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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속의 기원 / 신 6:4-9, 막 6:45-52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보게 된다. 한가지 사실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역풍을 만나 고생을 하는 광경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고요하게 기도할 장소를 찾아서 육지에 머물러 계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두 사실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엿볼 수가 있다. 하나는 제자들이 안간힘을 써가면서 극복하려고 하는 돌풍, 풍랑, 좌절의 세계로 밤과 어둠의 지배하에서 발버둥치는 현실이다. 이것은 자연의 힘 아래서 생존권을 주장하면서 우선 살고 보자는 아귀다툼의 세계이며, 내 목숨 살기 위해서는 무슨 대가라도 치러나가야겠다는 생존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나라는 나라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생존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IMF, 수해 등 역풍을 만난 배로 비유할 수가 있다. 한국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이 돌풍과 역풍을 이기고 고요한 아침, 바람이 자는 잔잔한 바다 위를 항해하고자 하는 강한 소원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 밀어닥치는 역풍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이런 시련에 부딪치게 될 때, 이 배에 타고 있엇던 제자들, 곧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사고가 전개된다. 그것은 소위 생존권이라는 것으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다른 사람들, 함께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죽더라도 나 혼자만은 살아야겠다는 의식으로서, 남들이 물에 빠져 죽더라도 나 혼자만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가져본다. 무슨 기적이 일어나서, 부서진 뱃조각을 붙잡고 혼자 표류 끝에 어느 무인도에 다다라서 온갖 고생 끝에 혹시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런 가눙성을 순간적으로 가져보기도 한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나와 함께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집념도 가져본다. 풍랑을 만난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이고 경건한 신자들이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순간적으로 능히 할 수 있다.
해방 후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수많은 교역자들이 교인들을 남겨둔 채 이남으로 피신했다. 6‧25때 유엔군이 한국전쟁을 위해 참여하여 이북에까지 진군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될 때인 1‧4후퇴 때에도 교역자들이 먼저 피난길에 오른 일이 있었다. 6‧25때 북한 공산군이 물밀듯 남침하게 되자 서울의 교역자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교인들의 생사여부는 알아보려 하지 않고 먼저 특별열차로 남쪽의 머나먼 거제도, 제주도까지 먼저 피난을 갔고, 거기에서 또 특별 수송선을 타고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로 가버렸던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피난 행위나 생존을 위한 노력을 잘못이라고 꾸짖거나 나무랄 수도 없다. 이 자리에서 우리 서로에게 물어봐도, 그러한 처지에서는 별다른 처신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렇지 앟을 것이다라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문제 삼는 것은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한반도라는 배를 타고 있는데,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거의 예외없이 자신만이 먼저 살고 보겠다는 생존의 의지를 굳혀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 다시 일제의 식민지나난 6‧25 같은 전란을 겪으며 우리의 생존권이 위협 당하는 사태를 원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전쟁이나 환난이 또 다시 터진다면 어찌 될 것인가? 우리는 그때나 다름없이 역시 나 먼저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과거보다도 더 억세고 악착스럽게 이러한 생존경쟁이 빚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쟁이 없는 이 현실상태에서도 우리의 의식 속에 벌써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나 혼자만 잘먹고 잘살겠다는 풍조가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야 어찌됐든, 나와 내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남을 착취해서라도 먼저 배불리 먹으려 하면서도 남의 고통과 슬픔에는 완전히 모른채 하려고 한다. 남이 고생하고 슬퍼하고 고난받는 현실을 거들떠보기는 커녕 걱정하거나 기도를 해주는 일까지도 성가시게 생각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울부짖는 일이 배를 요동시켜 자기들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나무라며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생존권을 말하면서도 무서운 개인주의, 무관심의 독소를 키워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존권이라는 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존권이라는 뜻으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다. 한국이라는 배를 탄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는 같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생존권을 말할 때 비로소 그것이 진정한 생존권의 의미로 만족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존엄성, 국민의 주권이 인정될 때 국민 전체의 생존권을 유지할 수가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교회들이 그동안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없이 내 교회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우리 한국교회의 약점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온 나라를 점거했는데도 임금과 옥새만 피난하면 나라가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강화, 의주로 피난했던 무력한 전통적인 호국사상의 약점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생존권이라는 말을 재규정해야만 한다. 한 사람의 생존권, 한 국민의 생존권은 그 개인이나 국민의 주권이 충분히 인정될 때 비로소 그 생존권이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국민의 주권이 무시된 나라에서 그 국민의 생존권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허황된 일이다. 특권층이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만다든지, 자신들의 안전만을 위해서 도망갈 길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나라에서는 특권층의 생존권은 있을지 모르나 국민 전체의 생존권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즘 인간의 생존권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 인권가지도 무시당하면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있다. 권력(빽)이 있는 사람은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되고, 빽이 없는 사람은 정리해고 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태임이 분명하다. 재벌들은 외국에 호화 별장을 구입해 놓고, 또한 스위스 은행에다가 돈을 몰래 숨겨 놓고, 회사나 나라가 망해도 나는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고된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거리를 배회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굶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자기들만 살아날 궁리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이러한 풍랑과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와는 대조적인 세계가 있다. 그것은 조용하게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풍랑을 맞이하는 세계이다. 예수께서는 돌풍에 말려든 배 안에서 당황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향해서 물위로 걸어가셨다.