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
5시간 ·
조영래 서거 32주기에 부쳐
아름답고 위대한 우정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
그리고 전태일‧ 조영래
1956년 12월 초, 피델 카스트로는 작은 배에 유격대원 82명을 이끌고 멕시코에서 쿠바로 갔다.
배는 난파하고 겨우 16명이 살아남아 우리나라 지리산 격인 시에라 마에스트라(마에스트라 산맥)에 둥지를 틀었다.
1959년 1월 1일, 불과 2년 만에 4만여 명의 친미괴뢰독재 정부군을 격파하고 혁명정부를 세웠다. 이는 자본주의 제국 미국의 콧등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거부한 현대 인류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혁명 주연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 조연인 체 게바라는 1955년에 멕시코에서 처음 만났다. 태어난 곳도, 자란 환경도, 겪은 경험도 서로 달랐다.
이런 다른 조건에서도 둘의 마음속에는 같은 적이 자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라틴 아메리카 약소국들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제국주의 모습에 반대하는 데에 뜻을 같이 하고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혁명 성공 뒤 ‘탈미국 그 이후’가 문제였다. 피델은 소련의 힘을 미국의 대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나, 체는 소련 역시 또 다른 제국주의라는 걸 알고는 크게 실망했다.
피델의 현실과 체의 이상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 혁명 정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이상에 목말라 하는 체는 정치를 현실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피델을 떠났다. 피델은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며 떠난 체를 비난하지 않았다.
체는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에서 돈키호테 같은 이상을 추구하다 목숨을 잃었다.
현재 쿠바에는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피델 카스트로의 형상은 아예 없고 어딜 가나 체 게바라의 형상과 구호만 넘실거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외국인 체 게바라가 왜 쿠바 혁명의 상징이 되었을까?
쿠바의 초등학생들은 수업하기 전에 “나는 체처럼 될 거야(Seremos como el Che)”를 반복할까?
피델 자신은 독재자라고 많은 비난을 받지만 체는 민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사실을 피델은 몰랐을까?
최고 권력자 피델은 체의 이상을 자신의 현실 정치에서 수용하기 힘들었지만, 혁명 정신의 원천으로써 체의 이미지는 쿠바 인민에게 아주 소중한 혁명 자원이라고 강조했다.
체의 이상은 ‘불가능한 꿈’일지 모른다. 현실에서는 이기적이고 현실적이며 불가피한 생존 전략만 가득할 뿐이다. 체는 그런 관습과 습관에 얽매인 현실을 비웃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런 체 게바라를 이상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현실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피델은 오히려 몽상가로 치부할 수도 있는 체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평생 존중했다.
피델과 체의 정치적 관점 차이가 치열했고 만남은 짧았으나, 영혼의 헤어짐이 결코 없었던 신비로운 우정이었다.
쿠바 사회는 모든 인간 세상이 그렇듯 확고한 이상 사회는 아닐 것이다. 혁명 후에도 대립과 갈등이 당연히 많았던 사회일 것이다.
쿠바 역시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장점이 많다면 허점도 수두룩할 것이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자 피델이 성공한 혁명의 영예를 체 게바라에게 고스란히 양보한 점만은 현대 정치사에서 아름다운 우정의 모범이며 쿠바 혁명 정치의 최대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인생의 참된 즐거움으로 보았고, 진정한 우정을 나룰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인생은 성공한 것으로 여겼다.
“우정은 유용성과 즐거움 그리고 선 이 세 가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선에 바탕을 둔 우정만이 영원하다.”
나는 쿠바에서 피델이 체에 베푼 우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전태일과 조영래 사이의 우정을 떠올렸다. 두 분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났지 않았지만, 조영래가 전태일 영혼에 다가가 전태일 정신을 세상에 드러낸 우정은 30대 초였던 내 의식 형성에 무한한 영감을 주었다.
전태일은 암담한 노동현실의 근본원인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태일은 비록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한자투성이 법대 교재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했다. 전문적인 법학개념과 법률용어로 된 책과 씨름했다. 전태일은 이때부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위대한 청년’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에게 참담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분신 사망 후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인 ‘아름다운 청년’ 조영래가 전태일 영전에 찾아왔다.
위대한 청년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 고통의 본질을 알아냈고, 아름다운 청년은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내려와 그 고통을 이 세상에 드러내었다.
혼과 혼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을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 있는 만남’이라 부른다.
내가 산 시대에 일어난 민중의 위대한 자각, 다시 말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시대모순을 돌파한 시대정신은 노동자의 자각을 외친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그러나 무지렁이 전태일의 분신만으로는 역사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영래는 고등학교 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하면서도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한 천재였다. 사법고시 준비하던 대학원생 조영래가 분신 사망의 소식을 듣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전태일의 영혼에 친구로서 다가갔다.
관포지교란 우정에서 관중이 뜻을 실현하도록 포숙이 언제나 양보했듯이, 피델이 쿠바 혁명의 영예를 고스란히 체에게 헌사 했듯이, 조영래는 자신의 능력을 전태일 정신 부활에 온 힘을 쏟았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모든 민주화운동은 이들 두 분-전태일과 조영래-의 영혼에 큰 빚을 안고 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체 게바라가 남미 혁명을 꿈꾸다 볼리비아에서 젊은 생을 마감했고,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죽음의 의미가 태산보다도 무거울 수도 있고,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을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조영래는 이상을 추구한 체 게바라와 전태일의 죽음이 의미하는 역사 무게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 정신을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우정은 ‘관포지교’ 이상이 아닐까.
나는 앞으로 남은 생에서 베트남혁명, 쿠바혁명, 68혁명에 대해 공력을 더 쌓아, 이를 바탕으로 전태일과 조영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에 다가서고 싶다.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12일 눈을 감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