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장선(張善)도 고려 문종 때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냈다.
여헌(旅軒) 장현광의 유록에 의하면, "고려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공(장금용)을 시조로 모시는 것은 그 분이··· 선대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조상은 몇 대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조상이 이곳 인동 땅에 거주하신 내력을 살펴보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이십대 뿐이다."고 한다.
장금용의 13세손인 장백(張伯)은 고려 우왕 때 태상경(太常卿)으로 문하시중도첨의밀직사(門下侍中都僉議密直使)를 역임하였는데, 후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되어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후손들은 장백을 중조로 삼아 옥산을 본관으로 하였는데 조선말기 옥산이 인동(仁同)으로 바뀜에 따라 본관을 인동으로 고쳤는데, 예전 그대로 옥산을 본관으로 쓰는 후손도 있다.
시조 장계(張桂)는 1305년(고려충렬왕 31년) 국학진사(國學進士) 권지도평의녹사(權知都評議錄事) 동진사(同進士)에 등과하여 진현전직제학(進賢殿直提學)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계는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는데, 옥산(玉山)과 연복(延福)은 인동(仁同)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후손들은 그를 ‘득관조(得貫祖)’ 혹은 ‘경기일세(更起一世)’라 칭한다. 장계가 인동현(仁同縣)의 남쪽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은 이후 후손들은 7세에 이르기까지 세거하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으며, 조선 성종 이후로 임지에 따라 서울 창동(倉洞)을 비롯한 충청북도 제천(堤川)‧단양(丹陽)과 경상북도의 영주(榮州)‧예천(醴泉)‧문경(聞慶)‧의성(義城)‧자인(慈仁) 등 전국 각지로 산거하게 되었다.
연복군파(延福君派): 안양공파(安襄公派)라고도 한다. 중시조는 장말손(張末孫)이며 장안량(張安良)의 삼남으로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짐.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승문원 박사(承文院 博士),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쳐 함길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내다 1465년 여진족을 격퇴한 공으로 예조좌랑(禮曺佐郞) 경차관(敬差官)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년) 조석문(曺錫文) 등과 함께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고 내첨시첨정에 올랐다. 1470년(성종 1년) 장악원 부정, 장악원정을 거쳐 해주 목사를 지내고 1482년 연복군(延福君: 연복은 인동의 별호)에 봉해졌다.
송암공파(松菴公派): 중시조 장구주(張九疇)이며 장계의 10세손으로 강원도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하였으며 송암공파, 영월파, 군수공파라고 불리나 충북 제천시 청풍면(淸風面) 고명산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청풍파(淸風派)로도 불린다.
인동장씨(仁同張氏) 각제학(閣提學)는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하고 후에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정승(政丞), 춘추관사(春秋舘事)의 증직이 내린 문충공(文忠公) 장계임(張繼任)을 시조로 하는데 이는 문충공의 8세손 문숙공(文肅公) 장순손(張順孫)이 중종 17년(1522) 병조판서(兵曹判書)때 그 아버지 증좌찬성(贈左贊成) 장중지(張重智)와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고씨의 묘비문에 첫 선조로 기록한 것에서 유래한다.
흥성 장씨(興城張氏) 시조(始祖)인 시랑(侍郞) 장유(張儒)의 둘째 아들 호부상서(戶部尙書) 장연좌(張延佐) 계의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장연좌(張延佐)가 옥산군(玉山君)에 봉(封)해졌다하여 옥산장씨(玉山張氏)라 하다가 관적(貫籍)을 인동(仁同)으로 하였다고 한다. 흥성 장씨(興城張氏)와 족보(族譜)를 같이하고 있다.
고려말(高麗末) 예빈경(禮賓卿) 장용서(張龍瑞=혹은 用瑞)계(系)의 인동장씨(仁同張氏)는 과거(過去) 장연(張淵)이라고도 하고 주로 북한(北韓)의 평안도(平安道)에 많이 살았는데 8.15 해방후(解放後) 월남(越南)하였으며 본관을 옥산(玉山)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인동(仁同)으로 많이 쓴다.
