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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안내
시민 모두가 문학으로 꿈꾸는 삶, 대전문학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학관 규모 : 총 1,102.89 m²
지상 2층 상설전시실, 문학사랑방, 관장실, 야외문학관, 공용시설상설전시실
문학사랑방
야외문학관 (외부)
지상 1층 기획전시실, 다목적강의실, 사무실(문학관 관리 및 사무실), 공용시설(화장실, 주 출입구 및 로비)기획전시실
다목적강의실
지하 1층 수장고, 기계실, 공용시설(엘리베이터 등)수장고
대전문단의 면모
대전은 1905년 대전역이 개통되면서 영남, 호남, 경기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 발전하며 근대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전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주요 세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많은 유학의 거유들을 배출한 역사적인 전통의 맥을 지닌 학문과 문화의 고장이다.
대전의 문학은 광복 이후를 기점으로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더불어 지방자치제의 실시 이후 빠르게 정착되고 있는 지역문화주의는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촉진함으로 대전문학의 미래를 밝게 해준다.
대전은 국내에서도 문인협회가 가장 많은 지역의 하나이며, 고교생 문학동아리도 전국 어느 지역에 비춰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활동이 활발하며 질적 수준 또한 높다. 현재 조사된 문인협회의 수는 60여개에 달하며, 다양한 성격의
문인협회가 대전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일반인이 문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한밭문화제, 동춘당문화제, 우암문화제, 호연재문화제, 서포문화제, 갑천문화제 등 전통문화행사의 지역축제가 활발해짐에 따라 각종 문학의 밤, 시화전, 백일장, 시낭송회 등으로 다양하게 열려있다.
대전지역 작가를 지원하기 위한 방안으로 박용래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정훈문학상, 대전문학상, 호서문학상 등의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기도 하다.
대전문학은 전통 지향적 흐름과 외래 지향적 흐름이라는 두 줄기의 상반된 흐름이 공존한다. 이는 과학문화도시를 표방하는 대전시의 비전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전자가 다원화 시대의 덕목이라면 후자는 세계화 시대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대전문학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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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
문학유적
대전 5대 문인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의 시인이여. 당신과 더불어 산천을 떠난 그 눈물들, 오늘은 어느 구름에 서리어 서로 만나자 하는가. ……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닌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문구, 「박용래 약전(略傳)」-
그는 여성적이고 감상적이었다. 그의 몸짓, 말투부터가 너무나 시인다웠고, 시에 관한 한 촌보도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자존심이 있었다…, 나는 그의 영롱한 감성과 서정의 아름다움에 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술을 좋아해서 만나면 으레 술잔을 나누었던 그는 한 줄의 시를 위해 몇십 번씩 생각하며 시어를 다듬을 만큼 꼼꼼하고 생각이 깊었다.
-호현찬 언론인·영화인,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다운 인생」-
돈 세는 일이 역겨워 은행을 그만두시고, 등록금을 독촉하기가 안스러워 결국 교직을 떠나셨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어느 곳에나 얽매이기를 싫어하셨던 자유분방함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여린 심정으로, 어쩌면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시인으로 운명지워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연 서양화가, 박용래시인의 딸, 「아버지는 오십 먹은 소년」中-
술 먹은 박용래가
대전 유성온천 냇둑
술먹은 고은에게 물었다
은이 자네는
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
나는 안 그려
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
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
고은이 킬킬 웃어대며
냇물에 돌 한 개를 던졌다
물은 말 없고
그 대신 냇둑의 새가
화를 내며 날아갔다
박용래가 울었다 안주 없이 먹은 술을 토했다
괜히 새를 쫓았다고 화를 냈다
은이는 나뻐
은이는 나뻐
박용래가 울었다 고은은 앞서가며 울지 않았다.
-고은, 「어느날 박용래」-
「박용래」
소나기 속에 매미가 우네.
