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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잡스의 1945년 역사저널 그날
이윤석/방송인: (히틀러 사진을 향해) 여러분! 이 사람 누군지 아십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나치 독일이 대부분의 유럽을 점령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때 저쪽 태평양 일대에서 또 다른 야심가가 등장합니다. 잠깐만요, 옷 안에 뭐 넣었나요? 하시죠!
박재민/배우: 동아시아 모든 민족은 일본인의 번영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나치 독일의 동맹국 일본은 태평양 일대를 접수하고 있었습니다. 군국주의의 등에 올라탄 일본은 승승장구했죠. 바로 그날 전까지 말입니다.
긴급속보-미국 일본에 선전포고
프랭클린 D.루즈벨트/미국의 제32대 대통령/1941.12.8: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열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1941년 일본의 美진주만 기습공격),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미의회의원)일동: 박수
박재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일본의 도발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됩니다. 분노한 미국은 곧 반격에 들어갑니다.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였구요. 미군은 일본이 점령 중이던 지역들을 탈환하며 일본군을 밀어냈습니다.--1941.12/진주만공습--1942.6/미드웨이해전--1942.8/과달카날전투--1944.6/사이판 전투--1944.7.괌전투--1944.10/레이테만 전투--1945.4/오키나와 전투.
한편 히틀러의 침공이 시작된지 6년만인 1944년 5월 8일, 유럽에서는 독일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결이 됐습니다. 이제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칼끝은 일본 본토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여러분! 제주도에서 이런 동굴(사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뢰와 포탄을 숨기고 병사들을 대기시켜 미군이 상륙할 경우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위해 만든 동굴진지인데요 (제주동굴진지-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제주 오름과 평원 해안 절벽에 만든 전쟁관련 시설), 오름과 평원, 해안절벽을 마치 개미집 처럼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주는 일본본토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요새였습니다. 일제는 만주에 있는 관동군을 신속하게 제주로 집결기키는데요. 1945년 3월, 3천명이든 일본군의 병력은 그해 8월 7만5천명으로 무려 25배가 늘어납니다.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최정예 육군부대 관동군).
가미키 사토루/제주주둔 관동군: 제주도가 마지막 옥쇄(玉碎)의 땅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옥쇄다’
이윤석: 전쟁은 코 앞에 다가온 듯 느껴졌습니다. 당시 하늘의 요새라고 불리면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던 최신식 폭격기 B-29 입니다. 이 B-29가 1945년 하루가 멀다하고 한반도의 상공을 날아다녔습니다. 사람들은 한반도가 언제 불바다가 될지 모른다면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죠.
박재민: 그런데 바로 그날 8월 15일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이윤석: 바로 해방의 그날이 찾아온 겁니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감격~감격~
잠시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해방의 숨은 이야기 대방출!
최원정/KBS 아나운서: 2019년 마지막 날 인사 드립니다. 35년의 일제 강점기를 끝내는 날, 바로 1945년 해방전야 이야기를 저희가 준비해 봤는데요. 그런데 진짜 이게 사실이에요? 제주도가 일본의 최후 격전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
심용환/역사작가: 맞습니다. 일본이 예상을 한 건 45년 가을 정도면 미군이 일본본토를 쳐들어 오겠다 예상해서 45년초부터 대비를 하게되는데 그 대비작전을 결호작전(決號作戰)이라고 불렀는데 저 위에 지도를 보시죠. 결1호(혹가이도) 결2호 결3호(도쿄) 결4호 결5호 결6호(시코쿠) 결7호(제주도), 저런식으로 전국을 7곳의 결호들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중에 끝에 보면 7호가 제주도입니다. 여기 이렇게 만들어둔 것은 미군이 한반도의 제주도를 상륙해서 일본 본토로 들어올 수 있는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입구를 막겠다 라는 입장에서 일곱번째 결호를 만들었습니다.
최원정: 제주도가 아까 마지막 옥쇄라고 그랬는데 옥쇄라는게 천황을 위해서 옥처럼 부서져라 죽어라 이런 얘기인데요. (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라 천황을 위한 깨끗한 죽음), 제주도가 그랬다는 말이죠. 처음듣는 얘기에요.
이윤석: 저기 제주도에 가봤거든요. 진지동굴은 무기를 숨겨둘려고 복잡하게 미로처럼 꼬아서 만들었는데 총길이가 한 1km에 달할 정도로 깁니다.
심용환: 저게 그러면 자연동굴인가요?
이윤석: 아니오, 일부러 사람들이 기계가 아니라 곡갱이 들고 다 손으로 파놓은거예요. 보면 손으로 판 흔적이 다 있어요.
신주백/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지금 이윤석씨가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파는 과정이 해방이 되기전까지도 10대 소년들이 거기서 노동을 할 정도로~ 일본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제주도를 지켜서 이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차원에서 한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잘 질 수 있을까. 일본이 왜 잘 질려고 했느냐를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 천황에게 당신이 전쟁의 최고지도자가 아니냐 당신한테 책임이 있다 라고 연합군이 책임을 물을 까봐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양보를 얻어 낼려고 했던 거고 그것을 연합군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일본 본토로 치면 오키나와고, 한반도로 치면 제주도가 말 그대로 땡처리 장소였던 거죠.
최원정: 땡처리 라는 표현은 굉장히 너무한데?
신주백: 말을 심하게 했을 수도 있는데 사실은 재활용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대상이 제주도 하고 오키나와 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심용환: 제주도를 버리는 걸 통해서 일본을 지키겠다는 거죠.
최원정: 일본이 최후의 버티기 장소로 고른 데가 제주도 인데 당시 세계의 이목은 다 제주도로 집중이 됐을 수 밖에 없겠네요. 이 상황을 세계 전쟁사적 관점에서 풀어주실 분이 군사무기의 전문가 홍희범 편집장이십니다. 플래튠이라는 군사무기 전문잡지를 발행하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이분 누가 아세요? 군사무기에 관심 있으세요?
신주백: 플래튠 영화제목 아녜요?
홍희범/월간 <플래튠>발행인/<1945>역자: 플래튠이 영화 제목이기도 하고 영어로 보병소대라는 뜻입니다.
이윤석: (두손을 위로 치켜 올리면서 PLATOON) 이거 아녜요?
박재민: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즐겨보던 잡지예요. 제가 밀덕이라~밀리터리 덕후~ 제가 플래튠을 초창기부터 저의 집에 수십권 쌓아놓고 봐요. 열혈 구독자입니다.
