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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일정씨 중시조 이신 형양 鄭襲明님의 石竹花(패랭이 꽃) 詩와 卒하실때의
기록을 고려사와 고려절요 등의 기록을 보충하여 기록한 동사강목을 간추려 올렸고,
또 고려시대의 문집속에 실려있는 시집을 우리 선조님과 관련있는 것 만 뽑아서 저술
하였습니다,
*형양선생의 석죽화 詩를 두고 백운거사(이규보)가 정습명의 일생을 석죽화 詩로서
평가했던,그의 詩에서 포은선생의 죽음과 집안이 몰락하는 순간,그리고 사성공 정종소의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것을 올려 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읽어 보시고, 또 시간이 되실 때 읽어보세요,
*영일정씨 중시조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을 모시는 *남성재(영일 오천면 남성리)
*고려 16대 임금 예종임금 시절에 형양(滎陽先生)선생 정습명(鄭襲明)께서 어린시절에
석죽화(패랭이 꽃)라는 詩를 지어서 궁궐 밖에서 큰 소리로 노래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나이어린 아이가 노래하는 것을 예종임금이 듣고서 감동하여 신하에게 저 아이를 불러오게
하여, 그 아이에게 묻기를,"그 詩는 누가 지은 것인고,,,"라고 하문하시니, 답 하기를,
"소인이 지은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임금은 귀하게 칭찬하시고,그래 그럼 내게 다시 한번 들려줄수 가 있겄는냐,,,라고 하시니,
곧 바로 읊조리기를,,,
石竹花[파랭이 꽃]
鄭襲明
世愛牧丹紅[세애목단홍],,, 모란꽃 아름답다 사람들 사랑하여
栽培滿院中[재배만원중],,, 집집마다 꽃밭에 가득히 심었네
誰知荒草野[수지황초야],,, 쓸쓸한 산 언덕 거친 덤풀속에
亦有好花叢[역유호화총],, 패랭이꽃 송이송이 활작 피었건만 그 고운 떨기 아는 이 없네
色透村塘月[색투촌당월],,, 쓸쓸한 파랭이 꽃이여 너의 고운 양자 마을 언덕 달빛받아
香傳롱樹風[향전농수풍],,, 그 향기 언덕에 퍼지고 바람에 날려 숲속까지 퍼져 나가네
地偏公子少[지편공자소],,네가 피어있는 곳이 궁벽하여 잘 생긴 귀공자들 찾아오지 않으니
嬌態屬田翁[교태속전옹],,, 너는 속절없이 촌 늙은이 에게 애교를 보낼수 밖에 없나보다,
나이 어린 정습명은 예종임금 앞에서 이렇게 시원하게 한 곡조 뽑아 주시니, 임금은
기뻐하여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후 정습명은 향시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별시에도 장원 급제하여,관에 올라서
내시부,를 거처서 숙위 및 근시(近侍)의 일을 맡아보는 관원으로 시문과 경문에 능통한
문신 출신을 보임받아 대상이 되었다,
東史綱目 동사강목 제8하
경신년 인종18년(송 고종 소흥10. 금 희종 천권3.1140년)
추7월 집주관(執奏官)을 폐지하고 내시별감을 줄였다.
재신(宰臣) 김부식.임원애.이중.최진.이 성랑(省郞) 최재.정습명.등과 더불어 상서
(上書)하여 당시의 폐단10여 조목을 말하고는 3일 동안을 대궐 문에 엎드렸으나,모두
회보(回報)가 없었다. 최재.등이 파직하기를 원하면서 나가지 않으니 왕이 그제야
집주관을 폐지하고 여러 곳의 내시별감과 내시원 별고 등을 줄이고는 그들에게 정무를
보도록 했는데,
유독 정습명(鄭襲明)만은 말한 바를 다 따르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았다, 우상시
(右常侍) 최관은 홀로 상서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고서 직책에 종사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니, 식견이 있는 사람은 이를 비루하게 여겼다,
정습명은 연일현(延日縣) 사람인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체격이 크고 기이하였
으며 학문에 힘써 글을 잘 지었다,일찍이 초에다가 금을 긋고 그곳까지 탈 동안에
석죽화(石竹花) 詩를 지었다,
시는 이러하다,
世愛牧丹幼--여기에서는 紅자를 幼자로 기록했네요,
위의 詩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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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죽화로 하여금,
대궐을 지키던 어떤 문지기자 그것을 외우니,예종임금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구감(狗監 한漢)나라 때 근시(近侍)의 직책이 아니면,어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아직 있는 것을 아는가?"
