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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 일시 | 여행도시 | 활동 내용 | 숙박 | 비고 |
1 | 10.29 | 양곤 | 부산 → 하노이 |
| 10시30분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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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이 → 양곤 | 양곤 | 하노이경유 |
2 | 10.30 | 양곤 | 항공권 구매 |
| 숙소 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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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곤 순환 열차 관광 | 양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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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0.31 | 양곤 | 양곤 시내관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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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1.01 | 바간 | 양곤 → 바간 |
| 항공 / 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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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간 오후 관광(일몰) | 바간 | 택시 |
5. | 11.02 | 바간 | 바간 오전 관광(일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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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휴식 | 바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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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11.03 | 몽유와 | 바간 → 몽유와 |
| 버스 (3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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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몽유와 관광 | 몽유와 | 택시 |
7 | 11.04 | 만달레이 | 몽유와 → 만달레이 |
| 버스 (3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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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달레이 관광 예약, 휴식 | 만달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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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11.05 | 만달레이 | 만달레이 전일 관광 | 〃 | 택시 |
9 | 11.06 | 만달레이 | 만달레이 관광( 전일, 오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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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11.07 | 낭쉐 | 만달레이 → 낭쉐 |
| 버스(8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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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쉐 시내 유람, 투어 신청 | 낭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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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1.08 | 낭쉐 | 인레 호수 관광 |
| 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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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레 지역 관광 | 낭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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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1.09 | 네피도 | 낭쉐 → 네피도 |
| 버스 (4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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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네피도 관광 | 네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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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1.10 | 양곤 | 네피도 → 양곤 |
| 버스 (4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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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곤 시내관광, 휴식 | 양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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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11.11 | 양곤 | 오전 양곤 시내관광, 쇼핑 |
| 18시55분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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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곤 → 하노이 | 기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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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1.12 | 부산 | 하노이 → 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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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 청도 |
| 기차 |
미얀마에 대하여 : 아시아 서남부에 있는 연방국. 국민의 9/10가 불교도이며 공용어는 미얀마어다. 1885년부터 1948년초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사회주의 중앙 계획 경제체제를 택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으로 산업은 대부분 국영화되어 있으며 경제는 주로 농업과 무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지형
미얀마는 북부 산악지방, 서부 산악지방, 중부 저지대, 동부의 샨 고원 등 4개 주요지역으로 나뉜다.
북부 산악지방은 미얀마 최북단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이 나라 최고봉 카카보 산(5,881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쿠몬 산맥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서부 산악지방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이지만 주요고지대로서, 히말라야 산맥 최동단에서 남쪽으로 뻗으면서 해발 3,000m 높이까지 치솟은 여러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구릉지대를 형성한다. 더 남쪽으로는 인구가 희박하고 삼림이 빽빽한 아라칸 산맥이 자리 잡고 있다.
중부 저지대는 아라칸 산맥과 샨 고원 사이며 벵골 만을 향해 펼쳐진 아라칸 해안평야와 안다만 해에 접해 있는 좁다란 테나세림 해안평야, 인구밀도가 조밀한 이라와디 강과 시탕 강의 삼각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샨 고원은 미얀마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부 저지대에서 갑작스레 치솟은 지형으로 단번에 600m까지 치솟은 곳도 있다. 샨 고원의 평균 높이는 900m이고 몇몇 산봉우리들은 2,600m가 넘는다. 남쪽으로 가면서 고원은 테나세림 산맥으로 흡수된다.
미얀마의 산맥은 남북으로 뻗어 있어 이라와디와 살윈 강 같은 주요 강들의 수로를 결정한다. 이라와디 강은 전체 길이가 2,100km이며 그중에 약 1,450km는 항해가 가능하고 전국토의 3/5 정도의 지역을 통과해 흐른다. 살윈 강은 이라와디 강 동쪽에 있으며, 샨 고원 지방을 통과해 마르타반 만으로 흘러나간다.
2. 기후
기후는 열대성기후로서 아시아 남부 계절풍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1년은 크게 세 계절로 나누어지는데 10∼2월은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 3∼5월 중순은 덥고 건조한 시기, 5∼10월은 계절풍이 부는 우기로 이루어진다. 연강우량은 해안평야와 산맥이 있는 지방의 5,100㎜에서 만달레이 주변 중앙분지의 900㎜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강우량의 거의 대부분이 여름의 우기에 내린다. 가장 서늘한 달과 가장 더운 달의 평균 기온은 샨 고원의 고지대에서는 23∼32℃이고, 남부의 양곤에서는 29∼36℃이다. 미얀마는 산이 매우 많아 경작지가 전체 국토면적의 1/6 정도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1/10 정도만이 관개가 이루어지며 이곳에서 주로 쌀을 재배한다. 국토 어디에도 초지로 이용할 만한 곳이 거의 없으며 국토의 거의 절반이 삼림으로 우거져 있다.
3. 국민
미얀마 국민의 3/4이 이라와디 강 유역의 전 지역과 좁다랗고 길게 뻗은 해안지대에 살고 있다. 친드윈 강의 서쪽 구릉지대에는 여러 친(Chin) 부족들이 살며 이라와디 강 상류지역과 북부 구릉지대에는 카친 부족들이 살고 있다.
샨 고원에는 보통 와족과 팔라웅족을 포함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샨족이 살고 있다. 삼각주 지대, 페구 산맥, 살윈 강 하류 등지에는 카렌족이, 샨 고원의 남쪽 기슭에는 카야족이 거주한다. 전 국민의 약 9/10가 불교도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이거나 애니미즘 신봉자들이며 힌두교도들은 극소수이다.
미얀마에는 단순한 방언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100개가 넘는 토착어가 있으나 공용어는 미얀마어로서 평야와 산악지방의 주민 모두가 사용한다. 버마라는 공식 이름으로 불렸던 영국 식민지시대(1885∼1948)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나 독립한 후로 영어는 공용어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아시아에서 인구밀도가 희박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전 국민의 1/4 미만의 사람들만이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연간 인구증가율은 세계적인 수준에 비하면 다소 높은 편이지만 동남아시아의 수준으로 보면 대략 평균치에 이른다. 2018년 기준 인구는 5,385만 5,735명이며, 이중 15세 이하의 인구가 27%를 차지하고 있다. 대도시로는 이라와디 강 삼각주에 위치한 양곤과 내륙의 만달레이를 꼽을 수 있다.
4. 역사
미얀마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해 산 곳은 약 1만 1,000년 전 이라와디 강 중류유역으로 추측되고 있다. <생략>
16세기 퉁구 왕조 치하에서 최초로 재통일이 이루어져 1752년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으나 곧이어 다시 몬족의 미얀마 지배가 시작되었다. 미얀마의 저항세력은 민중지도자 알라웅파야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며, 1759년에는 마침내 미얀마 전역을 확보하고 미얀마 최후의 왕조를 건설했다. 알라웅파야 왕국은 인접 국가들을 놀라게 할 만한 팽창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특히 아삼 지방에 대한 미얀마의 야심은 영국과 충돌한 계기가 되었다.
미얀마는 아삼 지방을 점령했으나 2번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1824∼26, 1852)으로 아삼 지방뿐만 아니라 마니푸르· 아라칸· 테나세림과 페구까지 잃고 말았다. 이어 미얀마의 나머지 지역은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끝나면서 1885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미얀마는 인도의 일개 주(州)로 전락했다. 영국은 불교를 국교로 계속 인정할 것을 거부하여 미얀마인을 분개시켰으며 더욱이 영국의 자유방임 경제정책들은 미얀마 국민 대부분을 소외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일들로 1931년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1937년 영국은 미얀마를 인도에서 분리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일본에 점령당했으며 1948년 초까지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62년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사회주의 미얀마를 건설할 목적으로 혁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군 지도자들은 미얀마의 주요기업들을 국영화했으며 미얀마를 외부세계와의 접촉으로부터 고립시키면서 급속한 공업화 정책에 착수했으나 실패했다. 1980년대 말까지 정부의 부패와 잘못된 관리정책으로 자원이 풍부한 미얀마는 세계에서 매우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대중의 불만이 1987∼88년 광범위한 반정부 폭동으로 터져 나왔으나 군의 폭력 진압으로 실패했다. 그후 미얀마사회주의계획당(MSPP)의 1당 독재는 폐지되었고, 여러 정당이 속속 등장했다.
