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6회 가고시마·미야자키①
역사를 크게 바꾼 인재 배출에 앞장선 가고시마.
풍부한 태양이 푸른 하늘에 빛나는 빛의 고장 미야자키.
스승은 이 천지에서 희망의 철학을 끝까지 이야기했다.
스승은 이 천지에서부터
동양광포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리고 스승은 이 천지에 정의의 투쟁을 새겼다.
지금, 그 혼을 계승하는 신시대의 제자가
잇달아 뛰어나오고 있다.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난을 극복하자!
아마미오섬으로
1963년 6월 20일,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가고시마와 미야자키 지도를 위해 나섰다. 제8권 ‘포진’에서는 야마모토 신이치가 가고시마현의 아마미를 처음 방문해 낙도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동지를 격려하는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20일 저녁, 신이치는 가고시마회관 기공식에 참석했다. 그 뒤, 가고시마총지부 간부회에서 지도하고 이튿날 21일, 도쿠노섬을 경유해 아마미오섬으로 갔다.
이 방문에서 신이치는 아마미 제도에 총지부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튿날인 22일 낮, ‘아마미총지부 결성대회’를 나제항이 맞닿은 시오하마해안의 매립지에서 성대하게 개최했다.
신이치는 도다 선생님이 제시한 학회의 3지침 ‘일가화락의 신심’ ‘각자가 행복을 획득하는 신심’ ‘난(難)을 극복하는 신심’을 언급하고 이렇게 강조했다.
“광선유포라고 해도 그 축도는 가정에 있습니다. 일가가 즐겁고 사이좋게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런 가정이 될 때 비로소 신심의 공덕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 모두가 ‘나는 이렇게 행복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기 위한 신심입니다. 최종적으로는 광선유포나 불도수행도 타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난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정법에는 반드시 난(難)이 있습니다. 악과 싸우기 때문에 난이 다투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바람이 없으면 연도 날아오르지 못하듯이 우리도 악과 싸워 난을 받아야만이 비로소 단련되어 인격의 광채를 더해 가는 것입니다.
난에 지지 않고 사악과 계속해서 싸우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숭고하며, 거기에서 솟아나는 무한한 생명력이 그리고 사명감 넘친 약동이 행복이라는 하늘을 향해 자신을 날아오르게 하는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스승에게 받은 지도는, 훗날 아마미 동지에게 다투어 일어나는 박해에 맞서는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이 6월 22일은 ‘아마미의 날’로, 벗이 스승과 새긴 원점을 되새기며 새로운 결의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정신은 행동을 통해 계승된다
미야자키총지부 간부회
아마미 지도를 마친 신이치는 23일, 배와 비행기를 갈아타고 미야자키현으로 갔다. 이날 저녁에 열리는 미야자키총지부 간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실로 강행군이었다. 신이치의 피로는 한계에 달했지만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미야자키 벗을 격려했다.
회합장소는 미야자키현 공회당으로, 그 뒤쪽에 있는 미야자키현 교육회관도 제2의 회합장소로 사용했다.
신이치는 간부회에서 창가학회의 발전은 ‘지용(地涌)의 의(義)’라는 점을 강조하고 온 힘을 다해 참석자를 격려했다. 그리고 회합이 끝난 뒤에는 제2의 회합장소로 달려가 멤버들을 격려했다.
‘포진’에는 신이치의 각오가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닛코유계치문(日興遺誡置文)>의 ‘아직 광선유포가 되지 않은 동안은, 신명을 버리고 수력홍통을 해야 할 것.’(어서 1618쪽)이라는 어문을 생명에 새겨 왔다.
이 어문은 바꿔 말하면 신명을 버리고 수력 홍통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로소 광선유포는 가능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지도이기도 하다.
은사인 도다 조세이는 실로 이 유계(遺誡)를 몸으로 보여주었으며, 회원 75만 세대라는 장거를 달성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신이치는 광선유포라는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의 실현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은사의 정신을 자신이 체현하여 계승해 가겠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하고 있었다.