인동(仁同)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신라 초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이동혜현(爾同兮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수동현(壽同縣)으로 고쳤다. 경덕왕 때 다시 인동현(仁同縣)으로 고치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상주목(尙州牧) 경산도호부(京山都護府)의 속현(屬縣)으로 병합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를 두고 약목현(若木縣)을 속현으로 하였다. 1413년(태종)에 인동현에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604년(선조 37)에 인동도호부(仁同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인동군이 되었다. 1914년 칠곡군에 병합되어 인동면(仁同面)이 되었다가 1978년 구미시에 편입되어 인동동(仁同洞)으로 개편되었다.
장사진(張士珍)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위에서 일본군군과 싸우다가 한쪽 팔을 잘렸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절하여, 성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했던 장봉한(張鳳翰), 상주 판관으로 전사한 장홍한(張鴻翰) 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장만(張晩) : 조선 인조 때 팔도도원수 및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일등공신에 책록되었고,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장돈(張暾) : 인조반정에 증산현령으로 공을 세워 옥산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 안주성에서 좌영장(左營將)개천군수로서 호병(胡兵)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돈령부사에 추증되었다.
장현광(張顯光) : 덕령부윤 장안세(張安世)의 후손이다.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다. 한강 정구(鄭逑)의 조카 사위이다. 문강공 여헌 장현광은 1595년(선조 28) 학행으로 천거되어 나이 42세에 보은현감이 되었는데 약6개월간 관직에 있다가 사임하고 물러난 후 형조좌랑, 순천 군수(郡守), 이조참판, 대사헌, 공조판서 등 37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독서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장말손(張末孫, 1431년 ~ 1486년) : 자는 경윤(景胤). 순효(純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원(敬源)이고, 아버지는 현감 안량(安良)이며, 어머니는 고승안(高承顔)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63년 승문원박사를 거쳐 한성참군·사헌부감찰·함길도평사를 역임하였다. 1467년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예조좌랑으로서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을 따라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내섬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470년(성종 1) 장악원부정을 거쳐 행부사직·첨지충추부사·행사직을 역임하고, 1479년 해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482년연복군(延福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장맹우(張孟羽, 1470년 ~ 1511년) : 자 익지(翼之). 송설헌(松雪軒) 말손(末孫)의 아들. 사마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를 역임하였다. 그는 처음 서울 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배움에 열의를 다하였다. 그는 기품이 순후하였고 행동거지가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고 하였다. 또한 효성과 우애를 갖추어서, 부모님께서 병중일 때에는 대변을 직접 맛보아 병세를 가늠하는 이른바 ‘상분(嘗糞)’을 행하였고, 동복(同腹) 형제들과 재산을 나눌 때에는 그들의 원(願)을 잘 들어줬다고 하였다. 그는 23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하고, 음직으로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그 후에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와 정랑(正郞),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를 역임하였다. 그가 도사로 재직할 때, 정사를 처리함이 간결하고 검소하여, 동료들이 그를 매우 신복(信服)하였다. 또한 당시 상관으로 있던 관찰사 심염문(沈廉問)과 잘 화합하여, 해주향교(海州鄕校)의 중수(重修)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집권자였던 김안로(金安老)의 뜻을 거슬러, 문과에 급제하고서도 더 높은 벼슬에 임명되는 등 현달하지 못하고, 황해도 임지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조정에서 크게 주목을 받고 쓰이지 못함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증장맹우(贈張孟羽)」에서 애석해 하였다.
장응신(張應臣, 1490년 ~ 1554년) : 자 방숙(厖叔). 교리(校理) 맹우(孟羽)의 아들. 그는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영주의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영주 초곡(草谷)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천품이 준이(俊異)하고 성품이 엄정하였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이치를 풀어냈는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전념하였다. 그는 장인인 창계의 문하에서 군자가 학문에 힘쓰는 요체를 얻어 들었다. 그는 아버지인 장맹우가 황해도(黃海道) 관소(官所)에서 생을 마치자, 천리 길을 힘써 반친(返櫬)하였다. 그가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유학할 때, 성균관의 제공(諸公)들이 그를 노성(老成)으로 추중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시 돌아와 문학에 전심하니, 학문이 날로 성취되었다. 김원대(金元大)가 행장(行狀)을 찬하고, 후손 장건덕(張建德)이 「십사대조고생원부군유사(十四代祖考生員府君遺事)」를 찬하였다.