1990년 5월 헌법 개정을 위한 총선에 약 90개의 정당이 참여해 야당인 민주국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NLD)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새 의회의 의석을 대부분 차지했지만, 1988년부터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부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당선자의 상당수를 투옥시켰다. SLORC가 장악한 국회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NLD의 지도자이며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와 야당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 다음 백과 인용, 편집 >
< 여행의 출발 >
♠제 1 일 (2019. 10. 29. 화) 청도 → 김해 → 상하이 → 양곤
군청 뒤 정자에서 안선생 사모님 차로 역에 도착하니 손과장과 이선생이 이미 와 있다. 사모님들의 걱정 어린 환송을 받으며 드디어 15일간의 미얀마 여행을 시작하였다. 7시 31분 무궁화로 구포역에 도착해 공항까지 택시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아침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빠르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겨우 택시 한 대를 잡는데 성공해 원래는 2명씩 타고 갈 생각이었지만 운전기사에게 4명이 탈 수 있느냐고 하니 타라고 했다. 캐리어 3개는 트렁크에 넣었으나 손과장의 농짝만한 캐리어는 결국 안고 뒷좌석에 탔는데 그 무게가 만만찮아 미얀마에서 저 놈의 캐리어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공항에 도착해 체크 인하는데 우리가 늦게 와서 4명이 나란히 앉아 갈 자리는 없다고 하여 세 사람은 나란히 좌석을 배정받고 나는 떨어져 앉는 대신 제일 앞쪽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출국심사와 보안검색을 거쳐 면세구역에 들어갔더니 청도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과 배진한 선생과 최가연 선생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래서 아메리카노 한 잔씩 돌리고 어딜 가느냐고 하니 대만 자매결연학교에 간다고 한다. 박소영 선생 아들 우가윤도 있어 마시던 커피나마 주고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탑승이 시작되어 10시 35분 베트남 항공 VN0427기로 하노이를 향해 출발했다.
내 옆 자리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젊은 아줌마가 고개도 잘 못 가누는 6개월도 안 되어 보이는 갓난아기와 고향 가는 모양인데 낯가림도 안하고 아이가 아주 순하다. 비행시간이 4시간 40분이나 되어 굉장히 지루한데 좁은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으니 소화가 잘 안되는지 방귀가 나오려 했다. 겨우 방귀를 뀌기 위해 화장실로 가는 건 에너지 낭비라 생각되어 은밀히 체외로 살포하니 다행히 소리도 없다. 약 30초 후 아이 엄마가 코를 끙끙대더니 아이를 안고 화장실로 간다.
음! 마침 심심하던 차에 이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화장실에 가 기저귀를 확인한 결과 아이가 똥을 쌌을 경우 아이 엄마는 “그렇지.”라면서 자기 코가 정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 아이가 오줌만 쌌을 경우 아이가 “오줌을 누다가 방귀를 뀌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셋째, 기저귀가 깨끗할 경우 “기저귀 하나를 아끼게 되었구나.”라고 기뻐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아이 엄마가 부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없고 게다가 얼마 전 TV에서 방귀 안에 들어 있는 황화수소(H₂S)의 효능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났다. 황화수소는 무색 기체로 썩은 달걀 냄새가 나고 치명적인 유독성을 갖고 있지만 소량으로 흡입할 경우 암과 뇌졸중, 심장질환, 치매 등 각종 질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체내의 세포를 보호하고 질병을 예방하며 혈액세포의 에너지 생성을 촉진하고 염증을 조절하는 미토콘드리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니 방귀는 거의 만병통치약이다. 그래서 미래에는 각종 질병의 치료에 사용될 것이라고 하니 나는 내 몸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황화수소로 주변 사람들의 질병 예방에 기여한 셈이다. 이 세상에 불필요한 것은 없으니 코딱지에 있는 특정세균이 만든 “루그더닌”이란 성분이 항생제에 내성이 잘 생기는 황색포도상구균이나 바실러스균에 대한 면역기능이 있다고 하니 코딱지도 아껴 먹어야할 판이다. 내 비록 선행을 했으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나는 나의 선행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베트남과 2시간 시차가 나기에 13시 10분에 하노이에 도착했는데 우리 시간으로 보면 15시 10분인 셈이다. 공항에서 대기 시간이 3시간 20분이어서 공항 대기실로 가는데 나머지 세 사람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 알고 보니 손과장은 공짜 술이라고 레드와인을 11잔을 얻어먹고 두 사람은 5잔씩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손과장은 계속 술이 술을 당기는 모양인지 양주를 자꾸 사려고 해서 억지로 말렸다. 눈앞에 넵머이 30°짜리의 붉은 레벨이 보였지만 미얀마는 아직 군사독재국가이므로 그걸 사는 순간 입국심사에서 생각지 못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 겨우 참았다.
< 베트남 항공은 값이 싼 편인데도 기내식이나 각종 음료수 서비스가 아주 만족할 만했다. >
16시 30분에 베트남 항공 VN0957기를 타고 양곤으로 향해 갔다. 베트남과 미얀마는 시차가 30분이기에 2시간 비행 후인 18시에 비행기가 양곤 공항에 내렸다. 양곤에서는 한인 게스트하우스인 윌리스에서 숙박하고 픽업을 부탁했기에 윌리스 팻말 든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문득 수하물을 찾으러 올 때 출구 하나를 지나친 기억이 나 그곳으로 돌아가니 윌리스 팻말을 든 청년이 있었다. 나는 차가 베트남에서처럼 소형 택시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는데 비록 차는 낡은 것들이 많았지만 일본차가 많았고 토요타 중형차 정도라서 캐리어 싣고 뒷좌석에 3명이 앉아도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차의 핸들이 오른쪽에 붙은 일본식인데 통행방식은 우리나라와 같아서 타고 내릴 때 차도로 가서 문을 열고 타야했기에 위험했다. 그러나 이도 나중에 적응이 되니 자동으로 뒤를 살피고 문을 열고 내리게 되었다.
< 비엣젯 선전 현수막에서 알 수 없는 동글동글한 글자를 보니 이곳이 미얀마란 실감이 났다. 중앙에 “ɔJ,000”은 나중에 무엇인지 알았는데 “12,000”이란 아라비아 숫자를 미얀마 식으로 적어둔 것이었다.>
윌리스에 도착하니 9층 건물 중 8층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불편하게도 출입 시 마다 1층 입구 자물쇠를 열어야 했다. 그런데 열쇠와 아귀가 맞지 않는지 잘 열리지 않아 늘 초인종으로 일하는 젊은이를 불러 열어달라고 해야 했다. 나와 안선생이 한 방을 쓰고 이선생, 손과장이 방 하나를 쓰기로 했다. 일단 가방을 방에 두고 식탁에서 매니저에게 유심 이야기를 하니 젊은 애 시켜 유심을 사오게 한 후 8천 짯(kyat)에 유심을 교체해 주었다. 일단 유심만 교체해 데이터만 쓸 수 있다면 대강 여행 때 생길 수 있는 자질구레한 난관은 구글이나 미얀마 사전 등으로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여행의 기술이 많이 는 것이다. 저녁때는 꼬치골목으로 가 꼬치와 귤을 9천 짯 어치 사서 숙소에 와 술 한잔하다가 11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제 2 일 (2019. 10. 30. 수) 양곤 순환열차
6시 경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식탁으로 나오니 미얀마의 20세 초반으로 보이는 키 크고 미끈하게 잘 생긴 머슴애가 소리도 내지 않고 사부작사부작 반찬을 만드는데 놀랍게도 전부 한식이다. 게다가 음식의 간도 맞고 양념도 제대로여서 어지간한 한식당(韓食堂)보다 낫다고 할만하다. 나중에 보니 윌리스는 게스트하우스만 아니라 맞은편에서 한식당도 해서 아마 그곳에서 배운 모양이었다.
