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수업84 불안할 때 염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압도적폭력 #자기안전감
"불안하다면 염불하라!"
2:43 수족이 잘리는 형장으로 오늘 당장 끌려가게 된다면
질겁을 하여 입은 마르고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이 튀어나오는 등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몰골이 되고 마는데,
2:44 하물며 무서운 형상을 한 염라왕의 사자가
털끝만큼의 인정도 없이 나를 묶는다면
큰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극심한 고통은 말로 다하지 못하리다.
#압도적폭력
일제강점기, 그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이들은 압도적폭력을 겪었습니다. 지독하고 지독하고 지독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존감이 고귀한 사람도 결국 둘 중 하나입니다. 고문을 끝까지 견디다가 죽거나, 아니면 결국은 자백하거나. 압도적 폭력 앞에서 자기안전감은 산산히 부서집니다. 자존감이 무너졌기에 스스로의 존엄을 의심하게 되고 이것이 육체 뿐 아니라 남은 인생 속에서 정신이 함께 무너지는 원동력이 됩니다.
폭력은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자연재해, 인간에 의한 폭력과 전쟁, 범죄 등 다양합니다. 그 모든 폭력의 궁극은 단연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의 무리에 묶여 있는 중생'에게 가장 극심한 공포를 불러옵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몸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중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타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들을 때조차 마음을 크게 흔들려 불안에 떱니다. 생존본능의 '죽음'이라는 폭력에 대한 거부반응은 상상 이상입니다.
2:45 ‘누구든 이 무서운 공포에서
저를 구해 주소서’ 하고,
공포에 질린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며 도움을 구하지만
#자기안전감
불안에서 벗어나 안심하는 것, 이것이 행복 그리고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하지만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죠? 아이가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른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스스럼 없이 어른들에게 안깁니다. 내 모든 것을 던져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아이들이 의지하는 어른은 어떻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불안을 안심으로 바꾸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타력에 의지하는 믿음의 길이요, 둘째는 자력으로 해결하는 사띠의 길입니다. 어른은 책임지는 자입니다. 일단 자신을 책임져야 하고,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아이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자력과 타력 모두를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안심해야 합니다. 안심이 최우선적 어른의 책임이니까요. <심리적 안전감>의 저자는 안전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심리적 안전감’은 간단히 말해서,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여기는 괜찮아. 저들은 나를 해치지 않아.’ 이런 느낌이 심리적 안전감이에요."
어른은 더 어른에게 의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마다 의지처는 가지각색입니다. 신, 조상님, 부처님, 선배님, 스승님, 멘토 등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게 기본입니다. 불자라면 더 어른인 불보살에게 의지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왕생론주>의 저자인 담란스님은 타력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만으로 수행하던 본인의 삶을 어리석다고 표현합니다. 비유하자면 물살이 쌔고 험한 강물을 건널 때 배를 태워준다고 하는데도 굳이 수영해서 건너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안전하다는 느낌을 불러오는 최고의 방법은 염불입니다. 일단 타력에 의지하는 염불수행은 칭명염불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에 압도되는 순간, 간절하게 불보살의 명호를 외워야 합니다. 그럼 일단 불안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더불어 불보살의 위신력으로 기적처럼 위험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타력염불을 활용하려면 일상 속에서도 염불 수행을 지속해야 합니다. 입에 붙어야만 깜짝 놀라 두려운 그 순간, '엄마야!'가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나올 수 있을테니까요. 더불어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음에 훈습해야만 타력의 원동력인 신심이 축적됩니다.
일상의 염불수행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 염불의 원동력은 신심에서 삼매로 전환됩니다. 타력으로 시작했지만 이것이 자력수행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 경우 칭명염불에 익숙한 이들은 보통 이근원통 수행이 숙달되기 시작합니다. 또는 16관법과 같은 관상수행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모두 삼매에 들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자력을 단독으로 쓰는 것과 달리 타력의 신심을 촉매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불자들에게 염불 수행이 가장 사랑 받는 이유는 안심을 불러오는 자력과 타력 수행을 동시에 닦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고, 더불어 안심을 불러오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두렵다면? 염불하세요!
2:46 사방 어디에도 도와주는 이가 없음을 보면
완전히 망연자실하며 절망에 빠질 터인데,
거기에서 도와주는 이가 없다면
그때서야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으리까.
#유일한의지처
유일한 의지처는 결국 믿음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는 불자에게 믿음의 대상은 삼보로써 외부에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삼보에 대한 믿음 속에서 진정한 의지처는 삼보가 아니라 삼보를 믿는 그 마음입니다. 자성불에 의지하는 자력 수행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성불이 '나'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자성불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 속 불성을 믿는 그 마음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믿음 자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본질입니다. 붓다는 죽음에 대해 명상하기를 항상 권장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순간 재산과 가족, 친구와 기억, 명성과 기술 등 모든 것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선업과 악업만이 나와 함께 할 뿐이다."
죽음의 순간, 철저히 혼자가 되는 그 순간에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은 '업'입니다. 그 순간 불안에서 벗어나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의지처는 '믿음' 그리고 '삼매'라는 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대상인지 상관없이 믿음과 삼매로써 불안을 잘 소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심할 것입니다. 이것이 맹신에서 벗어난 자기확신입니다.
죽음의 순간 뿐 아니라 이 확신적 자신감은 일상 그리고 온 생에 걸쳐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경험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대상을 만나는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대상에 대한 내 마음의 태도가 경험의 질을 바꿉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심지어 불안과 두려운 마음이 샘솟는 그 순간에도 유일한 의지처인 자신감이 단단하기만 하다면 해결이 가능합니다. 불안을 녹일 수 있습니다. 안심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눈 먼 상태에서 벗어나 지혜롭게 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자신을 믿는 마음만 있다면? 100%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 길이 열립니다.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안심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공지 리마인드
하나, 붓다스쿨 챌린지 활용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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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가 저희 집을 방문하셨을 때 할머니가 머무시던 방에 항상 염주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친척들이 할머니를 뵈러 오면 얘기 도중에도 할머니의 손에는 염주가 돌아가고 있었고 말끝에 항상 관세음보살을 나즈막히 읊조리시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래서 나에게 염불이란 함은 항상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기억됩니다.
어릴 적 무서움이 많았던 제게 무서울 땐 '옴마니 반메 훔'을 외우라 가르쳐 주신 분이 할머니셨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는 지금도 무서움을 느낄 땐 저도 모르게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고 있습니다. 염불에는 불안과 무서움을 잠재우는 힘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습관처럼 외우게 되는 염불의 힘! 참 큽니다
저는 요새 덕원스님께서 선물해주신 염주를 늘 손목에 차고 다닙니다.
저도 모르게 저녁에 늦게 돌아오는 날이나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때 염주를 만지며 저도 속으로 염불합니다 - 그러면 스스로 난 보호받고 안전하구나를 느끼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