하고,곧 옥당(玉堂한림원의 별칭)에 보직 시키니,사람들이 40자(字)의 매개(媒介)
라고 일렸다,
東史綱目제8하
병인년 인종 24년(1146년)
2월 왕이 훙(薨)하고, 태자 현(晛)이 즉위하였다,
25일 갑자에 왕의 병환이 매우 위독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전하고,28일 정묘에
보화전(保和殿)에서 薨하니, 재위24년,壽는 38세이다,
태자가 대관전에서 즉위하니, 이가 의종이다, 처음에 왕이 태자가 경박하여 부조
(父祖)의 왕업을 계승해 낼 수가 없으며,왕후 임씨도 또한 차자 호(皓)를 사랑하여
장차 태자를 폐하고 새로 태자를 세우려고 했는데,
시독(侍讀:태자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마음을 다하여 보호했던 까닭으로 폐하지
않게 되었다, 인종임금이 병환에 있을 적에 태자에게 이르기를,
"네가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마땅히 정습명의 말을 써야만 하느리라,"하고 일렀다,
인종임금은 재능과 기예가 많아서 음률을 이해하고 서화를 잘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했다,
성품이 검약하여 침석(寢席)에는 황주(黃紬)의 선(線)이 없고,침의(寢衣)에는 능금
(綾錦)의 꾸밈이 없었다, 심부름 하는 환관과 내료가 많았으나 매양 작은 이로써
내치고 다시 임명하지 않았고, 말년에 와서는 수인에 불과했다,
날마다 두세번씩 보면서 혹 정사를 아뢴 사람이 시일을 지체하면 반드시 小臣으로
하여금 재촉하여 오로지 恩德으로써 백성을 편하게 하였다,
시호는 공효(恭孝),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동사강목 제9상
기사년 의종3년(1149년)
*하4월 이인실을 문하시랑 동평장사로,고조기를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정습명(鄭襲明)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습명은 간관의 직에 오래 있으면서 간쟁하는 신하의 풍도가 있었다, 인종이 깊이 그의
재능을 중히 여겨 동궁의 사부(王子師傅)를 삼았다,
이때에 와서 이 명이 나왔고 곧이어 추밀원지주사에 승임되었다,
9월 재상들을 불러 술상을 차려놓고 격구를 관람하였다,
이에 앞서 평장사 고조기.좌승선(左承宣)정습명 등을 인견하여 술을 차려놓고 국사를
논하였고,드디어는 서루에 행행하여 격구를 관람하였다,
정습명은 국가의 정사를 바로 살펴야 한다,라고 고하였으나,왕은 듣지않고 다시 지문하
최유청.어사대부 문공원.등 6인을 불러 술을 차려놓고 격구를 관람하였다, 그때 왕은
밤낮으로 격구와 말놀이를 관람하였으나 다시 말하는 재상들이 없었다,
동사강목 제9상,
신미년 의종 5년(1151년)
3월 *추밀원 지주사 정습명을 죽였다,
정습명은 인종의 고탁(顧托)으로 자처하여 아는 일치고 말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왕이 그를 꺼려하였다, 환관 정함은 왕의 유모 남편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폐신(嬖臣) 김존중과 밤낮으로 참언하여 헐뜯었다. 마침 습명이 병가를 고하자
왕은 존중으로 그의 직책을 임시로 대행시켰는데,습명은 왕의 생각을 추측하여
깨닫고 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때부터 영행을 받는 者들이 날로 진용(進用)되고 왕은 더욱 빙자 하여져서
즐기고 노는 것이 절도가 없게 되었다,
나라의 치란(治亂)은 현자와 사악한 자의 진퇴를 보면 알게된다, 이때부터는
습명은 죽었고 존중은 등용되었다,
곧은 말은 들리지 않고 아첨하는 언사는 날로 많아져서 의종의 뜻은 이때부터
더욱 황란하여졌다,
위 동사강목의 부분을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
신미 5년 (1151년),송 소흥 22년,금 천덕 3년
봄 3월
추밀원지주사 鄭襲明이 졸(卒)하다,
습명은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다, 뜻이 높고 특출하였으며,학문에 힘써서
문장에 능하여 향공(響貢)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전에 왕께서 태자로 있을 때,습명이 시독(侍讀)이 되었다, 인종이 태자가
계승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였고,임후(任后)도 또한 둘째 아들을 사랑하여
장차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襲明이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였기 때문에
태자가 폐함을 당하지 않았다, 襲明은 오랫동안 간관직에 있었는데,
간쟁하는 신하의 풍모가 있어 인종이 깊이 그의 기량을 중히 여겨서 승선
(承宣)에 발탁하여, 동궁의 스승이 되었다, 인종이 병중에 태자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마땅히 襲明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였다,
왕이 왕위를 이어받자, 전에 태후가 작은 아들을 세우려 하던 일을 원망하였다,
하루는 태후를 모시고 앉아 있다가 말이 태후에게 미치자, 태후가 맨발로 뜰에
내려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였다, 홀연히 뇌성과 비가 함께 일고,번개가
심하게 치며 전광이 자리까지 들어왔다, 왕이 놀라고 두려워서,몸을 구부리고
태후의 옷자락 밑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벼락이 궁전의 기둥을 쳤다,
왕이 잘못을 뉘우치고 드디어 모자의 정이 처음과 같이 되었다, 襲明은
인종대왕의 부탁을 받았다고 여겨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어 왕이
꺼리니, 김존중과 정함이 밤낮으로 襲明을 헐뜯었다,
마침 襲明이 병으로 휴가를 청하니, 존중에게 그 직임을 임시로 대행시켰다,
襲明이 왕의 뜻을 해아려 알고, 약을 물리쳐 먹지 않고 죽었다,
위 동사강목,이어서,,,
3월*김존중(金存中)을 발탁하여 우승선으로 삼았다,
정습명이 졸하자 왕은 명망이 있는 자를 얻어 그를 대신하기를 원하였다, 정함이
존중을 천거하며,발탁하여 우승선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궁중을 드나들며 국청을 도모하여 그의 세력이 조야를 휩쓸었다,
예종이 승하 하자 인종이 17대 임금으로 보위를 물러받았고, 정습명은 태자
스승이 되어 의종을 훈도하며, 1141년 부터 5년 동안 삼국사기를 鄭襲明을
관구(管句)로 중책을 맏게하여 편찬하게 하고 1145년12월에 왕에게 올렸다,
또 鄭襲明은 인종의 부탁으로 인종의 고명신이 되어, 의종을 18대 임금으로
등극하게 하여,관이 추밀원 지주사에 올라 임금의 올바른 직분을 간하여 의종을
보필하여 간언(諫言)을 하였으나,의종왕은 오히려 내시부 김존중과 내시 함의
말을 듣고 스승인 추밀원 지주사 정습명을 유배를 보내고,왕은 더이상 자기에게
간습 할 사람이 없자 더욱더 환관 정치에 빠져 기생과 내시가 국사를 망치게 하니
유배된 스승 정습명은 안타까워 하며 의종에게 직간하는 마지막 상소를 올리고
1151년 3월 임진일에 자결하는 충절을 보이고 만다,그러고도 왕은 정신을 못 차렸
으니, 군부에 수장인 정중부가 더이상 참지를 못하고 1170년 8월에 구태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위 하고 명종을 등극 하시고 의종을 거제현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경주로 이송하여 이의민에게 허리가 부러터려지고 곧 바로 연못에 수장되었다,
그리고 정중부에서 경대승,이의민을 40년을 거쳐서 1196년 부터 1258년 4월 까지 62년
동안 최씨의 무신정권이 지속되었던 것이다,{이 때의 문신들은 鄭襲明을 어떻게
생각했을까...鄭襲明의 이름은 충신으로 깊이 남았고,문신들이 고달플때 마다,
정습명을 떠 올렸지는 않았을까,,,정승상을 생각되면 석죽화의 화제로 하여 詩로써
대신하여 문신들의 마음을 풀지는 않았을까? 싶다,그래서 고려말 두문동 72현들도
정몽주를 지칭하여 고려의 충신 정습명의 10대 孫에 또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나왔다.]