< 김치, 제육볶음, 계란 프라이, 어묵탕, 떡볶이에 숙주나물 무침까지 정갈하게 차린 밥상인데 이걸 20대 외국 남자애가 했다고 생각해보라. >
< 숙소 창 밖을 보니 눈부시게 날씨는 맑아 양곤강의 누런 강물에 많은 사람들이 탄 배가 도착하는 모습과 쌀과 과일을 등에 지고 나르는 모습이 보여 지리도 익힐 겸 동네 한 바퀴 산책하기로 했다. >
< 큰길 가 경복궁이란 절이 있었는데 2011년에 150주년 기념으로 사천왕상을 세웠다고 하니 제법 오래된 절인데 LED 등으로 번쩍이는 간판이 생경스럽다. 앞에 어중간한 자세로 포착된 손과장. >
그러다가 나온 김에 양곤순환열차를 타기로 갑자기 계획을 변경했지만 별 달리 준비물이 필요 없었기에 상관이 없었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양곤 중앙역으로 가자고 하니 어떤 택시기사는 못 알아듣는다. 겨우 영어를 조금 배운 젊은 기사를 만나 3,000짯에 흥정해 역으로 가니 우리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다. 역에 내리니 웬 건장한 중년의 사내가 오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자꾸 물었는데 아마 자기 택시를 이용하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순환열차를 탄다고 하니 역 안으로 가 아래로 가라고 가르쳐 준다. 역 건물 안에서 표 파는 곳을 찾았지만 영어는 전혀 없고 동글동글한 글자만 머리 아프게 있어 우리는 어디서 표를 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역무원에게 물으니 육교처럼 생긴 다리를 건너가라고 한다. 건너가니 우리로 보면 홍익회 냄비우동 파는 집 비슷한 것이 플랫폼에 있어 그리로 가니 표 파는 곳이 맞다. 영어가 적힌 간판은 가뭄에 콩 나듯 보이니 이렇게 다니기 불편해서 어떻게 외국관광객을 맞이할 수 있을지 내 나라가 아니지만 걱정이다.
< “Circular Train Platform 6,7”이란 영어를 상점 위에서 겨우 찾아내어 화살표 방향의 육교를 건너가니 그게 6번 플랫폼인 모양이다. >
플랫폼 매표소 앞에 서서 한 사람에 얼만가를 보는데 어디선가 걱정을 마라는 듯이 한 젊은 여자가 나타나더니 내가 “4 person.”이라고 하니 “800 짯이라 하고 자기가 돈을 받아 대신 표를 끊어준다. 역에 근무하는 도우미인가라고 생각했는데 표를 주고는 우리를 옆의 의자로 안내하더니 미리 와 앉아 있던 사람들을 당연하다는 듯 쫓아내고 우리에게 앉으라고 권한다. 얼떨결에 자리를 양보 받은 우리가 앉자 물통 중간 사이즈를 3병 가져오더니 3,000짯이라 한다. 큰 것은 들고 다니기도 불편해 작은 것 3병를 달라고 했더니 2,000짯이란다. 나중에 기차 안에서 사니 1병에 200짯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바가지를 쓴 줄도 모르고 물을 마시며 기차 오기를 기다리던 우리는 9시 40분에 기차가 와서 탔는데 기차 꼴이 기가 막히다. 이곳 사람은 읽지 못하는 경로석이란 한자(漢字)가 좌석 위에 적혀 있고 JR이라는 영문이 이 차의 전력을 말하고 있었다. 같은 협궤니까 일본 폐기차를 가져와 대강 고쳐서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플랫폼에서 기차의 계단에 발을 거는 것이 힘들 정도로 계단이 작고 좁고 높다. 겨우 올라가 자리에 앉으니 가져올 때부터 문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니면 더워서 그런지 아예 개문발차(開門發車)가 생활화 되어 있다.
< 차 안은 각종 장사치들이 올라와 큰소리로 물건과 음식과 약을 팔기도 하고 멀쩡하게 차려입은 열대여섯 돼 보이는 처녀애가 알 수 없는 글자가 빼곡한 종이를 사람들에게 돌린 후 조금 있다가 돈을 구걸해 가기도 하고 중늙은이 정도의 건장한 사내는 은으로 만든 주발 비슷한 그릇을 들고 다니며 돈을 시주 받아 가기도 한다. >
차 안은 손님 반에 장사나 그 비슷한 목적의 행상이 반인데 공통점은 모두 가난하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불평도 불만도 없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구걸하는 소녀에게 약 1/3 정도의 사람은 적은 돈이나마 준다. 심지어 시내버스에서는 1/2 이상의 사람이 돈을 주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이 기차가 자기네 안방인양 편안하게 행동했는데 아이 안은 여자는 스무 살 정도였는데 자연스레 젖을 내어 아이를 빨게 했고 모두 그게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 옆 빨간 웃옷을 입은 소녀는 방글방글 웃으며 기차 타는 모든 이를 아는 듯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쟤가 오늘
은 평일인데 학교 안 가고 왜 기차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침 서양 아줌마도 그게 궁금했는지 미얀마 가이드에게 물었고 가이드가 애에게 무어라 하더니 대답하기를 초등 4학년 다니다가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학교 가는 것이 절대적 의무가 아니니 안 다니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앞의 작은 의자에 앉은 아저씨는 필생의 레시피로 여러 재료를 조합해 음식을 만들고 있다.
< 바람 들어와 머리카락 날릴까 창문도 내리고 이 두 아줌마가 원숭이들 털 고르듯 새치를 뽑아주고 있다. 이런 정겨운 원시적 장면을 본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빗자루 장수인 치마 입은 아저씨는 보기 싫은지 돌아 앉아 있다. >
튀긴 곤충을 파는 아줌마도 있고 벌써 내년 달력을 파는 아저씨도 있다. 모두 자기의 생업에 바쁜 중에 어느덧 점심때가 되니 이들은 또 기차 바닥 중간에 모여 앉아 서로의 음식을 팔아주는 것이었다. 빵 파는 사람은 비빔국수를, 비빔국수 파는 아줌마는 빵을 서로 팔아 주는 것이다. 서로 돕는 것인지 아니면 모처럼 외식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데 알 수 있는 단어는 없다. 다만 그들의 표정이나 몸짓으로 보아 아마 서로가 상대방의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
< 유일하게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기타 맨. 음악과 생활의 괴리가 피곤한 그는 가진 것이라곤 기타와 빈 물통 뿐, 난 그가 기타를 치며 돈이라도 얻으려 했으면 그의 기타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조금 아쉬웠지만 그는 너무 피곤하다. >
기차는 어느덧 종점인 “HLAWGA”에 도착했다. 원래 순환열차라 양곤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그게 사정상 바뀐 모양이다.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 외국인임을 알아차린 기관사가 오더니 기차는 1시간 후에 출발한다고 벽에 붙은 지도를 가리키며 알려 준다. 참 친절한 사람들이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처음 양곤 역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 다가와 어디 가느냐고 묻던 택시기사 역시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계속 말을 걸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를 바가지를 든 악덕기사로 우리를 등쳐먹으려는 나쁜 놈으로 미리 판단하고 있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장 나쁜 인성을 지닌 인간들이 택시기사들이다. 그래서 택시기사가 말을 걸면 일단은 듣지 않는 척하고 무시한다. 그리고 택시비 흥정을 하긴 하는데 실제로 우리 돈 500원도 못 깎는다. 그 이유는 500원이나 깎을 돈을 그가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해칠 사람도 없는 광장(廣場)에서 혼자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 “JR”이란 마크를 단 기차가 좁은 협궤에 서서 가파른 계단으로 손님을 내리고 있다. 이대용 선생이 반대편 자갈밭 쪽으로 내리려 하자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가던 아낙이 광주리를 던지고 달려와 이 선생이 안전히 내리도록 부축해 주었다. 이들은 왜 우리를 자꾸 감동시키지? >
우리처럼 목적 없이 그냥 종착역에 내린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그건 다른 사람들이 가는 방향이다. 우리도 마치 무슨 볼일이나 있는 사람들처럼 부지런히 사람들을 따라 갔는데 삼거리가 나오자 다른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가는데 우린 갈 곳이 없어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총 길이 250M밖에 안 되는 작은 시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왜 왔을까 지켜보는 가운데 우린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럼 식당을 찾아야 하는데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식당 간판 비슷한 곳이 있어 가보면 미용실이었다. 무엇이라고 도와주려고 하는데 문제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스토랑”이라고 해 봤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하긴 포장도 안 된 시장바닥에서 “레스토랑”을 찾는 것 자체가 코미디에 가깝다. 일단 나는 점심으로 먹을 작은 바나나 찾기에 성공했고 그 앞에 조리된 반찬을 진열해 놓은 식당인지 반찬 파는 집인지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무언가를 발견했다.