정신의 계승이란 관념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동을 통해 전해지고 계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치는 한 순간 한 순간에 목숨을 걸었다.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신이란 한 순간의, 바로 지금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진행요원으로서 접수를 담당한 오타 아키코 씨(미야자키총현 부인부 총주사)는 스승의 행동을 직접 보았다.
“회합장소에 오신 이케다 선생님은 접수 담당인 저희에게 ‘신세를 지겠습니다. 노고가 많군요.’ 하고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활기찬 선생님의 모습에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소설 《신·인간혁명》을 읽고 격투 속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행사진행요원까지 격려해주신 사실을 알고 감동을 금치 못했습니다.”
간부회가 끝나고 제2의 회합장소인 교육회관으로 가는 선생님을 오타 씨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쫓아 갔다.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는 멤버에게 “서로 격려하고 단결하여 투쟁을 승리해내자.” “일생을 뜻 깊게 보내자.”고 잇달아 격려의 말을 보냈다.
그 다음 달인 7월, 오타 씨는 여자부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학회본부에서 개최한 부대기 수여식에서 오타 씨가 앞으로 나가자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분발하세요.”
악수를 하고 부대기를 넘겨받은 오타 씨는 한 순간의 만남을 생명에 새겨둔 선생님의 진심에 감동했다.
미야자키총지부 간부회 이튿날인 24일, 선생님은 아오시마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여자부 부대장인 히다카 도시코 씨(미야자키상승권 부인부 주사)는 <세이쿄신문> 통신원으로 니치난해안을 대표하는 명소인 호리키리고개에서 신이치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호리키리고개에 도착한 선생님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히다카 씨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처음 뵙는군요. 열심히 분발하세요.”
히다카 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사진을 찍어 드리겠습니다.’라며 야자나무를 배경으로 저희를 촬영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부는 교학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아오시마에 있는 식물원 등을 방문했다. “그 사이에도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찾아오는 동지가 많았습니다. 차례로 모든 멤버에게 말을 건네고 악수하는 모습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창가(創價)의 마음을 배웠습니다.”(히다카 씨)
훗날 선생님이 호리키리고개에서 촬영한 사진과 시가 적힌 종이가 도착했다.
종이에는 “괴로워도/ 한탄하지 마라 벗이여/ 내일이라는 날에/ 광선유포의/ 낙토를 보라”는 도다 선생님의 시가 이케다 선생님의 필체로 묵흔도 선명하게 씌어 있었다.
히다카 씨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한 사람’에게 이토록 마음을 써주신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때 써주신 시가 원점이 되어 그 뒤의 고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고 감사함을 말하고 보은을 서원했다.
가고시마회관 낙성식
《신·인간혁명》제8권 ‘격류’에서는 5개월 뒤인 11월 23일에 개최한 가고시마회관 낙성식을, 제9권 ‘신시대’에서는 미야자키회관 낙성식(1964년 4월 9일)을 언급했다. 가고시마회관 낙성식의 모습은 제27권 ‘격투’에서도 회상했다.
신이치는 낙성식에서 상식 풍부한 행동을 강조했다.
“아무리 진지하게 해도, 비장감으로 가득 차 과민하게 굴거나 엉뚱한 행동으로 치닫는 신심은 오히려 사회의 신뢰를 잃게 하고 법을 땅에 떨어뜨립니다. 비상식적인 행동은 본래의 신앙자가 지녀야 할 올바른 모습과는 대극임을 알기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이 ‘저 사람은 참으로 날마다 즐겁게 사는구나.’ ‘저 사람을 만나면 왠지 신심을 하고 싶어진다.’고 말해줄 수 있는 인생이야말로 불법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니치렌불법의 사고방식과 삶의 자세는 보편적이며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규범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대성인 불법도 ‘사신홍법(死身弘法)’ ‘부자석신명(不自惜身命)’을 설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예찬한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적 측면에서 말하면 ‘생애 어본존을 멀리하지 않고, 제목을 부르며 즐겁게 광선유포를 위해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낙성식의 지도에 담긴 마음이 소설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가고시마 사람과 규슈 사람의 한결같은 정열에 경의를 표했다. 크게 기대도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힘을 한 순간에 사라지는 불꽃놀이처럼 끝내버리는 것이 아닌, 영속적인 광선유포의 추진력으로 해가기를 바랐다.”
