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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물이 없는 곳, 메마른 땅에 나무가 심겨졌다면 그 나무는 메말라서 죽는다. 그대로 말라서 썩거나 또는 나무꾼들에 의해 잘려서 땔감으로 불에 들어가서 재가 되고 말 것이다. 나무로서의 꽃도 피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고, 번성도 못하고 그 나무의 일생은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나무가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해서 물이 많은 시내가게 심겨졌다면 그 나무의 일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나무가 자기 세상을 만난 것처럼 확 피어나지 않겠는가? 이 나무의 뿌리는 냇물을 빨아들이는 활동을 할 것이고, 빨아들인 물은 나무둥치로 거쳐서 나뭇가지로, 또 나뭇가지에서 잎사귀로 전달이 되니 이 나무는 금방 힘을 얻고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우리가 꽃밭에 꽃나무를 심을 때나 산에 나무를 심을 때 이런 것을 많이 경험을 한다.
잘 자란 나무는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가지를 뻗고, 길 가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지게 해서 쉬게 하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때 나그네들로 하여금 잠깐 피했다 갈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로부터 귀중이 여김을 받는다면 정말 나무의 역할을 잘하는 셈이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 진리의 도를 벗어나게 하는 모든 악한 자들이 유혹적으로 오고 미혹적으로 와도 그 꾀에 빠지지 않는다. 유혹은 물질적으로 오는 것이고, 미혹은 가르침으로 오는 것이다. 그 꾀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어린 모세에게 애굽의 모든 문물과 학문의 선생들이 달라붙어서 세뇌를 시킨다. 1 대 1로 선생들이 달라붙어서 애굽의 학문으로 모세를 세뇌시킨다. 모세의 속을 바꿔놓는 그런 작업이다. 그런데 모세의 속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진리 신앙사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격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애굽의 학문을 배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지식을 주격으로 하고 애굽의 모든 학문을 보조물로 삼았다. 발밑에 착착 깐다 그 말이다. 또한 바벨론의 모든 학문과 지식으로 십대 소년 다니엘을 잡으려고도 했다. 그런데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 잡히지 않았다. 이용을 했다 그 말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안 믿는 부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는 평신도는 물론이고 목사님들까지도 신앙지식은 이용물이고, 세상지식이 주격이 된 신앙으로 살고 있다. 이건 예수를 이용하는 거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소원 목적이나 사람들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보면 인간이 그렇게 미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반 자연계의 식물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어류 등은 본능적으로 자연법칙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법칙을 거스르며 살고 있다.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정해놓은 법칙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은 자꾸 자연법칙도 거스르고, 인인 간의 도덕적인 법칙도 거스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법칙을 거스르니까 인간 스스로가 고통이 된다. 그렇게 돼 있다.
세상은 인간이 잡으러 가도록 만들어 놓지를 않았다. 세상이 인간에게 와서 이용해 달라는 식으로 되어있는 것인데 타락된 인간이 세상을 잡으러 가려고 하니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잡혀지느냐? 그러니 그렇게 사는 게 고통스럽고 힘들고 원망불평이다. 그 얼마나 미련하냐? 하나님 다음에 인간인데, 이 인간을 일반적으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데, 만물을 다스리는 인간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죄를 짓기 위해 만물을 이용을 하니 이로 인해 만물이 죽어버린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갈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자기 자유로 어겨버린다. 말씀을 내버린다. 하나님을 내버린다. 이렇게 되니 인간끼리의 도덕성이 바로 설 리가 없다. 도덕성이 싹 무너져 버린다. 도덕성이 무너지니까 그 다음에는 물질적인 관계성에다 다 무너져 버린다. 이러니 사람이 괴물이 되고 짐승이 돼버린다. 점점 갈수록 더 그렇게 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천 년까지 살 런지도 모르겠는데 그 후로 보면 969살, 그 후로 보면 600살, 그 후로 또 보면 100살, 쭉 쭉 내려오면서 지금은 60, 70살, 그나마도 속 편하게 조금 오래 살면 100살. 어쨌든 아무리 오래 살아도 200살까지는 못 간다. 인간이 제 꾀에 의해서, 자기 미련에 의해서 자기 몸을 망치고 생명이 단축이 돼버린다. 참 미련하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마약을 하고, 담배도 일종의 마약이라고 할 수 있는 건데 오래 살겠다고 하면서 담배를 피운다면 이게 뭐냐?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악인들이 유혹적으로 미혹적으로 와도 그 꾀에 빠지지 않는다. 소원 목적적으로나 취미적으로나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들의 그 삶의, 그 신앙정신의 소원 목적에, 그들의 입장에, 그들의 소속에 들지를 않는다. 정신 사상부터가 그렇다. 일은 같이 할 런지 몰라도 그들의 소원 목적이나 그들의 취미나 그들의 사상에 그들처럼 감염이 되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목에 힘을 주고 사는 그들과는 의논을 하자고 해도 같이 하지를 않는다. 그 자리에 앉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인간답게 바르게 살려다보니 세상적으로 보면 그 삶이 편안하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개인적으로 그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늘 진리의 말씀을 상고를 하니까 복 있는 사람으로서의 신앙효력이 발생이 되는데, 본문에 보니까 시절을 좇아 과실이 맺어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시절’ 속에는 우리가 깨닫고 가야 할 이룰구원, 사람이 되어지는 이치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우리는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사시사철의 자연법칙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깨닫는 면의 구원의 이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농부가 자연법칙을 잘 이용을 하면 자기의 생활면에 큰 혜택을 받고 살게 되듯이 우리도 이 자연법칙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 계시를 찾아서 깨닫고 잘 이용을 하면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유익을 보고 가게 된다.
