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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문학>(2013년) 제37집에
김현우 회원이
단편소설 "칠불사의 그늘"을
발표하였다.
단편소설
칠불사의 그늘
김현우
간다.
조남칠 선생은 칠불사 아랫마을 범왕리에서 10여 년 전부터 민박집을 하는 늙은이다. 그러니까 칠불사 덕에 먹고사니 칠불사의 그늘 덕을 톡톡히 보는 사람들 중 하나다. 그는 바둑에는 실력과 재주가 있이 화개면 근처에서는 적수가 없다할 만큼 고수로 통했다. 예전 바둑계의 명인이며 국수였던 조 아무개 선생과 비견할 바둑 실력이란 소문은 그게 허명(虛名)이든 뭐든 간에 하동군내에서 바둑을 제법 두노라하는 바둑광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전자가 끊임없이 찾아왔다. 모두들 그를 ‘하동 조 명인’이라 과대포장해서 부르면서…….
“사실 예전 국수 그 양반과 글자도, 그것도 획수 하나 틀릴 뿐이지, ‘칠’짜와 ‘철’짜가 획 하나가 더 있고 없고 차이가 아닝가? 국수 조 9단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기단에서 입신 경지에 드신 영원한 명인이심에 틀림없고! 하동 칠불사 아래 조 선생이야 말로 프로기사는 아니지만 초야에 숨어 지내는 명인임에 틀림없어! 아, 그 수가 신출귀몰이라니까!”
젊어 우리나라 산이란 산, 골짜기란 골짜기는 죄다 답사해 산귀신이란 별호가 붙은 박태산은 근래 조남칠 선생에게서 바둑을 몇 수를 배우면서 입에 침이 마르게 떠들고 다녔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박태산은 미친 듯이 등산을 하던 버릇을 버리고 칠불사 동쪽 한참 올라가는 의신골짜기 안에 만여 평 땅을 사서 집을 짓고 토종벌도 치고 약초도 심고 집은 등산객을 위한 휴게소로 꾸며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등산하는 병이 철따라 도지면 배낭을 둘러메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산장을 아내에게 맡겨 놓고 떠나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돌아오곤 했다.
조남칠 선생은 진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명예퇴직을 했다. 환갑 나이쯤 되니까 젊은 동료들과 지내기가 어색했고 학부형들이 늙은 선생을 기피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그만 퇴직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 바둑을 즐겼고 기원에도 종종 출입을 했지만 자주 대국을 하며 놀러 다녔던 곳은 복덕방이었다. 그가 사는 동네의 복덕방 영감이 바둑을 좋아했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바둑 두기를 좋아했다. 그가 칠불사 아래 민박집을 사게 된 것도 부동산 사무실을 드나든 덕분이었다. 하루는 강 사장이란 부동산업자가 그랬다.
“하동에 괜찮은 물건이 한 건 나왔어요. 조 선생이 명예퇴직을 한다니까 생각이 나서 알려주는 겁니다. 퇴직금 몽땅 털어서 아주 싼 집 사서 민박집 한번 해 보이소, 하동 화개면 범왕리라는 곳인데 집을 짓다가 건축비에 내몰려 부도가 나서 나온 공매물건인데 벌써 유찰을 두어 번 했기 때문에 예정가보다 훨씬 떨어져 있어요,”
강 사장은 법원을 들락거리면서 공매처분 되는 부동산을 주로 취급하는 거래전문가였다. 둘러앉았던 사람들이 대부분 부동산업자들이라 자기들끼리 정보를 주고받고 한참동안 말이 많았다. 그러다가 부동산 사장인 김 영감이 결론을 내리듯 권했다.
“조 선생. 당장 그래하소. 내가 알기론 하동 쌍계사 근처도 좋겠지만 거기서 조금 올라간 골짜기, 거 칠불사 근처도 앞으로 괜찮을 것이요. 그라고 공매가격도 많이 다운되었다니 인수하면 유리할 거요. 요즘 가족 단위로 휴가를 다니는 풍조이니 민박집 재미가 쏠쏠할 거요.”