장응선(張應璇) : 자 중기(仲紀). 호 유루헌(幽樓軒). 경림처사(經林處士) 계성(季晟)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검열(弘文館檢閱)과 풍기 군수(豊基郡守), 사재감 정(司宰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손서(孫壻)이다. 그는 자품이 청수(淸粹)하고, 도학(道學)에도 순숙(純熟)하였다. 그가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주세붕(周世鵬)이 그에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제생(諸生)들이 장수(藏修)하며 서로 따른다고 하는데, 생각건대 이곳에서 따뜻한 봄날에 농사를 돌보는 여가에 한가로이 죽계(竹溪)에 왕림하여 맑은 물에 입을 헹구고 돌아갈 것이니, 그 흥취(興趣) 어떠하시오?”(「답장풍기응선(答張豊基應璇)」)라고 하였다. 그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과 금석지교를 맺었다. 퇴계(退溪) 선생이 그에게 「정장중기응선(呈張仲紀應旋)」을 주고, 금계가 「송장중기지흥해(送張仲紀之興海)」를 주기도 하였다. 그의 「비종자기시(悲鍾子期詩)」와 「이곽선주부(李郭仙舟賦)」는 가작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전송되었다고 한다.
장수희(張壽禧, 1516년~ 1586년) : 자 우옹(祐翁). 호 과재(果齋). 생원(生員) 응신(應臣)의 아들. 퇴계 선생의 문인. 그는 음직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제수되었고, 사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퇴계 선생이 영주 초곡(草谷)의 허씨(許氏)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을 때, 그는 6세의 나이였는데, 책을 가지고 수업하여 그에게 친자(親炙)를 받음이 두터웠다. 이에 퇴계 선생이 친히 “최락당(最樂堂)” 3자를 써서 주어, 그의 집에 편액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광정(李光靖)의 「경서퇴도선생제액후(敬書退陶先生題額後)」에 상술되어 있다. 그는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창건을 실제로 주관하였는데, 전후로 일을 주간한 12년 동안 서원의 규모(規模)를 세우고 재정을 넉넉히 하였으며, 모든 절목(節目)도 퇴계 선생에게서 품의하여 결정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군자는 힘써 행하여 선(善)을 할 뿐이니, 성문(聲聞 : 명예)은 수치스러워 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는 외조부인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묘갈명(墓碣銘)을 퇴계 선생에게 부탁하여 받아내었다.
장여화(張汝華, 1566년 ~ 1621년) : 자 무보(茂甫). 호 사계(砂溪). 과재(果齋) 수희(壽禧)의 아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의 사위.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그는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단곡(丹谷) 곽진(郭),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 검간(黔澗) 조정(趙靖) 등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준이(俊異)하고, 성품과 도량이 강직하고 방정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고 경훈(經訓)에 전념하였으며, 형인 수남(水南) 장여흥(張汝興), 단구(丹丘) 장여식(張汝埴)과 더불어 조석으로 강마하였다. 그의 아버지 장수희가 퇴계에게서 받은 최락당(最樂堂) 3자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형들을 따라 소고 박승임의 문하에 나아가서, 군자가 학문하는 요체를 들었고, 다시 김성일에게 나아가 배웠다. 사마시에 입격한 그는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광해군대의 난정(亂政)을 직접 목격하고서,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주에서는 이강(李茳) 등 자못 많은 사람들이 이이첨(李爾瞻)의 대북정권(大北政權)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이강의 조카로 진사시에 장원을 차지하였던 이영구(李榮久)는 자신의 동년(同年)들을 거느리고 부도(不道)한 말, 곧 폐모론을 상소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그는 향교(鄕校)로 들어가 흉도들을 삭적(削籍)하였다. 그러자 그 무리가 그의 집 문에 와서 소리치기를 “네가 나의 이름을 지웠으니, 나는 마땅히 너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이첨을 참하기를 청하는 소장(疏章)을 올리기 위해 단곡(端谷) 김시추(金是樞) 등과 서울에 갔으나, 소문(疏文)이 상달되기도 전에 병환이 깊어져 고향으로 되돌아왔다가 곧 생을 마쳤다. 