야스다 유코 씨(가고시마총현 부인부 총주사)는 낙성식이 끝난 뒤의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회관 밖에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낙성식이 끝난 뒤, 곧바로 밖으로 나가 멤버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가고시마 건아의 노래’를 지휘하셨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회관 2층으로 남녀 청년부 대표를 불러 지도회를 열었다. 선생님은 참석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메이지유신 당시에도 가고시마에서 상당한 인재가 배출되었는데 이중에도 인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격려했다.
당시의 감동을 야스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여자부 간부를 대표해 참석했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눈빛과 힘찬 목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미숙한 청년의 장래를 믿어 주시는 스승의 자애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명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가고시마 광포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지금도 달리고 있습니다.”
승리섬부에 보내는 격려
가고시마에는 북쪽의 시시섬부터 남쪽의 요론섬까지 남북으로 약 600킬로미터에 걸쳐 섬들이 펼쳐져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낙도는 26개로 개성이 넘치는 섬들이 방문객들을 매료한다.
낙도에서 활약하는 ‘승리섬부’의 멤버는 다양한 형태로 지역을 위해 공헌하고 학회를 이해하는 유대를 넓히고 있다. 그러나 각 섬과 지역에 이제 막 ‘묘법의 씨앗 한알’이 탄생할 무렵에는 학회에 대한 이해도 없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등 박해도 받았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런 승리섬부의 멤버에게 끝없는 희망의 빛을 계속 보냈다. 소설에도 사명의 천지에서 분투하는 벗의 모습을 여러 차례 거듭 썼다. 가고시마의 낙도가 무대인 내용도 많다.
앞서 언급한 제8권 ‘포진’에 이어 제13권 ‘광성’, 제23권 ‘감투’, 제27권 ‘격투’에는 아마미의 동지가 사랑하는 섬을 이상적인 땅으로 바꿔내는 드라마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광선유포의 이상향을
제13권 ‘광성’은 1968년 11월 13일, 신이치가 5년 만에 아마미에 도착한 장면부터 시작된다.
5년 동안 아마미 제도는 1개의 총지부에서 1개 본부와 2개의 총지부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학회원이 음험한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학회박멸’을 내건 대규모 시위도 열렸다. 동지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분한 마음을 느꼈다.
보고를 받은 신이치는 사태를 해결하고 동지를 격려하도록 최고 간부를 파견했다. 또 아마미에 가는 간부에게 “서로 증오하는 것은 결코 신앙자의 본의(本義)가 아닙니다.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라는 전언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모두의 분노도 억울함도 슬픔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되었다고 해서 똑같이 감정적으로 되어 버리면 대립의 골은 더 깊어질 뿐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법(佛法)에 대해서도, 학회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일부 유력자의 말에 편승해 학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창가학회를 교란시키고 불법을 파괴하려고 할 때는 철저히 악을 책해서 그 잘못을 철저히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의 목적은 자신이 행복해지고 동시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며 지역을 번영시키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화인욕(柔和忍辱)의 갑옷을 입고 커다란 경애로 상대방을 감싸며 강한 인내를 갖고 대화를 거듭하며 우정과 신뢰의 연대를 맺고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이치의 마음을 알게 된 아마미의 벗은 분쟁을 피하고 마을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마음껏 학회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라고 받아들여 대화의 큰 파동을 일으키겠다고 결의했다.
이를 악물고 끈기 있게 광선유포를 향해 전진하는 아마미 동지에게 낭보가 도착했다. 신이치의 두 번째 방문 소식이었다. 모두 성실한 대화를 거듭하고 마침내 그날을 맞이했다.
1968년 11월 13일,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신이치는 아마미오섬회관에 도착했다. 정원 한쪽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곧바로 강당으로 가서 동지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신이치는 참석자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아마미 여러분이 오늘까지 얼마나 노고하시고 어떤 심정으로 투쟁해 오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순수하고 강성한 신심은 삼장사마(三障四魔)의 폭풍우를, 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대풍을 향해 돌진해 훌륭하게 난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상쾌한 비상을 이룩하셨습니다.