‘시절을 좇아 과실이 맺어진다’고 했는데 ‘시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들어있다. 사시사철 과실을 맺는다고 하는 것을 신앙 면으로 보면 복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 사건에 처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은 신앙이기 때문에 구원이 잘 이뤄진다 그 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사람이 참 잘 만들어진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이 맺어지는 것처럼 그 사람 속에서 고차원적인 참 사람의 인격이 속에서 자라난다 그 말이다. 맺어진다 그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다. 하나님의 성품이 잘 입어진다. 사람이 참 잘 만들어진다 그 말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환경, 그러니까 남이 자기를 대우해 주고, 주머니에 돈푼 꽤나 있고, 가정은 살만 하고, 이렇게 되면 자기가 좋은 사람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런데 상황이 바꿔져서 돈이 없지,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고, 마음대로 돈을 못 쓰고, 이렇게 상황이 악조건으로 돌아가면 자기 속에서 어떤 생각이 돋아날까? 열매가 잘 맺어지는 곡식처럼 기분 좋은 그런 사람이 될까, 아니면 비가 오듯이 우중충하고 누가 살짝만 건드리면 천둥소리가 나고 그럴까?
사람이 지혜가 있고 바로 돼 있으면 환경적으로 악조건이라도 그 악조건의 상황을 천국적으로 바꿔간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모든 것에 대립을 일으킨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전쟁이 일어나는가 하니 첫째는 자기 마음에서부터 일어난다. 그 다음에 가정에서 일어난다. 이 전쟁이 이 가정 저 가정으로 합쳐지면 사회적인 전쟁이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게 되니 자꾸 편이 나누어진다. 이러면 한 국가 속에서 내란이 일어난다. 내란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는 그 속을 좁혀서 들어가 보면 자기 개인 속에서 그런 것이 발동이 돼 있다.
세상은 절대로 절대 정확하지를 않다. 선악과 따먹은 죄로 저주받은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각 개인마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떤 많은 무리들을 위해서 어느 한 쪽은 손해를 보게 돼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어느 한 쪽만 손해를 봐서는 안 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무리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해주려고 하지만 세상이 어찌 그런가? 아무리 민주주의라도 선악과 따먹은 기존적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천국처럼 되어지지를 않는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훈련을 위해서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가 치게 하고 가만 두지를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 성도들은 훈련을 거쳐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예 편하게 살 생각을 말아라. 세상을 천국처럼 생각을 말아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신앙지식으로 그걸 뚫고 나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 한다.
‘사시사철’을 두 번째로는 자연 법칙적으로 오는 이치를 생각해 보자. ‘사시사철’의 첫째는 봄이다. 이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겨울에 꽁꽁 얼어붙었던 것이 녹아지고, 땅속에서 겨우내 잠을 자던 동물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고, 얼음 속에서 말라 죽은 것 같았던 풀들이 새싹이 돋아나고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이 때에 농부는 소득의 기회를 놓칠세라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소득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겨울에 가서 큰 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봄에 좋은 씨를 심기 위해서 연구를 하고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봄은 유년시절과 같다. 말하자면 어린아이들의 마음과 같다 그 말이다. 어린 싹이 돋아나는 것이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볼 때에 어리고 부드러운 마음 밭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 농부가 밭을 보고 ‘올해는 뭘 심어야 되겠다’ 하는 게 있듯이 봄인 어린아이의 마음 밭에 뭘 심을 것인가? 반드시 심어야 한다. 안 심으면 큰일 난다. 심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어릴 때부터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한다. 기독교가 빨리 들어간 나라를 보면 문화적인 그런 것이, 말하자면 신사 같은 것이 많이 있다. 일반 도덕성적인 면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정적으로 자라지 못한 그런 나라에서는 상당히 후졌다.
