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회 세미나는 유례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객석 좌석이 없어 의자를 긴급 조달해 모두가 착석헐 수 있었다.
오늘 세미나의 초청 감독은 김재웅 감독이다. 다큐멘터리스트 김재웅 감독은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빅5에 들어가는 거장이다. 1941년 8월 3일 진천군 광혜원면 월성리 출생으로 음성의 대소초, 청주의 세광중, 청주상고를 졸업했다. 그는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1953년작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의 영화를 보고 감독의 꿈을 갖고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2기생으로 입학하여 1964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추송웅, 박정자 선배와 연극활동을 생각했으나 결국 영화감독의 꿈을 갖고 1966년 노필 감독의 <밤하늘의 부르스> 연출부로 입문하였다. 그런데 노필 감독은 이 영화의 흥행부진으로 삼청공원에서 목매 자살한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뒤 이강천 감독, 권영순 감독의 <에밀레종>,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 등에 참여했다.
1969년 중앙대 동기생인 한광희, 도상선의 권유로 농촌진흥청에서 별정직 공무원 신분의 영화감독으로 1975년까지 7년간 근무했다. 당시 농촌지도사로 근무하던 도상선 감독은 3만 원의 월급이었다고 한다.
1976년 그는 EBS의 시니어 PD 모집에 합격해 시길수, 홍종화와 함께 입사한다. 중앙대 동기생인 김창식 PD는 이듬해에 입사했다. 당시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오진석 실장 아래 김윤근, 김현일, 정효순, 이규옥 PD와 제작을 하였다. 당시 김봉식 촬영기사와 <교통의 발달>, <생활예절>을 제작했다. 이때 싱가폴로 CEPTA TV 뉴미디어 연수를 다녀왔다.
이때 <작은 나라의 강한 국력>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지만 불발되어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1979년 한국전력 홍보실로 이직하였다. 더 나은 제작조건을 생각했으나 사실은 점점 열악해져 차량지원까지 못받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3년을 근무하고 1981년부터 프리랜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 일본 ACC영화연수를 다녀왔다.
당시 정책홍보영화 제작은 삼진영화사의 김학수 감독이 유명했는데 이 회사에 중앙대 동기생인 정효근 감독도 있었다. 삼진영화사에서 일하다가 삼화프로덕션, 삼한기획, 중앙영화사, 서울영상, 국제영상 등에서 프리감독으로 활동하였다. 서울영상에서는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현대자동차 홍보영화를 제작하였다.
국제영상에서는 군홍보영화를 제작하였는데 해병대, 공사, 수방사등의 홍보영화를 제작하였다. 특히 내무부 소방홍보영화를 제작하며 화재장면을 연출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도 한다.
이렇게 현업에서 일하며 중앙대 신방대학원을 다녀 1989년에 영화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1989년에는 서울영상의 김영대 상무의 권유로 서울예술신학대학에 1989년부터 10여년 간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강의를 했다.
2005년에는 필리핀 마닐라 시립대학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의 교육효과에 대한 연구(Educational Effects of Image- Communication)으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1969년~1976년 농촌진흥청에서 <녹색혁명 이룩되다> 등 40여 편, 1979년~1980년 EBS에서 <교통의 발달> 등 200여 편, 1981년 ~1986년까지 내무부 제작의 <나와 너를 위하여>, <나들이> 등 33편, 1987년~1990년까지 농림부 제작의 <황금 들녘>, <석이네 가족> 등 24편, 1991년 ~1999년까지 삼성, 현대, 효성, 두산, 한국전력, 한국산업안전공단, 그리고 각 관공서의 홍보영화 61편을 감독했다. 적어도 360여 편인데 2000년대라고 쉬지 않았기에 그의 감독작은 더 늘어난다.
당대 활동한 문화영화 감독으로는 그의 감독 편수는 단연 압도적이다. 그가 감독으로서 열심히 제작일에만 몰두했기에 가능한 편 수일 것이다.
2014년에는 40분 품 인물자서전 <도전과 열정의 아름다운 이야기 이방수 회장>을 제작한 바있다. 지금도 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이다.
그가 꼽은 당시 다큐멘터리스트 빅5에는 그 외에 김학수, 박승관, 오성환, 정수웅 감독이 꼽힌다. 그 역시 금관상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986년 제3회 금관상영화제에서 <씻김굿>으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90년 제1회 우수창작비디오상에서는 <황금들녘>으로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제8회 금관상영화제에서 <건강한 사회, 행복한 생활>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93년 제8회 한국산업영상전에서는 <HYUNDAI FOCUS 1994>로 기획, 연출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하였다.
2부 발제의 주인공은 본 사업회의 중국지회장인 상명대 조복례 교수이다. 몇 년만에 초청되어 '한중합작영화의 경향'을 발제해주었다. 현재 중국영화시장은 한국에서 <괴물> 상영 후 흥행기록 경신 상황과 같다. 200억 원 투자에 1조 수익이라면 다른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할 흥행기록이다. 아직 한국영화는 극장상영이 아닌 불법 다운에 의해 유포되는 상황이다. 수교 이후 한중합작은 있어 왔지만 진정한 교류는 아직 미완이다. 한중의 관계는 수교 이후 최악의 상태이며 중국도 관계 개선을 갇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때가 진정한 한중관계 개선의 날이 될 것이다.
중국에서 이소룡의 인기는 아직도 최고이다. 양조위 등의 배우도 인기가 있지만 이소룡은 난공불락의 대스타이다. 중국배우로는 황소명, 장쯔이 정도가 인기이지만 이소룡에 비교할 바 아니다. 중국영화 산업은 아직 통계가 정확치 않은데 연간 80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한중합작영화의 모범 샘플은 <수상한 그녀>이다. 각국에서 리메이크 되었는데 중국버전은 대만 감독이 연출했다.
수교 이후 지난 26년간 40여 편이 한중합작되었지만 협작이 대부분이었고 진전한 합작영화의 성공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시장에서는 2천억 원 이상 수익을 올려야 번 것이라는데 각종 수치가 부풀려진게 많기 때문이다. 배급, 홍보비를 빼면 겨우 본전을 건진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은 특별협약국이지만 사실 잘 활용되지 않은 상태이다.
중국에서서 연출시 한국감독은 휘둘리기 십상이다. 언어가 소통이 안되고 중국인의 정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주익, 안동규 제작자가 활동했지만 아직 성공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김기덕 감독도 중국을 방문하면 기차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 중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정서를 알아야 영화를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인데 너무도 당연한 현실을 우리는 그동안 조선족을 통한 통역에 의존해왔다.
김태용 감독이 최근 중국에서 활동을 모색하지만 부인인 탕웨이 덕이 크다. 3~5년은 살아야 그들의 정서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보도되는 기사는 70%만 믿어야 한다. 정식 인터뷰한 기사가 아니고 인용한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최근 <김염>을 영화화 한다고 보도했지만 누가 언제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장예모 감독이 영화 <안중근>을 감독한다지만 건네들은 뉴스일 뿐이다.
이제 중국 광전총국에서 대본이 OK된 것뿐이다. 전체 공정의 10%가 진행된 상황일 뿐이다.
사드 문제는 언젠가 풀릴 것이다.그러나 누구도 그 시기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단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지극정성의 마음을 갖고 준비해야 한다. 3개월간 연락이 두절되며 끝이다. 공적인 일에는 송금도 안되고 한국방문 자체가 불허 상황이다. 설사 협약서를 썼다 하더라도 무효인 상황이다. 그야말로 안면몰수 상황인데 중국통인 조 교수를 통해 듣는 이야기는 너무도 와닿는 생생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