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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이름(막 8:27-30)
* 오늘은 환경선교주일, 삼위일체주일, 6.10민주항쟁기념일 등이 겹치는 날이다. 지난 5일이 세계환경의 날이고 지난 주일이 환경주일이었는데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설교를 하느라 환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못해 오늘은 짧게나마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선크림에는 바다의 산호초에 치명적인 옥시벤존과 옥티녹세이트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 이 두 물질에 노출되면 산호초는 유전자 문제를 일으켜 점점 색을 잃다 죽음에 이른다. 이를 백화현상이라고 한다. 옥시벤존은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 6.5개들이 물에 한 방울만 떨어져도 산호초에 치명적이다. 방수용 아웃도어 재킷, 종이컵, 프라이팬 등의 코팅제로 널리 사용되는 과불화 화합물(PFCs)도 발명된 지 반세기가 지나면서 분해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돼 여러 질병을 일으킨다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분산된다.
* 2015년 그린피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때 묻지 않은 10개 지역의 눈과 물을 조사했는데 채취한 모든 시료에서 PFC가 발견됐다고 한다. 모유와 신생아의 혈액 속에서도 발견되는 이 PFC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계속 연구 중이지만 암을 유발하고 내분비계를 교란시키며 생식과 면역 기능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보고가 있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물질은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결국 우리 건강을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 우리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 일상에서 무심코 이뤄지는 수많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가 사는 지구를 오염시키고 그 결과는 부메랑처럼 우리의 삶은 물론 우리 후손들의 삶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을 불러온다는 나비효과와 같다. 몇 년 전부터 문제가 되어 요즘은 전국민의 관심사로 부각된 미세먼지도 처음에는 날개짓처럼 작은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 마찬가지로 옥시벤존이나 PFC도 지금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초기단계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얼마 후 미세먼지 못지않은 태풍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할 것이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처음부터 우리가 인식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라도 무시하고 방치하면 결국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때는 손 쓸 방법이 없어 수수방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환경문제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 작은 일이 모이고 모여 큰 결과를 가져오는 이치는 비단 환경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시냇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을 모여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일상이 모여 이뤄내는 시대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이제 이틀 후면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과, 사흘 후면 한국의 정치 지형을 크게 바꿀 것으로 기대되는 지방선거를 생각하면 그런 자연의 법칙이 새삼 무섭게 여겨진다.
* 지난 주일에는 고난의 행군 이후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있는 북의 변화와 극우/수구 세력의 몰락으로 이뤄질 남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지난 3, 4차 남북정상회담과 12일의 북미정상회담 역시 한순간에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수많은 시도와 성과가 모이고 모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다. 멀리는 이후 유신정권 탄생에 일조한 7.4공동성명부터 노태우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가까이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과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 외에도 남과 북, 북과 미 사이의 크고 작은 충돌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진 대화와 타협의 노력이 이제 역사적인 6.12북미정상회담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틀 후 우리민족은 물론 전세계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두 정상의 만남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섣불리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 가장 큰 변화는 지금까지 금기시됐던 종전회담이나 평화회담이라는 용어가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있고 그에 대한 기대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인사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나 표현들이 엄청나게 완화되었다는 점이다. 아시다시피 이는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아직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의하면 이는 찬양고무죄(북한/김일성 일가족 찬양 및 고무 행위)에 해당한다.
* 이전에는 반공법이었던 국가보안법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7조 찬양 고무 항목 등은 '찬양'이나 '고무' 같은 매우 애매한 기준으로 지나치게 광범위한 법적용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독재정권에서 이 조항이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주요 근거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적용되는 일이 아주 잦았다. 그래서 막걸리 반공법/보안법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 실제로 1968년 한 요리사가 경찰에 연행되자 "선량한 사람을 왜 괴롭히느냐? 공화당은 공산당보다 못하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1970년 서울의 한 달동네 서민은 재개발로 집을 강제 철거당하게 되자 사람들이 운집한 곳에서 철거반원들을 향해 “이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들아!”이라고 내뱉은 것이 화근이 돼 반공법 제4조 1항 위반으로 구속됐다.
* 구속 및 기소된 이유는 "북한에서는 대한민국보다 나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그곳에 가서 살아보겠다는 의사도 내포됐다 할 것이어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비록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당시만 해도 구속되는 것만으로 엄청난 고초를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치른 대가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약과에 해당한다.
