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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11-18절. 자랑은 오직 십자가. 요약설교
11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 ‘큰 글자’(πηλίκοις γράμμασιν)는 우리 성경처럼 ‘큰 글자’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긴 편지’(large letters)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긴 편지’로 해석하는 경우는 갈라디아서 자체가 바울이 직접 쓴 편지임을 강조한 것이고, ‘큰 글자’란 바울이 눈이 나빠서 다른 사람에게 대필한 경우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본서를 기록할 당시는 바울의 초기 사역이었으므로(49년경), 노환으로 인해 눈이 어둡기 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나 칼빈이나 대부분의 학자들은(Bengel, zahn, Alford 등) ‘긴 편지’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본 후에 눈이 나빠졌는데, 1차 전도 여행 때 타우르스 산맥을 지나면서 말라리아에 걸려 눈이 더 나빠졌기 때문에, 그 후로는 대필자를 시켜서 편지를 쓰고, 마지막에 바울이 친필로 서명한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롬 16:22, 고전 16:21, 골 4:18, 살후 3:17)
특히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라고 했으므로, 벌써 이 때도 바울이 눈이 나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은 할례받은 사람들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선동하고 있는 유대교적 율법주의자들(Jewish legalists)을 가리킵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은 복음 신앙을 갖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해서, 복음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적 율법주의 이단으로 가게 만들려고 집요하게 유혹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만 믿어서는 참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할례를 받아야 참된 구원을 받는다고 이단 사설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자기들의 이단파, 율법주의파를 형성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신앙의 목회자를 쫓아내고, 자기네 율법주의 이단 지도자를 세워서 교회를 빼앗고, 교인들의 헌금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 율법주의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그 십자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유대교인들의 핍박을 피하고, 기독교 십자가 복음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 율법주의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육체’란 ‘성령과 복음’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the flesh, in opposition to the spiritual dispensation of the gospel)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구원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잘못 주장했습니다.
2. 유대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기독교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요 9:22; 12:22; 19:38)
그리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는 이방 지역에 있는 회당에도 기독교를 핍박하라는 은밀한 지령을 내렸습니다. (행 9:2)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지령을 받아서 유대교와 기독교 복음을 혼합하여, 기독교인들을 유대교로 전향하도록 유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구원을 부인하는 유대교의 율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당시 로마의 황제들은 식민지 국민들이 자기네 종교 의식을 행하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들은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도 종교적인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들과 지방 관리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들과 당국자들의 핍박을 피하라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순수한 복음 신앙을 지키는 기독교인들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도 유대교의 할례와 절기를 적당히 지키는 혼합주의 기독교인들에게 더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으로 인한 순수한 복음 신앙을 육체를 따른 유대교적 율법주의(Jewish legalism)와 타협한 것입니다.
실상 당시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legalistic false teachers)은 기독교인을 유대교인으로 개종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13절.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 ‘할례받은 그들이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 할례받으면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는데( 갈 5:3, 롬 2:17-23), 율법주의 교사들은 자기 마음대로 율법 중에서 할례만을 선택해서, 할례를 하기만 하면 나머지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너희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는 것은 율법주의 교사들이 기독교인을 유대교로 데리고 가서 유대교인들에게 자랑하고 유대교인의 인기와 명성을 얻어서 핍박을 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육체로 자랑하려 한다’는 것은 ‘너희 할례로 자랑하려 한다’는 뜻으로(The phrase "in your flesh" here, is equivalent to "in your circumcision), 율법주의 교사들이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시켜서 유대교 회당에 가서 자랑하고, 유대교인들의 핍박을 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교사들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서 자신이 율법에 열심 있다는 것을 유대교인들에게 보여주어서, 유대교인들의 핍박을 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받은 육체의 변화를 통해서는 내적인 자아가 변화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변화되어야 참된 변화를 갖게 됩니다.
이 율법주의 교사들은 참된 기독교인들을 유혹하여 ‘유대교적 기독교 이단’( Jewish-Christian party)을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바울이 유대 종교인으로 있을 때는 여러 가지 자랑할 거리가 많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는 세상 자랑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고, 십자가의 원수가 된 바울을 주님이 용서하시고, 가장 존귀한 사도의 직분자가 되게 해주셨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 율법주의자들(legalists)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서, 유대교인들에게 자랑하고 인정을 받고,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했지만, 바울은 로마 당국자나 유대교인들이 아무리 핍박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작정했고(고전 2:2), 십자가 외에 할례나 율법 행위들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빌립보서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처럼 바울은 유대교인으로 있을 때, 자랑거리가 많았으나, 이제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그 자랑을 다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만이 자랑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불신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너무나 좋아서, 바울은 세상 자랑이나 명예나 향락을 다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성령님)만 모시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6장 1-11절에서 ‘세례’(침례)를 말씀하면서, ‘죄’에 대해서 내가 죽었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시 살았다고 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개념이 여기서는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시 살아난 개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았습니다.
