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두 에세이
시낭송 예술
- 낭창
임 보
책들이 팔리지 않는다고 출판계에선 울상이다. 그런 판국이니 시집이 안 팔리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전에는 대형서점에 시집코너가 따로 있어서 시집을 고르느라 시를 읽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선가 시집코너가 사라지고 말았다. 시의 수요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시의 독자들은 위축되고 있는 판국인데 요즈음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시낭송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수백 개의 시낭송회가 만들어져 매월 낭송 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수시로 시낭송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전문적인 시낭송가가 등장하여 활동하고, 시낭송법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시와 멀어져 가는 대중들에게 시를 다시 일깨워 주는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이동시낭송회>는 월간 《우리詩》를 간행하며 한국현대시의 정통성을 모색하고 있는 (사)우리詩진흥회의 모태가 되는 모임이다. 1987년에 <우이동시인들>이 동인지 《牛耳洞》을 창간하고 이를 자축하며 갖게 된 시낭송 행사가 주위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공간시>와 <보리수> 등 겨우 한두개의 낭송 모임밖에 없었던 초창기였다.
2016년 9월로 <우이동시낭송회>는 339회를 맞는다. 30년 가까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진행되고 있는 이 낭송 행사는 몇 번 장소를 옮긴 적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우이동 도봉도서관에서 행해져 왔다. 장소가 삼각산 밑 궁벽한 곳이지만 전국의 많은 시인들과 음악인들이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찾아와 함께 시와 음악을 즐기며 키운 모임이다. 오늘의 시낭송 붐을 일으키는 데 <우이동시낭송회>와 《우리詩》도 기여 한 바 적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예로부터 시는 음송과 더불어 존재했다. 원래 시가 운문인 것은 읊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언어 구조물이어서 그런 것이다. 즉 일상적인 언어의 형태와는 달리 가락에 실려 읊조리던 말이다. 우리의‘고대시가’인 「황조가」「구지가」등을 비롯해서 최초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는신라의 ‘향가’, 「가시리」「청산별곡」 같은 ‘고려가요’그리고 ‘시조’가 다 노랫말이다. 우리 시가 노래로부터 독립된 것은 ‘신체시’ 이후 20c에 들어와서부터이니 극히 최근의 일이다. 시는 언어예술이기에 앞서 음성예술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전통시가들이 당대에 어떠한 모습으로 읊어졌던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시조창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고려가요나 향가의 읊조림도 매우 느렸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쩌면 그 흔적들이 민요나 판소리 그리고 사찰에서의 독경讀經, 제사의 독축讀祝, 무속의 주문呪文 등에 남아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전통적인 독법들을 참고하여 오늘의 시낭송에 활용한다면 단조로움에서 벗어난 효율적인 낭송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성공적인 시낭송을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만 한다.
첫째, 낭송에 적절한 작품의 선택이 중요하다.
낭송시는 음성으로 전달하기에 적절한 작품이어야 한다. 따라서 깊은 사유가 요구되는 작품보다는 들어서 금방 쉽게 이해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면 더욱 좋으리라. 또한 적절한 길이 곧 분량도 유념해야할 일이다.
둘째, 낭송자의 자질이 문제 된다.
의미 전달을 명료히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발음, 청중들에게 호감을 주는 부드러운 음성 그리고 고저장단의 변화로운 어조를 구사할 수 있어야 된다. 따라서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발성의 부단한 연마를 필요로 한다.
셋째, 암송이어야 한다.
텍스트를 보고 읽는 낭독이 아니라 낭송자는 작품을 암기하여 그 내용을 완전히 체득한 다음 음성으로 표출해야 한다.
넷째, 매 작품마다 적절한 낭송기법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한다.
모든 작품의 내용은 다 다르다. 따라서 선택한 작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낭송법을 늘 모색해야 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민요나 시조, 판소리의 가락이라든지 염불이나 독경 같은 전통적인 독법으로부터 적절한 낭송법을 원용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내가 시도해 보고 있는 시낭송법에 <낭창朗唱>이라는 게 있다. 낭송朗誦과 창唱을 결합해서 만든 말이다. 즉 기존의 낭송에다 우리 소리의가락을 결합시켜 느리게 읊조리는 암송법이다. 얼핏 보면 노래와 유사하지만 이는 악보에 얽매인 노래와는 달리 자유로운 읊조림이다. 동일한 작품이라도 장소나 낭창자의 기분에 따라서 가락의 고저와 완급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며 읊조릴 수 있다. 그야말로 유유자적한 심경에서 무장무애無障無礙하게 읊어대는 노래라고 할까? 그런 자유롭고도 변화로운 낭송법이다.
시가 가락 곧 음악적인 요소를 떠남으로 해서 대중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낭창과 같은 새로운 낭송법을 통해 시낭송을 하나의 독립된 ‘낭송예술’로 발전시켰으면 한다. 그리하여 시에 다시 가락을 싣게 되면 시를 떠나갔던 대중들이 다시 시에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옛날에 소요음영하던 음유시인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에 새로운 음송시인의 출현을 기대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사족]
낭창이 어떤 식으로 읊조리는 낭송법인지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들어보는 것이 제일 빠른 이해의 방법이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3시~5시에 우이동 도봉도서관에서 행해지는 <우이동시낭송회>에 참석하면 감상할 수 있다.
출처 :우리시회(URISI) 원문보기▶ 글쓴이 : 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