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령인가 놀라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또 하나의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거센 바람이 부는 바다 위를 걸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자신이 우리의 역사 안에서 움직이시고 할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따른다고 자처한 제자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유령을 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우리의 눈이 왜 이리 어두워졌을까? 왜 하나님의 역사를 늘 말하면서, 이러한 착각을 하는가? 그것은 교회의 안보와 생존권만 생각하고 집착한 제자들이 이 교회를 이끄시고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두지 않고, 교회라는 제도나 기구에, 또 그러한 제도나 기구의 생존권에만 집착할 때 그리스도의 모습은 흐리멍텅해 보이며 유령처럼 보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현장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리스도를 찾기 때문에 제자들과 교회는 크나큰 역사적 착각 속에 헤맨다. 그래서 풍랑 속에서 파선 직전의 배를 향해 걸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국제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면에서 큰 어려움을 맞고 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해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났다. 엘리야의 기도 - 조각구름 -커짐 - 소나기처럼, 이번 비도 그렇다. 기상대도 예측을 못했다. 게릴라성 폭우. 정치는 정치대로 각 정당이 이권만을 생각하여 서로 협조가 안되고, 경제는 경제대로 어려움 속에서 대량해고가 발생하고, 여기에 수해로 인해 나라가 혼란 속에 빠진 형편이다. 이번 수해는 천재보다도 인재라고들 말한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남. 허술한 하천관리,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산사태 등의 자연 파괴 때문에 이번 피해가 컸다. 2년 전에도 이곳에 피해가 있었는데도 이렇게 큰 비가 또 올 것인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풍랑을 가라앉히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다. 우리의 영원한 평화와 모든 백성의 생존과 안정을 가져다 줄 이는 과학기술이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는 주님이 말씀따라 자연을 잘 다스려야지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를 피해야 한다. 복구할 때는 친자연적(생태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민족의 모습이고, 또 이를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의 모습이 바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어야 하며, 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구원해 주시고 평안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목요일 밤 뉴스 중 지역 뉴스에서 아나운서는 우리 전북지방은 이렇게 심한 피해가 지금까지 별로 없는 곳이기에 복받은 땅이러고 말하면서 뉴스를 시작했다. 이번 수해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기도로, 물질로 도움을 줄 자들은 바로 복받은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특별히 오늘은 우리가 남북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이다.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날이다. 이런 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펼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당한 도리이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어려움을 당한 우리 동포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므로 작은 예수가 되어 받은 복을 나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평화통일주일 성찬식
성만찬으로 초대
지금 우리는 민족간에 전쟁이 쉬지 않고 있는 이 역사 속에 구속의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모든 성도들을 이 성만찬 식탁에 초대하시고 흑암에 놓인 우리들을 영생의 신비에 이르게 하십니다.
귀한 이 식탁에 불러주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감사와 영광을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식탁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하나되어 노력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우리 주님의 뜻입니다.
성령임재의 기원
주님, 당신의 빛을 사모하며 그 빛을 담고자 저희가 여기에 모였습니다.
빛을 비추는 일에는 용기가 없었고,
어둠과 싸우기보다는 어둠에 익숙하는데 길들여졌던 저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들을 당신의 빛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도 전에
주의 식탁에 초대하셨던 것처럼, 이제 저희로 하여금 성만찬의 신비를 통하여
하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려 부르신 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자비로 저희를 감싸시어
당신과 한 몸되는 이 신비한 순간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임하여 주옵소서.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이시여,
지금 이곳에 오셔서 저희를 평화통일을 위해 하나로 일으켜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살을 찟기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떡을 뗌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같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떡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상하고 찢긴 내 몸이다. 받으라. 먹으라.’
우리 주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명령대로 주의 떡을 함께 받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떡을 받으시고
우리 위하여 상하신 주님의 살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와 함께 드십시오.
잔을 나눔
우리 주님은 식후에 잔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잔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너희와 나 사이에 맺어진 새언약의 피다. 받으라. 마시라.‘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이 잔을 받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잔을 받으시고 우리 위하여 한방을도 남김없이 흘려주신
주님의 보혈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와 함께 잔을 받으십시오.
감사기도
영원하신 하나님,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저희가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여 주시오니 감사드립니다.
이웃 사랑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헌신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또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민족과 역사 앞에 바쳐진
모든 교회와 성도들과 성직자들의 수난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골고다로 오르며 폭력의 제물로 죽어간 성도들,
이념의 희생물로 죽어간 자매들과 형제들,
특히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당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주님을 저희 몸 속에 모셔드린 저희들로 하여금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세상 속으로 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귀한 살과 피를 주신 것 같이
우리도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섬김으로서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주께서 허락하시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는 저희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998-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