최원정: 무시무시한 전운이 감도는 제주도, 당시 해방을 앞둔 세계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윤석: 제가 판을 깔아드리겠습니다.
홍희범 편집장의 제2차 세계 대전史
홍희범: 깃발, 네 나라가 흔히 얘기하는 연합국입니다. 그 당시에 중화민국은 공산화가 되기 전이었구요, 영국 대영제국, 소련, 그 다음에 이 당시만 해도 거의 물주인 미국 이렇게 네 나라고, 그 다음에 연합군과 맞서 싸우는 추축국, 이탈리아, 나치 독일, 그리고 일본, 흔히 악의 축이라고 얘기하는 세 나라 해서 이렇게 일곱 나라가 중심이 돼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윤석: 근데 미국하고 소련이 지금 한 팀인 거예요?
홍희범: 네, 한 팀입니다.
이윤석: 그게 미소가 어떻게 한 팀이지?
홍희범: 지금 우리 생각으로는 낯선데 사실 재미있는게 이 당시만 해도 1941년 6월 까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한 사람이 없었어요. 왜냐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거의 일주일전 독일하고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게 서로 침략만 안하겠다고 한게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유럽을 반으로 갈라먹겠다 거의 그 수준으로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41년 6월에 완전히 뒤집힙니다. 왜냐 독일이 동맹을 깨고 소련으로 쳐들어갑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먼저 점령을 하고 그런 다음에 덴마크와 놀웨이를 점령을 하고요. 그 다음에 북서 유럽을 다 점령을 해버립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의 거의 대부분이 독일 땅이 되어 버린 거죠. 그리고 나서 그리스 유고슬라비아까지 점령을 해 버리고요.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이 소련을 점령하기 위해서 파죽지세로 소련 깊숙히 몰고 올라갑니다. 41년 겨울에 모스크바 가까이 이 선까지 옵니다.
박재민: 히틀러가 원래 서유럽을 점령하다가 방향을 틀어가지고 동유럽으로 진출합니다.
홍희범: 방향을 틀었다기 보다는 다 먹고 먹을게 없으니까 동쪽으로 삐져 나간 거죠.
심용환: 1차 세계 대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격전을 벌이면서 프랑스가 버텨 주었는데 2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가 너무 쉽게 망하니까 소위 말해서 유럽 대륙에서는 경쟁자가 없어지니까 내친김에 소련으로 가게 된 거죠.
최원정: 유럽 전선은 이렇게 형성이 됐고 이제 태평양 전쟁에서 전선을 한번 볼까요.
홍희범: 너머 너머 가서 태평양을 갑니다. 12월 7일에 저 멀리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점령은 못했지만 폭격을 합니다 (진주만 공격(1941.12.7)-미군 해군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공격,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쟁에 참전하는 계기가 됨), 미태평양 함대가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치욕을 당합니다. 그리고 나서 곧 바로 일본은 거의 동시에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버마 등 한 마디로 영국과 미국이 동남 아시아에 갖고 있던 식민지들을 일제히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42년 봄까지는 이 영역이 거의 다 점령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대동아 공영권이 형성될 것 처럼 보였죠.
이윤석: 이렇게 정말 어마 어마 하네요. 세계 정복이네요.
박재민: 이 정도 파죽지세였으면 연합군이 사실상 이기기가 힘든 전쟁이라고 느꼈을 것 같애요.
신주백: 초기 양상은 분명히 그랬습니다.
이윤석: 지금 보니까 이런 표현이 그렇지만 분위기 좋아요. 추축국 일본 입장에서는~왜 진주만을 공격 한 거예요?
박재민: 그러니까요, 심지어 거리도 있고~ 일본은 왜 굳이 진주만엘 갔을까요?
홍희범: 그건 지극히 전술적인 판단입니다. 미국 태평양 함대가 그 당시에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전력이었거든요. 바꾸어 말하자면 이게 있는 한은 일본의 동남아 침공이 방해 받기 쉽다. 쉽게 말해서 방해꾼이 저기 있으니까 방해꾼을 먼저 제거하자 지극히 단순한 논리에요.
최원정: 그런데 그게 자충수였잖아요?
홍희범: 그렇죠, 문제는 미국이 그 정도까지 흥분하고 분노한다는 것을 계산을 못한 거고, 그 다음에 미국이 분노하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과소평가한 거죠.
박재민: 일본 입장에서는 일종의 메시지를 던진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오지마! 우리가 이 정도로 타격할 수 있으니까 거기서 가만히 있어! 라는 메시지를 던진 게~
홍희범: 틀린 말이 아닌게 일본은 전쟁 내내 마인드가 내가 너의 뺨을 호되게 한번 때리면 제가 울면서 그만 싸우자고 그러겠지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그런 생각이었어요.
이윤석: 그런데 때렸는데 상대가 헐크야~
최원정: 잘못 건드린 거죠.
신주백: 일본이 예상을 못한게 두가지 였는데, 하와이에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의 일부 항모와 함정이 우연치 않게 진주만에 있지를 않았어요. 중요한 것 두번째는 일본이 오판을 한게 미국이 이렇게 회복력이 빠를 줄을 몰랐어요.
최원정: 여기까지 들으니까 그래도 속속 상황이 이해가 돼죠. 중요한 건 우리 얘기를 해봐야 돼죠. 해방 6개월 전후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홍희범: 이제 45년 초가 됩니다 (해방 6개월전 1945년 2월), 이렇게 되면 나치 독일의 점령지가 다 사라집니다. 다 사라지고~ 사실상 남은 데가 독일 본토의 극히 일부만 남습니다.
신주백: 전선 자체가 독일 안으로 싹 좁혀져요.
홍희범: 그리고 이렇게 전쟁이 거의 끝나가게 쯤 되니까 연합국가의 최고 핵심 수뇌부 3명, 루즈벨트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그 다음에 소련의 스탈린, 이 세 명이 소련의 휴양지 얄타에서 만나서 전후 처리문제를 놓고 회담을 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이게 얄타회담,
최원정: 얄타회담의 주인공들을 이렇게 모형으로 만들었어요. 이 세 명의 巨頭를~ 그런데 이 루즈벨트 모형이 신주백 교수님 하고 닮았어요.
신주백: 영광이긴 하지만~
최원정: 영국, 미국에서 날아와야 하는 상황인데 왜 하필 얄타 였을까요?