그는 감사(監司) 정조(鄭造)의 이름을 원록(院錄)에서 삭제하였던 경와(敬窩) 김휴(金烋)와 함께 영남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늘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보면 귀가하는 것조차 잊으면서 소요하였는데, 전계(箭溪) 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날마다 소영(嘯詠)하였다. ‘전계초당(箭溪草堂)’ 4자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글씨로, 한 중국 사람이 글씨의 기상을 보고 와서 값진 명려(名驢)와 바꾸자고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또 금강(錦江) 가에 심원정(心遠亭)을 지었는데, 그 글씨는 한호(韓濩)의 작품이다. 그는 자찬(自撰) 갈문(碣文)을 지었으며, 갈천(葛川) 김희주(金熙周)가 「사계장공행장(砂溪張公行狀)」을 찬하였다. 단곡(丹谷) 곽진(郭)은 만사(輓詞)에서 “군자의 고을 영주를 잘 보전하였네.[克完君子鄕]”라고 하였다.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사계선생일고(砂溪先生逸稿)가 간행되었다.
장준남(張俊南, 1606년 ~ 1683년) : 자 제경(濟卿). 첨추(僉樞) 세훈(世勳)의 아들.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의 문인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博士)와 제독(提督),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장진(張瑱, 1635년 ~ 1707년) : 자 군옥(君玉). 호 모암(茅菴). 원경(元慶)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부정자(副正字), 성현 찰방(省峴察訪),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용담 현령(龍潭縣令), 예조 정랑(禮曹正郞), 진주 목사(晉州牧使),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에 임명되었다. 자품이 단아하고, 나면서부터 총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 질병이 많아, 건강을 염려한 부모가 학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만류하였으나, 11세 때부터 당숙(堂叔)인 국암(菊巖) 장유경(張裕慶)에게 나아가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국암이 번거롭게 그를 가르치지 않았으나, 그는 대의(大義)를 잘 파악하여 애친경장(愛親敬長)의 예절을 알게 되었으며,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은 따로 잘 메모하여 행위의 준칙으로 삼았다. 침식을 잊고 공부하여 문사(文詞)를 크게 성취하였으므로, 향교(鄕校)에 나아가 공부할 때에 동류들이 그와 더불어 앞을 다투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주봉(柱峰) 이래(李崍)가 근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시로써 아이들을 시험하자, 그가 호운(呼韻)에 곧장 답하기를, "全身十五年前累 전신(全身)에 묻은 15년 때를 / 洗盡淸江七月秋 7월 맑은 강물로 모조리 씻어내네. / 若使垢塵生五內 만약 마음에 때가 낀다면, 直令刳腹付川流 곧장 배를 갈라 냇물로 씻어버리리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고 한다. 그는 성현 찰방으로 재직하면서 우역(郵役)의 절반을 줄이는 등 화간(和簡)으로써 정사(政事)를 잘 다스리니, 이졸(吏卒)들이 기뻐하며 그를 위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또한 그가 목사(牧使)로 부임한 진주(晉州)는 땅이 크고 인구가 많을 뿐만 아니라 토착 세력이 강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불렸는데, 그는 산적한 문부(文簿)를 신속하고도 적실하게 처결하였고, 아울러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가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에는 큰 흉년을 맞게 되자, 기민들을 위해 곡식을 내고 요역(徭役)을 견감하였으며, 맥환(麥還)의 기한을 늦춰 주었다. 이에 백성들이 배고픔을 근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양친 및 일가족이 모두 전염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그들을 구호하다가, 결국에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끝내 무사하게 되니, 사람들이 신명(神明)의 도움이라고 칭술하였다. 그는 평소 “검약겸하(儉約謙下)”를 우선하고 “수법봉공(守法奉公)”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산수 간에 노닐다가, 다시 동송촌(凍松村)으로 이거하여, 이곳에서 노주(蘆洲) 김태일(金兌一)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교유하였다. 그는 만년에 주자서(朱子書) 읽기를 좋아하여, 이를 손수 베껴 강송(講誦)하였다. 아울러 장문의 응지소(應旨疏)를 지어 국가를 보위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방도를 피력함과 아울러 폐비(廢妃) 민씨(閔氏)의 복위(復位)를 청원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소문(疏文)을 올리지는 않았다. 문집이 있다. 박주종(朴周鍾)이 행장(行狀)을 찬하고, 조덕린(趙德鄰)이 「통훈대부행사헌부장령장공묘갈명(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張公墓碣銘)」을 찬하였다.
