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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2) - 야고보 / 행 12:1-3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동행하시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야고보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사역과 본질을 잘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기채 목사가 쓴 ‘예수가 선택한 열두제자 이야기’에서 야고보를 첫 장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최초의 순교자 야고보 : 성서에 기록된 제자의 죽음은, 가룟 유다와 야고보의 것뿐입니다. 제자 가운데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가룟 유다로 자살하여 죽었고, 그의 빈자리는 맛디아가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순교한 제자는 야고보인데, 그가 죽은 뒤 그 자리는 채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순교함으로써, 자기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팀 라헤이가 쓴 ‘성령과 기질’이라는 책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기질도 변화될 수 있는가?” 대답은 ‘NO’입니다. 우리가 흔히 분류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질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어서, 유독 어떤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체험한다고, 우리의 이러한 기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장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단점을 보완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의 기질을 다루어 가시기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모든 제자가 그렇지만, 야고보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셨을까요? 예수님은 혼자 사역하시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뜻을 펼쳐갈 동지가 필요하셨습니다. 동지란 아는 사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동지란 가까운 사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동지란 목적과 뜻을 같이 하는 사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는 예수님이 동지로 선택된 자들입니다. 당연히 제자로 부르시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막 3: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먼저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여야 했습니다. 공동번역성서는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처음 본 사람들을, 첫인상 좋다고 부르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음 본 얼굴에, 관상이 좋다고 부르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두셨다는 말은, 그 동안 쭉 지켜봐왔다는 말입니다. 평생을 자신과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양들을 맡아서 먹여야 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사숙고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깊은 고민과 철야기도 후에 부르셨습니다. 눅 6:12-13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실제로 얼마나 고민하셨겠습니까? 부르신 후 맘에 안 든다고 중간에 버릴 수 없습니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중간에 탈락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한 번 부르신 사람은, 끝까지 데리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밤을 새워 기도하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세 가지를 염두에 두셨습니다. 막 3:14-15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먼저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보내서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당시 제자들은 물론이고, 오늘날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 역시 감당해야할 사역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교인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단순히 교인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살아내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열둘을 세우셨습니다. 그 명단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지난주일 베드로에 이어서, 오늘은 두 번째 제자인 야고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핵심 3인방에 속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인데, 예수님은 이들을 유독 편애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세 팀으로 운영하셨습니다. 세 팀을 나누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과 가까움의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가 있는 A팀이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고, 그 다음은 빌립이 있는 B팀, 그 다음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는 C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한과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A팀 B팀 C팀 어느 팀이냐 하고 가릴 것 없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A팀, 그것도 최측근 세 손가락 안에 들었습니다. 그는 핵심 제자 3인방으로서, 예수님의 특별한 초대를 받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난 딸을 살리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돕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의 현장에, 야고보가 초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이 세 제자를 유독 챙기셨습니다. 시샘할 법도 하건만, 대놓고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 세 사람이 남다른 헌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시샘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곳에 남아 있던 아홉 명의 제자가, 애 아버지한테 “예수님이 출타하셨는데, 어떻게 오실 때까지 기다리실래요? 아니면 갔다가 다시 오실래요?”라고 안내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안내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무작정 기다리느니, 우리가 한 번 해보자’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께 인정받을 기회로 여겼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그 애 아버지가 아홉 명의 제자를 향해, “당신들도 할 수 있지 않느냐? 당신들이 해보면 안 되겠냐?”고 권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홉 명의 제자는, 귀신들린 아이를 붙들고 씨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눅 9:40절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어린 아이를 자기 앞에 세우시고는,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눅 9:48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막 10장에 보면, 하루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미리 자리 청탁을 했습니다. 10:35-37절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워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마 20장에 의하면, 어머니를 앞세워 부탁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하시며 물었습니다. 20: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뭔가를 보장받고 싶은 조급함에 쉽게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23절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 장면을 열 제자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이때 열 제자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성경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막 10:41절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님이 열 제자를 달래시느라 식겁하셨을 것입니다. 야고보 형제는 예수님을 아주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당시 야고보란 이름은 흔했고, 열두 제자 중에도 다른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바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달리 ‘작은 야고보, 소 야고보’라고도 불렀습니다. 야고보란 이름의 뜻은 ‘발뒤축을 잡음’입니다. 눈치 챘겠지만, 야고보는 야곱의 헬라어 음역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세베대인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주심’입니다. 세베대는 자기 아들이, 야곱처럼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의 동생인 요한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 1장에 보면, 요한이 안드레와 함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안드레가 자기 형인 베드로를 인도했듯이, 요한 역시 형인 야고보에게 예수님 얘기를 종종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막 1:16-20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과,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같은 어부지만, 배 한 척인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와는 달리,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집안에 품꾼들을 둘 정도였습니다. 배 몇 척을 소유할 정도로, 비교적 집 안이 부유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그의 집안은 대제사장과도 알고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요 18:15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여기서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은, 야고보 동생인 요한을 가리킵니다. 요한이 사적으로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테니, 그의 아버지 세베대를 통해 아는 사이일 것입니다. 당시 대제사장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야고보 집안은 아버지 쪽으로 꽤나 영향력 있는 집안으로 보입니다. 야고보 집안이 그렇다는 말은, 베드로 형제에 비해, 야고보 형제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불리한 입장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많이 가진 게 문제될 게 없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많이 버려야 하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자신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빈손이어야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양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게 내가 예수님을 붙잡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게 나한테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손에 뭐가 들려 있습니까?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혹시 예배 시간까지도, 그거 붙들고 있다가, 정작 받아야 할 은혜를 놓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거 없이는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말입니다.