기독교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미국으로 가고, 미국에서 일본으로 들어오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건데, 지금은 한국에서 중국을 뚫느라고 야단법석이다. 그렇게 해서 중국을 뚫고, 중국에서 인도를 뚫고, 인도를 뚫으면 그 다음에는 아라비아가 뚫어지고 하면 기독교 복음이 지구를 한 바퀴 빙 둘러서 예루살렘의 출발점에 도착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도시대에 바울이 아시아 쪽으로, 그러니까 동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님이 이 일을 막아버렸다. 바울의 꿈속에 유럽의 젊은 청년들이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계시를 받아서 그 쪽으로 갔다. 이걸 보면 참 일리가 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인데, 바울이 로마로 가서 복음을 퍼뜨렸다. 그 때 로마의 길은 바둑판처럼 되어있어서 로마에서 세계 각지로 갈 수가 있게 돼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각 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갈 때 세계 사방으로 펼쳐진 이 길을 타고 나갔다.
그리고 로마로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서 마치 피 한 방울을 망치로 탁 치면 그 피가 사방으로 막 튀듯이 그 핍박을 피해서 기독교인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게 하나님의 전도방법이다. 참 묘하다. 그렇게 해서 복음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일본으로 복음이 건너오게 되었는데, 내가 어릴 때 일본에 살았었는데 우리나라보다 복음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은 그 때만 해도 산더미 같이 큰 배들이 있었고, 그 때 이미 고속전철이 있었고, 버스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는 우상의 나라지만 소문을 듣기로는 경제적으로 힘을 쓰는 사람들 중에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많다고 한다. 미국에서 유행된 것이 일본으로 건너오고, 일본에서 유행이 된 것이 한국으로 건너온다.
그런데 내가 어릴 때 일본에 살 그 때에 한국이 일본보다 50년이 뒤졌다고 했는데 한국사람이라는 게 굉장히 부끄러웠다. 일본사람들이 사는 곳은 굉장히 깨끗한데 한국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은 지저분하고 미개했다. 아무리 믿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문명적으로도 좋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비록 바른 믿음은 아닐지라도 성경을 들고 있으니까 북한이나 중국보다는 좀 낫다.
복음은 들어가지 않고 기계문명만 들어가면 사람이 인격적으로 망가져 버린다. 그러면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이 안 된 사람에게 돈을 주면 안 된다. 사람이 못써져 버린다. 그래서 보면 인도는 순 불교나라고 또 소를 신으로 섬기는데, 송장이 떠내려가고 똥이 떠내려가는 인더스강이나 갠지스강에서 오래 살겠다고 목욕을 하고 있다. 교회와 성경이 있는 가정이나 국가가 아무렴 더 좋다. 교회에 가면 암만해도 듣는 것이 많으니까 귀가 열리는 거다.
좀 더 들어가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성경의 이치가 안 열리면 그 나라 그 가정은 얼마 못 간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미국도 지금은 젊은이들이 거의가 복음에서 떠나버렸기 때문에 미래가 막막하다. 성경의 이치가 안 열리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다. 성경의 이치는 안 열려있는 상태에서 기계문명이 발달이 되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밖에 없는 거다. 우리 한국도 교회가 빨리 이치적으로 깨달아져야 한다. 안 깨달아지면 볼 것 없다. 사람은 깨달음을 받아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마음 밭에는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또 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가 듣고 보고 느끼면서 보고 들은 것이 감염이 되어 들어가고 있고, 그 감염된 것이 아이의 속에서 지식화 되어서 그게 점점 자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부모가 될 청년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자식은 부모가 된 대로 은연중에 그걸 밟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말하기를 ‘아이들은 자라면서 열두 번도 더 변한다’고 말을 한다. 미래적으로 잘 될 것을 생각을 하면서 이 말을 하는 거지 못될 것을 생각하면서 열두 번도 더 변한다고 하는 게 아니다. 현재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도 하는데 아이의 행동만 보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 밭에 떨어진 지식이 기준지식이 되어서 그 지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 성경에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신령천국에서도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고 싶어서 하는 말씀이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어련히 알아서 이 말씀을 하셨겠느냐?