장후상(張后相, 1677년 ~ 1742년) : 자 몽여(夢予). 호 석문(石門). 첨추(僉樞) 유(瑜)의 아들.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관직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예조 좌랑(禮曹佐郞), 양산 군수(梁山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금강(錦江) 장신(張璶)의 문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절륜하였고, 번거로이 독려하지 않아도 13세 때에는 기윤(朞閏)을 계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23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음악(音樂)을 하사받기까지 하였으나, 동년 가운데 죄를 짓고 충군(充軍)된 자가 있었으므로 파방(罷榜)되고 말았다. 이에 임금은 그가 억울하게 연루된 것을 아쉬워하여 참봉(參奉)에 두도록 하였으나, 전관(銓官)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복방(復榜)되어, 성균관 학정에 임명되었다. 그가 군수로 있던 양산(梁山)에는 봉산(封山)이 있어서, 이곳 백성들이 매우 고생하였는데, 그가 부임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이 베풀어지게 하였다. 또한 관찰사의 친속이 밀양(密陽)의 민전(民田)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가 사관(査官)으로 차출되어 법(法)에 따라 사건을 잘 다스렸다. 그가 지방관으로서 워낙 유능하고 어진 정사를 펼쳤으므로, 당시에 “권 양산(權梁山 : 강좌(江左) 권만(權萬)을 가리킴)은 천재(天才)요, 장 양산(張梁山)은 인재(人才)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군(郡)의 남쪽 석문(石門)에 자리 잡고 세상일을 잊으며 살았는데,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자 관량도총(管糧都摠)으로서 의병장(義兵將) 나학천(羅學川) 등과 함께 영주의병(榮州義兵)을 선창(先倡)하였다. 이때 제민루(濟民樓)에 의병진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기록을 「무신란기(戊申亂記)」로 남겼음. 저서에 석문시고(石門詩稿)가 있다.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행장(行狀)을 찬하고,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통훈대부행성균관사예석문장공묘갈명(通訓大夫行成均館司藝石門張公墓碣銘)」을 찬하였다.
