는 교이니 곧 천태의 원융무애한 교리를 뜻한다. 어떤 가르침이나 능히 소화할 수 있다면 이는 곧 一乘의 道理에 돌아갈 수 있는 넓은 이치를 찾는 것이니 이것이 교관겸수의 교가 뜻하는 바였다. 관행은 선의 실천수행을 의미한다. 관행은 지자대사가 쓴 {마하지관}에 기초한다. 마하지관은 실천의 길을 조직적으로 설한 10권의 저서인데 그 요지는 大意 釋名 顯體 攝法 編圓 方便 正觀 果報 起敎 旨歸의 10장으로 되어 修禪行法을 가르친다. 그는 특히 止觀明靜의 특유한 방법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지관은 心一境住하는 三昧(sammadhi)의 뜻이 들어 있고 명정은 맑은 지혜를 뜻하니 선을 통한 지혜의 깨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이외에도 천태의 중요 교리인 會三歸一 三諦圓融 一念三千에 대해서는 한기두 {한국불교사상연구} 174-177참조할 것)
교관겸수의 주장에 의하면 선은 교리에 바탕하여 행해야 하며 실천적으로는 천태종의 宗祖 智者大師의 摩訶止觀 정신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 양종이 佛의 근본정신으로 볼 때 하나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天台宗이야말로 全佛敎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은 귀국후 숙종2년 천태종의 본사로서 국청사를 개창하고 주지가 되었다. 이 사찰은 고려의 국교로서 불교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예종4년에는 천태종의 僧試를 보게 되고 6대 본산을 두어 위세를 떨쳤다. 의천은 천태종 속에 불교의 각 종파를 포용하였지만 의천이 궁극적으로 시도하였던 것은 화엄과 천태의 두 사상의 융화였다. 그는 이론면에서는 화엄사상에 의거하고 실천면에서는 천태사상에 의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선을 하되 아무런 교학적 지식없이 할 것이 아니라 화엄적 교리의 이해와 천태적 지관을 행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의천은 불전과 경서 1천여권을 가지고 귀국하여 선종에게 헌상하였다. 선종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어 송 요 일본 등에서 널리 교장을 수집하게 하였다. 이것이 고려대장경의 간행으로 이어진다.
참고: 천태 사상
법화경의 절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세운 교설이 천태사상이다.
천태사상에서 말하는 제법의 실상은 一念三千이다. 한 순간 혹은 찰나의 한 마음 가운데 삼천의 세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중생의 일념 속에 일체만법 현상이 본래 갖추어져 있어서 다시 의지할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이 천태의 성구실상론(性具實相論)이다.
六道(고통의 세계: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대승에서는 聲聞 緣覺 菩薩로 나눈다. 이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 위에 천태는 佛乘을 더하여 6凡4聖의 열 세계(十界)를 상정하였다. 그런데 이 십계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각각 다른 십계가 갖춰져 있다고 본다(十界互具). 예를 들어 인간계에도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계의 세계가 갖추어지는데 여기에 법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究竟 의 열 가지가 곱해진다 그 내용은 겉모습, 성분, 체질(상성이 합해져 이루어진 중생의 주체), 역용 즉 공능, 작위 즉 조작, 업인 즉 직접적 원인, 조연 즉 간접적 원인, 결과 즉 인에 따라 얻어진 과, 과보 즉 간접적 연으로 생겨나게 된 내세의 보응, 그리고 본말구경은 본상으로부터 말보에 이르기까지의 본말이 구경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이 일천세계에 다시 삼종세간을 곱하여 삼천세계가 나오는데 오음세간 중생세간 국토세간이 삼종세간이다. 正報로서의 주체적 중생을 의미하는 중생세간, 依報로서 중생이 살고 있는 환경인 국토를 의미하는 국토세간, 일체를 구성하는 색수상행식 등의 요소로서 앞의 두 세간의 총체를 말하는 오음(오온)세간을 말한다.
이러한 전체 우주의 모습 즉 삼천의 실상이 곧 일념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일념삼천이라는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낱낱 그대로 삼천의 제법임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삼천의 제법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삼천의 제법을 갖추고 있으나 가장 관하기 쉬운 자기의 망심을 취하여 공부하는 행자에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불계에도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그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지관겸수이며 이는 천태선이라고도 불린다.