황산나루에서 빠져 죽고 싶은 사람
막걸리잔 들고 웃다 우는 사람
상치꽃 쑥갓꽃 하며 호호거리는 사람
맷돌 가는 소리에 또 우는 사람
싸락눈 속에 매미가 우네.
-홍희표, 「박용래」-
박용래
박용래는 훗승에서 개구리가 되었을라
상칫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아욱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죽은 홍래 누이 그립다가 그리고…… 그리고……
박용래는 훗승에서 그리고로 울었을라
서정춘 시집 『귀』(시와시학사)에 실린 「박용래」
술
술은 마음의 울타리
술 속에 작은 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가 보면
조약돌이 드러난 개울
개울 건너 골담초 수풀
골담초 수풀 속에 푸슥푸슥
날으는 동박새
스치는 까까머리 아기 스님 먹물 옷깃
누가 마음의 울타리를 흔드는가
누가 마음의 설렁줄을 당기는가.
江景
안개비 뿌옇게 흐려진 창가에 붙어서서
종일 두고 손가락 끝으로 쓰는 이름
진한 잉크빛 번진 서양 제비꽃, 팬지
입술이 갈라진, 가슴이 너울대는.
오류동
방안에 들였어도 퍼렇게 얼어죽은 삼동의 협죽도
쇠죽가마 왕겨불로 달군 방바닥은 등을 지져도
외풍이 세어서 휘는 촛불꼬리
들리지도 않는 부뚜막의 겨울 귀뚜라미 소리
찔찔찔찔 들린다 해서 잠들지 못하는
초로의 시인
윗목에 얼어죽은 제주도 협죽도가
함께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대전시 교외 오류동
삼동의 삼경. 귀를 세우고
-나태주, <박용래>-
맑은 이슬방울이 연잎에서 또르르 굴러 떨어졌는데, 그것은 늙지 않을 것 같다. 박용래는 내 안에서 늙지 않은 채로 항상 이슬처럼 있다. 박용래는 그 타고난 자리를 잃지 않고 그 천분의 자리를 지켜낸 사람 같다.
박용래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꿈의 세계에 있는 듯도 싶다. 박용래라는 사람은 타고 날 때 묻어 있었던, 타고나기 이전의 어떤 것을 아직 지닌 채 살았던 사람같다. 세상 파도가 아무리 거셌어도 박용래에게서 그것을 앗아가지 못했다. 그것이 시가 되고 그는 이 세상에서 오직 시인으로만 살다가 갔다.
-최종태 조각가, 「맑은 이슬방울처럼 그렇게 : 박용래를 회상함」-
‘아내와 아이들 다 職場에 나가는
밝은 낮은 홀로 남아 詩 쓰며 빈집 지키고
해어스름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
朴龍來더러 ‘장 속의 새로다’하니,
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는 있는 새라고 한다.
요렇처럼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
지혜는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
왜 아니리요.
그중 지혜있는 장 속의 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朴龍來인가 하노라.’
-서정주 ‘박용래’ 전문
문학사상 1976년 1월호에 게재
아버지를 회상하며
가을. 감나무 이파리. 감새의 수리성.
오래 전 일입니다. 방에서 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조심히 문을 열고 쳐다본 아버지의 모습.
아…….
전 시인을, 우수수 떨어진 청시사의 저녁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구름의 행방을 묻지 말자. 구름은 영원한 방랑자.’
두 줄의 시구를 읊고, 육 개월 후 구름이 되어 가셨습니다.
- 박노아
충청시단의 선구자 시인 정훈 (丁薰) (1911~1992)
정훈은 충청도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살면서 충청도 사람의 정서를 충청도의 어법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나태주시인, 전 충남시인협회 회장-
“시를 쓰든지, 시조를 쓰든지, 최선을 다해서 좋은 작품을 발표하라”시던 선생의 말씀만은 마음에 깊이 새겼다.