< 기름에 튀긴 고기와 닭고기 각종 채소나 소스 등이 20여종 진열되어 있는데 반찬을 파는 집 같았다. 어쨌든 손으로 가리키면 접시에 음식을 담아 주고 밥은 큰 그릇에 가득 담아 탁자 가운데 차려주었다. 나는 음식이 모두 튀기거나 아주 짜게 조리했기 때문에 식중독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께름칙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면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나는 바나나 한 송이를 1,400원에 사 점심을 대신하기로 했다. >
얼마냐고 물으니 얼마라고 하는데 얼만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계산기를 주었더니 4,500짯이라 찍는다. 만 짯을 주니 5,500짯을 주었다. 그러더니 내가 밥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1,000짯을 도로 주었다. 그러면 1인당 1,000짯에 3명이니 3,000짯에 밥은 총 500짯이다. 우리 돈으로 2,800원이니 식비는 1인당 935원이다. 게다가 자기들은 별로 덥지 않은데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먹는 우리가 불쌍했든지 식당 여주인과 젊은 딸 2명이 각자 한 명씩 맡아 부채를 부쳐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뭔가를 이야기하면서 쉴 새 없이 깔깔대며 웃는다. 우리를 화제로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무선 선풍기를 켜고 있었기에 미녀가 부쳐주는 바람의 영광에서 제외되었다. 나는 이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가난한지 그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선생이 1달러를 팁으로 주었는데 물론 받지 않으려 했지만 워낙 완강하게 주니 받긴 받았다. 나는 그들의 호의를 물질로 환산한 듯한 느낌이 들어 좋지 않았다. 손 과장은 소변이 급했든지 화장실을 물었는데 없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데나 누라는 것 같기도 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중에 손 과장은 자기 바지 앞에 손가락을 대더니 쭉 포물선을 그렸다. 천재다. 그러니까 바로 알긴 알아보는데 가게 뒤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하는데 결국 실패하고 우린 역으로 가 화장실을 물으니 역 뒤쪽으로 가란다. 가정집처럼 보이는데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1인당 200짯을 요구했다. 군자(君子)는 대방광(大膀胱)이라 나는 200짯을 아꼈다.
< 역에서 800짯을 주고 4사람 표를 끊어 12시 25분 기차를 탔는데 기차에서 표를 보니 “ From Yangon To Yangon”이라 적혀 있었다. 양곤에서 끊은 표가 왕복표였던 것이다. 워낙 값이 싸서 지레 짐작해 800짯을 날렸다. 사진의 왼쪽이 기관사 운전석이고 보다시피 달리는 기차의 모든 것은 부끄럼 없이 개방되어 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사람은 차장이 아니라 그냥 승객인데 다른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들고 타면 짐을 올려주고 내릴 때는 도와주기라도 하려는 듯했는데 급정차하면 상당히 곤란할 것 같다. 양곤 순환열차는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 찾아가 반드시 한 번은 타봐야 할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
< 택시로 숙소에 오니 애완용으로 기르는 원숭이가 반긴다. 냄새가 좀 나는데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귀엽다. >
더워 땀을 많이 흘렸기에 일단 씻고 맥주와 소주를 섞어 가볍게 한잔을 하고 운남소걸(雲南小乞)이란 식당에서 안주 겸하려고 소, 돼지, 닭고기 요리와 공심채를 시켰는데 손과장이 소주라고 가져온 것이 맹물이다. 맥주 1병만 마시고 나와 윌리스에서 추천한 발마사지 받으러 갔다. 비용은 30분에 4천짯이고 팁이 2천짯이니 우리 돈으로 4,800원이다. 마치고 나와 바로 앞 꼬치 집에서 꼬치를 넉넉히 사고 망고스틴도 사서 숙소에서 한잔 더 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제 3 일 (2019. 10. 31. 목) 양곤 시내 관광
오늘은 숙소에서 출발해 양곤 시내에 있는 유적 중 제일 먼 거리에 있는 ‘로카찬타 퍼야’에서 시작해 숙소 쪽으로 오면서 ‘차욱타지 퍼야’, ‘깐도지 호수’, ‘쉐다곤 퍼야’, 국립박물관, 그리고 ‘보타타웅 퍼야’를 구경할 생각이다. ‘퍼야’는 ‘파고다(Pagoda)’, ‘제디(Zedi)’로도 불리며 산스크리트어로는 ‘스투파(Stupa)’라고 한다. 부처나 제자들의 유골, 유품, 경전, 불상 등을 모신 탑을 말한다. 원래 계획은 택시 한 대를 대절해 하루 종일 타고 다닐 생각이었는데 어젯밤 숙소의 매니저가 택시비로 50달러 정도 생각하는 우리에게 150달러를 요구해 거절하고 아예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숙소에서 출발했다.
< 양곤 여행의 출발점은 Sule 파고다인데 여기서 모든 버스들이 출발하기도 하고 여기 사람들은 이 사원을 기준으로 몇 마일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8mile 레스토랑”이라면 여기서 8마일 떨어진 식당이란 것이다. >
숙소에서 택시로 Sule pagoda에 와 일단 버스 정류소를 찾는데 역시 경험 많은 안선생이 생김새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바로 찾아내었다. 그 사람은 인도 사람인데 일반적으로 인도 사람들은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의 마름 노릇을 하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잘 한다. 또한 미얀마인들은 영국인을 대신해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인도인을 전갈 보듯 싫어하니 인도인이 미얀마에서 믿을 구석이라고는 돈과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우리에게 길 건너 버스 정류소로 가라고 한다. 양곤 시내는 국가에서 오토바이의 통행을 금지해 길 건너기가 그래도 나은 편이나 시내를 벗어나면 동남아의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길을 건널 때는 상당히 요령이 필요하다.
버스 정류소에서 숙소 아이가 타라고 한 31번 버스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옆에 선 중년이 지난 사내에게 영어로 물어 보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신문 파는 노인에게 무어라 이야기한다.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와서 37번 버스를 타라고 한다. 이곳의 버스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같은 번호의 버스가 2대씩 연달아 오기도 하고 요금도 어떤 것은 2짯, 어떤 것은 3짯, 공항 가는 것은 5짝 등 요금이 차의 종류별로 다르다. 문제는 그 요금을 요금통에 적어 두었는데 자기네 문자로 적어 두어 지폐의 숫자와 통의 숫자를 맞추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37번 버스가 와서 타려고 하니 급히 오더니 아니라고 한다. 그럼 저 37번 버스는 무어란 말인가? 다른 버스는 자주 오는데 37번은 자주 오지도 않았다. 해는 어느덧 열기를 더해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분 정도 지나 다시 37번. 아니라고 한다. 다시 10분. 37번, 아니라고 한다. 우리 앞을 알짱거리며 슬슬 가는 택시를 타기에는 이미 기다린 시간이 너무 오래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37번 중에 “미니마”를 타야 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작은 버스를 타라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영어선생인 이선생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 37번 버스가 왔다. 그가 뛰어 오더니 운전기사에게 “로카찬타 퍼야”라니까 타라고 한다. 왜 이 버스가 “미니마”인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댕큐”를 연발하며 버스에 올랐다. 잔돈을 손에 쥐고 요금이 얼만지 확인하려는데 젊은 아줌마가 오더니 내가 쥐고 있는 돈을 이리저리 빼더니 요금통 안에 집어넣는다. 마침 앞에 좌석이 있어 앉아 정신을 좀 가다듬고 차를 보니 작은 차도 아니었다. 그래서 “미니마”는 중국 쿤밍공항의 “근참승객”과 더불어 영원히 알 수 없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차장 아줌마라 생각했던 여자는 몇 코스 가더니 내려버렸다. 그럼 그녀는 차장이 아니라 승객? 그녀는 내가 외국인이라 계산에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도와주려고 온 승객이었다.