止觀의 지는 모든 심상을 정지하고 무념에 머무는 것을 말하고 관은 망상의 산란한 마음을 멈추고 참지혜가 나타나서 모든 존재의 참모습인 실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止는 定 觀은 慧라고 하며 혹은 지와 관을 寂과 照라고도 해석한다. 이 둘은 실제로는 둘이 아닌 하나로 마음을 일정한 곳에 멈추어 진리를 관찰하는 것이다.
지관의 방법으로 삼종지관 - 漸次止觀 不定止觀 圓頓止觀 - 이 있고 대표적인 원돈지관에는 四種三昧, 十乘觀法, 일심삼관 등의 正修行과 25方便의 方便行이 있다.
一心三觀이란 원융삼관이라고도 하는데 일심을 대상으로 하고 三諦가 원융함을 관하여 삼관상이 일심중에 성립함을 관찰하는 것이다. 삼제란 空제 假제 中제의 진리이다. 존재하는 것이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제, 空하나 현상적으로 없지 않으므로 假제, 가제와 공제를 상호부정하여 중제를 말하는 것이나 중제가 공제와 가제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삼제가 혼연 일체됨을 관하는 것이 삼관이며 우리 한 마음이 그대로 원융삼제라고 보는 것이 일심삼관이다.
삼천 삼제가 일심에서 생긴 것이고 또 그것에 갖추어진 것으로 파악하였으니 일심은 만상과 그 실상의 원천으로서 진여 본성 곧 본체와 상통하는 것이다.
사종삼매(四種三昧)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바른 지혜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신체의 서고 앉는 동작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常坐三昧는 앉은 채로 마음을 가라 앉혀서 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진리를 관하는 것이다. 常行三昧는 도량 내 불상의
주위를 걸으면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창하는 것이다. 반행반좌삼매는 방등삼매 혹은 法華三昧라고도 하는데 일정한 기간(삼칠일) 동안 불상의 주위를 맴돌면서 걷기도 하고 좌선도 겸하여 하는 수행이다. 비행비좌삼매는 앞의 세 삼매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삼매를 말한다.
지눌(知訥; 1158-1210)
普照國師 知訥은 호가 牧牛子이며 황해도 서흥사람으로 속성은 정씨였다. 고려 의종(毅宗) 12년에 태어났다. 지눌은 명종 3년 그의 나이 16세 때 조계종(曹溪宗) 사굴산(寐塗山)下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출가하여 具足戒를 받았다. 지눌은 한 스승에게만 배우지 아니하고 도를 쫓아가서 배웠다. 지눌은 25세 되던 해 창평의 청원사에서 머물며 10여명의 도반과 함께 결사정진하는 수도를 하던 중 {육조단경}의 한 구절 "眞如自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象 而眞性常自在(참된 자성에 생각이 일어나면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바가 있으나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진성이 항상 자재한다.)"를 보고, 마음을 바로 깨닫게 하는 좋은 말이라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훗날 사상적 연원을 六祖에 연결시키며 六祖가 머물렀던 曹溪山으로부터 曹溪宗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내었던 것은 여기에 원인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에서 "觀心과 사사무애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하며 觀心 하나만의 自內證을 통하여도 華嚴全般의 사상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구절을 발견하였다. 또 {화엄경} 出現品에 있는 [一塵含大千經卷]에 대한 이통현의 화엄론 해설 "여래지혜도 이와 같으니 중생의 몸에 구족하여 있으나 단지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이라"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지눌은 "세존이 입으로 설한 것이 敎이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禪"이라고 하며 조사의 말씀과 마음이 다름이 없음을 강조하였다.(한기두 189-194) 이처럼 지눌이 읽고 크게 깨우쳤던 전적이 육조단경과 화엄론 등이라는 것에서 선의 정신이 확고하면서도 이론적 측면도 아울러 지니는 지눌의 수행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43세가 되던 신종3년(1200)에 길상사로 옮겨 조계의 선풍을 진작하는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길상사를 송광사로 이름을 바꾸고 배후의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지눌의 결사의 이름도 정혜사에서 수선사로 바꾸어 송광사에 머물면서 결사를 통한 공부와 중생제도에 주력하였다.