라고 했다,
*1205년 고려 20대 신종임금 때에도 무신정권의 수장인 최충헌의 신임을 받고 있던
문관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 그의 자는 춘경(春卿),자호는 백운거사,시호는
문순공,이 있었다,
백운거사 이규보는 1189년에 사마시 1등,1217년에 우사간 지제고, 1233년 나이 66세
때에 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한림학사,승지에 오른 사람이다,
이 분이 지은 詩 중에 내가 관심을 기우리게 하는 詩가 몇 수 가 있다, 그 첫째로 주목되는
詩가 바로 석죽화(石竹花)이다,
石竹花(파랭이 꽃)
李奎報
節肖此君高[절소차군고],,, 절조는 대죽(竹)처럼 고상한데
花開兒女艶[화개아녀염],,, 꽃이 피면 아동들과 녀자들 모두 좋아하네
飄零不耐秋[표령부내추],,, 이슬이 내리는 가을엔 그만 떨어져 버리니
爲竹熊無檻[위죽웅무함],,, 석죽이란 이름 분수에 넘치지 않겠나,
위의 백운거사의 詩를 어떤 뜻으로 보이나요,?
저가 보기엔 이렇게 보입니다, 이 시를 지을 때 백운거사께서 무신정권의 최충헌 시대
(1196~1219)년 이니,&&& [최충헌이 이의민을 격살한 1196년에 고려의 정권은 최충헌의
시대가 열리게 되며,그 뒤를 이언 최우,최항,최의.로 이어진 최씨 정권의 62년 동안
지속되다가 1258년 최의가 죽어면서 김준(김인준) 시대가 1258~1268년 까지 이뤄 지다가
임연이 김준을 1268년에 죽이고 1270년 임유무 까지 무신정권이 장장 1170년 부터 1270년
까지 100년 동안 지속된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어서 백운거사는 1189년에 사마시에 올랐지만 무신정권의 득세에 숨도 한번 재대로
쉬지 못하고 최충헌의 말 동무나 바둑을 두는 상대로 있는 처지에 최충헌집에서
막걸리나 얻어 마시는 처지였으니,얼마나 비참한 문관시대 였겠나 싶구요,
위의 백운거사가 지은 석죽화는 아마도 고려의 충신 鄭襲明을 지칭한 詩구 가 아니겠나
생각됩니다,
다시 말 해서 [동국이상국 전집]에 살펴 보면,이규보가 절친한 벗 鄭아무게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기록 하고 있어나, 꼭 鄭아무게 에게는 그냥 친한 친구로 표현
되고 있다,
위의 이상국 詩 석죽화를 지어서 친하게 지내던 벗인 鄭襲明의 아들 정섭균(鄭燮均)
이였기나 손자 정겸목(鄭謙牧)에게 농으로 보여 주지 않았나 생각을 해 봅니다,
시의 제목 석죽화는 정습명을 뜻 하고,그 詩를 살펴보면,,,
節肖此君高... 본받을 만한 절의는 고상한데
花開兒女艶,,, 화사하게 이어온 집은 누구에게도 있어온 일이고
飄零不耐秋... 회오리가 치고간 자네의 집 처랑 하여라
위죽웅무함... 대처럼 쪽바로 선 이름 넘처 버렸다네,,,
나는 이렇게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상국전집에 나오는 몇몇 詩구에 그냥 어떤 사람에게 보내다, 라는 詩가 적지않게
보입니다, 그 중에 이상국이 지은 제15권 시를 살펴 보면,,,
通判 鄭君에게 2수 를 지어 보인다,
江南地僻作孤囚[강남지벽작고수],,, 강남의 벽지에 외로운 죄인 되어
猶似籠禽不自由[유사롱금부자유],,, 갇혀있는 새 자유롭지 못함이 아닌가
嵐장熏人顔漸黑[남장훈인안잠흑],,, 남장이 熏蒸하여 얼굴 차차 검어지니
相逢應愧舊交遊[상봉응괴구교유],,, 고향친구 만나면 부끄러워 하지 않을까,
주)남장=화병은 마음에서 생겨난다는....산천에서 생기는 나쁜 기운.
또
人淳事簡雖堪喜[인순사간수감희]... 자네가 순박하고 일 적어 기쁘기는 하지만
地瘠民殘不忍看[지척민잔부인간]... 땅이 박하여 백성들이 쇠잔하여 차마 볼 수 없네
公退坐衙無一事[공퇴좌아무일사]... 공무에 물러앉아 일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
官人無事益難安[관인무사익난안]... 관인은 무사한가 더욱 편안하기 어렵네,
*이 두 시는 정확하게 누구라고 이름은 없고 그냥 통판정군으로 되어있다,
*백운거사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는데,아마도 최충헌의 무신정권에서 아무것도 할수없는 문신들의 비정한 마음을 막걸리 한사발로써 달래지는 않았을까,?
동국이상국 고율시 중에서[술이 없어서]라는 제목의 詩
李奎報
燥烟何事忍生추[조연하사인생추]... 목마른 생각이 선뜻 일어나니
酒盡空缸臥屋추[주진공항와옥추]... 술 떨어진 빈항아리만 집구석에 나딩구네
聞道思梅猶止渴[문도사매유지갈]... 매실을 생각만하여도 목마름이 그친다는데
胡爲飮水未요愁[호위음수미요수]... 어째서 물 마셔도 시름이 가시질 않네.