“허어! 난 불교 신자도 아닌데? 인연이 있다면 몇 해 전 칠불사를 구경하러 갔다가 거기서 점심 공양을 얻어먹은 거뿐인데요?”
“보라모! 부처님이 그리로 인도하시는 거로군! 조 선생이 천상 절밥을 묵을 팔자인가보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 선생이 승낙하는 한 마디가 떨어지자 다들 교직에서 퇴직하는 바둑친구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 정보도 들려주고 자금도 구해 주겠다는 등 신경을 써 주었고 그도 완공단계에 있는 건물을 둘러보고는 강 사장에게,
“내 지금 살고 있는 집도 팔고 퇴직금도 몽땅 털어 넣을 테니 그것 인수해 주소.”
하고 결심을 굳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 선생은 아내와 단 둘이 칠불사 아래 민박집 건물로 이사를 했다. 집은 방이 다섯 개인 2층 몸채 외에 민박 손님을 맞기 위한 단층 건물 3동에 방이 열 개나 있었다.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널찍한 마당과 뜰에 조경도 해야 했고 부속건물들도 짓고 진입로도 포장해야 했다. 은행에 빚을 내기도 했지만 어쨌든 민박집은 개업을 하게 되었고 걱정했던 것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대로 초반에 운영이 잘 되었다.
“철주 스님이 왔는디요?”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박태산과 바둑판을 사이에 놓고 한가하게 지내고 있는데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 주삼이 달려와 알려주고는 핑 달아났다. 주삼은 그 이름자에 ‘술 주’자가 들었는지 술고래였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술에 골아 떨어져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전에는 술을 마셨다하면 사흘이고 닷새고 끝장을 보았다는데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주량을 크게 줄이고 조심을 한다고 다짐하는 소리를 곧잘 하지만 술버릇은 여전했다. 주삼이 뒤를 따라가 듯 7호실 이계수씨와 8호실 황지니 여사가 절에 가려는지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문을 들어서던 건장한 체격의 스님이 유심히 황지니 여사를 바라보며 합장하며 아는 척 했다. 한 달여 이곳에 머물고 있는 그녀는 예불을 드리러 매일 절을 드나들었기에 서로 안면이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잠깐 눈길을 스님께 주었다가 말없이 합장을 하고 지나쳤다. 여자와 같이 나가던 사내는 본척만척 제 갈 길을 휘적휘적 힘없이 걸어갔다. 사내는 말기 폐암 환자로 산청 어디 용하다고 소문난 의원의 치료를 받으러 며칠 전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칠불사 철주 스님은 조 선생과 바둑 친구이다. 오후 좀 한가한 시간이면 불경 공부는 잠시 미루어두고 칠불민박집으로 내려 왔다.
“아이고! 우화등선(羽化登仙) 하싰능가 했지. 통 보이지 않길레……”
앉은 채 엉덩이를 조금 들썩 하며 조 선생이 스님을 맞았다. 박태산은 바둑판에 눈을 내리 꽂은 채 고심하느라 고개를 들지 않았다. 머리통이 보통 사람보다 유난히 큰 스님은 웃으면서,
“우화등선이 뭔교? 우리 같은 땡중이 예전 칠불 그 부처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지요.”
하고 박태산의 등을 툭 치며 앉았다.
“황 보살님 하고 나가는 분이 누구요? 남편인가?”
박태산은 힐끗 스님을 바라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지족선사가 따로 없군 그래. 퉁방울눈에도 황진이 엉덩이가 눈에 확 들어오던 가베? 옛날 송도삼절이라 캤다며? 박연폭포에 화담 서경덕 선생에 기생 황진이. 황진이 그 절색미녀가 30년간 면벽 수도하는 스님이라꼬 소문이 난 지족선사를 찾아가 옷을 홀랑 벗고 유혹을 하니 단번에 넘어 갔다카데. 30년 면벽수도가 미인이 꼬리 한 번 치니까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꼬!”