버스는 공항 방향으로 가다가 운전기사가 여기라고 내리라는데 내가 예상하던 그림과 너무 안 맞다. 다시 “로카찬타 퍼야?”라니까 맞단다. 내 머릿속 그림은 이 버스가 숲이 우거진 종점에 우리를 내려 주고 우리는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고즈넉한 분위기의 절에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내린 곳은 차량의 왕래가 많은 대로변 길가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절도 탑도 보이지 않고 결국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묻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질문 전공의 안선생이 질문의 요령에 따라 그 중에서 제일 젊고 예쁜 아가씨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 사람이 모여 무어라 하는데 안선생은 “로카찬타 퍼야”를 반복하였다.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자기들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까를 의논하여 아가씨에게 전달하려는 순간, 내 앞에 멀건이 서 있던 젊은 아낙이 “어디 가시는데요?”라는 것이 아닌가! “로카찬타 퍼야”라니까 길 건너 조금 가다가 왼쪽으로 쭉 가면 된단다. 아마 한국에 시집온 새댁이 친정 다니러 온 것 같았다. 그래서 또 가는데 도무지 내가 생각하는 절집의 풍경이 아니라도 너무 아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내어 구글 지도를 보니까 자전거 타고 가던 청년이 오더니 어디 가느냐고 했다. “로카찬타 퍼야”라니까 맞다며 계속 가라고 한다. 이들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 마다 나타나 도와주는 것일까? 이들의 친절과 자비에 지쳐 길가 사탕수수 즙 파는 곳에 쉬면서 사탕수수 즙을 한 잔씩 마셨다. 그리고 바로 길 옆 사원이 “로카찬타 퍼야”인데 깜놀, 입장료가 없다!
< “로카찬타 퍼야”는 만달레이 북쪽에서 약 1,000톤짜리 백옥이 발견되어 그 자리에서 부처 형상으로 대강 다듬어 여기까지 이동 후 만들었다. 무게는 500톤에 높이가 11m인데 옥불(玉佛)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앞을 가린 보호 유리에 사원 입구가 반사되어 부처가 가슴에 불꽃을 안고 있는 듯 영, 사진발이 안 나온다. >
다음 행선지는 “차욱타지 퍼야”란 곳으로 택시로 5,000짯을 줄 정도로 멀었는데 에어컨이 안 되어 정체된 도로에서 창문을 연 차는 우리밖에 없었다. 조금 언덕진 곳에 올라가 자리 잡은 “차욱타지 퍼야”는 거대한 와불로 유명한 절이다. 그러나 와불을 본 순간, 나는 그 크기보다 부처를 이렇게 마음대로 만들어도 될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첫째, 와불(臥佛)은 석가모니가 열반하는 모습을 본뜬 것이므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 부처는 소파에 누워 TV 보는 것을 본뜬 것인지 눈을 크게 뜨고 말똥말똥 앞을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와불은 베개를 베고 있는데 이 와불은 베개는 있되 팔로 머리를 괴고 있다. 게다가 부처의 모습을 여성화한 건지 눈썹은 아주 선명하게 검고 길며, 눈 주위로 색조 화장까지 했다. 또, 속눈썹이 엄청 길고 입술은 루주(rouge)를, 손톱발톱엔 매니큐어를 새빨갛게 칠하고 있다. 피부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완백색이다. 어느 나라 사람보다 불심이 깊은 미얀마 사람들이 왜 부처를 이렇게 표현했을까?
< 모두가 다 해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여자인들 해탈하지 못할 것이 있나 하는 마음에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는 여자는 윤회의 바퀴에서 남자 바로 아래 단계에 있어 다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야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태어나 처음으로 여성으로 표현된 부처를 보았다. >
한 바퀴 둘러보고 온 김에 절의 화장실을 사용하자 싶어 화장실 표시를 따라 가니 그 표시는 우리를 절 밖으로 이끌었고 계속 따라 가니 유료 화장실이었다. 그래도 마침 그곳에서 볼일 보러 온 택시기사를 만나 3,000짯에 깐도지 호숫가 말리쿠 식당으로 가자고 해 택시를 탔으니 다행이었다. 깐도지 호수는 무려 30만평이 넘는 거대한 규모인데 쉐다곤 퍼야를 지을 때 흙을 돋우어 인공 언덕을 높였다는데 그 흙 파낸 자리가 깐도지 호수가 되었다. 중국 북경의 이화원의 불향각(佛香閣)언덕과 곤명호가 이 비슷한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고 있다.
안선생이 가이드북에서 찾아낸 말리쿠 식당은 깐도지 호숫가에 전통 미얀마식 음식을 파는 곳이라 한다. 문제는 이 식당을 운전기사가 호숫가를 뱅뱅 돌아도 끝내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호수 입구에서 우리는 그냥 내리고 택시를 보내니 식사시간도 넘어 아무 집이나 들어 간 것이 말리쿠 식당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식사 중이었는데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아주 저렴해 나는 쌀국수를, 다른 사람들은 밥을 시켰는데 종업원이 자꾸 무슨 말을 하긴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곧 젊은 아줌마가 오더니 영어로 말하는데 우리의 주문이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다. 쌀국수를 주문했는데 그건 그냥 쌀국수 덩어리만 주는 것이고 밥은 그냥 반찬 없이 밥만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째 헐하다고 했더니. 그래서 다시 메뉴판에 집중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겨우 주문을 했다.
< 시키다보니 나는 비빔국수 비슷한 것이 나왔는데 옆의 국은 서비스란다. 다른 사람들은 밥에 고깃국과 이상한 물김치 비슷한 것이 나왔다. 4명 식사대가 15,000짯이니 우리 돈으로 1인분에 3,100원이다. >
다음 행선지는 미얀마 전체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인 쉐다곤 퍼야인데 쉐다곤은 60m 높이의 언덕을 만든 후 그 위에 지어진 파고다인데 그 높이가 112.17m(7.17미터 정도인 첨탑까지 포함)인 크고 아름다운 황금 탑이다. 미얀마 설화에 따르면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마침 그 주변을 지나던 미얀마인 형제가 공양했고 부처가 고마움의 뜻으로 여덟 가닥의 머리카락을 뽑아줬다고 한다. 그 머리카락을 형제가 왕에게 바쳤고 그 중 두 가닥을 봉안해 언덕에 묻고 쉐다곤을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쉐”는 황금, “다곤”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즉, 황금의 언덕이라 뜻인데 이름에 걸맞게 모든 건축물은 황금으로 덧붙여져 이곳의 입장료로 1인 1만짯을 받을 만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쉐다곤 입장 스티커는 입장 시에 옷에 붙여 주는데 당일에 한해서 유효하며 매일 다른 색깔을 사용하므로 다음 날 재사용은 안 된다.
< 쉐다곤 퍼야의 대표적 파고다와 동쪽 입구 >
아마 우리가 올라간 곳은 동문(東門)인 듯한데 미얀마의 일반적 사원의 형태는 우리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주건물의 사방(四方)에 입구가 있고 그 입구마다 각각의 부처를 안치해 두는 것이다. 사진의 뒤에 보이는 것이 112.17m의 주건물이고 이 건물을 중심으로 지금 보이는 것과 같은 입구가 동서남북에 있는 것이다. 그 외 부속건물도 엄청나게 많아 도대체 언제 이 많은 건물을 짓고 언제 이 많은 금칠을 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몇 년 전 여행한 스리랑카의 루완웰리세아 다고바(대탑)와 그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다고 하겠으나 루완웰리세아 다고바는 흰 페인트칠을 한 것에 비해 쉐다곤은 그 화려하기로 따진다면 부처의 치아를 봉안했다는 스리랑카 불치사(佛齒寺)가 와도 안 될 것 같았다.