장위항(張緯恒, 1678년 ~ 1747년) : 자 천응(天應). 호 와은(臥隱). 옥상(玉相)의 아들.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자인 현감(慈仁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금강(錦江) 장신(張璶)과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이다. 천품이 정민(精敏)하였고, 외면은 허약한 듯하였으나 내면은 청경(淸勁)하였다. 그의 문사(文詞)는 섬일(贍逸)하고 정채(精釆)가 있었다. 또한 필체는 단정하고, 점획(點畫)이 모두 심체(心體)에 근본을 두었다고 하였다. 효성이 뛰어났다. 그는 병치레를 많이 할 정도로 허약한 몸을 타고났는데, 5세 때에 생모가 생을 마치자 그가 시신을 안고 호곡하니, 이를 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여겼다고 한다. 그의 나이 8세 때에 계모 김씨가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이때는 마침 매우 추운 계절이었으므로 김씨가 날씨로 고생하자, 그가 스스로 뜨끈한 국물을 데워 올렸다고 하였다. 그는 10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학업에 종사하였는데, 천성이 매우 영오하여 문의(文義)를 이해함이 대나무를 칼로 쪼개는 듯하였다. 이렇게 수년이 지나지 않아서, 경사(經史) 관련 여러 책들을 모조리 읽게 되었다. 14세 때에는 부석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지은 시에 이르기를, "嶺雪千層玉 봉우리 눈은 천층(千層)의 구슬이요 / 溪冰萬丈虹 시내 얼음은 만장(萬丈)의 무지개로다. / 夜來添得月 밤 되어 밝은 달까지 곁들여지니 / 天地一瓊宮 온 천지는 한 구슬궁전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는 금강(錦江)에게 수업하여 고인(古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음을 알았다고 하며, 다시 고산(孤山) 문하에 나아가 사문으로부터 누차 칭상(稱賞)을 받았다. 문호를 위하여 과거를 보라고 하던 선친의 명으로 인해 부득이 과거를 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 방면에 성과를 거두어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 무렵 그는 처상(妻喪)과 부친상을 연달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잘 추슬러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러냈다. 사마시 입격 이후 한때 공부하던 성균관에 다시 유학을 간 그는 어수선한 서울의 정국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여, “장황우(藏黃牛)”, “절벽송(絶壁松)”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귀향하니, 전염병으로 인하여 부인과 계모를 잃었으며, 그도 감염되었다가 겨우 소생하였다. 이후 그는 계모의 유훈을 받들어 문과에 응시하여 마침내 급제하였고, 사과(司果)에 임명되었다. 그는 1728년(영조 4)에 정희량(鄭希亮) 등이 이른바 무신란(戊申亂)을 일으키자, 영주 의병진에 참여하여 정일신(丁一愼) 등과 함께 참모(參謀)를 맡았다. 그런데 금방 난이 진정되고 주모자가 처벌되자,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는 1730년(영조 6)에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어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송인명(宋寅明)・정우량(鄭羽良) 등이 그의 명성을 듣고 심부름꾼을 보내어 그와 직접 만나고자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 출근하여 근무하는 외에는 오직 두문불출하며 서책을 읽었다. 이에 그가 평소의 지조를 너무 고집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그는 사헌부 감찰로 있다가 병조 낭관으로 의망(擬望)되었으나, 정적(政敵)의 방해로 임용이 좌절되고, 또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귀향할 결심을 굳히던 차에, 자인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자인은 1731년(영조 7)과 1732년(영조 8)에 대흉년을 당하여 고을의 형편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백성들과 이졸(吏卒)들이 유망(流亡)하였는데, 그는 정사를 간정(簡靜)하게 다스려 백성들을 안집(安集)시켰다. 아울러 수리(水利)를 확충하고자 제언(堤堰)을 굳건하게 정비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녹봉을 희사하여 이 역사(役事)를 도왔다. 그는 자인의 문풍(文風)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흥학 시책도 적극 시행하였다. 또 자인 관아(官衙)에 도사리던 요기(妖氣)를 그가 글로써 풀어주니 그 요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자인 현감을 끝으로 관직을 완전히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금강(錦江) 장신(張璶)이 초창하였던 운곡서당(雲谷書堂)을 이건하고, 여기에 숙야재(夙夜齋)・역락헌(亦樂軒)・사우포(四友圃)를 마련하여 날마다 이곳에서 자제들과 더불어 옛 책을 강론하였다. 그는 특히 산수(山水)와 화죽(花竹)을 사랑하였으며, 주자(朱子)의 「운곡잡영(雲谷雜詠)」과 「무이도가(武夷櫂歌)」에 화운(和韻)하여 회포(懷抱)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는 향년 70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생을 마쳤다. 문집이 간행되었다. 권상일(權相一)이 행장(行狀)을, 이광정(李光庭)이 묘지(墓誌)를 찬하였다.
