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새 남자/ 김순금
<슬픔>이란 글감이 주어졌을 때 엄마와 둘이 살던 때가 생각났다. 기쁨과 슬픔이 상대적이 듯,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 주면 줄수록 엄마의 보살핌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내 처지가 슬픔이라고 느껴졌을 땐 결혼할 사람과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다.
식당일을 하고 계신 엄마가 혼자라는 걸 알고 ‘애인’들이 자주 나타나 내 방을 들락거렸다. 엄마가 선택한 사람이려니 이해는 됐으나 불편했다. 그 사람은 중국집에서 주방 보조를 하던 유부남에 딸이 한 명 있었다. 시골 할머니와 살고 있던 우리집에 엄마가 그 딸을 맡기고 갔다. 잠시만 돌봐주면 된다고 했다. 동네에선 엄마가 바람을 피워 만난 남자의 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할머니와 남동생이 그 아일 대하던 ‘이방인’의 눈초릴 잊을 수 없다. 두 해 살았을까? 엄마가 ‘향미’를 데려갔다. 아빠랑 서울 가서 산다고 했다. 정이 들었는데 보내는 내 맘은 그저 안쓰러웠다.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게 될 일을 생각하니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 뒤로 향미 아빠도 보이질 않았다.
수학여행 갈 땐 용돈을 주었고, 내가 좋아 하는 걸 알고 책도 여러 번 사다 주셨다. 엄마 가겔 자주 출입한 걸로 보니 엄마의 새로운 남자다. 엄마에게도 물론 잘했다. 엄마가 행복한 걸 보면 내 맘도 좋아져서 그 아저씨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아내가 있는 몸이라서 우리 방은 대낮에나 가끔 들렀고 밤엔 집으로 갔다.
아침부터 동네가 시끄러웠다. 눈을 떠서 나가보니 우리 엄마가 웃통이 홀라당 벗긴 채 도롯가에서 머리채를 잡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 신고 할 거야!” 소리 지르며 엄마 몸을 감싼채 집안에 들여앉혔다. 알고 봤더니 아저씨의 아내였다. 낌새를 알고 엄마를 찾아 와 그 난동을 부린 거였다. 분하고 화가 나서 아저씨께 전화해 마구 따지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와 내 남동생, 그리고 형부를 불러 모아 아침 상황에 대해 말했더니 세 남자가 동네 아저씨 집에 찾아갔다. 담부턴 장모님 곁에 얼씬도 하지 마라며 단단히 일렀던 모양이다. 내 남자친구가 그 집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막상 가서 이야긴 했는데 그 집 딸의 눈빛을 보니 거기서도 한집안의 가장이고 아버지란 사실이 떠올라 장모님도 썩 잘한 건 아니라고 했다. 찾아 간 일이 후회된다고 했다.
식당 메뉴로 동동주가 인기였다. 비법을 알고 계신 아저씨는 매일 밤 집에 들러서 동동주를 담가 줬다. 엄마는 아저씨 드리려고 중간중간 맛있는 음식을 해 날랐다. 큰 덩치와 어울리게 잘도 드셨다. 서울 사는 외할머니가 엄마를 도와주려고 한 번씩 내려왔는데 이 아저씨만 보면 무척 반가워하셨다. 힘든 딸을 도와주고 돈도 많이 벌게 해 준 은인이라고 ‘청계 아저씨, 청계 아저씨’ 했다.
학교가 끝나면 식당에 필요한 음식을 배낭에 사다 나르곤 했다. 그래설까? 어느 날은 허리가 끊어 질 듯 아팠다. 책상에 앉아 수업 받는 일이 너무 힘들어 그날은 조퇴를 했다. 청계 아저씨가 잘 아는 곳이라며 함께 지압원에 들렀다. 목포터미널과 가까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방약과 파스 냄새가 진동했고, 벽엔 박제된 새들이 장식되어 있어 괴기스런 분위기였다. 매트 위에 눕기 전에 브래지어만 남기고 교복 상의를 벗으라고 했다. 목부터 허리까지 지압을 받는데 시원함은커녕 두 남자의 시선이 의식되어 너무나 부끄러웠다. 첨엔 같이 와 줬는데 낼부턴 혼자 다니라기에 며칠을 수업이 끝나면 와서 받곤 했다.
주말이었다. 지압원 건넌방에선 점심을 먹고 있는지 딸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웅성거림도 들렸다. 그날따라 아저씨가 엉덩이 꼬리까지 지압을 해야 된다며 치마를 벗겼다. 얼굴만 발개져서 몸을 맡기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팬티 안으로 자주 손이 들어갔고 급기야 팬티를 벗기더니 아저씨의 흥분된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식사하고 있는 가족 한 명이 “아빠”하고 부르자 아저씬 바지를 급하게 올리더니 잠깐 기다려 보란다. 기분이 이상해서 교복을 부리나케 입고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버스를 탔는데 심장이 크게 뛰고 겁이 났다. 집에 안 가고 늦게까지 방황하다 엄마에게 말씀 드렸다. 다음날 청계 아저씨가 찾아가 으름장을 놓고 왔노라 했다. 맘 같아서는 망치로 가게 문을 부셔버리고 싶었다.
아저씨도 보기 싫어서 그날은 엄마 일만 계속 도왔다. 시험일이 다가와 공부를 해야 된다는 이유를 대면서 오늘은 식당에서 자겠다고 했다. 엄마가 들어가시자 밥상 위에 촛불을 켰다.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가면 술에 취한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기 일쑤였다. 책을 펼치자 서러움이 밀려왔다. 눈물을 닦고 코를 풀면서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하니까’. 스스로 달랬다.
엄마는 아프다고 자주 나를 찾는다. 허리는 굽고 주름은 늘었다. “남자친구 소개시켜 드릴까요?” 물으면 “내 몸도 귀찮은데 송장 치를 일 있니?” 하며 손사래를 친다. 그땐 엄마의 고생은 뒷전이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몸부림만 있었다. 막상 떠나고 보니 지금 내 나이보다도 훨씬 더 이른 삼십 대에 홀로 된 엄마, 재혼도 안하고 자식 넷을 키우려 애쓰던 모습이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