당시에는 선교의 대립이 심하였다. 선을 숭상하는 자는 교를 배척하고 교를 숭상하는 자는 선을 비방하는 현상이 일어나 선교의 양가가 원수처럼 되고 있었다. 9산의 선문들은 신라에서 선이 수용될 당시 교를 위주로 하는 기성불교계에서 그릇된 사도로 평가하고 압박한 데 대한 반발로서, 선의 우위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이야말로 불가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하며 교를 배척하였다. 그들은 '석가의 스승은 眞歸祖師로서 석가의 깨달은 바가 미진한 것을 보고 77주야에 來訪하여 석가를 깨우쳤다'고 범일국사가 신라 진성왕의 禪敎에 대한 물음에 답한 말이라든지, 聖住和尙이 {능가경(楞伽經)}만 공부하다가 이것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선종만이 큰 도를 얻을 수 있다고 입당구법한 이야기라든지 하는 류의 이야기들을 내어놓음으로써 교종에 대한 선종의 위신을 높이려 들었다.({禪門寶藏錄}) 교종에서는 교외별전이란 있을 수 없는 터무니 없는 말이라며 선종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지눌은 {定慧結社文} {華嚴論節要} {修心訣} {圓頓成佛論} {看話決疑論} {眞心直說} {誡初心學人文} 등의 글을 통해 定慧雙修를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정혜쌍수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지눌은 불자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찾는가 하는 데 대해 마음을 따로 찾으려 들어서는 안되며 평소에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조작하여 번뇌를 끊으려 하거나 번뇌가 없는 것만을 장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自性의 本來理致를 悟得하여 자성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범부는 念과 知가 있음에 반해 諸佛은 생각이 없는 知(無念而知)가 있는데 이 무념이지는 자성을 순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불법에 발심하여 성불하는 날까지 오직 무념이지 즉 寂知한 자성을 떠나지 않아야만 한다고 보았다. 자성을 깨쳐 了達할 때 理智라 이름하는 바 理智의 理는 곧 寂의 경지이고 智는 곧 知의 境地이니 理智나 寂知가 다를 바 없다.
또 발심할 때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止觀이라 한다. 止란 止息諸緣한다는 뜻으로 결국 寂에 도달하여 부합하는 의미이고 觀이란 觀照性相하여 知에 冥明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止觀은 寂知와 다를 바 없다. 성불을 이룰 때 보리와 열반을 이룬다고 하지만 보리는 지가 열린 때를 의미하고 열반은 寂滅을 뜻한다고 하면 이 또한 寂知를 놓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주장은 결국 定慧의 雙修를 하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정신수행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지눌은 정혜쌍수를 하는데 있어서의 금기로서 다음 두 가지를 든다. 첫째 자성을 관조하지 않으면서 박학다문만을 능사로 삼는 것으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의지하다가 마침내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둘째 마음을 통일하여 정토극락을 염원하더라도 밖의 극락을 염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自心을 등지고 願만 있기 때문에 혹시 정토에 왕생할 수는 있으나 성불은 더욱 멀어진다.