장화식(張華植, 1853년 ∼ 1938년) : 조선 말기의 무신. 1897년에 참령(參領)에 올랐고, 이듬해 6품으로 군부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이 되었다. 1901년에는 참교(參校) 김광식(金光植)이 취하여 보문각(寶文閣)에 난입했던 사건에 해당 부대의 친위(親衛)의 연대장서리(聯隊長署理)로서 군법에 의해 감(減) 3등과 태형(笞刑) 20대를 받았으나, 곧 풀려나 육군부령(陸軍副領)으로 승진하여 원수부군무국부장(元帥府軍務局副長)이 되었다. 1902년 한성부판윤, 1904년 육군법원장 칙임관 2등, 통신원회판(通信院會辦) 칙임관 3등, 육군참장(陸軍參將), 관제리정소의정관(官制釐正所議定官), 1905년 총판사무서리(總辦事務署理), 통신원총판(通信員總辦) 칙임관 1등, 군부참모국장(軍部參謀局長), 군부군무국장(軍部軍務局長) 등을 역임하였다.
장충식(張忠植, 1836년 ~ 1901년) : 한말의 의병으로 을미의병(乙未義 兵) 때 유인석(柳麟錫) 의진(義陣)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장익환(張益煥) :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지역 유림(儒林)의 지도자 격인 장충식(張忠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6년 3월 아버지와 동생 진환(晋煥)과 함 께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창의진( 湖左倡義陣)에 참여하여 단양 방면의 수비 책임자로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 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 항일의병에 기여한 공 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사훈(張師勛, 1916년 ~ 1991년) : 호 운초(云初). 해문(海文)의 아들. 그는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한국음악학(韓國音樂學) 방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6세까지 조부인 장복인(張復仁)에게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다시 이산공립보통학교(伊山公立普通學校)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상경하여 사립보인보통학교(私立輔仁普通學校), 공립청운보통학교(公立靑雲普通學校)를 다녔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에 제4기로 입소하여 5년의 중학교(中學校) 과정을 마쳤다. 그는 이때 거문고를 전공하고, 거문고 연주법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특징에 대한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양성소를 졸업 후에, 아악수(雅樂手)로 활약하면서 여러 명인(名人)들의 가곡・가사・시조를 배워 이를 채보(採譜)하고 아울러 고악보(古樂譜)를 수집하였다. 1944년에는 아악수를 그만두고 낙향하였다가, 해방 직후에 군정청(軍政廳) 문교부(文敎部) 편수국(編修局) 편수관(編修官)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공보부(公報部) 방송국(放送局) 연출과(演出科) 음악프로그램 담당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국악학회(韓國國樂學會)를 발족하였다. 이후 1951년부터 숙명여대・덕성여대・서울대에서 음악과(音樂科)・국악과(國樂科)의 강사 및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6년에는 국악교육(國樂敎育)을 창간하고, 같은 해 6월에 민족음악학(民族音樂學)을 발간하였다. 이 시기 그는 대한민국예술원상(大韓民國藝術院賞), 대한민국국민훈장(大韓民國國民勳章) 등을 받았다. 그는 서울대를 정년퇴임한 후, 예술원(藝術院)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국악학회장(韓國國樂學會長), 한국동서음악연구회장(韓國東西音樂硏究會長), 세종대왕기념사업회(世宗大王記念事業會) 이사(理事) 등을 역임하였고, 다시 청주대학교 예대학장(藝大學長) 및 민족음악자료관(民族音樂資料館 : 일명 운초장사훈기념관(云初張師勛紀念館))의 관장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국악대사전(國樂大辭典), 국악문헌자료집성(國樂文獻資料集成) 등이 있다.
장계 홍패 및 장말손 백패·홍패(張桂 紅牌 및 張末孫 白牌·紅牌) : 보물 제501호. 인동 장씨의 조상인 장계(張桂)와 그의 후손인 장말손(張末孫)에게 과거에 급제한 것을 알리는 합격증서로 총 3점이며, 인동 장씨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다. 장계에게 내린 홍패는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내린 것으로 서체는 행서체이다. 장말손에게 내린 백패는 조선 단종 1년(1453)에 진사시험 2등 제7인에 합격한 증서이고, 홍패는 세조 5년(1459)에 문과의 병과 제3급에 합격한 증서이다.
