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
1.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라는 길지 않는 글에서 현실적 마르크스의 위기를 진단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기획하며 정치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바디우는 세 가지 준거에서 마르크스의 위기와 중단을 발견한다. 먼저 소련이라는 현실적 사회주의에서 발생한 마르크스의 부적절한 적용과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확인되는 마르크스주의가 민족적 관점과 결합하여 변모되는 모습 그리고 폴란드 자유노조운동에서 나타난 공산당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에서 마르크스의 위기를 감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심판을 받아 단죄되었고 그 대안으로 제시된 의회민주주의와 권리 중심의 정치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한다. 이러한 대안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서 급진성을 제거하고 현실의 해방에 눈을 감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해방의 정신은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방향이며 정치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의 새로운 형상을 구획짓게 될, 또한 해방적 가설을 지속하는 마르크스주의로 불리게 될 어떤 것과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붕괴에 관한 완전한 사유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2. 바디우의 정치적 재구성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현실의 정치에서 표현되는 ‘수’의 정치, ‘재현’의 정치를 부정한다. 정치는 선거에서 나타난 투표의 수, 시위와 파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요소에서 해방될 때에야 진정으로 정치를 사유할 있다. 바디우는 당시 북아프리카 이주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던 ‘탈보사태’를 예시하며 그것과 관련된 좌파와 우파의 대응 그리고 그들의 상호관계를 분석하고 그러한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부조리한 모습을 확인한다. 바디우가 초점을 잡는 것은 외형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 속에 나타나지 않고 사실로부터 부재하고 있는 어떤 것, 즉 ‘사건’에 주목한다. 탈보사태의 핵심도 그들의 파업이 법적으로 정당하고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정체성, 파업의 실질적 원인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건은 ‘권리없는 권리의 언표’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정치에 드러내기 어려웠던 존재들, ‘재현될 수 없는 주체’들의 저항인 것이다. “모든 요인이 정합적이고 전체 상황에 대해 합법화된 하나의 집합을 형성하며, 따라서 일자로 재현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하나로 셈하기를, 곧 구조를 실현한다. 실제 인식에 따를 때, 이주노동자들은 그러한 일자의 공집합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셈할 수 없는 것이다.”
3. 정치는 기존의 질서를 재현하고 안전하게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해방시키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사실로 나타나는 재현의 정치가 아닌 은폐되고, 재현되지 않는, 즉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치는 그 절차의 원칙 자체에 따른 법의 중단과의 마주침을 사건의 형식으로 놓는다. 연속적인 개입은 사건에 대한 일관적인 충실성에 따라 도박의 대상이 된 가설 아래 놓인다. 이를테면 실재적이며 따라서 법의 관점에서 부조리한 사건으로부터 무한이 유래할 수 있다는 점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성적 추론은 정치적 과정의 본성적 요소이다.”
4. 바이우의 정치적 관점은 대략적으로는 핵심적 개념이 파악된다.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파악되는 정치적 구조, 정당과의 대립, 시위와 파업의 참여는 결코 정치의 핵심적 사유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속에서 숨겨지고 왜곡된 것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리’가 강조되는 정치 속에는 누군가의 권리를 위하여 희생당하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가 외형적이고 사실적이며 구조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고 가정한다면 변화와 해방을 위해서는 구조 너머, 사실 너머, 보여지는 것에 숨겨져 있는 것들에 주목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선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해방의 정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5. 하지만 이해에 접근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논리의 흐름은 각각의 개념과 명제, 사례 그리고 연관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형성된다. 이때 연결 고리를 놓쳐버리면 성급한 결론에만 도달하게 된다. 현대 철학, 특히 프랑스 현대철학의 난점은 이러한 사고의 논리에서 헤매게 된다는 점이다. 정치적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이다. 언제든 중요한 것은 결론에 이르는 논리의 흐름이다. 또한 현실적 정치를 이해하는 토대가 되는 ‘개념’의 발견이다. 개념과 개념의 연결으로 이루어진 논증의 과정, 이것이 철학적 사유의 핵심이다. 정치에 대한 사유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모호하지만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정치에 대해 사유할 때 보이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숨겨지고 은폐된 것들에 초점을 맞추라는 방향의 제시이다. 하지만 은폐된 것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될까? 일상의 정치적 현실의 비열함을 관통하는 철학적 시선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할까? 여전히 궁금한 일이다. 정치에 대한 현실적 감각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사고훈련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첫댓글 - 정치적 사유는 기나긴 교육적 활동으로 길러진다. 정치적 선택이 습관화된 몸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집단 지성의 힘이다. 그러나 정치적 활동은 아주 사소한(?) 감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며 승리를 쟁취해 나간다. 작은 불평들을 들어주는 듯한 전략이 점점 더 먹혀들어간다. 그러면서 더 중요한 시스템들을 무시하게 된다. 오직 승리만을 위한 전략 앞에서 맞대응하다보면 진흙탕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