< 주탑을 중심으로 다시 이와 같은 부속 건물이 빙 둘러 있고 그 안에 다시 부처를 모시고 있다. 1995년 조사에 의하면 현재 탑 외벽에 붙여진 황금 판(8,688개)의 황금이 54,000kg(54톤)에 이른다고 한다. >
사진에서는 보잘것없이 보이는 탑의 맨 위 장식부에는 다이아몬드가 있으며 그 주변으로 수많은 보석이 장식되어 있다. 제일 꼭대기의 다이아몬드 장식물은 높이 56cm, 너비 27cm에 다이아몬드가 4,351개로 총 1,800캐럿에 이른다. 그 중 제일 가운데 큰 다이아몬드는 76캐럿이라 한다. 날개 및 우산 부분은 길이 130cm에 너비 76cm이고 무게 419kg인데, 루비가 2,317개, 금종이 1,065개, 은종 420개가 장식되어 있다. 쉐다곤 북쪽 출입문 앞에는 탑 꼭대기의 다이아몬드를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으며, 오후 4시경 북쪽 출입문 근처에서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면 햇빛에 반사되는 다이아몬드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데 보석을 그냥 돌의 한 종류로 보는 나에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므로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 경내를 돌다가 사진의 가운데 남자애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먼저 말을 걸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순식간에 여학생들의 얼굴에 놀람과 부러움의 웃음이 피어나며 우리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아마 대장금의 이영애나 BTS의 K-pop 아이돌 덕분이거나 요즘 동남아의 인기몰이 중인 박항서 감독 덕분이겠거니 하고 이야길 해보니 미얀마 학생들이라 한다. 사진을 한 장 찍고 안선생이 마침 기념품으로 준비해온 볼펜을 한 자루씩 돌리니 두 나라의 우호가 더욱 돈독해진 듯하다 >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왔던 곳으로 돌아와 택시를 타고 국립박물관으로 가자고 했더니 허름한 건물 앞에 차를 데더니 다 왔단다. 건물을 보니 국립 극장이었다. 한참 교육을 시켜 다시 차를 돌려 겨우 박물관에 도착해 차비로 3,000짯에 1,000짯을 더 주었다. 박물관이래서 상당히 기대를 했지만 어떤 곳은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그대로 둔 곳도 있고 주로 건축물 미니어처 같은 것이 많아 별 구경거리가 없었다. 그래도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팻말은 붙어 있었다. 기록을 좋아하는 안선생이 박물관에서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은 걸 보면 남에게 권할 박물관이 아님을 알 것이다. 시간도 늦어서 ‘보타타웅 퍼야’는 생략하기로 하고 봉고 택시로 숙소 근처에 내려 이제 제법 단골이 된 동내 슈퍼에서 맥주를 사 숙소에서 한 잔했다.
< 해 저물녘 숙소에서 내다본 주변 경관 >
6시경에 시장 구경을 하다가 노점상에게 오이 4개를 샀다. 저녁은 중국 식당에서 국수와 만두로 때웠다. 돌아오는 길에 꼬치 집에 들러 꼬치와 맥주를 샀다. 어젯밤 숙소의 한국인 매니저가 택시 대절비로 150달러를 요구하던 교통비를 계산해보니 15달러 밖에 안 들었다. 슬픈 일이다. 내일 일정은 국내 항공편으로 바간까지 가야하므로 숙소로 돌아와 가방도 싸고 공항까지 차량도 다시 확인했다. 소맥에 오이와 꼬치로 한 잔 더 마시고 잠들었다.
♠제 4 일 (2019. 11. 01. 금) 양곤 → 바간
4시 50분에 일어나 컵라면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5시 55분 숙소에서 나와 예약한 봉고를 타고 양곤 국내선 청사에 도착하니 시간은 6시 35분이다. 보안 검색을 하고 체크인 후 기다리다가 공항버스를 타니 공항 내를 이리저리 돌다가 한 쪽 구석에 세워 둔 프로펠러 달린 작은 비행기 앞에 도착했다. 스님이 2분 타셨는데 비행기에 오를 때도 먼저 오르게 하고 자리도 가장 앞자리를 배려해 주는 것 같았다. 비행기는 7시 30분 정시(定時)에 양곤을 출발했다.
< 통로를 가운데 두고 2사람씩 앉아 20줄 정도니까 정원이 약 80명될 것 같은 프로펠러 비행기이다. >
< 그러나 손님 대접은 우리나라 저가 항공보다 훨씬 났다. 아침이 부실한 승객을 위함인지 요기가 충분히 될 정도의 빵과 케이크, 그리고 취향에 따라 커피에 타서 마시도록 설탕과 크리머, 입가심용 물 등 간략하나마 알뜰한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
< 앞에 가는 외국인 커플은 내 앞좌석에 앉아 왔는데 비만인 여자의 해외여행에 대해 그간 궁금했던 점을 그녀는 한 방에 해소시켜 주었다. >
외국 여자들의 히프는 우리나라에서 나름 비만하다는 여자들은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정말 거대한데 나는 그런 외국 여자들을 볼 때마다 저 여자는 비행기를 어떻게 타고 왔는지 궁금했다. 내가 앉아도 그리 자리가 넉넉하지 않은데 얼른 보기에도 내 히프의 2배 이상 되니 좁은 비행기 좌석에 그 히프를 어떻게 교묘히 넣는지 정말 궁금했다. 오늘 아침 내 앞 커플이 몸으로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위 사진의 여자 히프를 보면 폭은 남자친구의 2배 정도이지만 둘레는 4배 정도가 되어 보인다. 저런 여자는 비행기 여행을 하려면 무조건 사진의 남자와 같은 체형의 남자친구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면 일단 남자를 창가에 구겨 넣고 중간 팔걸이를 뒤로 재친 후 사뿐히 의자에 앉는다. 그러면 그녀 히프의 1/4은 남자 친구의 의자를 침범하게 된다. 그리고 1/2는 자기 의자에, 나머지 1/4는 통로의 허공에 매달린 상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의자의 1/2로 버텨야하는 남자의 자세는 자연히 엉덩이를 비스듬하게 해 면적을 좁히려 노력하게 된다. 허리가 비틀어진 그는 오는 내내 창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듯했다. 그녀는 자기를 자리에 앉게 해준 그가 아주 귀여운지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그는 허리를 돌릴 수 없어 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 9시에 바간 공항에 도착하니 외국인의 경우 고고학적 지역의 지역세를 내야 했는데 1인당 5일에 25,000짯이니 우리 돈 2만원의 고액이다. 바간에는 이런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길 막고 통행세 받는 산적을 만난 기분이다. >
공항을 나오니 택시가 몇 대 있었는데 6,000짯에 흥정해 Bagan Biliken Hotel에 도착했는데 1박에 3만4천 원짜리 호텔치고 조용하면서 기품이 있어 정말 마음에 든다. 마침 택시기사가 영어도 제법 해 9시 40분부터 12시까지 반나절을 2만짯에 대절해 올드 바간 지역의 대표적 퍼야를 구경하기로 했다. 2011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에 이어 2013년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사원을 본 나는 오늘 바간의 사원들을 구경함으로써 드디어 세계 3대 불교유적 모두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두 곳의 유적이 엄청난 규모인데 비해 이곳은 물론 규모도 있지만 숫자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바간은 1044년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인 바간 왕조를 열었던 아노여타 왕에 의하여 건설된 미얀마의 고대 수도로 400만 불탑의 도시로 불렸다고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넓은 평원에 옛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만큼 지은 크고 작은 사원들이 끝없이 솟아 있는 것을 보면 미얀마 사람들의 불심은 정말 부처의 자비만큼 넓고 크다고 하겠다. 전탑 형식으로 지어진 크고 작은 탑들을 보며 부처를 향한 경쟁적 낭비로 그 당시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귀족이 큰 사원을 지으면 가서 노동력을 제공해 임금을 받아 생활을 하고 조금씩 돈이 모이면 나도 그 돈으로 사람들을 고용해 탑을 지어 다른 사람을 먹여 살리는 형국이 마치 양곤 순환열차의 상인들이 서로의 음식을 사 먹음으로써 서로를 살리는 것과 같지 않은가.