술이 익다
李奎報
酒如潮水縮還盈[주여호수축환영]... 술은 潮水와 같아 줄었다간 도로 차며
口似春畦枯復潤[구사춘휴고복윤]... 입은 봄밭 갈아서 말랐다간 다시 젖네
生死人心是麴生[생사인심시국생]... 사람마음 죽고 살게함이 술로 인해 일어나니
來雖可喜歸無信[래수가희귀무신]... 올때는 참으로 기쁘지만 돌아갈 땐 덧없어라.
급암시집 제1권
고시
示鄭夢周[정몽주께 보이다]
閔思平
吾門鄭大學[오문정태학]... 내 문하에 정 태학이
如今有賢嗣[여금유현사]... 지금 훌륭한 아들을 두었네
況與愚孫游[황여우손유]... 게다가 내 손자와 교우하니
胡不示猶子[호부시유자]... 어찌 자식처럼 보질 않겠나.
주) 1.吾門學= 포은선생의 부친 운관(云瓘)이 급암선생의 시험방에 합격했나 봅니다.
그래서 문생이라 했고, 태학이란 뜻은 당시엔 선균관 재생을 두고 태학생 이라 하였다,
*2)*나의 손자와 교우하니= 문급암 선생은 아들이 없었고,딸이 있었는데, 외손자가 제민
(齊閔)과 제안(顔)이었다, 이 두사람 모두 포은선생과 친분이 있었다.
*민사평=1295~1359년 본관은 여흥(驪興),찬성사 적의 아들로,김윤(金倫)의 사위로,
그의 자는 탄부(坦夫)로 호가 급암(及庵)으로,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예문관수찬,
응교,성균대사성,1344년 충혜5.감찰대부가 되어 여흥군에 봉해졌다
충정왕 즉위 원년1348년에 도참의참리에 올라 수성병의협찬공신의 호가 주어졌다,
*제민(齊閔)= 김구용(金九容1338~1384년)을 말한다. 김구용의 초휘가 제민을 자는
경지(敬之)요 호는 척약재(척若齋) 또는 육우당.으로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이다.
16세에 진사가 되고 왕명으로 산원직(散員職)을 받았으며 1375년 삼사좌윤이 되어 이 때
이인임(李仁任)등 권신들이 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이하자,이숭인,정도전,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都堂에 상서해 이를 반대하다가 竹州에 귀양 갔다가,뒤에 여흥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를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詩와 酒로 시간을 즐기다 1384년 행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갈때 국서와 함께 백금1백냥과 세저,마포 50필을 가지고 갔다가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남경으로 압송되었고,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大리衛에 유배 도중 노주
영녕현에서 병사했다,
목은 이색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나온다,
고 했다,
*제안(齊顔)= 김구용의 동생으로 자는 仲顯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이존오,이숭인,
등과 친했고 간관으로서 책무를 다 했다,국서를 河南王에게 잘 전달하는 등 공을 세웠고,
공민왕 때에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古詩
贈鄭太守[정 태수께 주다.]
閔思平
割鷄用牛刀[할계용우도]... 닭 잡는데 소를 잡는 칼 쓴다는 말은
夫子戱言耳[부자희언이]... 공자가 농담을 했을 뿐이네
不見陳丞相[불견진승상]... 진 승상을 보지 못했는가
里中分肉始[리중분육시]... 마을에서 고기 나누는 일부터 시작하였다네.
주) 1,닭 잡는데...소 잡는 칼..=공자의 제자 子游가 武城의 수령時에 조만한 고을에
禮樂의 정사를 보는것을 공자가 보고는,"割鷄焉用牛刀"라고 했다,
자유가 정색을 하며 예악의 중요성을 설명하자,공자가 농담을 하였다고 하였다,
2,진 승상= 진승상은 한나라 진평(陳平)을 말하고,그가 미천할 때 고상리에 살았는데
향리에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면 그가 주제하여 고기를 공평히 나누어 부로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도은집 제2권
九月初八日呈達可丈 9월8일 달가 어른에게 드리다,
李崇仁
天氣三秋好[천기삼추호]... 날씨도 좋은 만추의 계절
人生百事勞[인생백사로]... 온갖 일 고달픈 인생입니다
笑談須款款[소담수관관]... 담소하며 즐겁게 보내야 하리오니
情興自陶陶[정흥자도도]... 흥겨운 정취 절로 도도해지리
滿把黃金菊[만파황금국]... 황금같은 국화꽃은 한 줌 가득 않고
盈준白玉료[영준백옥료]... 백옥같은 뚝배기는 동이에 가득찼네
重陽明日是[중양명일시]... 중양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는데
何處共登高[하처공등고]... 높은 곳 어디에 함께 오를까요.