홍희범: 스탈린이 사실 암살을 두려워한 사람이라~웬만하면 비행기를 안탈려고 했어요. 재임기간 중에 딱 한번 탔습니다. 전쟁 중에 카이로 회담에 오느라~
박재민: 제가 예전에 야사에서 들은건데~ 비행기는 테러 위험도 있지만 스탈린이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기차를 탔다 라고~
홍희범: 그런 이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역시 암살위험입니다.
심용환: 그래서 어쨌건 얄타에 모입니다 (얄타회담(1945.2.4~2.11)-독일의 항복과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영-소 정상회담),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회담이 진행이 되는데요. 지금 요렇게 보면 3 거두 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 소련, 그리고 미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들러리입니다. 이미 늙은 제국이 된 거죠. 소련이 주도하면서 소련과 미국이 회담을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그런 회담으로 보시면 됩니다.
신주백: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의도했던 바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서 유럽전선을 마무리 하고 소련군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참전시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에서의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시키면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차원에서 소련군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얄타회담에서 미-소공존을 구상하는 거고~ 처음 시작할 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미군이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장면이 나와 있지요. 섬과 섬을 점령하는 과정이다 보니까 워낙 미군의 피해가 커요. 그 조그마한 섬도 그런데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면 일본군의 저항이 있을텐데 미군의 희생을 감당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소련군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얄타에서 미-소의 공존구상을 매우 적극적으로 펼친 사람이 루즈벨트였다.
홍희범: 아래 위로 피해가 덜하니까~
박재민: 한 마디로 적의 적이 아군이 되는 상황이에요. 실재로 이때만 해도 미국과 소련이 얼마나 긴밀한 사이였는지 나타내주는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여기 사진을 보면 방탄모를 쓰고 있는 군인이 미군이고 나머지는 러시아 군인인데 실제로 전쟁에 사용됐던 M1 소총을 설명해주고 있는 모습이에요. 이제 그랬겠죠, Hey! How do you do? 헤이 반가워~ 소비에트 유니온, 하우 두 유 두? 함께 미소가 있잖습니까~
신주백: (사진에 미군과 소련군) 얼굴에 긴장감이 없어요.
이윤석: 무기 보여주고 쏘는 법 알려주고 이거는 적군이 될거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홍희범: 이 사진 찍고 얼마 뒤에 다들 진탕 마셨습니다. 엄청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최원정: 무장해제가 된 상태예요.
박재민: 여기 소련 병사 볼 파인게 보니까 목이 말라네요. 여기 보면 또 사진이 하나 있는데~ 그 당시 미군 병사들의 가장 인기 있었던 주간지 YANK를 같이 보고 있는 사진인데~
심용환: 너무 신났어~
박재민: 러시아 군인이 러시아말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스파시바(감사합니다)
최원정: 얭크(YANK)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 저렇게 남성 세명의 모습이 저런건가요?
홍희범: 얭크 내용 자체는 전황이 어떻고 미국에서 기본적인 내용인데~ (YANK(얭크)-미육군이 발간한 군사잡지)
이윤석: 저는 총보다도 잡지를 돌려보는 것은 정말 잘한 것이다.
박재민: 이게 바로 전우애~
최원정: 저렇게 까지 끈끈했는데~ 한 순간에 또 팍 갈라섰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얘기도 들어봅시다.
홍희범: 이렇게 친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적이 되었냐 그걸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소련이 변했습니다. 변했다기 보다는 본색을 드러낸 거죠. 예를 들자면 폴란드 라든가 동유럽의 처리에 대한 인식차가 크게 드러난 건데~ 폴란드는 본토는 점령을 당했지만 망명정부가 런던에 있고 연합국들은 그때까지 망명정부가 합법정부다 이렇게 인정을 했는데 소련이 이걸 인정을 못하겠다고 나온 겁니다. 왜냐면 망명정부는 전쟁 전부터 폴란드를 통치하던 세력이 만든 정부인데 반소 반공정부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인정을 못하겠다는 것이죠.
심용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서로가 이해관계가 충돌이 되는 거구, 갈등이 심각해집니다. 적이 있을 땐 친구였는데 적이 없어졌으니까
박재민: 이제 빈집이 되니까! 이젠 내가 여기서 지분을 차지하겠다.
신주백: 먼저 들어간 사람이 주인인 거죠. 그런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작지점이 폴란드였다.
최원정: 그러면 냉전의 씨앗이 이때부터 막 뿌려지기 시작했다.
이윤석: 전쟁을 해도 힘들고 전쟁이 마무리가 되도 힘들고~
홍희범: 전쟁은 할 때가 차라리 편한 게~ 싸우는 적이 있으니까 싸우면 되잖아요.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은 그때부터 정치가 시작되는 거예요.
이윤석: 내 꺼 내 꺼 막~
최원정: 또 어떤 요인들이 있었어요?
홍희범: 그 다음에 얄타회담에서 돌아와서 얼마 안되어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쓰러집니다(사망), 4월 12일 두달 정도 쓰러져 있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최원정: 사인이 뭐예요?
홍희범: 뇌출혈 이에요.
신주백: 스트레스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 아니겠느냐
최원정: 급사를 한 거네요, Roosevelt dies suddenly.
이윤석: 세계 대전인데 이걸 마무리 해야 되는데~
최원정: 루즈벨트를 고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홍희범: 대통령이 사망 했으니 부통령인 트루먼이 갑자기 대통령이 됩니다. 취임 82일만에요(해리 트루먼(1884~1972)-미국 제33대 대통령),
심용환: 저희가 알고 있는 항소전쟁의 그 트루먼 맞죠?
홍희범: 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보면 황당한 게 이 사람이 부통령이 된 게 우연이에요. 원래 트루먼이 그때까지 상원의원 이었기는 하지만 딱히 보여준 게 없어요. 사실 잘한 일도 없고 못한 일도 없어요.
심용환: 갑자기 대통령이 되었을 때 진짜 당황했었데요 저렇게 무채색에 결단력이 없고 드러나지 않은 저 사람이~
홍희범: 그런데 예상외로 생각보다는 능력이 있던 사람인 거죠. 그리고 세번째 진짜 어떻게 보면 미국이 꽁꽁 감추어 왔던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원자폭탄입니다. 트루먼 자신은 취임할 때 까지 원자폭탄을 몰랐어요.