* 1986년에 친형의 칠순 잔치를 마치고 만취해 버스를 탄 김 아무개가 버스기사와 요금 시비를 벌이다가 무심결에 "나는 공산당이다. 공산당이 뭐가 나쁘냐? 잡아넣어라"라고 말했다가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 대구의 모 나이트클럽 웨이터는 남북정상회담을 즈음해 행사차량에 인공기를 내걸고, 김정일 부킹위원장이라고 쓰인 명함을 건네주다 경찰로부터 '찬양 고무 혐의'를 쓰고 검거되었다가 무죄 방면되었다.
* 이런 식의 순간적인 실수까지도 무분별하게 처벌하다보니 북한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하는데 정대세가 골을 넣었을 때 좋아하면 이게 북한에 대한 찬양고무이냐 아니냐라는 우스개소리까지 나왔다.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강호는 “무함마드 알리하고 조지 포먼이 권투시합을 했다. 나는 무함마드 알리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김일성도 무함마드 알리를 응원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빨갱이인가?”라는 말로 국보법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 호칭의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언론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라는 호칭을 당연한 듯 사용하고 있는데 이 역시 작년까지만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물론 아직도 북한은 헌법 상 반국가단체이고 김정은은 그 단체의 수괴이니 존칭을 붙이는 것은 위헌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국 언론이나 정부도 위원장(Chairman)이라는 정식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시대의 변화에 뒤쳐진 주장이 아닐 수 없다.
* 이미 미국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이 호칭을 사용한 적이 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악의 축이라 부르던 북한의 김정일에게 보낸 친서 서두에 ‘친애하는 위원장 선생(Dear Mr. Chairma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김정은 위원장을 언급할 때 이름만 언급하거나 ‘북한 지도자’라고만 표현해 왔다. 그런데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이 8일 평양행 전용기 안에서 ‘위원장(Charima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신문은 지난 9일 ‘화석처럼 굳어진 냉전의식의 발로’란 논평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미국 대통령’으로 칭했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을 ‘늙다리미치광이’ ‘트럼프패거리’ 등으로 표현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3월 초 북한과의 회담을 수락한 이후엔 그를 ‘집권자’라고 호칭했던 북한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호칭의 변화는 사소한 문제인 것 같지만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 정치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가 그렇다. 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의 관계도 상호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면서 관계가 개선되었다. 가톨릭은 종교개혁 직후 개신교를 “뛰쳐나간 이단자”라고 불렀다. 증오심이 담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이런 증오심이 누그러지면서 “돌아와야 하는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다 최근에는 “만나야 하는 한 형제”라는 호칭으로 까지 발전시켰다. 이런 변화와 무관하게 개신교 일부는 가톨릭을 이단이라 규정한다.
* 유대철학자 마틴 부버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It”(그것)이라고 부를 때와 “Thou”([ðaʊ] ‘당신’을 부르는 최고의 존칭어)라고 부를 때의 차이를 강조한다. 하나님을 “야훼”로 부르는 것과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관계의 발전이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관계도 마찬가지다. “여보세요”라고 부르는 관계와 “여보”라고 부르는 관계는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 지난 수요일 잠깐 다루기는 했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야훼, 또는 야웨(יהוה Yahweh)라고 부르는 이름은 나중에 편의상 합의된 것일 뿐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신명사문자(트라그라마톤)이라 불리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알파벳 YHWH)으로 표기했지만, 일 년에 딱 한 번 대제사장만이 발음할 수 있었고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발음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 나중에 엘로힘, 아도나이, 여호와 등의 이름으로 부르게 됐지만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였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행위로 간주했던 유대사회에서 예수는 아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규정했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혁명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올바른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오늘 분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예수와 제자들이 방문한 곳은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이었다. 가이샤랴 빌립보는 헤롯 대왕이 BC 2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선물로 받은 도시이며 현재 이름은 바니아스이다. 당시 헤롯 대왕은 요단 강의 근원 중 하나인 바니아스 샘물 가까이에 신전을 지어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쳤다.
* 그리고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로마 황제의 이름과 자기의 이름을 합하여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황제를 숭배하는 정치의 중심지였고, 황제의 이름에 걸맞는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그 화려함 앞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일행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런 지리, 공간적 상황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소 하지 않던 질문을 불쑥 던지신 것이다.
* 제자들이 들은 대로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대답하자, 예수는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아마 예수의 관심사는 첫 번째 질문보다 두 번째 질문에 더 많이 담겨져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아마 이는 초대교회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처럼 마태와 누가는 이를 각자의 입장에서 윤색한다.
