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쏜 화살 / 이훈
향수 / 정지용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부분)
별똥 / 정지용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러,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좋은 시는 대상(이미지)을 보여 주고 독자가 그걸 여러 방향에서 해석해 보도록 이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렵다는 데 있다. 시인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으므로 괴롭다고 그 수고를 마다할 수는 없다. 그러자고 불면의 밤도 있을 것이다.
정지용 시는 짧은 동시지만 많은 얘기가 가능하다. 어른이 읽어도 된다. 마음의 움직임을 풍경화가 하듯이 보여 줘서 그렇다. 이런 방식의 시에서는 해석은 자연스럽게 독자의 몫이 된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 저 시는 상실과 회한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것저것 하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린 시절의 꿈을 다 잃어버리고 현실 원리에 그럭저럭 맞춰 살아왔다는 느낌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내 삶이 이상을 유예한 대가로 겨우 얻은 것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깊은 슬픔을 불러온다. 반대로, 자족의 노래로도 불릴 수 있다. 쓸데없는 데 눈 안 돌리고 살아서 이만큼 됐다는 느낌도 소중하고 따라서 존중받아야 하리라.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순진무구를 기리는 노래로 해석하는 것도 그럴듯하다. 천문학자는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참고로, 정지용의 절창 「향수」의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옯기고”에서 ‘발을 옮기’는 것이 바로 이 별똥별이다. 그러고 보면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에 나오는 ‘마음’도 날이 밝으면 별똥을 찾으러 가 보리라고 벼르는 것과 이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날마다 바뀌곤 하던 어린 시절의 꿈과 아울러 이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되어 지나간 시절을 안타깝게 되돌아보는 마음을 이렇게 손에 쥐여 주듯이 표현하는 방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훈, <좋은 시, 나쁜 시>, https://cafe.daum.net/ihun/jIQm/64
전에 쓴 글인데 정지용의 시를 다룬 곳만 떼어 내고 옮겼다. 우리 교육 현실을 어린 시절의 “함부로 쏜 화살”과 연결해서 몇 마디 하고 싶어서다.
<향수>는 1927년에 발표됐지만 저 연은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 어린 시절의 풍경화이기도 하다. 서울 같은 곳에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시골에서는 하루 종일 뛰어노는 게 일이자 공부였다. 활도 만들어 화살을 하늘에 쏘아 대고 소나무 가지를 잘라서 칼을 만들어 동네 친구들끼리 편을 짜서 칼싸움도 벌였다. 그렇게 즐겁게 놀았던 데다 아이는 무조건 놀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도 요즘 아이가 활과 칼을 들고 다니면 기겁할 것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이 “함부로 쏜 화살”이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우러르며 꾸는 꿈이 시시각각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밤마다 다른 꿈을 꾸듯이 하루는 운동선수나 가수였다 다음 날 점심에 맛난 음식을 먹고는 요리사, 그날 오후에는 재밌는 책을 읽고 학자가 되겠다는 식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그런데 내 바람과는 정반대로 초등학생이 의대나 법대 들어가려고 학원에 다닌다는 걸 심심찮게 듣게 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함부로”와, 뚜렷하게 목표를 세우고 거기로 매진하는 마음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아이에게 공부는 뭘까?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지겨운 일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런데 이런 일과 달리 놀이는 외부적인 목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자체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부모에게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판다고 욕도 얻어먹었다. 왜 그랬을까? 즐거워서다. 마음껏 뛰놀면서 몸도 튼튼하게 만들고 친구는 물론이고 자연과 친밀한 관계도 맺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자발적인 선택의 고민 없이 부모의 권유('강요'가 현실과 어울릴 듯싶다)나 우리 사회의 깊은 병인 획일화된 가치관에 따라 의사나 변호사로 굳어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나이게 걸맞게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목표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 아닐까? 이웃을 배려하고 약한 이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선택지로 떠올라야 되지 않을까?
의대 정원이 늘어난다니까 화살 한 개만 고이 간직하고 열심히 학원으로 가는 아이가 더 생길까 봐 한숨이 나온다. 놀이하듯이 즐겁게 공부하고 책을 읽는, 다시 말하면 공부와 책을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만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