장말손초상(張末孫肖像) : 보물 제502호. 장말손초상(張末孫肖像)은 조선시대 문신인 장말손을 그린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107㎝, 세로 171㎝이다. 장말손(1431∼1486)은 세조∼성종 때의 문신으로, 이시애의 난(1467)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이 되었는데 이 그림은 그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3폭으로 연결되었는데, 얼굴부위가 들어있는 가운데 폭과 양어깨를 표현한 2개의 폭이 이어져 있다.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얼굴을 살색으로 칠한 후 갈색으로 윤곽을 잡았으나 선의 짙음과 흐림이 없는 옛 기법을 사용하였다. 입술은 붉은 기가 돌고 눈매의 표정이 살아있으며,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준다. 목 위로 바짝 올라간 관복, 팔뚝 아래에 있는 의자의 손잡이, 가지런한 두 발, 각진 옷의 윤곽선, 금실로 공작을 수 놓은 흉배에서는 조선 전기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머리에 쓴 사모의 꼬리가 잠자리 날개 모양에 수평으로 퍼져 있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몸의 풍채가 과장되지 않고 옷자락이 벌려져 있는 점은 조선 중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 초상화는 흉배의 공작모양에서 장말손이 연복군으로 봉해진 성종 13년(1482)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몇점 전하지 않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초상화 연구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공신도라 할 수 있다.
장말손 적개공신교서(張末孫 敵愾功臣敎書) : 보물 제604호.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수훈을 세운 45인의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로서, 그 가운데 장말손은 2등공신으로 선정되어 적개공신의 교서를 받았다. 적개공신문헌으로『적개공신회맹록』도 같이 보존되어 왔으나 이 회맹록은 불에 타서 그 일부가 훼손되고 45인의 적개공신에게 내린 교서가운데 유일하게나마 확인된 것은 이 것뿐이다. 이 교서의 크기는 가로 150㎝, 세로 30㎝이며, 공신들 전원의 이름이 적혀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왕의 직인이 찍혀있다.
적개공신 회맹록 및 패도 : 보물 881호. 조선 세조 때의 명신인 장말손(1431∼1486)의 것으로 패도(佩刀)와 적개공신회맹록이다. 패도는 세조 12년(1466)에 함경도 회령에서 오랑캐를 물리친 공으로 왕으로부터 옥적(옥피리) 1정(丁)과 은배(은잔) 1쌍과 함께 하사받은 것이다. 적개공신회맹록은 세조 13년(1447)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임명되어 예종 원년(1469) 3월에 내린 회맹록이다. 특히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참가한 인물들을 파악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은배는 한국전쟁 당시 도난 당하였고, 옥적은 장말손의 사위 박인량에게 주어 다시 그의 사위 권오상에게 전해지고 현재 예천군 용문면 초간 권문해의 종택에서 보관하고 있다
장말손 종가 고문서(張末孫 宗家 古文書) : 보물 제1005호. 조선 세조부터 성종 때까지의 문신인 장말손(1431∼1486)의 종손가에 보관되어 전해오는 고문서들로 5종 18점이다. 이들 고문서에는 고려 우왕 11년(1385) 장말손의 증조(曾祖)인 장전(張戩) 의 소지(所志)를 비롯하여 장전의 논밭·노비소유관계 문서와 도망간 노비를 잡아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가 있다. 「장전처신씨자매화회문기」는 장전의 처 신씨의 세 자매가 상의하여 재산을 나눈 문서이며, 「장안량별급기」는 장말손에게 가사를 내린 문서이다. 이들 9건의 문서를 묶어 1첩의 문서로 펴냈으며, 이외에도 명종 16년(1561) 장말손에게 발급된 교지와 효종 12년(1655)에 예조의 허가문서인 예조입안 등이 있다. 고문서들의 크기는 모두가 각기 다르다. 당시의 사회, 경제, 제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려 후기∼조선 전기의 소지, 분재기 등의 문서양식을 살피는데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