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塢公(道僩) 遺稿
자는 슬혜(瑟兮), 호는 죽오(竹塢·1763~1832)이다. 공은 아버지 동산공(東山公) 휘 백신(伯紳)과 어머니 장흥 임씨(任氏)의 아들로 1763년(영조 39)에 관산 방촌에서 태어났다. 존재공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나 죽오공 또한 존재공처럼 3벽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출사를 접고 임천(林泉)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래서 동사촬요(東史撮要)·고사예축사(苦四禮祝辭)·상변통사(上變通史)의 저술을 남겼다.
공이 남긴 함흥위씨파보서(咸興魏氏派譜序)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관북에서는 1689년 기사보(己巳譜)부터 1940년 경진보(庚辰譜)까지 6번의 족보를 발행했으나 남종의 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파보서는 그만큼 희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서문에 어느 때의 파보라는 시제가 없다. 공의 생졸년을 따져보면 1824년에 발행된 관북 갑신보(甲申譜)가 틀림없다. 공의 연치 61세의 글로 보인다. (유고집)
■ 咸興魏氏派譜序 (함흥위씨파보서)
「夫族之有譜尙矣追其一本之義而明其宗支之分雖百世之遠使不至於路人者譜也程子所謂收宗族厚風俗莫如譜者亶其然乎維我十二代祖四昆季第三生員公與其次孫頓氏八居於咸興其長孫瑞氏仍留於長興長興之城中南面及谷城之石谷皆其一派也南北雖遠宗支雖分而其本則一父母所生也自其一父母視之則寧有南北之遠宗支之分乎其合而焉譜道理當然而咸宗鋟譜時南宗力弱不能赴則南北之宗分而爲二而宗支之親便爲他族也此豈收宗族厚風俗之誼哉宗人得祚甫爲是慨然與其宗人道晊甫相議合南北二宗爲之一譜出物繡梓以壽其傳其志豈不嘉且尙哉雖然譜役旣重而物力甚綿則二譜不可盡其詳也是以南譜則皆記其生卒墓位而咸譜則只記其官爵閥閱以明其南北一統之義而誌其派族之盛此不無傷哉之嘆也後之覽者其或諒哉否」
〈해설〉대체로 동족끼리 족보를 갖추고 지나온 지도 오래전부터이었으니 그 동일한 근본에서 온 의(義)를 쫓아서 그 종손과 지손으로 구분됨을 밝히게 되고 백세(百世)의 먼 후대까지도 길가는 사람같이 여겨버리는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은 곧 족보(族譜)다. 송나라 정자(程子) 북송 정이(程頥)가 종족(宗族)을 모이고 풍속(風俗)을 후하게 하는 데는 보(譜)만 같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옳은 말이라 하겠다.
우리의 십이 대조는 4형제분이셨는데 세 번째 생원공이 그 차손 돈씨(頓氏)와 더불어 함흥(咸興)으로 들어가서 살았고 그 장손 서씨(瑞氏)는 장흥(長興)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장흥성(城)안과 지금의 용산면인 남면(南面) 및 곡성(谷城) 석곡에 살고 있는 일가들은 모두가 일파다. 남과 북이 비록 멀고 종손과 지손이 비록 나누어지기는 했으나 그 근본만은 동일한 부모(父母)에게서 출생하였다.
그 동일한 부모로부터 보자면 어찌 남과 북이 멀며 종손과 지손의 구분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합쳐서 족보를 하는 것이 도리(道理)상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함흥 일가들이 족보를 인쇄할 때 남쪽일가들이 힘이 약하여 같이 못하였으므로 남과 북의 종친들이 분리되었고, 종손 지손의 친족이 문득 다른 종족처럼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종족(宗族)을 모이고 풍속을 후하게 하는 정의가 있다고 하겠는가?
종인(宗人) 득조(得祚)씨는 이 점을 개탄하며 그의 종인 도질(道晊)씨와 함께 상의하여 남과 북의 두 종친들을 합쳐 오래 전(傳)해질 수 있는 동일한 족보를 만들고자 하여 자금을 거출하여 출판하려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가상(嘉尙)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기는 하지만 남쪽의 사정이 족보 일이 중함에도 불구하고 물력(物力)이 너무 약하고 보니 두 가지로 족보를 하게 되었고 그 상세함을 다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남쪽 족보에는 그 생졸(生卒)과 묘(墓)의 위치를 모두 다 기록해 두었지만 함흥 측 족보에는 단지 그 관작(官爵)과 벌열(閥閱)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으로 그 남과 북이 일통(一統)의 의(義)를 밝히고 그 파족(派族)의 성함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서글픈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으며 한탄스러운 일이다. 후일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그 혹을 양해를 해줄 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