*위 제목의 달가는 포은선생의 字자,이다,
주) *도은선생이 이 시를 지어 올릴 이때에는 포은선생의 아버지는 일찍이 죽고 없었고,
달가의 집에 어른은 종증조부 송간(松磵)선생(鄭仁彦)과 송간의 아들 장남 光厚와 차남
元厚 그리고 제종숙 돈용위 사정 瑋,번,瑛과 한성윤 元厚의 아들 군수 로,와 호,등이
살아 있었다,
아마도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당시에 포은선생이 사마시의 시관(시험관)으로 명을
받아 첫시험관의 일을 치루고, 이를 축하잔치를 여러 곳에서 열렸는데,그때 송간
종증조부의 집에서도 축하 연회잔치를 열었는데, 도은선생이 달가의 집 어른들께
즐거히 詩로써 화답을 했던 詩인것 갔습니다,*아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도은(陶隱)=이숭인(李崇仁1349~1392년)고려의 3은 중 한사람으로 공민왕 때에 나이
14세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16세때 등과하여 숙옹부승,21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정몽주,김구용,박상충,권근,정도전,등과 사귀었다,
우왕 즉위년에 친명파 라는 이유로 대구현에 유배 되었다가 4년뒤에 풀려나 성균사성,
전리판서,밀직제학을 지냈다,
창왕이 즉위하여 1388년에 최영,일파의 참소로 통주에 유배됬다가,최영장군이 처형된
후 풀려났고,1392년 4월 정 포은이 피살되고, 이성계 일파에게 순천에 유배됬다가,
조선개국 직전에 정도전의 심복인 황거정에 의해 피살되었다,
선죽교 血과 정몽주 집안의 몰락과 불사이군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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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4월26일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될 시기에 집안에는 종증조부 전공판서
정인언(鄭仁彦)과 종조부 공조판서 정광후(鄭光厚)와 동생 한성윤 정원후(鄭元厚),
돈용교위 사정 위(瑋) 형제분들과 돈용사정 사촌동생 郡守 로,와 철이 있었다,
이 때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와 살육살생으로 맞서려면 포은선생 쪽에서도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 첫째로는 당시에 포은선생은 고려의 최고 벼슬인 만인지상의 표상이 되는
예문관대제학 수문하시중 익양군충의백에 올라 있었고,종조부가 공조판서에 또 작은
종조부는 한성윤을 맞고 있었다,그 둘째로는 당시에 정몽주의 영양력이 대단하였기에,
이성계의 주위 군사를 제외하고서, 나머지 군사들을 충분히 동원할수 있는 힘이 있었으나,,,,
그러나 달가(達可)는 피살되기 하루 전날에 종증조부께 찾아가서 시국을 의논하여 증조부
에게 命을 받기를,"<너이가 군사로 대적한다면,저 도둑들의 무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모든 식구들의 안녕을 책임질 터 이니, 너는 혼자서 절의로써 불사이군(不事二君)을
행하라,!하였다,>[종증조부 송간선생은 달가에게 불사이군을 가르켰고,달가는 몸(身)으로
不事二君을 행하였다,]>하고서는, 증조부는 그 길로 곧바로 집안 치솔들을 모두 대리고
낙향하면서 은둔시켰지만,본인의 둘째아들 식구들은 그냥 두고 떠났고, 포은선생은
다음날 이성계집에 찾아가서,이방원이 [하여가]로 회유하였지만,선생은[단심가]로
거절하고서 돌아오는 길에 이방원의 군사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고,,,,,
선죽교에서 거사가 성공하는 것을 확인한 이성계의 수하장수 이종무 등은 말을 달려 포은
선생의 종증조부 집으로 달려 가 보니,전공판서 송간 정인언의 집에는 이미 어디론가 떠난
뒤 였으며,포은선생 집에도 아무도 없었으며, 그 다음으로 시급한 곳은,이성계 일파들이
재일 두려워 한 것은 정몽주의 종조부 한성윤 정원후(鄭元厚) 였다,
이성계가 모반하여 정 한성윤의 장 손자 달가를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한성의 성문을
굳게 잠구고, 한성윤이 곳곳에 통문하여 군사들을 모아 역모 작당 모반의 수장 이성계를
친다면, 심각한 결과를 가져와 실폐하고 말것이라는 계산에,,,
이미 작전을 짜두었기에 이종무 등은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서 군사들은 한성에서 멀리
매복을 시켜두고서 이종무가 부하장수 두 명을 대리고, 성문 아래에서 대궐에서 파발이
왔다고 거짓으로 알리니,성주가 별 의심없이 성문을 열어주었고, 이종무는 정 한성윤을
척살하고,뒤 이어 한성윤의 아들 군수가 있는 곳에 가서도 격살하였다,
이종무는 돌아가서 경과를 보고하고, 정 한성윤 사가에 가서 모두 처리 하였으나,아이
하나가 너무나 어려서 참아 죽이지 못하였다고,말하고,또 정판서 송간선생 치솔들을
뒤 쫒을 결심을 물어니, 이성계가 말하기를,"쫒을것 없다, 이미 포은이 죽고,한성윤이
죽었으니 늙은이가 혼자서 무슨 힘을 쓰겠는냐,그만 두거라,"하였다,
*어린아이는 정 한성윤의 손자로, 당시에 부모등이 죽임을 당하자, 어린아이는 너무나
울었다고 한다, 이분의 후손은 孫子(한성윤의 5대손)까지 확인이 됨니다,
이로 인하여 오천정가의 정몽주집은 완전하게 몰락하고, 또 왕씨의 고려 500년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용헌집 제1권
詩
谷山鄭使君寄詩次其韻
곡산 정 사군이 시를 보내왔기에 그 시에 차운하다,
李原
江雲渭樹逈參差[강운위수형참차]... 장강의 구름과 위수는 나무처럼 멀리있어
俱是東西作客時[구시동서작객시]... 모두 다 동서의 나그네가 되었네
長笑陶潛偏嗜酒[장소도잠편기주]... 도잠이 술을 무척 좋아한 것을 웃었고
每多鄭谷早能詩[매다정곡조능시]... 鄭곡이 일찍 詩에 능한 것은 늘 칭찬했네
嬌兒解唱皇華什[교아해창황화집]... 아리따운 아이는 황화편을 노래하나
勝友難同金屈치[승우난동금굴치]... 좋은벗은 금술잔을 마주하기 어렵네
昨夜梅花開一朶[작야매화개일타]... 엇저녁에 매화가 온 가지마다 피어서
看梅此日倍相思[간매차일배상사]... 매화보는 오늘에는 그대 생각 배나 나네,
주) 1,곡산 정 사군은= 누군지를 용헌시집에서 찾아보아도 모르겠으나, 당시에 황해도
곡산 군수를 역임 하고 있었고,하여 혹 한성윤 鄭元厚의 아들 군수 로(王路)나 호(王告),가
아닌가 하여,,,,,(당시에, 곡산 군수를 역임하였기에)
2, 江雲渭수...차= 서로 멀리 있어 그리워하는 것으로, 두보의 詩중에 [春日億李白,봄날에
이백을 생각남]의 (渭北春天樹 江東日幕雲...위수 북쪽엔 봄하늘에 우뚝 선 나무, 강 동편엔
저문 날의 구름)에서 나옴,
3,鄭谷= 한나라 성제(成帝)때 운양의 산골에 숨어 농사를 지어며 살던 사람인데,谷口子眞
이라고도 불렀다한다, 이사람을 대장군 왕봉이 禮로 여러번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 사군이 어려서부터 시에 능통하였기에, 한나라 鄭谷에 비유한 詩 절구이라 하겠다,
4,황화편=<<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인,[황황자화:皇皇者華]로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떠나가는 사람을 전송할 때 부르던 노래,로,,,
여기에서는 정 사군이 곡산 군수로 나아갈 때 전송했던 것을 지칭함,
**李原=1368~1429년,본관은 고성,자는 차산(次山),호는 용헌(容軒)이고,시호는 양헌(養憲)
으로,1382년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1385년에 과거 급제,1388년 사복시승,공조.예조 좌랑,
병조정랑을 거쳐서 조선에 들어와서는 예조.이조.병조판ㅅ를 역임하고 의정부찬성사를 거처,
1418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추강집 제3권
칠언절구(七言絶句)
經圃隱故宅
포은의 고택을 지나며,2수
南孝溫
操鷄鴻業半千年[조계홍업반천년]... 고려가 개국하고 반천년이 지난뒤엔
楚楚朝綱仗老臣[초초조강장노신]... 처량한 조정 기장 늙은 산하에 의지했네
家破國亡無一物[가파국망무일물]... 나라가 망한 뒤라서 남은 물건 하나없어
至今遺宅愴行人[지금유택창행인]... 고택이 지금까지 행인을 슬프게 하네.