야고보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한 성질 했지만, 야고보도 성질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야고보 형제에게, 이런 별명을 지어주셨을까요. 막 3:17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 그들에게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이신 이유가 궁금하기는 합니다. 크고 당당한 음성 때문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렬한 기질 때문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을 종합해서 정리하면, 목소리가 천둥소리 같고, 성미는 불같았다는 말입니다. 이동원 목사는 ‘복음으로 세상을 변혁한 열두사도 이야기’라는 책에서, 야고보를 가리켜 열정적인 사도 야고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가 열정적인 사도라고 한 것은 좋게 말한 것이고, 그가 흥분도 잘하고, 거기다 목소리까지 컸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의 성격을 알게 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눅 9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좀 멀더라도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빙~ 둘러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고자, 먼저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눅 9: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보통사람이 누군가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과, 무술 유단자가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다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너 죽어!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때,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말로 끝나지만,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르다는 겁니다. 야고보의 생각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방해하는 사람들,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열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유형인 것 같습니다. 흔히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극단적 보수주의’ 또는 ‘근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흔히 중세시대의 ‘마녀사냥’과 ‘십자군 전쟁’ 같은 일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신앙 이데올로기 전쟁입니다. 인류의 가장 무서운 범죄 중의 하나인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도, 그의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는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열등감과 잔인함을 합리화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 야고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불을 내려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분노하고, 예수님을 위해 말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오해하면 얼마든지, 이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헌신과 사랑 그리고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표현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야고보를 꾸짖고 계십니다. 이쯤 되면 분노조절장애 수준입니다. 그렇게 과격하게 나오는 그들을, 예수님이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눅 9:55절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꾸짖으시고 뒤에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난외주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고대 사본에는, 55절 끝에 다음 말이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
야고보는 열두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순교는,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야고보만 나옵니다. 그것도 사도행전 끄트머리가 아닌, 중간 이전인 12장에 나옵니다. 야고보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순교했음을 말해줍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14년 정도 지날 무렵으로 봅니다. 행 12:1 -3절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그 무렵, 야고보가 눈에 도드라지는 활약을 한 게 아닙니다. 베드로나 요한에 비하면, 사도로서 활약이 그리 돋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헤롯에 의해, 사도로서는 최초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이유를 나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 바로 베드로를 잡아 죽이는 데는, 제법 부담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이인자로 보이는 야고보를 죽이고, 여론의 추이를 살펴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걸 기뻐했습니다. 그러자 요참에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뒀습니다. 이성적인 접근은 아니지만, 그의 성격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불같은 성격이, 그의 순교의 시기를 앞당겼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야고보를 잡자 말자, 바로 처형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형식적으로라도 재판 과정을 거쳤을 텐데, 그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야고보의 성격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때가 그를 순교의 제물로 받으신 하나님의 때였다고 믿습니다.