-리헌석, 「정훈 시인 탄신 100세를 맞아」-
“바람이 맛있다는 표현 속에 선생님의 초탈한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선생님은 자존심을 놓지 않았다. 이는 대전에서 처음으로 현대 문학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 등 존경받는 문인의 삶을 이어가려는 선생님의 노력이었던 것 같다.”
-곽우희 한성기 문학상 운영위원장-
“자연을 그리며 바람의 맛까지 가르쳐 준 스승을 잊을 수 없다”
-시조 시인 김영수-
“낯설고 혹독한 타향감각의 바다를 보며, 그래도 시인은 맛있는 바람을 마시고 어쩌면 무엇인가 찾고 얻는 것보다, 잃고 버리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시인, 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김용재-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한성기에게 있어 인류의 원초적 문명이며, 또한 의식이 필요없는 종교이다.
- 송재영, 「질서와 조화의 시학」-
그는 시를 통해서 자기 자신과 이웃(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시인으로서의 투철한 책무와 소명의식을 가지고 자연 속에 밀착된 전원생활로 일관하면서 부단히 전통적 신서정을 구축·창조하고자 구도자로서, 고행자로서, 예언자로서의 직능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분투한 고뇌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진석, 『한성기의 불행한 생애와 고뇌의 시세계』-
의연한 선비 소설가 권선근 (權善根) (1926~1989)
권선근은 대전지역 소설문학의 선구적 인물이다. 그는 이 지방에서 최초로 문단에 등단한 작가로, 대전에서 평생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1954년 《문예》지 4월호에 「요지경」이라는 작품으로 신인작품 추천을 마친 권선근은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충남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협 충남지부 회장과 예총 충남지회 회장을 맡는 등 향토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소시민의 애환을 그리거나 불신으로 가득찬 사회의 실상을 묘파하는데 있었다. 그는 「꿈」(호서문학1집, 1952.8), 「해방기」(현대문학, 1955.11-12), 「파편습기」(호서문단1집, 1956.3), 「자식」(현대문학, 1960.11) 등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타의에 의해 대학에서 면직된 후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살다가 작고하였다. 권선근은 1962년 결성된 예총 충남지부를 이끌며 지역 문화예술의 발전에 앞장 선 선구적인 소설가이기도 했으나,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제시하지 못한 채 문학적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운명을 달리하였다. 사후, 그의 문학비는 둔산의 샘머리 공원에 건립되었다.
소설가 권선근 선생 생각
그만하면 되었지
남들은 60도 못 사는데
그보다 훨씬 넘게 사셨는데
탄방동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은 모두 내버렸지만
아들 딸 육남매는
나란히 통곡하는데
그만하면 되었지
그래도 이 고장에선
의젓한 선비로
한평생 꼿꼿하게 양반답게
허리 굽히지 않고 지내지 않았던가
축축한 장마철
초상집 마당엔
외로운 조화가 젖어 있고
옛날의 정리로 모여든 조객
그만하면 되었지
억울한 시대
억울한 사람들 때문에
휩쓸려 쓰러진 당신
눈물이 왈칵 쏟아져
소주잔 들이키고
나도 의젓하게
진흙을 밟고 골목을 나섰지만
그만하면 되었지
하다가
그럴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없어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그대의 의젓한 오만 때문일까.
- 시인 최원규 -
한국의 50년대 대표작가 최상규 (崔翔圭) (1934~1994)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서로 애인이다. 그들은 처음에 서로의 이름 밑에 ‘씨’자를 받쳐 불렀다. 그러나 점차 그게 불필요해졌다. 그래 그걸 없애 버렸다. 그러면서 얼마 지내고 보니 그 나머지 이름이라는 것들조차 부를 필요가 없게 되고 말았다.
-<제1장> 중에서-
새로운 미의식의 창출은 구체적인 작품이 이루는 예술적 성과에서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며, 이는 넓은 뜻의 실험 정신의 작동에 의존하는 것이다. 산문으로서의 문체 변혁이랄까, 실험이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