二
南孝溫
공勝元來報漢思[공승원래보한사]... 공승은 원래 한나라 은혜를 갚으려고
亦劉之外更無君[역류지외갱무군]... 유씨 이오에 다른 임금 섬기지 않았네
何將不事二君手[하장불사이군수]... 어찌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손으로
更作辛昌諫爭文[경작신창간쟁문]... 다시 신창에게 간쟁하는 글을 썻던가.
주) 1], 操鷄鴻....고려..뒤엔= 후삼국 시대 때 철원에서 살던 중국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어너 도사로 부터 거울 한개를 얻었는데, 그 안에 여러 가지 비기(秘記)가 적혀있었다,
그중에, [먼저 닭 부터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이다,先操鷄 後搏鴨]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말은 왕건에게 계림(신라)을 먼저 취하고, 뒤에 압록강 강안(江岸)까지 점령하라는
예언이었다,고 한다.
2],공승은...섬기지 않았네= 공승은 한나라 팽성(彭城) 사람으로, 자가 군실(君實)로,
애제(哀帝) 때 간대부와 광록대부를 역임하고, 왕망(王莽)이 집정하자 물러난 사람이다,
왕망이 누차에 사람을 보내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더니,문인들에게 [내 어찌 한 몸으로
두 임금을 섬겨 죽은 뒤에 옛 임금을 보겠는가?]하고 염상(염喪) 기구를 준비하라고 해
놓고 단식을 하여 14일 만에 죽었다,
3],간쟁하는 글을 올렸던가= 포은이 창왕에게 간쟁하는 글을 올린것은 그를 우의 아들로
임금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임금은 창왕은 신돈의 아들이라 왕씨와 신씨의 두 성을 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왕은 분명 우왕의 아들이 맞다,] 이 부분은 남효온이 당시의 여론을 빈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년)=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
(最樂堂),벽사(碧沙)등으로 점필재 문하생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학자들은
그를 추강선생이라 일컬었다,
삼탄집 제7집
詩
어떤 사람을 전송하며,
李承召
使星光照祝融墟[사성광조주융허]... 사성의 빛 주융 맡은 땅에 내려비치거니
想見등淸更晏如[상견등청경안여]... 맑게 해서 다시 백성들을 안도하는 것을 보리
極北分憂辭玉陛[극북분우사옥폐]... 대궐에서 근심 나눠 옥 계단을 하직하자
嶠南相慶望유車[교남상경망유차]... 영남땅서 경하하며 사신 수레 바라보네
香疑燕寢薰風細[향의연침훈풍세]... 향기서린 연침에는 훈풍이 불어올 것이고
節住棠陰化日舒[절주당음화일서]... 깃발멈춘 당음에는 햇볕활작 퍼지리라
已布君恩墮處洽[이포군은타처흡]... 임금 은혜 이미 펴서 가는곳 마다 흡족하고
便敎民막應時除[편교민막응시제]... 백성고통 주는 폐막 제때맞춰 제거하리
樓臺遺興詩無敵[루대유흥시무적]... 누대올라 흥 오르매 지은 시는 상대없고
花柳爭姸樂有餘[화류쟁연락유여]... 꽃과 버들 고움다퉈 즐거움은 넘처나리
入相明年傾書接[입상명년경ㅁ접]... 내년에는 재상되어 매일 3번 접하면서
蓬萊殿上曳霞거[봉래전상예하거]... 봉래전의 전위에서 도포자락 끌 것이리,
주) 1, 봉래전= 당나라 때 궁전인 봉래궁 으로,,, 대궐을 뜻하는 말로 쓰임,,, 당상관에 올라서
놀자는 뜻,영의정,,,
또 이사람을 보낼 때
이승소
曾作關西入幕賓[증작관서입막빈]... 관서에서 지날에 막빈으로 있을적에
신敎陰谷見陽春[신교음곡견양춘]... 음지골짝 사람들이 양춘 보게 했었네
英材自古無多子[영재자고무다자]... 좋은인재 옛부터 많지 아니하였으며
厚德如君有幾人[후덕여군유기인]... 후덕하기 그대같은 사람 몇이 있었던가
棠발陰濃恩尙在[당발음농은상재]... 당발에는 그늘짙어 생각하는 맘 있는데
木綿구暖政惟新[목면구난정유신]... 무명솜은 따뜻하여 펼친 정사 새롭다네
大同江水深千尺[대동강수심천척]... 대동강물은 깊어 일천 자나 되거니와
爭似恩添一道民[쟁사은첨일도민]... 은혜 주는 백성에게 베푼 것과 어떨는지,
李承召=1422~1484년, 자는 윤보(胤保),로 17세에 진사, 1447년에 대과급제하여 성균대사성,
이조,호조,예조,형조참의를 역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정종소(鄭從韶),의 기록,
본관은 오천정씨(烏川鄭氏),자는 가정(可貞)이요,호는 정헌(靖軒)으로 판서 광후
(光厚)의 증손자(曾孫),영산교도 휘 문예(文裔)의 長男으로,포은선생(夢周)의 3종질,
이 된다,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생질,로 외숙 대전공께 공부하고,외숙과 함께 태재선생
유방선문하에서 공부했다,
세종29년 정묘,1447년에 문과에 오르고 동년 성 삼문, 이개,유성원,신숙주,박팽년,
정창손,등과 함께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내직으론 전랑,교리,성균사성을 외직으론 영천군수,예천군수,함양군수,영주목사,
안동영관,등을 역임하여 집현전에서는 팔준도전을 펼쳤다,
단종 손위후,로는 칭질(稱疾)하여 대부직을 고사 하였고,병자후 금성대군,이보흠과