< 틸로민로 퍼야는 높이 48m로 이곳에서 탓빈뉴 퍼야(61m)에 이어 두 번째 높은 사원이다. >
1218년 지어진 이 사원은 2층으로 되어 있고 층마다 사방에 입구를 두어 4분의 부처를 모셨으니 총 8분의 부처를 모시고 있다. 이 사원을 세운 냔따웅마 왕이 왕자일 무렵 부왕이 다섯 왕자 중 누구에게 왕위를 계승할지를 결정하려고 우산을 던졌는데 그 우산이 가리킨 방향이 냔따웅먀 왕자였고 그 우산이 떨어진 자리에 세운 것이 이 사원이라 한다. 그래서 “틸로민로”란 말은 “우산 뜻대로”라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왕자의 난이 몇 번 정도는 날 일인데 왕자들이 착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갔을 무렵 한창 복원공사 중이었는데 비계가 전부 대나무라서 위험해 보였다.
< 우리로 보면 사천왕에 해당되는 역할을 하는지 부처를 경배하는 신자인지 모르겠지만 사원 입구 양 쪽에 조각상을 두었는데 그 양식이 캄보디아와 닮았다. 그 아래 동글이 글씨로 무어라 적힌 것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 코가 뾰족한 부처상인데 우산과 연관된 사원이라서인지 우산이 4개나 있다. >
< 이마가 뚝 불거진 부처상인데 여기도 우산 두 개를 곁에 두었다. 물론 우산은 불교에서 성물(聖物)에 속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곳에서 사원의 유래와 관련지어서 우산을 두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원에도 우산이 있는지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
다음으로 아난다 퍼야(Ananda Paya)로 갔는데 바간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사원 가운데 하나이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동서남북 사방에 나 있으며 사원의 높이가 51m, 동서 길이가 182m, 남북의 길이가 180m에 이른다. 1091년 짠시따(Kyansittha) 왕이 인도 남부의 벵갈지역의 난다물라 동굴사원을 모델로 사원을 건립했기에 18세기까지 난다라 불렀다. 19세기부터는 부처의 시자(侍者)였던 아난존자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 퍼야라 불린다. 눈부신 흰색과 황금빛의 조화, 그리고 높이와 넓이의 비율이 완벽한 비율 등은 바간의 중기 건축양식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이 건물을 지은 승려들이 인도로부터 이주해온 불교건축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무한의 지혜”라 불리는 이 사원을 지은 짠시타 왕은 이 건물을 지은 후 건축의 설계도를 없애고 인부들마저 죽임으로써 다시는 이 같이 미려하고 위대한 사원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아난다 퍼야의 또 다른 특징은 기다란 회랑을 만들어서 그 안쪽에 부처님의 전생담(前生談)인 637개의 그림(자타카, jataka)을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 동쪽 문 입구에 있는 부처는 구나함모니(Konagamana) 부처로 화재로 심하게 훼손되어 1857년에 티크 우드로 다시 만든 불상이라고 한다. 멀리서 본 모습이니 자애 가득한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냥 눈을 내리 깔고 있는 모습으로만 보이지 특별히 자애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
구나함모니 부처는 평민이 멀리서 참배할 때의 모습은 한없이 자비롭고 왕족이 되어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엄하게 보이는 부처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부처이다. 그러나 이는 어느 호사가가 지어낸 말이라 생각되는 것이 모든 부처는 한없이 자비롭고 모든 인간을 연민의 정으로 대하지 누구에게는 다정하고 누구에게는 엄격한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이 권력과 부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우산이 자기를 가리켜 하는 수 없이 왕이 된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왕관의 무게만 해도 편두통이 올 지경인데 그런 신분적 이중 잣대를 지닌 부처에게 역차별까지 받아가며 왕족을 해야 한다면 출가해 스스로 해탈을 추구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싯다르타가 출가 한 것도 역차별이 억울해서인가?
< 구나함모니 부처에게 최대한 가까이 와 찍은 사진인데 그냥 눈이 크게 보일 뿐이지 굳이 성을 내 바라보는 표정은 아니다. >
<남쪽 문으로 들어서면 부처의 커다란 발자국 조형물이 둥그런 판 위에 커다랗게 새겨져 있고 정면으로는 나무로 만든 9.5m의 부처 입상이 있다. 이 부처는 가섭불(Kassapa)이고,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가 입고 있는 연미복 같은 가사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인데 이는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를 나타낸다고 한다. 내가 볼 때 네 분의 부처상 중 얼굴이나 비율이 가장 아름다운 부처상이다. >
< 서쪽에 있는 부처는 석가모니(Gotama)이다. 최근에 조성된 불상으로 100년 전에 조성되었는데 금, 은, 동, 철 등의 금속을 합금해서 만든 불상이라고 한다. 틸로민로 퍼야의 부처상들과는 달리 이곳 부처 옆에는 우산이 하나도 없는 걸로 보아 우산은 “우산사원”이라는 틸로민로 퍼야만의 특징적 모습이 아닐까? >
남쪽과 북쪽의 부처는 원래 만들 때의 제 모습이나 동쪽과 서쪽 부처는 몽골 침략 때 화재로 심하게 훼손된 것을 근래에 재조성했다고 한다. 아난다 퍼야는 통로가 세 개로 나누어진다. 맨 바깥 통로는 일반인들의 참배 통로이고 그 다음은 왕의 참배 통로이고 가장 안쪽의 부처님과 가장 가까운 통로가 승려들이 참배하는 통로라고 한다. 이 안쪽 통로에는 수많은 감실을 만들고 부처의 전생담(前生談)을 조각하거나 불상을 모셨다. 무식해서 무례한 우리는 더운 바깥보다 훨씬 시원한 가장 안쪽 통로로만 다녔으니 졸지에 부처를 모시는 승려가 되어 참배한 셈이다.
< 북쪽 문 입구에 있는 부처는 구류손불(Kakusanda)로 사원 건립 당시 그대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부처 옆 감실에도 부처상이 모셔져 있어 어떤 이는 아난다 퍼야의 불상이 1,000개, 어떤 이는 550개라는데 글쎄? 알 수 없다. 다만 많다는 정도로 이해하자. >
동남아의 사원을 다니다 보면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원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혹, 신발을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했고 스리랑카에서는 몇 푼을 주더라도 신발 보관소가 있어 다행이라 여겼는데 미얀마에 와서야 신발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예수 사랑하려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아라 해놓고 신발 훔쳐 가더라.” 같은 노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사람 많은 곳에 신발을 벗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란 잠재의식을 가진 나는 내 신발이 그들의 신발보다 나으면 도난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조심했다. 그러다가 이제야 도둑놈이 신발을 훔치려 굳이 절까지 와 그것도 기도하는 사람의 신을 훔칠까 하는 생각에 지금까지 내 마음 속이 기우(杞憂)로 차 있었음을 깨닫고 이유 없이 남을 경계하는 세속의 두려움이 잔뜩 묻은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나를 신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는데 요한복음의 말씀 중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란 말에서 진리는 늘 존재했지만 나는 자유롭지 못했으니 그 대신 “깨달음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란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는 생각을 했다.