지눌은 마음 밖에 佛이 없고 性品 밖에 法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자성을 향한 탐구를 가장 큰 과제로 삼았다. 자성을 탐구하기란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으나 그 눈으로 사물을 잘 식별하면 바른 눈을 가진 것으로 알 수 있는 것같이 자성에 비록 흔적은 없으나 사물을 바르게 보기만 하면 자성을 본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성은 어떤 것인가? 지눌은 우선 형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선하다고 말해도 부족하고 악하다고 말해도 옳지 않다. 형상이 없으므로 국한이 없고 국한이 없으므로 전체에 차며 전체에 차므로 큰 능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자성은 능히 형상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눈앞의 진실되거나 거짓된 모든 형상이 모두 이 마음의 움직임 때문이요 삼라만상 일체작용이 모두 마음의 형상으로 읽어지는 것이다. 셋째 자성을 일체를 거둬들이고 일체를 드러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거둬들이면 한 알의 티끌 속에도 다 들일 수 있고 드러내면 황하의 모래보다 더 많이 번져지는 세계이니 그 조화는 宇宙와 自心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한기두 210-214)
지눌은 위대한 선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는 선을 위주로 하긴 하였지만 한편으로 화엄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禪敎一如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통현의 {華嚴論信解義}를 요약하여 {華嚴論節要} 3권으로 만들기도 하고 화엄의 근본사상을 判釋하여 {圓頓成佛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지눌이 선가이면서도 선문만을 다루지 않고 화엄사상을 다룬 것은 화엄 천태의 원돈사상이 돈오점수의 실천수행과 그 뜻이 부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눌은 성불의 기초는 卽心是佛임을 아는 때부터라는 것을 혜능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나 自心만 찾고 事事無碍임을 모르면 佛果가 크지 않다는 주장들에 자극 받아 부처의 말씀으로서의 교와 부처의 마음으로서의 선이 어떻게 상호 부합하는가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화엄경도 成佛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성불은 단순한 悟得境이 아니라 모든 業藏이 頓畢하고 자타의 거래간에 원만한 조화를 이룰 때 성불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교의 사상은 지눌이 주장하는 頓悟漸修와 부합되었다. 지눌의 돈오는 凡夫가 다함이 없는 지혜 즉 성품(無漏智性)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알 때를 의미하였다. 공적령지(空寂靈知)를 찾는 것이 돈오라고 보았다. 이런 후에 망념이 일어나면 덜고 또 덜어서 더 이상 덜 것이 없을 때까지 더는 것이 悟後牧牛行(곧 漸修)이었다. 이러한 수행에는 그러한 이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선을 닦되 닦을 것이 없고 악을 끊되 끊을 길이 없는 때까지 定과 慧를 균등히 지녀야만 선악이 담박하고 자비와 지혜가 뚜렷하고 밝아진다고 보았다.
참고자료로 다음 두 글을 첨부합니다. 한길사의 {한국사} 가운데 사상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올려놓아 많은 사람이 쉽사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작권에 저촉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만 학습을 돕기 위한 참조 대상으로 올리는 것이니 이 정도는 허락되지 않을까 합니다.
추만호, "신라하대 사상계의 동향"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가운데 일부입니다.
채상식,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불교에서 유교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매년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6천권의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현화사 중광사 대운사 대안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절에 많은 토지를 기부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무분별하게 일으킴으로써 농번기에도 농사를 짓지 못하고 부역에 시달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사찰에 재화가 몰려드는 데 비례하여 승들의 타락이 깊어 갔다. 고려사 문종 10년 9월조에 보면 "...부역을 피하는 무리가 승려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재산을 불려먹고 살아가며 농사짓고 짐승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장사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계율을 어기고 물러나서는 청정한 검약생활을 하지 않는다. 승복은 술항아리 덮는 데 쓰이고 설법하고 염불하던 장소는 파 마늘 밭으로 할애되었다. 상인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팔며 손님과 어울려 취하도록 마시고 노니 절간이 시끄럽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게 되었다".(정의행 208 재인용)
위의 지적은 고려조 초창기에 있었던 일이지만 말기가 되어 원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도 그후 공민왕의 시기에도 승단의 타락은 깊어 갔다. 선사들이 이권을 탐하고 대토지를 점유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사찰은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대토지와 많은 노비를 차지하고 소작 양조 축산 고리대 등을 통해 물질적 이익을 꾀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10년조(1361)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불교는 본래 청정함을 숭상하는데 그 무리가 죄와 복의 설로 과부나 외로운 여인을 꾀어 머리를 깍아 여승이 되게 하며 동거하며 음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대부 집안이나 종실에 불사를 권하여 산중에 머무르게 하는데 가끔 추문이 들려 풍속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일을 일체 금지시키고 어기는 자는 엄벌해야 할 것입니다. 또 지방의 아전이나 공사 노비들이 법을 어기고 부역을 회피하여 불가에 몸을 의탁해서 손에는 불상을 들고 입으로는 염불을 하며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축내니 그 폐해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신진사대부세력은 귀족과 사찰의 대토지 소유를 혁파함으로써 당시의 재정적 위기와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유학자들은 불교가 주장하는 바의 세계관 자체를 유교적 세계관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도전이며 그는 불씨잡변에서 배불론을 전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