“허어! 산귀신이 대낮에 나와서…… 누가 이 귀신을 왜 안 잡아가나? 난데없이 지족선사는 왜 들먹이노?”
“그런데 황진이가 화담 선생을 찾아가서 또 옷을 홀라당 벗고 꼬리를 살랑살랑 쳤는데 그 꼴샌님 선비는 글만 읽고 있었데요. 불알을 찬 사내라면 요조숙녀가 아니라 노류장화 기생년을 그냥 둬요? 단방에 조지지!”
박태산의 거침없는 말에 조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태산이! 우리 철주 스님께 지족선사는 뭐고 황진이는 또 뭔가? 그 얘긴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불교를 깔보려는 의도로 양반 선비들이 만들어낸 얘기야. 우리 같은 중생들이야 미녀를 만나면 혹하는 게 당연하지만 도가 높은 스님들이야 말로 오불관언이 아니었겄나?”
하고 사리분별을 가리라고 은근히 다짐 두는 말을 했다. 잠깐 지족선사의 얘기에 우두망찰해 하던 철주 스님은 ‘거 봐라!’ 눈짓하며 무거운 몸을 평상에 내려놓았다.
“난 우리 스님이 황진이 고운 자태에 사십 수년 쌓아올린 공든 탑을 일시에 허무하게 허물고 속인이 될까 걱정이 되어 그러지요. 저 황 여사가 얼마나 예뻐요? 나이가 우리 나이 보다야 적다지만 오십이 넘은 여자치고 어찌 저리 몸이 허리가 호리낭창 날씬하고 피부는 얼마나 고운지. 예전 세수하고 머리만 빗어도 황진이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데 꼭 황 여사가 그렇소.”
“허어! 여기 정신 빠진 사내가 또 하나 있군. 지족선사를 나무라더니! 황진이, 황진이! 요새 그런 유행가가 인기라더군.”
“아닙니다. 조 선생님. 황지니 여사가 보통 여자는 아닐 거요.”
“나도 궁금해서 뒷조사를 해 봤는데 늙은 기생이 틀림없더군. 우리 집 사람과 얘기를 했는데 서울에서 큰 요정을 경영했다더군. 그 요정은 재력가는 물론 정치가, 권력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데. 왕년에. 그러다 최근 얽히고설킨 복잡한 일이 생겨 요정 경영을 후배에게 넘기고 떠나온 거래.”
조 선생의 얘기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지니 여사는 칠불민박집에 정처를 정한 후 한 번도 외출을 하거나 누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완전히 과거와 결별하려고 지리산 토끼봉 골짜기를 찾아 온 듯 누구와도 연락을 하거나 받지도 않았다. 그 흔한 휴대폰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
그녀가 조 선생 민박집에 처음 와서 말하기를 쌍계사 입구 마을의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잤는데 차소리 바람소리 사람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더 골짜기 안으로 올라가보자.’ 하고 용강에서 승용차를 몰고 계원, 모암 마을을 거쳐 신흥 삼거리에서 대성리로 가려다 칠불사란 절 이름에 이끌려 범왕천 내를 따라 구경삼아 올라온 곳이 칠불사 아래 마을 오송이고 가래골이고 범왕마을이라 했다. 그녀는 칠불사 절 구경을 한 다음 민박집을 찾아 왔던 것이었다.
조 선생은 그때 장작을 패는 주삼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박태삼이 자기 소유 산에서 베어낸 나무를 실어 왔기에 그걸 정리하던 참이었다. 주삼은 웃통을 벗어젖히고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잘게 쪼개진 장작을 주워 모아 손수레에 담아 창고로 가져갔다. 겨울철 벽난로에 불을 때면 솔향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는데 그 냄새를 민박하는 도시 사람들이 참 좋아했다. 황지니 여사는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남자 둘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물론 그도 ‘왜 왔느냐?’ 하고 묻지도 않았다. 절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마치 민속촌에 들리 듯 절 아래 마을 남의 살림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휘둘러 구경하고서 저들끼리 희희낙락 떠들다가 사라지곤 하였기 때문에 일일이 대거리를 하지 않고 지냈다. 대문간에 선 도회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여자를 발견했지만 개의치 않고 그들은 장작 쪼개는 일에 열중했다.