정말 잘 분발해 주셨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찬탄하는 바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대승리는 틀림없습니다. 앞날에 영광의 무지개가 빛나고 있습니다.”
신이치의 말은 아마미 동지에게 미래를 비추는 희망의 빛이 되었다.
기념촬영이 끝나고 대표 멤버와 근행창제를 한 뒤 신이치는 다시 지도를 이어갔다.
“지금 고투하고 있는 아마미는 30년 후, 40년 후에는 일본 광선유포의 이상향(理想鄕)이 됩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고 섬사람 모두 학회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대가 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십시오.”
“누구든, 또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불법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최후에는 반드시 신심을 관철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말고 이체동심(異體同心)의 단결로 전진해 주십시오. 나는 오늘 보여 주신 여러분의 모습을 떠올리며 매일 창제를 하겠습니다.”
아마미의 동지는 이날 신이치가 한 지도를 가슴에 품고 ‘일본 광선유포의 이상향’을 목표로 전진했다.
<기고>세계광포의 새로운 흐름을!
히지야 히로나리 가고시마총현장 / 노자키 마유미 가고시마총현 부인부장
이케다 선생님이 가고시마현을 처음 방문하신 때는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시고 넉달 뒤인 1958년 8월 23일입니다. 선생님은 당시의 심경을 “후배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싸운다. 더운 규슈에 땀의 역사가 있다.”고 써주셨습니다.
그 뒤로 23차례에 달하는 가고시마 지도는 청년을 끝까지 격려하신 격려행이었습니다.
1972년 9월, 4000명이 참석한 기념촬영회에서는 회합이 끝난 뒤 남자부 정리진행요원을 규슈종합연수원에 초대해 함께 ‘동지의 노래’를 합창하고 “온갖 고난에 부딪혀도 유유히 끝까지 살아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훗날 인재그룹을 ‘감나무 열매 모임’이라고 명명)
그 마음은 후계의 청년에게 맥맥이 이어져 학회를 공격하는 폭풍우를 물리치고 1980년 2월, 아마미 여자부 86명이 도쿄의 다치가와문화회관에 계신 선생님 곁으로 갔습니다. 구도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반전공세의 아침이 도래했음을 느꼈다.’고 써주셨습니다.
또 1990년 9월에는 규슈연수원에서 개최한 전국 남자청년부간부회에 참석해 “젊은 날에 인생의 스승을 만나 진실한 인간으로 단련을 받는 일이 청년에게 최고의 영예다.” 하고 사제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재의 연마를 광선유포의 생명선으로 여기신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 전진한 동지의 분투로 현재 가고시마신세기, 가고시마창가, 사쓰마이케다, 기리시마이케다. 오스미욱일, 아마미광성의 6개 분현으로 발전했습니다.
“가고시마현은 언제나 지역 건설의 선구가 되어주십시오.” 하고 말씀하신 선생님은 직접 모든 분현에 발걸음을 옮겨 손수 가고시마 광포의 인재성을 구축하셨습니다.
휘호 ‘세기난무인(世紀亂舞人)’은 1983년 3월, 가고시마문화회관을 처음 방문한 선생님께서 써주신 세로 2미터의 큰 휘호입니다.
“메이지유신보다도 몇 배, 몇 십 배의 위인이, 일류의 사람이, 대지도자가 이곳에서 나오기 바랍니다!”라는 스승의 외침을 가슴에 품고, 역사를 크게 바꾼 천지인 가고시마는 ‘세계광포의 새로운 흐름을 우리 지역에서부터 만들겠다!’는 결의로 격려의 유대를 넓히겠습니다.
광포를 위한 기원은
기원이 성취되는 힘이 된다
기카이섬의 어머니
아마미 제도의 동북부에 위치한 산호초가 아름다운 기카이섬에서 착실하게 묘법유포를 위해 끝까지 걸어온 벗의 분투가 제23권 ‘감투’에 씌어 있다.
사납게 날뛰는 숙명의 거친 파도에 울던 도미시마 도시는 1956년에 입회했다. 도미시마는 숙명전환을 위해 자타 함께 행복을 실현하는 절복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기해 날마다 홍교를 위해 걸었다.