최원정: 맨해튼 프로젝트를 몰랐다구요?
홍희범: 취임하자마자 측근들이 와서 중요 말씀드릴 게 있는데 하고 한 게 원자폭탄 브리핑이에요.
최원정: 핵 폭탄급으로 들렸을 것 같애요.
이윤석: 이거야 말로 트루먼 쇼네! 진실을 알게된 거야.
심용환: 그 동안 부통령인데 무시당했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을 거야,
홍희범: 그리고 7월 16일에 원자탄 핵실험이 성공하면서 이게 진짜 쓸만한 무기다 라고 입증이 되는데(1945년 7월 16일), 하필 그 타이밍이 바로 곧 설명드릴 포츠담 회담 도중 이었어요(포츠담 회담(1945.7.17~8.2)-일본의 항복권고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영-소 정상회담),
최원정: 포츠담 회담이란게 일본의 항복을 구체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한 회담이잖아요.
신주백: 포츠담 회담 때 트루먼에게 우리가 네바다 사막에서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라는 연락이 가는 거죠.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면서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생겼구나. 소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 전쟁을 마무리 할 수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거죠. 포츠담 회담 와중에 원폭이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신무기가 있다 이런 뉘앙스를 스탈린에게 전달을 하는 거죠.
이윤석: 그거는 얘기하지 말아야 되는 거 아닌가~
홍희범: 어차피 곧 뉴스에 나올거니까~ 솔직히 스탈린은 그때 트루먼 보다 원자폭탄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고 있었어요.
신주백: 이론상으로는~
홍희범: 왜냐하면 초반부터 소련은 원자폭탄이 개발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스파이를 통해서 구체적인 수준까지 알고 있었어요.
최원정: 대단한 첩보작전들이네~
홍희범: 그런 상황인데 스탈린이 정말 대단한게 끝까지 그게 뭔데 라는 표정을 유지 했어요 (포커페이스),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잘 쓰이기를 빕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요 그리고 뒤돌아서 야, 빨리 진행해! (성공했대),
신주백: 트루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스탈린이 이거 모르겠지, 스탈린은 8월 15일 이후에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 그 이전에 개입하지는 못할 것이다. 스탈린이 나한테 그렇게 말까지 했다 자기 일기에 그렇게 써요. 그러면 우리가 원폭을 터트리면서 이 전쟁을 우리 주도로 마무리 할 수 있겠구나. 아시아-태평양 전선 생각을 하고 1945년 8월 6일날 히로시마에 원폭을 터트립니다.
최원정: 그렇게 첩보가 뛰어난 소련 입장에서도 정확한 원폭 투하 날짜는 몰랐던 건가요?
홍희범: 몰랐죠, 이제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폭이 투하되니까 소련은 정말 다급해 집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참전 하기 전에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을 일찍 하는 겁니다. 그래서 8월 8일에 그 동안 유지해 오던 중립조약을 파기해 버리고 8월 9일 0시부터 파죽지세로 만주로 밀고 들어옵니다.
최원정: 해방 6일 전에 허겁지겁 전쟁에 가담을 한 거에요.
홍희범: 보시면 아시겠지만 8월 9일 0시로 시작해서 정말 며칠만에 만주를 다 석권을 하고 그리고 한반도로 들어와서 8월 말까지 평양에 들어갑니다 (8.12-라진, 8.13-청진, 8.24-함흥, 8.25-평양), 그러니까 불과 2주 정도 기간 동안에 만주 전체와 한반도의 절반을 점령을 해 버리는데~ 이게 어느 정도로 빠른 거냐 하면 6.25 한국전쟁 당시 전쟁을 시작해서 서울이 점령된 게 3일만이었죠. 3.8선에서 서울까지 3일이 걸렸는데 저 사람들은 한반도의 몇 배가 되는 땅을 거의 2주일만에 점령을 한 거예요. 어마 어마하게 치고 내려온 거죠.
최원정: 저기에 관동군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쉽게 올 수 있었던 거지요?
홍희범: 관동군이란 군대 자체가 덩치만 있지 실력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갖고 있던 장비들의 질 자체가 워낙 압도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전차를 예를 들면 일본은 97식 전차를 갖고 있었고, 소련은 T-34 전차를 갖고 있었어요. 간단하게 얘기해서 조금 과장을 보태면 아이와 어른 정도의 실력 차이가 납니다. 97식 전차가 T-34 전차 정면에서 붙으면 뚫기가 힘들어요. 반대로 T-34 전차의 포는 어느 방향에서든 그냥 간단하게 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군의 전차 보유대수가 소련군 보다 훨씬 많았다면 숫자를 믿고 싸울 수 있었는데 10분의 1 정도로, 숫자로 열세였다고 합니다.
이윤석: 상대가 안됐네요.
박재민: 세계 제2차 대전 역사를 보면은 T-34가 가장 중요한 장갑차로 나와요.
신주백: 소련 전차가?
박재민: T-34는 그냥 상징적인 이름처럼 나와요.
홍희범: 소련제 T-34가 몽고 및 기타 국경지역에서 출발해서 만주로 파죽지세로 일본 전차를 밀고 들어옵니다. 일본 전차는 도망갔다기 보다 다 박살이 납니다.
이윤석: 쉽게 말하면 이윤석은 세 명인데 타이슨은 열 명인 거네요. 그러면 싸움이 안되는데~
신주백: 아주 적절한 비유였어요. 8월말이 되면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에 소련군은 진주를 다 완료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미군은 당시에 오키나와가 미군이 진주한 가장 북쪽지역이었어요. 따라서 소련에서 마음만 먹으면, 우리 38선 이남에 내려가서 경성도 차지하고 대전도 차지하고 부산이나 목포도 차지할 수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거에요.
심용환: 일본 본토까지도 들어 갈 수 있었겠는데요.
신주백: 이렇게 되자 미국이 깜짝 놀란겁니다. 이러면 안된다. 8월 10일날 미국이 일본의 항복의사를 공식적으로 전달 받은 날이 8월 10일입니다. 그러자 바로 긴급회의에 들어가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미국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거죠 (딘 러스크-찰스 본스틸 대령-일본 항복 후 미국이 한반도를 어디까지 점령할 지 논의).
박재민/소련: 그러면 내가 소련 입장이면 이렇게 한반도를 다 가져야지~
이윤석/미군: 그러면 안되지~ 미국은 가만 있나~ 그러면 한반도를 다 갖지 말고 공정하게 나누는게~
박재민/소련: 반반으로~ 이 선(38선) 넘어오기 없기 예요. 이북은 다 내 땅이에요.
