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존재하는 바의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측면에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제5분에서는 부처님의 몸이 다른 일반 사람들의 몸과 구별되는 '상(相)'을 다루고 있다. 부처님께서 32대인상을 구족하셨다는 사실에 당시의 불교도들은 지나치게 감동하고 있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중생들이 초인의 32대인상에 현혹되어 법신불(法身佛)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할까봐 크게 염려하셨을 것이다.
초인의 32대인상을 갖추셨던 세존의 한 측면은 실제로 그분의 수행이 가져다 준 복덕의 결실이긴 하지만, 법신(法身)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진정한 여래의 모습에는 이러한 상(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보다는 범어 원문에 보다 충실한 번역으로 인정받고 있는 현장(玄奘) 스님의 한문 번역문에서 제5분의 정확한 내용을 음미해 본 뒤에 더 상세한 해설을 전개해 보려고 한다.
如理實見分 第五(현장 역)
①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可以諸相구족觀如來不."
②善現答言. "不也世尊. 不應以諸相구족觀於如來. 何以故. 如來說諸相구족卽非諸相具足."
③설是語已佛復告具壽善現言. "善現. 乃至諸相구족皆是虛妄. 乃至非相구족皆非허망. 如是以相非相, 應觀如來."
여래의 참모습을 보아라! 제5(현장 역)
①부처님께서 장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②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으로써 응당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래께서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으로 설하신 것은 곧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③이런 말로 대답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다시 장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으로 여래를 본다면 이는 다 허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이 아닌 면에서 여래를 본다면 이는 허망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상(相)과 상이 아닌 것[非相]의 두 가지 관점에서 마땅히 여래를 보아야 하리라."
위의 번역문 가운데 ③의 '如是以相非相, 應觀여래'가 항상 해석상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한 현장 스님과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⑴구마라집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와 ⑵ 현장의 '如是以相非相 應觀如來'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⑴구마라집 스님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3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①만약 모든 상(32대인상)을 상이 아닌 관점에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②만약 모든 상(32대인상)을 보아서 상이 아니면, 곧 여래를 보리라.
③만약 모든 상(32대인상)과 상이 아닌 것을 동시에 생각해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여기서 ①과 ②는 '32대인상을 보고 그것의 허망함을 깨닫게 되면 상(相)이 아닌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여래의 법신(法身)을 보리라.'는 뜻이고, ③은 '32대인상과 그러한 상이 아닌 면의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여래의 법신을 보리라.'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⑵현장 스님의 '如是以相非相 應觀如來'는 '이와 같이 상(相)과 상이 아닌 것[非相]의 두 가지 관점에서 마땅히 여래를 보아야 하리라.'는 의미로서 그 뜻이 분명하며, 이것은 범어 원문과도 일치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부처님의 32상은 여래의 법신(法身)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바로 '진속2제(眞俗二諦)의 중도적 상즉(相卽)' 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 제5분 ③의 끝 부분에서 우리는 <금강경>에 나타나 있는 중도사상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5분 ②에서 이 경에 나타나 있는 일관된 논리인 '여래가 A라고 설하신 것은 곧 A가 아닌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라는 표현도 사실은 '진속2제(眞俗二諦)의 중도적 상즉'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래가 A라고 설하신 것'은 바로 불타의 교설로서 방편적인 세속제이고, 뒤이어 나오는 '곧 A가 아닌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는 불가언공성(不可言空性)의 승의제(勝義諦)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관학파의 승의제는 경험적인 세속언설을 초월한 불가언설의 공성(空性)이지만, 공성의 초월성은 공성이 세속세계를 부정한 바깥에 놓인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기의 도리에 의해 성립하는 세속제는 공성의 현실적인 바탕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세속제(世俗諦)는 독립자존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 무실체(無實體)인 공(空)의 형태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세속제는 실체가 없는 환화(幻化)와 같은 것으로서 여환성(如幻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하튼 여기서 '모든 상[諸相]'은 세존께서 구족하신 32대인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세속제를 현상(現象)으로 생각하고 승의제를 본체로서 간주하는 진속2제(眞俗二諦)의 측면에서, 32대인상을 현상으로 보고 여래의 법신을 본체로서 간주할 때,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을 주장하는 대승불교에 있어서 세속제와 승의제는 서로 상즉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용수보살의 <중론> 제24장 [관4제품] 제10게에서 '만약 속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제1의(第一義=勝義)를 얻지 못하고, 제1의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지 못한다.'[若不依俗諦 不得제一義 不得제一義 則不得涅槃]라고 설하고 있다.
공성이 단지 허무가 아니라 세속의 여환성(如幻性)을 의미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은 <중론> 제24장 제18게에서 잘 설하고 있다.
연기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연에 의한 가명(假名)이며, 그것은 바로 중도이다.[衆因緣生法 我설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위의 <중론> 제24장 [관4제품] 제18게는 승의제인 공성을 연기(緣起)=환화(幻化)로, 또는 이와 같은 가명(假名, prajñapti)으로서 말하고 있는 대표적인 게송이다.
승의(勝義)의 공(성은 무(無)가 아니라 세속의 존재가 환화와 같은 '연기(緣起)'라는 의미이며, 이러한 세속, 승의의 2제(二諦)의 도리로서 공성(空性)인 것이다. 그런데 승의의 '공성(空性)'이 세속존재의 환화와 같은 '연기'라는 뜻이라면, 승의의 '공성(空性)'은 '무(無)'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단순한 유(有)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승의의 공성은 세속과 승의 2제를 동시에 내포하기 때문에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인 것이다. 따라서 '연기', '환화', '가명'은 모두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의미하는 동의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며, 승의공성(勝義空性)의 중도적인 진실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승의공성(勝義空性)은 연기, 환화, 가명이기 때문에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이며, 승의즉세속의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논증을 통해서 우리는 <금강경> 제5분에서 '진속2제(眞俗二諦)의 중도적 상즉(相卽)' 관계를 설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으로써 여래를 본다면 이는 다 허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32대인상을 구족한 것이 아닌 면에서 여래를 본다면 이는 허망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상[相]과 상이 아닌 것[非相]의 두 가지 관점에서 마땅히 여래를 보아야 하리라."
그런데 영국의 저명한 불교학자인 에드워드 칸즈(Edward Conze)에 의한 제5분 끝부분의 번역은 선적(禪的) 예지(叡智)가 번뜩이는 매우 탁월한 해석으로 생각되어 여기에 한 번 옮겨본다.
When this has been said, the Lord said to the Venerable Subhūti: "Wherever there is possession of marks, there is fraud, whereverthereisno-possession of no-marks, there is no fraud. Hence the Tathāgata is to be seen from no-marks as marks."
"이와 같이 대답하자, 세존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32대인상을 구족한 면에서 보면 허망함이 있기 마련이고, 어떤 상이 아닌 것[非相]조차도 없는 경지에서 보면 결코 허망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상[諸相]을 어떤 상이 아닌 것[非相]조차도 없는 경지에서 보면 곧 여래를 볼 수 있으리라."
<금강경의 핵심논리와 그 해석/ 이대성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