구습이 뿌리 깊은 섬이라 순수하게 불법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적었다. 도미시마에게 물과 소금을 뿌리거나 낫을 들고 쫓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도미시마는 어떤 일을 당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불법대화에 힘썼다.
도미시마의 착실한 분투도 있어 1961년 8월, 기카이섬에 첫 지구(地區)가 결성되고 도미시마는 지구부인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달, 태풍으로 집이 날아가 버렸다. 도미시마는 기카이섬까지 지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넓은 집이, 섬의 광선유포를 위해 회합 등에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회합장소가 있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그러자 도쿄에서 부동산회사에 다니는 아들이 “엄마를 위해 기카이섬에 집을 지어 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1964년, 10평이 넘는 방이 딸린 집이 완성됐다. 훌륭한 집은 지역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한 훌륭한 실증에 절복에도 기세가 붙었다.
‘감투’에는 기원의 일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렇게 씌어 있다.
“‘광선유포를 위해서’라는 일념을 담은 기원은 소원을 성취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지용의 생명이 솟아오르는 목소리가 대우주에 울려 펴져 제전을 작용하게 하고 세계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광선유포를 위해 굳세게 사는 데에 소원만족의 인생이 있다. 성훈에도 ‘제목을 봉창하는 소리는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닿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어서 808쪽)라는 말씀이 있다.”
모두 도미시마를 ‘기카이섬의 어머니’로 존경했다. 괴로움을 안고 있는 벗에게는 “괴롭다고 느낄 때가 바로 승부를 걸 때입니다. 매서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신심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하고 대확신을 담아 격려했다.
그리고 ‘야마모토 선생님을 만나 뵙고 기카이섬의 상황을 보고드리고 싶다’며 계속 기원했다.
1976년 8월, 그 기원이 실현됐다. 도미시마는 가고시마의 기리시마에 있는 규슈 종합인수원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석했다. 연수원에 머물던 신이치가 주위 간부에게 “달리 격려할 사람은 없습니까?” 하고 묻자 규슈의 부인부 간부가 도미시마를 소개했다.
신이치는 도미시마와 함께 근행한 뒤 그 동안의 분투를 칭찬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도미시마는 여러 일을 보고하고 싶었지만 가슴이 벅차올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신이치가 감싸 안듯 이렇게 말을 건넸다.
“알고 있습니다. 모두 알고 있습니다. 도미시마 씨의 마음을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잘 싸우셨습니다.
분하고 괴로운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법을 위해, 사회를 위해 투쟁하신 것 그 자체가 도미시마 씨가 부처이고 지용보살이라는 증명입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흘린 땀은 복운이 되어 영원히 자신을 장엄하게 장식합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활동하면 내세에는 강하고 건강한 몸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고투에 맞서 끝까지 용감하게 도전한 사람에게는 행복이라는 대승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법(佛法)의 인과이법(因果理法)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기카이섬의 태양으로서 행복의 빛으로 모든 사람을 비춰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이치는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시를 써서 선사했다.
광포발전의 요인
제27권 ‘격투’에는 1978년 5월, 가고시마를 방문한 신이치가 가고시마의 간부들과 아마미의 광선유포가 크게 발전한 요인에 관해 대화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마미는 ‘학회박멸’을 외치며 시위를 일으킨 지역도 있었지만, 동지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거듭 절복에 힘썼다. 그리고 신심을 관철한 사람은 커다란 공덕의 실증을 나타냈다. 반대로 탄압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움에 부딪혔다.
이 엄연한 현증을 보고 사람들은 학회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학회에서 내건 운동을 어중간하게 끝내지 않고 철저하게 추진한 점, 한 사람 한사람이 지역공헌을 위해 힘쓴 점이 아마미가 발전한 힘이 되었다. 이렇게 분투한 이야기를 듣고 신이치는 기대를 담아 말했다.
“우리는 학회에서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마음’과 ‘자타 함께 행복을 창조하는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역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언제나 학회원끼리만 모여 행동한다면 사회에서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쪼록 아마미는, 가고시마는 언제나 지역건설의 선구에 서서 계속 나아가기 바랍니다.”