신주백: 지금 상황하고 비슷하잖아요.
최원정: 실제로도 대충 그읍시다 해가지고 허겁지겁 만든게~
신주백: 8월 11일날 새벽에 미군의 전쟁지도부에 있었던 두 대령이 30분만에 그렇게 그었다 (딘 러스크의 회고-긴박한 상황이라는 압력 하에서, 찰스 본스틸과 나는 사무실의 지도를 보면서 38선을 생각해 냈다),
일동: 30분만에요!
홍희범: 어디다 긋지 어디다 긋지 하다가~
신주백: 지금 나오는 지도가 거의 비슷해요 (일본 본토와 남한을 포함하여 선을 그음), 그래서 제가 생각하고 깜짝 놀란 거에요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눈치작전), (미-소의 분할점령 경계를 표시해 놓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1945.8), 저걸 보면 미국의 입장에서 38선을 경계로 소련이 더 이상 남하하는 걸 저지하면서 38선 이남에서의 자신의 전체 영향력의 확보, 이게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핵심이었다. 최근에 우리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이완범 교수 라는 분이 1945년 7월 25일경 포츠담 회담 와중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나누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2013년 새롭게 밝혀진 사실),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언제부터 나왔냐 1944년초다. 이건 굉장한 뉘앙스의 차이입니다. 30분 순간에 그었다 라고 그러면 이건 군사적이지만 지금 새로운 학설로 이야기 하면 이건 정치적인 목적이 있고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미국한테 물어볼 수 있는 이야기까지 가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 하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주체인 한국인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라는 얘기죠.
심용환: 미국과 소련의 이익을 위해 그은 38선이 30분이 됐든 한 달이 됐든 지금 80년이 흘렀어요. 이게 비극인 거지 뭐예요.
최원정: 우리는 분필 한번 들어본 적도 없네요. 결국 일본은 8월 14일 오후 11시 포츠담 선언을 다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해방을 맞은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이윤석: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에 B-29가 막 날라 다니지요. 소련군은 급하게 내려온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은 불안한 상황이었을 것 같애요.
심용환: 재미있는게 뭐냐면 우리가 많이 놓지는 부분인데 한편에서 아이 이 참에 소련군이 빨리 남쪽까지 내려와서 우리를 해방 시켜달라 이런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는 사람도 꽤 많았다는 것이죠.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었다. 1945년 8월 16일에 소련군이 서울에 왔다 라는 소문이 막 돈 거예요. 사람들이 진짜 왔구나 하고 수천명이 몰려 들어서 환영인파가 몰려들기도 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주백: 당일날에 이런 비슷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자이자 고종의 손자였던 이우 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李鍝(1912~1945)-고종의 손자, 조선의 마지막 황족), 이분이 8월 6일날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때 그때 원폭에 맞아 사망을 해요. 이분의 장례식을 8월 15일 낮 12시에 경성에서 거행할 예정이었던 거죠. 황실의 예법까지 다 갖추어서 장례절차를 준비했는데 8월 15일 아침에 갑자기 장례를 중지합니다 라고 발표를 합니다.
이윤석: 왜 그랬을까요?
신주백: 사실은 중지합니다 라고 발표한 그 순간이 1945년 8월 15일 오전에 서울시 곳곳에 여러 벽보가 부쳐집니다.
금일 正午 중대방송, 1억 국민 必聽!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연합국의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하였다.”---------일본 제124대 천황 히로히토 항복방송(1945.8.15)
최원정: 만일 그 당시에 그 방송을 들었고 해방이라는 것을 감지 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애요? 그건 이루 말할 수 없죠. 가슴이 벅차 올라서~
이윤석: 그 감격이야 야, 사람들이 뛰어나오고 만세 부르고 얼싸안고~ 실화냐 그러면서 뛰쳐나와서~
박재민: 저는 사실 그 내용을 알았어도 이거 만세해도 되나 이거 또 거짓말 하는거 아냐 괜히 만세했다가 잡혀 가든지 총 맞을까봐 오히려 저는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당시 기억들을 화면으로 만나볼까요
---------------당시 사람들 인터뷰-------------
윤장근(79)/당시13세/학생/서울시 마포구 거주: 그때는 라디오를 좀 사는 집이나 가지고 있었죠. 보통 서민층 가정에는 없었어요. 잡음이 나고 해방이라는 단어도 없었고 패망이다 패전했다 우리가 항복했다 이런 말도 한 마디도 안했어요.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짐은 중대한 결심을 하기로 했다 (이런 말만 했어요).
최서면(84)/당시 18세/학생/강원도 원주시 거주: 스님이 내려갔다가 올라오면서 막 두 손을 흔들고 고함을 지르는데 도망을 가라 그러는 신호인지 그것 밖에 생각 할 수 없었죠. 읍에 갔다 온 사람이 저렇게 손을 흔드는가 (했죠). ‘이봐 학생 해방이 되었단 말야 빨리 가게 그때 해방이 뭡니까?’ 했죠.
일동: 아! 아! 이럴 수가~
독립운동가: 밖에 차차 그런 얘기가 나와서 우리나라가 해방된 걸 알고 온 감옥이 떠나가도록 만세를 불렀죠.
최원정: 해방이 뭔지도 몰랐던 분들도 많았어요.
이윤석: 해방이 뭡니까?
심용환: 태어났을 때부터 일제시대에 살았던 어린 아이들은 진짜 그랬을 것 같애요.
박재민: 실제로 1945년 8월 15일은 수요일이었습니다. 수요일은 직장인들에게 어떤 날이죠? 가장 힘든 날이죠. 한반도가 가장 침체되어 있고 오늘도 어떻게 버티나 이러고 있었는데 직장과 일터에 나갔던 사람들은 동태를 살피다가 조용히 집에 돌아와 가지고 그날 저녁부터 일단 퇴근을 하고 그리고 이제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하는 거죠. 아까 낮에 방송들었어? 그 천황 나와 가지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아쇼?
이윤석: (낮은 목소리로) 들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박재민: (낮은 목소리로) 그 옆집은 들었소?
심용환: 일본이 항복했다는 말이오. 말을 해도 못알아들어. 항복 했다! 항복!
이윤석: 소리를 낮추시오
심용환: 참, 왜 그렇게 겁이 많아!