* 마태(마 16:13-20)는 첫 번째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예레미야’를 추가하는 것 외에 마가와 대동소이하게 기록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물론 예수의 반응을 상당히 추가한다. 베드로의 대답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정교한 표현으로 발전하고, 예수 역시 베드로를 극찬하며 그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엄청난 축복까지 추가한다. 아마 이 역시 초대교회의 입장일 것이다.
* 반면 누가(9:18-20)는 마가, 마태와 달리 ‘빌립보의 가이사랴’라는 지명을 생략한 채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 혼자 기도 중에 제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시는 것으로 상황을 설정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동소이하지만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는 표현을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살아났다’고 확장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도 마태보다는 마가에 더 가깝게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간단히 기록한다.
* 세 복음서의 기록이 조금 또는 많이 차이가 나지만 이 세 가지 즉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것이 예수에 대한 초대 교회의 고백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이를 ‘네이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와 서신의 수많은 기록은 결국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이 단 세 마디로 이뤄진 고백에 의존해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했던 것이다.
* 여러분은 ‘익투스’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원래 발음은 이크튀스(ἰχθύς/ΙΧΘΥΣ)로 ‘물고기’라는 뜻이다. 이는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비밀스럽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두 개의 곡선을 겹쳐 만든 물고기 모양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어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의 약자로 전해진다. 그 뜻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베드로의 고백 즉 '주님은 저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 그런데 이 세 단어의 고백이 점차 확대되어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사이에 총 93개의 단어로 구성된 ‘사도신경’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312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 후 325년 총 206개의 단어로 구성된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지고, 이후 총 637개의 단어로 구성된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교회가 더 거룩해지고 더 성숙해졌을까? 오히려 복잡해진 교리를 기반으로 이단을 규정하는 핍박이 이어졌고 통합보다는 분열이 가속화됐다.
* 이 복잡한 교회의 분열과 대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고백이 복잡하고 정교해질수록 다양성이 위축되고 획일화되면서 그 역동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고백은 단순할수록 좋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고백보다 예수는 메시야(그리스도)라는 베드로 또는 초대교회의 고백이 갖는 힘에 대해 깊이 생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올바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 이름은 사람만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적용된다. 광주사태와 광주민주화운동 또는 광주민중항쟁의 차이나, 여순반란과 여순사건, 그리고 여순항쟁의 차이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이런 예들에 얽힌 논쟁과 대립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 또는 불리는가는 생각보다 큰 의미와 위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고 불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공자의 가르침 중에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고, 일이 되지 않는다(名不正 卽言不順 卽事不成)”라는 말이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규정했다. 말이 단지 의사소통과 감정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양식을 규정하는 틀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의해 우리의 신앙이 좌우된다. 그리고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
* 마찬가지로 북한과 북한 동포에 대한 규정,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북미 간에 사용되는 호칭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는 호칭에 걸맞게 두 정상이 진정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정말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리기를 간곡히 소망한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바뀔 것이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이미 평화로 가는 거대한 변화는 시작됐고 그 물줄기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 오늘 31주년을 맞는 6.10민주화운동/항쟁 역시 처음에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작은 물줄기에서 비롯됐다. 4.19혁명 이후 5.16 쿠테타와 10월유신, 긴급조치 시대로 이어지는 18년 독재, 그리고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전두환 군사독재 7년 동안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결국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 결과가 1987년 6.10 또는 6월 항쟁 아닌가?
* 그리고 지난 이명박-박근혜 집권 당시 통치자의 무능과 비선실세들의 사욕으로 인해 망가진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민주와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작은 물줄기들이 모이고 모여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촛불혁명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결과가 지난 3, 4차 남북정상회담과 이번 6.12북미정상회담 아닌가?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민주, 평화, 통일이라는 말의 가치를 올바르게 지키고자 하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 2천년 역사 동안 문제도 많았지만 아직까지 기독교가 존재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 역시 예수의 올바른 이름 즉 ‘예수는 메시야’라는 고백을 간직하며 예수의 제자라는 올바른 이름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존재일 것이다. 우리 역시 그런 존재가 되길 바라며 13일 이뤄지는 지방선거를 통해 민주주의의 올바른 이름에 걸맞게 민의를 반영하고 시대의 변화를 이뤄내는 역사의 큰 물줄기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