나도 또한 그대들과 함께
그리고 선생님은 아마미의 동지와 맺은 사제의 유대를 제28권 ‘승리섬’과 제30권(상) ‘자복’에 썼다.
1976년 6월, 신이치 앞으로 ‘아마미 광포결의’라는 제목의 결의문과 뜻 있는 멤버들이 모이 제작한 ‘아마미 광포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와 악보가 도착했다. 결의문에는 사제공전(師弟共戰)으로 섬의 광포를 추진하겠다는 서원으로 넘쳐 있었다. 또 아마미 제도의 도쿠노섬에서 성대하게 개최한 문화제에 관한 보고도 있었다.
신이치는 펜을 들었다.
“아마미의 날, 축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준 ‘아마미 광포결의’를 잘 보았습니다. 20일에 도쿠노섬에서 개최한 문화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생기발랄하게 약동하는 여러분의 모습에 참으로 기쁩니다. 어본존께 결의문을 올렸습니다. 여러분의 결의에 대한 내 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용감하도다/ 아마미창가학회의 벗
아/ 늠름하도다/ 아마미 공전(共戰)의 지용(地涌)의 벗
아/ 아마미 동지의 결의를/ 보전(寶前)에 올려
나도 또한/ 그대들과 함께
그대들을 지키면서/ 투쟁하겠노라고 맹세한다.’
사랑하는 소중한 아마미 벗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내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제28권 ‘승리섬’)
1978년 8월에는 규슈연수원에서 아마미 멤버 10여명과 간담을 나눴다.
“불법은 승부입니다. 10년, 20년, 30년 아니 50년이 지났을 때 모든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승부는 일생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삼세(三世)라는 척도로 보아야 할 때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크게 승리한다고 확신하고 불퇴의 용자로서 끝까지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강해야 합니다. 겁쟁이는 신심을 관철할 수 없습니다. 모진 시련을 견뎌내는 강한 마음, 만심과 명문명리에 대한 집착 등을 이겨내는 강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학회를 떠나면 최후에는 후회합니다. 고독합니다. 광선유포의 진열에서 떨어지지 말고, 발랄하게 환희의 대행진을 이어가기 바랍니다.” (제28권 ‘승리섬’)
다치카와에서 만남
1980년 2월 17일, 아마미오섬 지역본부의 여자부원 86명이 스승을 구도해 도쿄의 다치카와문화회관을 방문했다. 이 원점의 날에 대해 제30권(상) ‘자복’에 씌어 있다.
1979년 2월, 규슈연수원에서 개최한 규슈기념간부회에 참석한 신이치는 창가여자회관에서 아마미오섬 지역본부의 여자부 근행회를 개최하고 싶다는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아마미 여자부는 광포확대의 큰 파동을 일으켜 스승의 슬하에 모이자고 결의하며 대화를 위해 달렸다. 그 사이에 신이치는 회장을 사임했다. 규슈연수원에서 만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4월 24일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충격은 컸다. 그러나 그들은 지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홍교를 대승리해 선생님을 안심시켜 드리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전진했다.
그리고 1980년 2월 17일, 아마미오섬, 가케로마섬, 도쿠노섬, 오키노에라부섬에서 온 여자부원 86명이 다치카와문화회관에 도착했다. 신이치는 현관 로비에서 멤버들을 맞이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건강하신가요? 가장 힘들게 고생하면서 광선유포의 길을 열어주신 아마미의 분들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섬에 돌아가면 아무쪼록 안부 잘 전해주십시오.
초창기 동지들이 박해와 맞서 싸우며 목숨을 걸고 학회의 기반을 구축해주셨습니다. 그 토대 위에서 즐겁게 마음껏 학회활동에 힘쓰는 여러분은 복운이 있는 분들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고생과 노력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또 신이치는 휠체어를 타고 참석한 멤버를 격려했다. 시를 써서 대표에게 건네고 기념촬영도 했다.
아마미의 여자부장 일행과 간담하는 자리를 마련해 동지의 분투하는 모습에 귀를 기울이고 전언과 격려품을 건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사는 각각의 섬이나 지역은 작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섬과 지역을 광선유포의 모범으로 만들면, 아마미는 전 세계 동지에게 희망의 별이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선두에 서서 세계광선유포를 이끌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역광포는 즉(卽) 세계광포입니다.