박재민: (낮은 목소리로) 해방이 맞어?
이윤석: (작은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
심용환: 크게! 크게!
신주백: 두 분의 반응은 당연한 거예요. 사실은 그때 당시를 지금 화면에 나와 있는 분들 처럼 회고한 분도 있고 일본군에 소속되어 마포에서 근무하다가 8월 15일 12시 정오경을 지나자 마자 부대에서 아무런 통제를 안킬래 나왔던 분도 계십니다. 그때 회고록에 보면 분위기가 싸~ 했다는 거예요 (<회상> 서태원 회고록 中(1984)- 그날 저녁 위험을 무릎쓰고 일본 군대 속에서 뛰쳐나왔다 (…) 거리는 희미한 전등불만이 군대군대 비추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못하니까 그건 달리 얘기하면 뭐냐하면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은 하나도 다친게 없었어요. 일본의 군, 경찰, 관료조직은 그대로 시스템이 유지되는 거예요. 그러니 해방이 더욱 더 실감이 날리가 없겠지요. 드라마나 신문 같은 데서 보면 천황이 방송을 하자 바로 길거리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면서 뛰쳐 나왔다~
이윤석: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가~
신주백: 그런 이미지잖아요. 8월 15일은 만세함성이 없었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하나 퀴즈를 준비해봤습니다.
퀴즈: 우리가 맞이한 해방의 순간을 많은 사람들은 어떤 감정으로 맞이 했을까 하는데, 아래 ( ) 안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표현되어 있어요. “해방은 ( ) 처럼 왔다” ( )은 무엇일까요?
박재민: 어려운데~?
최원정: 뭐라고 썼어요? 이거 진짜 답을 모르고 푸는 거예요? 하나~둘~ 셋~ 각자 보여주세요. 해방은 (번개) 처럼 왔다, (도둑) 처럼 왔다, (T-1000) 처럼 왔다.
이윤석: (영화 이병헌의 액체 로봇 T-1000에서) 해방이 너무 흐물흐물 왔어~
박재민: 우르릉 쾅~쾅~,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잖아요. 정말로 수요일인데 우르릉 쾅쾅 번개같이 해방이 갑자기~
신주백: 우리 심 선생 하고 이 선생이 도둑이라는 표현을 썼잖아요. 해방은 (도둑) 처럼 왔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운동 인사이었던 함석헌 선생이 해방 당시를 기억하시면서 했던 말이에요.
최원정: 당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해방을 다양하게 표현을 했겠네요. 갑작스럽게 왔다.
신주백: 갑자기, 뜻밖에, 이런 식의 뉘앙스가 들어가는 단어를 다들 썼어요. 그래서 예를 들어서 당시에 사회주의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박헌영 같은 사람도 “아닌 밤중에 찰시루 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았다.”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온 거다. 그래서 갑자기, 뜻밖에, 도둑 처럼 다 이런 뉘앙스로~
박재민: 영화 암살을 보면 그 당시 일본 고위 경찰 간부로 분했던 이정제 베우가 나오는데~ 왜 변절했느냐고 아군이었던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그때 뒷걸음질로 도망치면서 나오는 대사가 유명한데 “해방될 줄 몰랐어!,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자기도 해방될 줄 알았으면 이러지 않았을 거라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가슴 아프고 비겁한 변명이라고 들으면서도 실제로 저렇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꽤 있었을 거라는~
신주백: 친일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심용환: 자기의 모든 기득권이 다 무너진 거잖아요,
신주백: 지금 말씀하신 논리로 해방될 줄 몰랐다는 논리는 사실은 친일파적인 논리입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당시에 독립운동가와 민족운동가들은 우리는 독립할 줄 알았다 하는 신념을 갖고 독립운동을 했던 거죠. 독립운동에 계속 참여했던 거고. 이승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경우는 당시 미국에 계셨잖아요.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국의 이승만입니다.” 라고 해서 전황을 한국으로 20분씩 방송해 주신 역할도 하신 분이 계시고요. (국외 세력의 해방준비: 이승만과 구미위원부-미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재미한인을 독려하고 한국이 독립국가임을 알림),
이승만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1942)-“왜적이 양양자득하여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만 일왕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라는 데서 만주에서 유격투쟁을 하다가 비록 일본군 한테 밀렸지만 하바로프스크에서 준비하고 있던 김일성을 비롯한 만주의 빨치산들이 새조선 조직을 위한 준비로서 조선공작단을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하고요. (국외세력의 해방준비: 항일 유격대-새조선 준비를 위해 조선공작단 위원회 조직), 중국공산당 마오쩌둥이 있는 연안 지역에 무정이라는 분이 조선의용군 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조선의용군-만주를 통해 조선 본토까지 진출하는 무장독립전쟁 준비), 8월 15일 조선의용군은 만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갖고 움직이는 그날, 천황이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한국 광복군의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서안 지역에서 한국 광복군이 국내진공 작전을 준비해서 OSS와 같이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훈련을 하지 않습니까. (국외세력의 해방준비: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 광복군 창설, 미국과 함께 국내진공작전 준비), 이 모든게 다 전쟁의 어느 한 순간 우리가 이 전쟁에 직접 개입을 하고 나중엔 이 전쟁에 기여를 해서 우리 스스로의 독립을 준비해야겠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런 과정에서 건국을 준비하고자 하는 정신적 준비를 하는 거죠. 그 대표적인 게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을 제정한 경우가 그런 것이죠. 다른 것도 아니고 딱 건국강령인 거예요.
최원정: 세계 각지에서 미리 해방을 감지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긴밀하고 은밀하게~
신주백: 이 분들은 독립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이 일본의 항복과 맞물려 있다는 것 까지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거죠.
최원정: 그러니까 해방이 도둑처럼 온게 아니라 날짜가 도둑처럼 온 거예요.
홍희범: 사실 일본 국내에서 조차도 며칠날 할 거냐를 갖고 상당히 논의를 했고 일본 국내에서 천황의 항복방송을 막아야 된다 라고 했고 쿠데타 비슷한 사건도 일어났다고 해요 난리가 났습니다.
