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法頂) 스님 어록(語錄)
<법정 스님>
■ 법정 스님의 생애를 가만히 살펴보세요. 법정 스님은 우리 시대 부처님이셨습니다.
• 저는 법정 큰 스님이 아닙니다. "법정 스님입니다. 분명히 알아두세요."
• 너그러운 마음은 본심이고, 옹졸한 마음은 번뇌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옹졸한 마음은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한다. <말과 침묵>
• 총에 맞은 상처는 나을 수 있지만 사람의 입으로 입은 상처는 두고두고 아물지 않는다. <물소리, 바람소리>
• 석존(釋尊)은 길에서 태어나 평생을 길 위에서 살았다. 그는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시물(施物)이나 받아먹는 노란 좌불(坐佛)이 아니었다. <영혼의 모음>
• 무소유란 마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다는 뜻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 용서(容恕)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무소유>
•기도로써 힘을 얻었다, 영험을 얻었다 함은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을 기도를 통해서, 불보살의 가르침을 통해서 활짝 꽃피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마음 쓰는 일이고 또는 마음 닦는 일입니다. <산방한담(山房閑談)>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무소유>
•부처님이 벌을 주고 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불교 신자 중에 있다면 그는 불교를 크게 잘못 알고 있다. 부처는 분노하고 질투하며 복을 주었다 거두었다 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부처란 눈뜬 사람이다. 지혜와 자비를 몸소 실현하면서 이웃에게 그 그늘을 드리우는 너그러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 나눌 것이 없으면 다정한 눈매라도 나눌 수 있다.
•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물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맑고 향기롭게>
•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 기도란 간절한 귀의이고 마음을 여는 일인데, 무슨 영험을 바라고 동참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세속적인 거래요, 흥정이다.
• 나무아미타불의 진정한 의미는 나 혼자만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부르는 염불이 아니고 우리들 안에 있는 지혜의 자비를 끌어내는 일이다.
• 모든 오해는 저마다 ‘자기 집’에만 갇혀 있는 데서 오게 마련이다.
•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댄다. 기분 좋다고 먹고, 기분 나쁘다고 먹고, 싸웠다고 먹고, 화해했다고 먹고, 배고프다 먹고, 만났다고 먹고, 헤어진다고 먹고...
• 문명인으로 자처하면서도 글을 읽지 않으면 머릿속은 묵은 밭처럼 잡초만 무성하게 되어 속물이 되고 만다.
• 우리들 생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에 있다.
•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이 말은 얼마나 복잡하게 분별하고 있느냐의 뜻이다.
• 베푼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인 것 같다. 원칙적으로 자기 것이 없으므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속세에 대한 집착에서 생긴다. 집착이 없으면 괴로움과 번민이 없어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 불교 신자란 이 절 저 절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아니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5계를 받아 지니는 사람들을 말한다.
• 인간끼리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저마다의 독백에 있다.
• 계를 지키는 것은 콕 막힌 소승의 짓이고 닥치는 대로 먹고 행동하는 것을 대승인 양 착각하는 무리들마저 없지 않다.
• 시주의 은혜를 입는 것은 옛사람의 비유에 따르면, ‘내 숫돌에 상대방의 칼을 가는 것과 같다’는 것. 상대방의 칼은 간만큼 잘 들겠지만, 내 숫돌은 그만큼 닳아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 흔히 계율은 그릇과 같고, 선정은 물과 같으며, 지혜는 달에 비유한다. 깨진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없다. 그릇이 성해야 거기에 선정의 물이 고이고, 그 물에 지혜의 달이 비친다. 계율, 선정, 지혜를 삼학이라 한다. 어떤 종파든 삼학은 수도의 기본적인 틀이고,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물소리 바람소리>
• 모든 종교의 진리는 혀끝에 있지 않고 오로지 청정한 행동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소리 바람소리>
• 타인에 대한 비난은 정확한 것이 못 된다. 왜냐면 아무도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심판할 수 없다.
• 선지식은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어떤 특정한 계층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어떤 신분을 지니고 무슨 일을 하며 어디서 사는 누구이건 간에, 내 자신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깨달음의 길에 이르도록 교훈과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가 곧 내게는 선지식이다.
• 분노하고 질투하고 또 벌주는 것이 신(神)인가? 오직 자기만을 섬기고 남은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신이요, 창조주인가?
• 성급한 현대인들은 세월을 미리미리 가불해서 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속에서 미래의 몫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니 어찌 바쁘지 않겠는가.
• 우리들은 자신이 ‘풍요로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 손안에 넣는 순간 흥미는 사라져 버린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아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아무개 하면, 자신의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그렇고 그런 존재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그릇된 오해인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것인데.
•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면 우선 낡은 옷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다.
•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부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상이고 미신이다.
• 이 몸도 한때의 집이고 옷에 지나지 않는다. 집과 옷은 낡으면 허물어지고 해져 마침내 버려지고 마는 것.
•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 홀로 있을 때 순수한 내가 온전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부분의 나밖에 존재할 수 없다.
• 도덕성이 결여되었거나 삶의 목적이 합당치 못한 일은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올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물소리 바람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