지금 있는 곳이야말로 사명의 땅이자 행복의 상적광토(常寂光土)라고 정하고, 사이좋게 전진하기 바랍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곳을 떠나서 저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니라.’(어서 781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아마미에서 21세기 광포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주십시오.
아마미, 힘내십시오! 지면 안 됩니다. 아마미!”
‘자복’에는 “아마미는 신이치의 기대대로 일본 제일의 모범조직으로 성장한다.”고 씌어 있다. 이 한 문장은 스승이 아마미에 기대를 담아 보낸 영원한 지침이다. 또 실제로 아마미는 일본의 모범이 되는 광포확대를 이룩했다.
도카라 열도의 흐름
제28권 ‘승리섬’에는 가고시마항에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남해 상에 줄지어 늘어선 ‘도카라 열도’ 광포의 흐름도 상세하게 씌어 있다.
도카라 열도는 야쿠섬과 아마미오섬 사이에 위치해 남북에 걸쳐 약 160킬로미터로 이어져 있다. 사람이 사는 섬이 7개, 무인도가 5개로 모두 12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이들 섬은 ‘도시마무라’에 속해 있다.
학회는 이 ‘도시마무라’와 함께 다케시마섬, 이오섬, 구로시마섬으로 이루어진 ‘미시마무라’를 합쳐 ‘도시마지구’를 결성했다.
‘승리섬’에서는 가고시마 시내에 살면서 도시마지구의 지구부장으로서 이들 섬에 사는 동지들을 끊임없이 격려한 벗이 소개된다.
1964년 3월, 지구부장에 임명된 이시키리 히로타케는 달마다 한번씩은 도시마무라와 미시마무라를 돌았다. 도시마무라의 멤버를 가정방문하려면 아마미오섬의 나제로 가는 배를 타고 구치노섬, 나카노섬, 다이라시마섬, 스와노세섬, 아쿠세키섬, 고다카라섬, 다카라시마섬 순서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배는 한 달에 네 차례만 왕복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비는 결항되어 집을 나서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또 각 섬을 도는 데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시키리는 섬 동지를 위해 끝까지 힘쓰겠노라고 각오를 정했다. ‘불요불굴의 결의로 일어서는 광포의 투사를 육성하자. 그러려면 내가 불요불굴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자(師子)가 되어야 사자를 육성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섬 동지들도 주위 사람들이 신심을 반대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성실함으로 일관했다. 그 모습에 착실히 학회를 이해하는 유대가 넓혀졌다.
미시마무라의 이오섬에도 섬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며 신심에 힘쓰는 한 부인부원이 있었다. 남편이 병약하여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운데 열심히 일하면서 불법대화를 위해 걸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그 부인부원이 착실하게 생활을 혁명하는 실증을 나타내자 학회를 깊이 이해했다.
다케시마섬에서는 다른 종파의 승려가 대성인 불법의 위대함을 알고 학회원이 되어 거듭 대화를 나누었다.
섬의 광포를 추진하는 남편을 뒷받침한 이와키리 기요 씨(가고시마신세기현 요시노히가시지부 부부인부장)는 “이케다 선생님이 언제나 섬을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마음을 말했다.
“남편은 늘 ‘사명이다. 사명이다.’라며 섬을 돌았습니다. 한번 집을 나서면 일주일은 집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 가족은 단결하여 집을 지키고 생활을 지탱했습니다. 가족의 사명이라고 확신했기에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승리섬’에 도카라 열도의 모습이 그려졌을 때, 섬 사람들의 수많은 기쁨의 목소리가 이와키리 씨에게 전해졌다.
이와키리 씨도 “가족은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도왔다.” 라는 문장을 보고 ‘선생님께서는 모두 알아 주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승리섬의 벗은 지금도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 자신이 사는 지역에 격려의 빛을 보내고 있다.
그 빛은 이 섬, 저 섬에 있는 지용보살(地涌菩薩)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선 벗이 섬의 행복을 바라며 사명감에 불타올라 착실하게 지역광포를 추진했다.
공전보(16-1) 제16회 가고시마·미야자키.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