지식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먹는 지식이 있다. 이거는 생명수라. 영생과라. 이 지식은 영원히 효력이 발생할 수 있는 신령한 지식이요 영적인 지식이다. 또 하나의 지식은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지식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이걸 모르고 사니 연속적으로 가정의 환난 풍파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일이,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속에 들어있는 지식이 문제다.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전혀 엉뚱하게 생각을 하니 얼마나 고통을 자초하느냐?
타락된 지식은 눈에 보이는 것, 세상에 있는 것, 땅에 속한 것, 불타지면 없어질 것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지식이다. 불타질 것, 세상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지식은 뭘 따먹은 지식이라?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이라. 사람이 이 지식으로 살게 되면 이는 고통을 늘 짊어지고 있는 사람과 같다. 사람의 생각이 무겁다. 세상을 생각을 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도 골치가 아프다. 그 생각을 하느라고 잠을 못 잔다. 사람이 땅에 소원 목적을 박아놓고 사니 눈도 늘 땅을 봐야 하고, 머리도 늘 땅으로 숙이고 다녀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개나 돼지가 머리를 땅으로 내리고 살듯이 사람이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면 자꾸 짐승처럼 돼버린다. 그걸 꼭 알아야 한다. 어떻게 살면 짐승처럼 된다?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면. 땅의 소원 목적이란 돈에 욕심을 두는 것이다. 돈에 욕심을 두니 사람을 위해서 돈을 쓸 줄을 모른다. 돈을 자꾸 재워놓기만 하지 사람을 위해 쓸 줄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이 땅에 소원 목적을 두게 되면 그 마음이 좁아터진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째째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러니 대인관계가 잘 이뤄지지를 않는다. 이러면 스스로 고통이 돼버린다.
세상 부모들은 의식을 하지 못한 채 아이들의 마음바탕에 어른들의 소원 목적을 넣어주어서 아이들이 타락된 일반지식으로 살게 한다. 세상을 보면 거의가 그렇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어린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내신 그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어디로 가버린 것이냐? 그러니 이 어린아이는 영원한 미래가 없는 거다. 이게 참 안타까운 거다. 불쌍하고 처절한 거다. 그러면서 ‘아이를 학교에만 보내면 잘 가르치겠지’ 하며, 그게 인생의 목적인 줄 알고 있다.
예수를 믿는 부모들은 어린아이의 마음 밭에 진리의 씨를 심어줘라. 그러면 그 말씀의 지식이 주격적 지식이 돼서 세상 모든 지식은 활용하는 지식이 돼버린다. 이게 인간이다. 이게 옳은 교훈이다. 그렇지 못하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아이를 위해 준비된 구원은 다 없어져 버린다. 평생 받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축복이 그 어린아이에게서 없어져 버린다. 있는 것도 못 받고 간다 그 말이다. 이런 꼴이 어디 있느냐?
아이를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길러놓으면 그 아이는 ‘자기가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왜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하는 자기를 만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른 채 결국 불타질 세상 것을 욕심을 내며 세상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으로 세상을 섬기며 살게 되니 자기의 젊음, 자기의 정력, 자기의 시간, 자기의 소유를 전부 물질 성공률에 투자를 해 버리게 된다. 이거는 하나님 앞에서 전부가 사망성공이 돼 버린다.
어린아이를 사망성공이 되게 해 놓으면 하나님의 심판거리다. 불심판밖에 없는 거다. 창조 전서부터 어린아이에게 주어져 있는 누릴구원을 알지 못한 채 영원히 영원히 멸망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을 할 줄 안다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아찔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자연 법칙적으로 봄을 만들어서 우리로 봄을 거치게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어떤 면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인지’ 하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 발견해야 된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것을 모르고 살았으니 그 결과가 오늘날 현재 자기에게 부딪힌 결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의 상태는 갑자기 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를 이 세상에 살게 하는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모르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봄에 대한 교훈이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닌데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감은 잡을 수 있겠느냐? 아이가 커서 된 게 어른이니까 ‘어른으로서 오늘날 내가 왜 이렇게 됐느냐’ 하고 볼 때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알았어야 할 텐데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나의 부모도 성경을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못해서 오늘날 나의 현실이 부정적으로 되었으니 부모가 된 지금의 나는 성경을 알고 있으니 두 번 다시는 부모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말자. 지금도 늦지를 않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