2. ‘십자가’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유대교인들에게는 십자가가 저주의 상징이요 거침돌이었습니다.
유대교인들에게 십자가는 치욕이요 부끄러움(ignominy and shame)이었으나, 바울은 도리어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근거이기 때문에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3. 어떤 역본들에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자랑하는 것을 금하신다’(God forbid that I should glory)로 번역했습니다( KJV, AKJV, DRB, WNT).
로마서 3장 4절에는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최대의 자랑이요 능력과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는 우리가 고난받을 때 위로가 되고, 천국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입증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것은 갈라디아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과 같은 의미이고, 골로새서 2장 20절(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과도 상통하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며,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 때문에 당한 병약함, 비난들과 고난들과 박해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바울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죽음을 통과하고 세상 권력자나 어떤 박해자나 어떤 악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홍해에서 애굽 군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 떨었으나,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하여 애굽인들을 몰살시킨 것과 같습니다.
15절.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는 말씀이나 고린도전서 7장 19절에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과 상통합니다.
그리고 할례받은 유대인이나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이고, 할례받았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롬 10:12, 골 3:11)
즉 구원의 의에 이르는 길은 할례는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어지며, 구원받은 사람들은 할례인인이나 무할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 절은 13절에 할례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14절에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2. ‘지음받은 것’(κτίσις: creation)은 로마서 1장 20절에서와같이 ‘창조’( κτίσεως κόσμου τοῖς: creation of the world)를 가리키기도 하고, 로마서 1장 25절(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김)이나 8장 22절(피조물이 탄식함)처럼 ‘피조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처럼 ‘새로운 피조물’(καινὴ κτίσις:new creation)을 가리킵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고( 요 3:3),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사람이 된 자를 가리킵니다.( 엡 4:24,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10-11.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3. 본 절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키고, 로마서 12장 2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은 날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4. 오직 ‘새로 지음받은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나, 피부색이 다른 인종이나, 혈통이나 지위나 미모나 재산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새로운 피조물’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16절.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 ‘규례’(κανών)는 원래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쓰는 줄자를 가리키는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규례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영어의 캐논(canon) 즉 정경(正經)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즉 성경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2.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마감하면서 앞에서 바울이 가르친 규례를 지키려는 자들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축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혈통적인 유대인만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나 유대인도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모두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 ‘흔적’(στίγματα)은 복수형으로서(marks) 여러 개의 흔적들을 가리키고, 원래 이 단어(στίγμα)는 주인의 소유인 노예나 특히 신전 노예에게(especially to temple slaves) 주인의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서 불도장을 찍은 낙인(烙印)을 가리켰습니다.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은 ‘키벨레’ 우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불도장 낙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낙인들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됨으로써 눈이 나빠진 것과, 갈라디아 지방을 전도하러 갔을 때 타우루스 산맥을 일주일간 지나면서(행 13:14 주석) 말라리아 눈병에 걸린 것과,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행 14:19) 받은 몸의 상처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종이고, 예수님은 바울의 주인인 것을 의미합니다.
2.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은 몸에 할례를 자랑하지만,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한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3. 갈라디아서는 모든 율법적인 규정들에 대해서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종’이란 요즘에 월급을 받고 일하는 종업원(servants)을 가리키지 않고, 주인이 돈 주고 산 노예(slaves)를 가리킵니다.
이 ‘노예’란 전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해서 자유하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두 반대 개념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요?
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써 가능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모든 율법과 정죄와 마귀의 공격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것인 참된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나를 예수님의 사랑의 종으로 만드셨습니다.
즉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으로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로 인해서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의 사랑에 매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즉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에 매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바울은 피전도자를 위해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이 사랑과 희생의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은 육신적으로 무척 힘들었고, 여러 가지 희생이 필요했고, 반대하는 유대인들과 이방 종교인들의 핍박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단지 기쁨과 보람이 있었다면,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표적으로 귀신을 쫓아내게 해주시고, 병자들을 고치게 해주셨고, 복음 전도를 듣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서 기쁨과 보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상처들과 고난의 흔적들이 마치 주인되시는 예수님이 자신을 예수님의 노예로 불도장을 찍어주신 것이라고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MacLaren's Expositions
18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례를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과거에 율법으로 살았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날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 모시고, 구원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