더불어 유배된 단종임금(노산군)의 복위를 꾀하여 격문을 작초하고 영주(榮州)의
제민교를 건조한 다는 구실로 지사들과 주래하다가 금성대군의 종 놈이 밀고하는
바람에 일이 드러남에 금성대군은 안동에 유배되고 이보흠은 박천(博川)에 유배
당하고 김대중,은 촉지,되고 公은 피신하여 모면 하고, 은거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타계하였다,
사후에 단종을 도운 유신으로 숙모전 서무 30위에 묘셔졌다,
세종30년 무진(1448년,정통13)
三館에서 上書 하기를,
"태조와 태종께서 창업하시고 수통(垂統)하시와 만세의 큰 터전을 세우시고, 과거를
베풀고 선비를 뽑아서 일대의 좋은 법을 만드셨으니, 자손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끼치시고 국가를 위하여 무궁한 아름다운 福을 이루신 바가 지극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데,태종 전하께서 처음 重試의 과거를 세우시매, 이 과거에 합격하는
자는 자급을 더하여 탁용 하시어,비록 삼관의 천전 하는 예에 있는 者 일지라도 상자
(常資)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모두 거관하게 하였습니다,
박서생은 성균관 학생으로서 정언에 임명되었고, 김구경은 권지학유로서 봉상 주부에
임명 되었으며, 정초는 예문 검열로서 정언에 임명되고, 김조는 검열로서 인녕부 승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전고의 제왕에 없었던 거룩한 일이옵니다,
우리 주상께서는 이 법을 준용 하시와 친히 臨하여 재주를 시험하시고, 또한 모두
탁용하셨으니 뜻을 이어 일을 좇으심이 전열(前烈)보다 빛나옵니다,정묘년에 성균학록
신(臣) 정종소와 겸승문원 저작랑 조변룡이 또한 이 과거에 참여하여 장차 자급을
더하려고 하오나,천전하는 예(例)에 구애되어 그 벼슬에 그대로 머물고 옮기지 못하오니,중시(重試)로 탁용하는 뜻에 어찌 어긋남이 없사오리까,
하물며,지금 從韶는 이미 선무(宣務)의 자급에 올랐는데 9품의 벼슬을 행하니, 만약
例에 따라 천전(遷轉)하면 반드시 5년 뒤에야 거관(去官)할 것이오니,태종의 중시로
탁용하는 뜻에 어떠하옵니까,,, 엎드려 성상의 재결을 바라옵니다, 하였다,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종소가 이미 重試에 올랐고, 또 선무로써 거관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우의정
황보인,좌찬성 박종우는 홀로 불가하다고 하매, 이조에 내려 다시 의논하게 하니,
이조에서 아뢰기를, "삼관은 자급을 계산하지 아니하고 일체 직사에 따라 거관하게
함은 이미 성법(成法)이 있사온데,만약 한때의 특별한 은혜로 뛰어올려 제수한 예를
끌어들여 거관하게 하면,삼관의 천전하는 법이 무너질 것이오니,타례(他例)에 의하여
거관하게 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세조 5년 기묘(1459,천순3)
7월 18일(정유)
심회,이인손,이승손,권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심회를 판중추원사로, 이인손을 호조판서로,이승손을 판한성부사로,권지를 호조참판
으로,이윤손을 공조참판,정종소를 사간원 좌헌납으로 삼았다,
세조 6년 경진(1460,천순4)
6월 27일(임신)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는데, 성균 대사성 서강, 사예 공기,이계손,정종소,
인순부소윤 진유경, 직강 권이경,등이 윤대하니,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조 8년 임오(1462,천순6)
2월 6일 경신
구차관을 보국 숭록 대부로,봉석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우찬성 구치관의 품계를 더하여 보국 숭록 대부로, 봉석주를 강성군으로, 임효인을
인순부 윤, 이지를 지사간원사로, 정종소를 겸 사헌 장령으로 삼았다,
세조8년 임오
4월 17일(임오)
각도에 사목(事目)을 주어 분순 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을 규찰하다,
분순어사 이영은을 경기에, 김서진, 충청도에, 안관후를 경상도에, 송충림을
전라도에, 강원도 어사에 정종소를,민규를 함길도, 이질을 평안도, 이우를 황해도에
보내니,,
그 가지고 간 事目은 이러하다,
1, 파종(播種)과 관개(灌漑)의 상태를 살펴서,만일 제때에 파종을 하지않은 者와
거짓으로 파종한 현상을 한 者가 있으면 수령을 거두어 국문 할것,
1, 수령이 칠사(七事)를 거행하는지의 여부를 규리(糾理)하고, 아울러 일찍이 내린
백성을 효유(曉諭)하는 유서와 호조에 내린 전지의 금령 조건(禁令條件)을 규리할것,
1,수륙 장수(水陸將帥)와 수령,만호,찰방,등이 탕묵하고 백성을 침학(侵虐)하는 일은
다만 제읍(諸邑)을 순행하는 것만으로는 다 알지 못할 것이니, 여염(閭閻)에 이르러
물어서 찾고 혹은 아전에 보내어 보고 듣게 하여 만일 범한 자가 있으면,3품 이하는
본부의 소송하는 자의 예(例)에 의하여 구문(句聞)하고, 당상관 이상은 공함(公緘)을
사용하여 핵문하여,증거가 명백한데도 불복하는 자는 3품이하는 고신을 거두고 가두어