그는 별명에 나타난 성격처럼, 우레의 아들로 살다 갔습니다. 굵고 짧게 살다 간 것입니다. 가늘게라도 길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산다고 문제 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인 인생이 돼서는 안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못 죽어서 살고, 죽지 못해 사는 인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처럼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면, 오래 사는 것도 복입니다. 행 7장에 보면, 야고보보다 더 빨리 순교한 사람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는 웬만한 사도보다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의 사역을 살펴보면, 사도들에 비해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집사로 안수 받고, 얼마 있지 않아서 순교를 당하고 맙니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전도자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는 큰 파장을 일으키는 순교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순교는 훗날 바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야고보의 순교에 대해,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증언이 있습니다. 그는 목이 베여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 때 그를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시킨 아주 높은 관리가 있었는데, 그 관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사실 자기도 그리스도인이고,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죽어 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광경을 보고, 마음을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자기도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야고보 사도여, 나를 용서하시오. 내가 당신을 팔았소. 그러나 나도 그리스도인이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함께 목 베임을 당하게 되는데, 죽기 직전 야고보가 그 관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형제여, 주님이 당신의 마음에 평화를 주시기를. 그대는 나의 형제요!” 그러면서 서로 얼싸안고,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 후, 나란히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동전 가운데, 쟁기를 메고 제단을 바라보는 황소 한 마리가 새겨진 동전이 있습니다. 그 동전 아래에 라틴어로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를 갖춰라.” 황소는 쟁기를 메고 충성스럽게 일하다가, 어느 순간 제단에 바쳐져서 희생의 제물이 됩니다. 야고보가 그랬던 것입니다. ‘쟁기를 메고 제단을 바라보는 황소 한 마리’ 왠지 아련한 마음이 듭니다. 성경에 나오는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가 오버랩이 되기도 합니다. 그게 우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야고보는 예수의 핵심 제자였습니다. 측근 중의 측근이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삼총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독자적인 사역은, 성경에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이, 매우 특이하게 보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지중해 연안에 가서 전도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직후, 그의 제자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몰래 빼내 스페인으로 옮겼습니다. 그의 유해는 ‘별빛 들판의 성 야고보’라는 뜻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안장되었고, 그 장소는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북부 해안가를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르는 코스를 ‘산티아고 순레길’이라고 하며,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순례자 코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산티아고’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란 뜻입니다. 야고보의 스페인어식 발음인 티아고(Tiago)에, 성(거룩, 聖)을 뜻하는 산(San)을 붙인 게 ‘산티아고’입니다. 스페인어권 남자 이름으로 흔한 디에고 역시 같은 야고보를 뜻합니다. 그러고 보니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마라도나의 풀네임이 디에고 마라도나입니다. 마라도나의 이름이 야고보라고 생각하니 더 친숙해집니다. 현재 김하성 선수가 뛰고 있는 메이저리그 팀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인데, 샌디에이고도 산티아고의 영어식 발음입니다.
야고보는 독자적인 사역보다, 주로 요한과 함께 사역했습니다. ‘열두제자 이야기’에서 이진경은, 두 사람을 묶어서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마지막 이별’이란 파트에서, “형제는 용감했다”며 “늘 함께였던 형제”로 묘사했습니다. 두 사람은 형제애만 끈끈했던 것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도 유별나게 끈끈했다고 했습니다. 보통 부모 중 한 사람만 나오는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말할 때는,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도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함께,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나옵니다. 마 27:55-56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세베대는 두 아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어머니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랐습니다. 이 역시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이 죽자 살자 따르는 예수님을, 어머니도 함께 따랐던 것입니다. 마가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의 이름을 살로메라고 했습니다 막 15:40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으니’ 요한은 이모라고 했습니다. 요 19:25절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이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야고보와 요한의 자리를 부탁한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찾아와 어렵게 부탁한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거절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 일로 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골고다까지 함께 했음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괜히 그녀의 두 아들이, 예수님의 핵심 제자가 된 게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야고보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 같이, 우리의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 아직은 덜 익은 사람 야고보가 구했던, 그런 ‘영광’은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했던 많은 것이, 실상은 우리의 영광은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우리도 야고보처럼 순교의 자리에 불림을 받는다면, 그것이 감사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12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것은, 어떤 제자도 완전한 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만들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오늘도 만들어져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면, 우리의 다듬어져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지금 산티아고를 걷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하루하루가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여정인 것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순례길을,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다 완주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잘못된 것과 악한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한 분노가 있게 하옵소서. 공동체를 위한 분노,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로 역사를 바꾸게 하옵소서. 거기에서 생명의 사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훼파되는 것을 아파하는 이들이 많아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계 속에 있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분노할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 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야고보가 육신적 야망을 하늘나라의 야망으로 바꾼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가치관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야고보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끝까지 주님만 바라볼 때, 새로운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신앙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지막 날에 주남 앞에 섰을 때, 야고보처럼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