< 그 흔한 꽃도 못 사는 가난한 여인이 집에서 가져온 깨끗한 컵에 물 한잔을 앞에 놓고 빌고 있다. 아! 슬픔. 그녀가 원한다면 돈 많은 남편이라도 되어 주고 싶다. >
나는 가난을 대하는 관점이 동서양이 다름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시간관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다. 서양의 시간관, 특히 기독교의 시간관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일회성 시간관’인데 그 시작은 하느님의 천지창조이며 그 끝은 심판의 날로 일직선을 달리는 화살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동양의 시간관, 특히 불교의 시간관은 ‘무명(無明)에 의해 생겨난 윤회의 세계에는 시·공간이 존재하며 이를 벗어난 열반(涅槃)에는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는 것으로 빙글빙글 계속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바퀴의 개념이다. 여기서 이광수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무명(無明)’이란 말뜻을 알 필요가 있는데 대강 사물에 대한 도리를 밝게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진리에 대한 무지로 통용된다. 무명은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의 가장 원초적인 원인이 되니 이 무명을 없앨 때 해탈로 돌아가게 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사족(蛇足)을 하나 더 달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외치는 일부 개신교의 종파들을 보는데 사이비라 보면 틀림이 없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을 마치 지구 전체에 환난이 닥치고 지구가 큰 혜성과 부딪혀 박살나면서 인류 전체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 단체로 심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데 그럼 옛날 죽은 사람은 뭔데? 한 개인의 죽음이야말로 그에게 닥친 세상의 종말이며 개별적으로 하느님 앞에 가 받는 것이 최후의 심판이지 내가 죽고 난 다음 세상이 빠개져봐야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지구의 인구가 60억이 넘는데 한 분이신 하느님이 어느 천 년에 한 사람 한사람 심판하신단 말인가? 심판하시는 동안 서로 사랑에 빠져 대기 인구가 자꾸 늘면 최후의 심판은 끝없이 계속되겠네. 하느님 과로사하시겠다.
서양은 오늘의 가난이 나의 내세와는 상관이 없으니 이 가난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고 오늘은 돌아오지 않고 지나가는 오늘이기에 하느님만 굳게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동양은 오늘의 가난이 전생의 업(業)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를 갚기[報] 위해 안을 갈고 닦는 것이다. 오늘은 다음에 다시 돌아올 오늘이기에 더 나은 오늘을 맞기 위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에 대한 자세는 남미 가난한 나라를 보면 바깥 정부나 기업을 향한 과격한 시위나 파업, 폭동이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 특히 불교가 융성한 동남아 몇몇 나라 – 부탄, 미얀마는 세계 최빈국에 속하면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이다. –의 경우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니 나를 갈고 닦아 남에게 선행하는 자세로 오늘을 살아가니 스스로는 겸손해지고 남에게는 자애로운 이웃이 되는 것이다. 우리니라의 역사에서도 폭정이나 학정으로 인한 민란은 있으되 단순히 가난으로 인한 민란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음으로 차를 타고 간 곳은 61m 높이의 ‘전지전능한 부처'란 뜻의 탓빈뉴 퍼야로 1144년 알라웅시투 왕의 명령으로 북부 인도의 파고다를 모델로 지어진 바간 최고 높이의 퍼야이다. 요즘 건축기준으로 3m를 한 층으로 본다면 20층 높이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탓빈뉴 퍼야의 내부는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2층은 승려들의 공간, 3층은 유물박물관이다. 4층은 도서관으로 얼마 전까지는 바간의 탑군(塔群)을 조망하는 전망대로도 개방했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어 올라갈 수 없다.
< 지금 봐도 대단한 건축물로 일층 입구와 이층 창문이 보인다. 탑의 상부에 사리 등의 많은 성물을 모셨다는데 세계 2차 대전 때 미얀마를 침략한 일본군이 모두 훔쳐가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일본은 여러 나라, 여러 민족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으니 만약 부처가 계신다면 언젠가 그 갚음을 당할 날이 올 것이다. 바간의 많은 불탑과 사원들은 2016년 8월에 닥친 6.8의 강진으로 부서지고 무너진 부분을 복구 수리 중이었다. >
맨발로 다니기에 발바닥이 따끔거릴 만큼 볕이 따가워 일층만 둘러보았는데 이곳도 그 규모에 걸맞게 4개의 입구와 4분의 부처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아난다 퍼야에 비교하면 건물의 미적 완성도에서 떨어지고 부처의 크기도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작다. 역시 몇 군데 퍼야를 보니 비로소 아난다 퍼야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니 인간의 가치판단은 늘 상대적이다. 그러나 실제 바간의 아름다움은 어느 하나의 탑이나 퍼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니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넓게 펼쳐진 평원 곳곳에 자리 잡은 많은 건축물들의 합(合)을 바라보면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게 되니 이러한 전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바간의 풍경이 우리에게 주는 경건한 감동이 아니겠는가.
< 눈썹의 깔끔한 곡선과 손가락의 균등한 표현이 소박하고 단순해 오히려 넉넉한 아름다움을 품은 듯하다. >
< 아무도 가꾸는 이가 없어도 사원 가는 길에 자리 잡은 나무답게 이렇게 넓은 그늘을 만들어 눈이나마 시원하게 해주니 참 착한 나무다. >
< 마하보리 퍼야 입구에서 운전기사가 찍어준 귀한 단체 사진 >
< 마하보리 퍼야는 규모가 작아 한 분의 부처를 모시고 있었는데 지붕을 탑 삼아 이처럼 수많은 감실 부처를 안치해 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
< 이라와디 강 옆 언덕에 바간 왕조 이전인 850년경에 지어져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부(Bu) 퍼야. LED로 부처의 광배를 만들어 얼마나 돌리는지 천박할 정도였다. 순례 차 온 대구 가창 소재 절 아줌마들을 만났다. >
< 부(Bu)가 호리병박을 의미한다니 이곳은 이 사리탑이 중심인 것 같다. >
< 일몰 장소로 유명한 쉐산도 퍼야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우린 이곳에 와 배 타고 나가 이라와디 강심에서 일몰을 보았는데 날씨가 흐려 별로였다. >
< 부 퍼야 옆 식당에서 맥주 한잔 후, 부처의 불발(佛髮) 한 터럭을 보관하고 있다는 쉐산도 퍼야로 왔다. 1057년 여노야타왕에 의하여 지어졌는데 5단의 계단이 있어 일몰 장소로 유명했지만 추락 위험이 있다하여 지금은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택시 안에서 사진만 찍고 말았다. >
< 일단 오전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열대의 햇살 아래 호텔의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조용하고 깨끗한 호텔이다. >
택시기사에게 좋은 식당을 물었더니 호텔 바로 앞 Queen 레스토랑을 추천하면서 밤에는 하모니 레스토랑의 바비큐가 유명하다면서 추천해 주었다. 기사가 싹싹하고 어느 정도 영어도 해서 내일도 이 택시로 다니기로 하고 8시에 오라고 예약했다. 그리고 바로 Queen 레스토랑으로 가 파파야 샐러드에 나는 쌀국수 나머지 분들은 볶음밥을 주문했다. 음식은 깨끗하고 간도 맞아 먹을 만했다. 맥주 2병에 소주를 간해 마셨는데 음식 값은 22,000짯(17,800원/4명 = 4,400원)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와 빨래를 해 바깥 베란다 의자에 널고 나니 101호 이선생과 손과장 방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힘들게 가져온 농짝 캐리어의 전기 쿠커로 끓인 꽁치찌개로 다시 한잔 더 하고 방으로 돌아와 낮잠을 잤다. 형편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이것이 여행이다.
< 저녁을 겸해 하모니 식당에서 바비큐로 다시 한잔 마셨다. >
< 진열된 음식 중 우리가 골라 주면 구워서 가지고 온다. 닭고기, 돼지고기, 은행과 꼬치구이를 시켰다. >
호텔 방으로 돌아와 다시 소주 한잔 더하니 오늘 술자리는 점심때부터 시작해 4번째이다. 결국 모두 만취해 현실과의 인연을 잠시 끊어 버렸다.
< 여행기 1부 끝, 2부로 이어집니다. >
첫댓글 오늘은 1부만 즐겁게 읽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동서양의 종교적인 관점의 피력이 잼나고 의미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