심용환: 항상 저는 요 장면만 나오면 너무 속상하고 아쉽고 우리가 잘 아는 백범일지에 나오는 김구 선생의 비통함의 문구가 꼭 떠올라요. 회고록에 보면,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김구<백범일지>中),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이 되었다.” 이제 우리가 연합국의 한 일원으로써 당당하게 밀고 들어가서 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박재민: 며칠 차이잖아요~
심용환: 이게 승전국의 지위로 해방을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게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게 김구 선생이 예견하고 느끼신 것이죠.
신주백: 맞습니다.
이윤석: 사실 많은 분들이 한국의 해방은 미소 연합국이 승리를 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시는데 지금 말씀 듣고 보니까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꽤 노력을 하고 준비를 했다 말에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평가가 너무 야박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홍희범: 사실 서구 열강들이 한국이란 나라는 고사하고 한반도 라는 지명을 전혀 몰랐어요. 지도에서 찍으라고 해도 못찾는 상황인데, 그나마 이 나라가 일본이 점령하기 전에는 독립국가였다 는 사실을 독립운동가들이 끊임없이 목숨을 던지면서 활동을 했고 알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예를 들면, 당시 중국의 장제스 같은 경우도 전쟁이 끝나면 우리나라를 독립시켜야 된다(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제안한 장제스)라고 얘기를 했는데 사실 임시정부의 활약이 없었다면 장제스의 그런 얘기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신주백: 국내 같은 경우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건국동맹이라는 것을 1944년에 만들어요. 그런데단어에 주목해야 돼요. 이 분도 건국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직을 만든 경우예요. 이것을 발판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서 45년 8월 15일 직후에 치안상황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거죠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8.15-9.7)-8.15 해방 직후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준비단계), 지금 저기 화면에 나와 있는 분이 몽양 여운형 선생 이신데 저분의 유명한 일화가 있죠.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에서 마라톤 우승한 다음에 일장기 말소사건을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주도하신 분이에요. 그 정도로 리더쉽이 있고 조선인 사회에서는 신망이 있던 분이어서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총독부 2인자)이 여운형 선생 한테 우리 일본이 곧 항복하면 조선의 치안을 당신이 맡아주십시오 라고 말할 정도로 준비된 지도자였다는 것이죠.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날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 합시다.”
해방 다음날-서대문, 마포 형무소를 찾아간 여운형-독립운동가들을 석방 시키다. (형무소에서 나온 독립운동가들이 만세를) 부르다.
심용환: 사실 이 사건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거죠. 너무 유명한 사진이죠.
박재민: 이 사진은 실제로 제 개인 SNS의 첫번째 사진이에요.
최원정: 박재민 씨는 그걸 왜 올렸어요?
박재민: 광복 70주년, 8월 15일날 저 사진을 제 SNS 첫사진으로 올려서~ 지금도 저게 첫 사진이에요.
이윤석: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잖아요~
박재민: 저게 기쁜 사진 아닙니까 그리고 8월 16일이라는 거죠.
심용환: 이 사진이 8월 16일 아침 9시, 마포형무소 앞에서 주로 독립투사들과 그 일대 시민들이모여서 함께 해방의 기쁨을 나눈 바로 그 사진~
최원정: 거기 시계 같은 게 있어요? 시간은 어떻게 알아요?
심용환: 이 사람들 꼼꼼 하시군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사진에 증언자가 있어요.
이갑상(88)/당시22세/애국지사: 저게 바로 그 사진이요 (2011년 증인으로, 독립운동가 故이갑상 선생은 2017년 별세하셨습니다). 저게 그 사진이고 내가 저기 어디 있다는게 표시되어 있어요. 그 사진 없나~ 사진~ 이갑상(88)/당시 22세/마포형무소 수감중,
제작진: 나오자 마자 얼싸안고 소리 지르고 그랬어요?
이갑상(88세)/당시22세: 허허, 그날 시퍼런 죄수 옷 입고 나오니까 감격 아니에요? 감격이라는 거 알아요? 감격하면 눈물이 먼저 나와요.
신주백: 그래서 사진의 위치는 딱 좋네요.
최원정: 지금 딱 방(故이갑상 애국지사)에 걸어 놓으셨잖아요. 대단합니다. 8월 16일 단 하루에 석방된 정치범이 약1100명에 달한다고 하지요. 이들이 순식간에 고향에 돌아감으로써 해방소식이 하루 만에 마침내 땅끝까지 퍼지게 됩니다.
애국지사: 15일 하루 지나서 16일날 서울에는 만세 소리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크게 들렸습니다.
이병호(86)/당시 20세/애국지사/서대문형무소 수감중: 그때 저녁때 전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아무나 껴안고, 울고, 울더만, 남녀노소 그냥 껴안고 아무나~ 그게 보통 때 같으면 껴안고 왜 그러느냐고 이럴 판인데~ 다 그냥 만세고 좋다 그러고,
이성균(80)/당시 14세/학생/강원도 홍천군거주: 15일에 할아버지들이 평상을 놓고 뭘 그려요. 참 이상한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할아버지 이게 무슨 그림이에요?’ 그러니 할아버지가 ‘이 녀석아 너는 일본 국기만 아느냐 이게 조선의 국기란다.’
------해방 다음날 8월 16일 비로소 터져 나온 만세 함성, 온 나라가 태극기로 물들다.------
이윤석: 여기 보니까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그 분위기의 백 배 천 배 였네요.
최원정: 목이 쉬어라고 불러도~ 더 불러보고 싶었을 꺼 같애요.
이윤석: 한가지 의아한 게 태극기를 해방이 되고 나서 처음 봤다 라고 하네요.
신주백: 지금 저기 화면에 보시면 태극문양을 한번 비교해 보세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강색과 파랑색의 모습하고 일치하는게 거의 없죠. 태극 문양을 머리 속에서 기억해 내서 그리긴 그린 거에요. 건곤감리도 일치하는게 없어요.
박재민: 심지어 태극문양도 반대예요.
최원정: 대충 먼 기억 속에 떠올려서 그린 거예요.
신주백: 기억을 재생한 것 뿐인데 저 장면은 8월 17일날 전라남도 광양군에서 있었던 독립축하만세장면에 나오는 사진을 캡쳐한 건데요 이렇게 많은 태극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죠.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식민지 시대에 태극기를 갖는 것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태극기가 등장할 수 있었냐 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우리가 한번 캐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재민: 아까 혹시 김구 선생님을 비롯해서 광복 이후에 준비하시던 분들이 미리 인쇄를 해 놓던지 그런 게 아닌가요?
신주백: 그런데 일장기에 해법이 있습니다.