국문하고,당상관 이상은 계달(啓達)하여 취지하고,사련인(辭連人)으로 실정을 말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즉시 장신(杖訊)할것,
1,윗 항의 수륙 장수,수령,만호,역승(驛丞)등이 탐묵하고 백성을 침학하는 것 및 스스로
자기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백성이 고소하는 것을 허락할것,
1,分臺가 세쇄(細碎)하고 간요하지 않은 일을 거핵(擧劾)한다면 한갓 민간을 소요하게
할 뿐이니,작은 일은 규리하지 말 것,"
주) 1,칠사=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7곱 가지, 즉 농상을 진흥시키고,
호구를 늘리고, 학교를 일으키고,군정을 잘 다스리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사송(詞訟)
을 잘 처리하고, 간활(姦猾)을 없에는 등의 7곱 가지,
2,본부=사헌부,
3,공함=당상관이나 심문할 때 서면(書面)으로 취조하는것, 판결,,,
예종 1년 기축(1469,성화5)
3월 9일(계사)
*금을 받고 물건을 적게 준 이길생,김치중을 처참하고 삼포에 무역을 금하다,
*처음에 상인 이길생이 통사 김치중으로 인연하여 왜인 시난이라를 꾀어 은(銀)40냥을
가지고 金8냥 5돈과 바꾸기를 약속하여 이미 문서를 만들어 금을 받아온 뒤에 이길생이
단지 은18냥과 인삼50근만을 주었는데, 왜인 평무속이 고하니, 명하여 이길생을 국문하게
하여 옥사가 이루어졌다, 형조에서 말하기를, "이길생은 처참 전수하고 가산을 적몰하며,
김치중과 이길생의 주인 염부,유리대 등은 가산을 적몰하고,북방 관노에 영속하고,이길생
에게서 명주4백 필을 징수하여 시난이라에게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고령군 신숙주에게
의논하니, 신숙주가 아뢰기를,
"이길생,유리대는 모두 아뢴대로 하고,김치중은 통사로서 외이(오랑케)를 어지럽게 하여
간사함을 행하고 혼단을 만들었으니, 징계하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아울러 처참 전수하여,
남은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봉상시 부정 정종소에게 명하여 삼포(三浦)등지에서 이길생,김치중을
처참하고 머리를 전(傳)하여 널리 보였다,
이때 부산포에 사는 왜인이 실화(失火) 하였는데,정종소에게 명하여 술과 고기를
갖추어 먹이게 하고, 또 사람들에게 쌀 3두(斗)씩 주어 진휼하게 하였다,
예종 1년 기축(1469.성화5)
3월 22일일(병오)
*왜인의 피살사건을 심핵하게 하고 양식을 주는 것 등은 고례를 따르게 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국이 보낸 중산 화상(中山和尙)이 고하기를,
"무룻 왜선이 浦에 이르면 즉시 인구와 진상하는 물건을 헤아려 점검하여서 급히
浦所로 올려 보내지 아니하고, 양식도 주지 아니하여 굶주림을 당하게 하니,
왜인들이 본토로 돌아가자고 하며, 이제 우리도 양식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생각하건대 반드시 포에 머무는 자도 굶주릴 것입니다, 이 먼저는 포소에 상시를
사는 왜인은, 남자는 표(標)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여자는 표 밖에 나가서 大國
사람과 더불어 어염(魚鹽고기와 소금)을 서로 매매하기를 허락하여 생활을 의지하였는데,지금은 여자의 출입도 아울러 금하여 생활하는 도리가 없게 하였으니,왜인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으며,대국의 법령이 이와 같이 하는가 아니하는 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본도(本島)의 왜인 7곱 사람이 도주(島主)의 고기잡는 노인(路引)을 받아 가지고 지세포
로 향하다가 갑자기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전라도 지방에 이르렀는데,
1사람은 대국 사람에게 해침을 당하였고, 2사람은 상처를 입고 거의 죽게 되어, 이미
제포(薺浦)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이 생각 하건대, 이들이 비록 지세포 만호의 문인(文引)은 없을지라도 島主의
서계(書契)를 상고할 수 있는데, 大國사람이 상해(傷害)함이 이에 이르니, 자못 이웃
을 불쌍하게 여기는 뜻에 어긋납니다,하였습니다," 하니, 院相에게 의논하도록 명
하였다,
고령군 신숙주,영의정 한명회,능성군 구치관,상랑군 김질,좌찬성 김국광등이 의논
하기를,
"왜인이 피살된 일은 이미 윤효손을 보내어 심핵하게 하였고,포소에 양식을 주는 것과
진상하는 물건을 점검해 보내는 일은 이미 정한 법이 있는데,반드시 받들어 시행하기를
다하지 아니한 것뿐입니다, 지금 가는 정종소로 하여금 추문하여 법에 의해 속히 주게
하며, 또 포에 머무는 왜국 여자의 출입과 매매하는 일도 역시 정종소로 하여금 옛 법을
상고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 2년 신묘(1471,성화7)
1월 14일(정해)
*봉상시 부정 정종소 등 5인이 윤대하다,
*봉상시 부정 정종소 등 5인이 윤대(輪對)하였다,
*****
첫댓글 선조에 대해서 알 수 있어 참으로 좋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