최원정: 아~ 뭔지 알겠다. 일장기에다 덧 그리기에 좋은 구도야. 진관사의 태극기도 일장기 위에다 태극기를 그린 거잖아요. 되게 후련했겠다. 그 위에다 그릴 때에~
이윤석: 일장기에 파란색을 삭 그릴 때의 심정이 뿌듯했을 거예요. 일본을 지우면서 그리는 거니까요.
박재민: 그래서 저렇게 많은 태극기들이 나왔는데 가운데에 있는 원의 모양이 너무 일정하니까 그게 다 일장기 이었기 때문이군요.
신주백: 그거 하나만 일정하고 나머지는 다 자기 기억인 거예요.
심용환: 그런 우리가 외국에서 독립운동 하신 분들도 훌륭하지만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들만이 아니라 기억을 유지했던 사람들~ 광에서 보자기를 꺼낸 다음에 기억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태극기를 그려 낼 수 있었던 게 우리 민족혼이 아닌가~ 자랑스러운 민족의 후예라는 걸 생각해 봅니다.
신주백: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일본이 그렇게 황국신민화, 즉 조선인을 일본인화 시키고자 정신구조를 바꿀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그 순간에 태극기가 등장했다.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는 태극기로 상징화된 거다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최원정: 오늘 드디어 해방을 맞이 했어요. 역사저널 그날 1년 동안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다루면서 우리 도대체 언제 해방되느냐고 그랬는데 드디어 지금 만세를 부르고 싶네요.
일동: 만세~ 만세~
최원정: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함께 쭉 해오신 입장에서~
이윤석: 정말 35년을, 우리가 일년에 몰아서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기쁠 땐 너무 기쁘고, 관동지진 얘기 할 때는 너무 슬프고, 같이 울고 웃고 그랬는데~ 결국은 이렇게 해방이 오잖아요. 그리고 조금 있으면 2020년, 해가 바뀌고 그런 거 보면은 결국 역사는 제 갈 길을 가는 거 같애요. 해방도 반드시 오고야 말고~ 내년이란게 반드시 또 오고 이렇게~ 반드시 갈 길을 가니까 우리가 함께 걷기를 잘 걸읍시다.
신주백: 그런데 아쉽게 하나 있습니다. 2020년을 맞이해서 1945년부터 70년이 넘은 현재까지 그어짐을 당한 38선은 현상변경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걸 향해서 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독립은 곧 자주잖아요. 자주가 곧 분단 극복의 지름길이다. 다가오는 100년은 그렇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윤석: 네~ 가거라~38선아!
최원정: 2019년 마지막 날에 인사들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내년에 더욱 더 알찬 방송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49회에서 정리).
① 독일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전격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다. 독일은 일주일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상호 불가침에다 유럽을 반으로 갈라먹자고 동맹도 맺었다. 나치 독일은 이어서 덴마크와 놀웨이를 점령하고, 북서 유럽을 다 점령해버린다. 유럽의 대부분이 독일 땅이 되었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까지 점령해 버렸다. 그런, 독일이 소련과 동맹을 깨고 41년 6월 소련을 침공 파죽지세로 소련으로 쳐들어간다. 41년 겨울에 모스크바 근처까지 갔다. (작년 8월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통합되면 전쟁의 위험이 있어 분리시켰다고 들었다).
②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후 교만해져서, 이번에도 선전포고 없이, 1941년 12월 7일 미하와이 진주만을 야비하게 기습폭격한다. 미태평양 함대가 거의 궤멸, 타격을 입고 치욕을 당한다. 동시에 일본은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버마 등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를 일제히 공격 점령, 42년 봄까지 거의 다 점령하여 대동아 공영권이 형성될 것처럼 보였다(이때 식민지 조선에서 많은 지식인 독립운동가 애국자들이 친일로 돌아선다)
③ 그 당시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였다. 고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일본은 우선 동남아 침공의 위협이 되는 미국의 강력한 태평양 해군력을 제압해야 했다. 단순한 논리다. 결과는,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하와이의 미국 태평양 함대 일부 항모가 진주만에 있지 않았고, 또 미국의 회복력이 빨랐다는 것이다.
④ 1943년 11월(카이로 회담)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가 모여서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한국의 독립보장을 논의하고 결의하였다 (이때 중국 장제스는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의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중국침략의 수괴들을 살해 살상한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⑤ 1945년 2월(얄타회담), 해방 6개월전, 독일은 연합군에 패전하여 점령지가 다 사라지고 본토 일부만 남았다. 전선 자체가 싹 좁혀졌고, 전쟁이 끝나가게 되니까 연합국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수상이 소련 휴양지 얄타에서 만나 전후 처리문제를 놓고 회담, 미국은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유럽전선을 마무리 하고 소련군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참전시켜서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미-소 공존 구상,
⑥ 1945년 7월 17일(포츠담회담), 미-영-소 정상이 독일 포츠담에서 일본의 항복권고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원자폭탄 실험이 막 성공하여 소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 전쟁을 마무리 할 수 있다고 판단. 트루먼은 소련이 8월 15일 이후에 참전할 것으로 판단, 그러나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자 소련은 다급하게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8월 9일 0시부터 전차를 앞세워 2주만에 만주와 한반도로 밀고 들어왔다. 소련은 해방 6일전에 참전하여 8월말에 북한을 점령한 상태,
⑦ 1945년 8월말 미군은 오키나와에 진주한 상태, 미국은 소련의 조기 참전에 깜짝 놀랐다. 8월 10일 미국이 일본의 항복의사를 공식 전달 받은 후 미국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 관리를 고민하기 시작,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대령은 일본 항복 후 미국이 한반도의 어디까지 점령할지 논의. 8월 11일 새벽에 두 대령은 사무실 지도를 보면서 30분만에 한반도에 38선을 그었다.
⑧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한국 광복군이 수년간 미군 OSS와 국내진공 작전을 준비해온 건 허사가 되고 말았다. 한국의 해방은 참으로 예기치 않게 도둑 처럼 왔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회고록에 보면,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이 되었다.” 이제 우리가 연합국의 한 일원으로써 당당하게 밀고 들어가서 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⑨ 해방이 되자 국내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지만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미주에서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남한에는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상륙하여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시 까지 3년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은 한국인 관료들에게 자리를 떠나지 말고 그대로 남아서 근무할 것을 종용하였다. 치안담당 관료들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악질 고등계 경찰들이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