“아저씨! 방 있어요?”
한참만에 여인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조 선생은 알은척 하며 손님을 맞아들였다.
“좀 오래 지낼 거예요. 조용한 곳인 듯 하네요.”
“아아! 너무 조용해서 탈이죠. 인간이란 북적거리고 사람끼리 비비적거리며 지내야 살맛이 나는데요? 손님께서 며칠이고 지내보시면 알겠지만 지리산 토끼봉 이 아랫자락이 바람소리 물소리조차 숨죽여 지내는 곳이지요. 혼자 지내기에 딱 좋을 겁니다. 어느 스님이 그랬지요. 오는 이 없고 가는 이 없어도 혼자 논다는 것은 매 순간 존재의 느낌대로 순간을 사는 것, 아무런 대상 없이 혼자 노는 사람은 밤과 낮이 구분이 없고 생과 사도 두려움이 없도다…….”
“…….”
여자는 빙긋 웃기만 했다. 8호실로 안내하니 그녀는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마음에 들어 했다. 방구석에 놓인 다탁과 다기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선 내가 가꾸고 딴 녹차를 손님들이 언제든 드시게 두지요.”
*
황지니 여사와 함께 나가던 이계수 사장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칠불사를 찾았다고 했다. 자동차 부속품을 만드는 조그만 하청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폐암 말기로 수술도 가망 없고 약도 소용없다고 의사 선생이 사형선고를 내리데요.”
하고 힘없는 소리로 한탄을 하면서 산청에 한의사 자격증도 없지만 암을 완치시키는 용한 의원이 있다기에 찾아 온 길에 칠불사 아래에서 마지막 생을 의탁하고자 한다는 소리를 했다.
“오래 살면 반 년이요, 아니면 두어 달이랍니다.”
그를 따라 온 딸이 그랬다. ‘어머니는 사오년 전에 역시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 사장에게는 같이 온 딸과 사위 외에 아들 내외가 있어 2, 3일 후에 찾아오기는 했지만 지근(至近)에서 병구완을 해줄 형편이 아닌 듯 아버지를 민박집 작은 방에 둔 채 돌아가 버렸다. 이계수 사장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아침저녁 산보삼아 칠불사를 찾아갔다. 아마 황 여사와 이 사장 둘이 오가는 길에 만나 안면이 익은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방을 나서면 기다렸다는 듯 황 여사가 방문을 비죽 열고 나오곤 했다.
“잔뼈가 굵기를 공장에서였지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 회사도 그렇고 병도 얻고. 인생살이가 나에게는 어찌나 고된지, 사람들이 휴가니 해외여행이니 떠들며 놀러 다녔지만 죽은 우리 안식구하고 난 죽자고 일만 했지요. 백만 원 모으면 또 이백만 원, 천만 원…… 그거 모으는 재미에 덜미가 잡혀 안 먹고 안 입고 안 놀고 열심히 살았지요. 이제 병들고 보니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가요? 고작 취미였다면 술 좀 먹고 줄담배를 피웠다는 거 있군요.”
아들 내외가 다녀간 그 이튿날, 이 사장이 마당 평상에 나와 앉아서 칠불사 전설을 물었다. 그림자처럼 황 여사도 나와 앉았다. 조 선생은 하동 녹차를 한 잔씩 권하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이것 방마다 비치해 놓았지만 우리 집에서 생산된 작설차입니다. 나와 집사람이 이른 봄에 저 아래 차밭에 가서 직접 찻잎을 따고 관향다원에 가져가 덕는데 거들고 그렇게 해서 만든 겁니다. 맛이야 파는 것 보다야 좀 못할지 몰라도 향기가 참 좋을 겁니다. 참, 폐암이 흡연과 관련이 있다더군요. 나도 전에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이젠 끊었지요. 여긴 공기가 참 좋습니다. 손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지내보니까 살만 하네요. 그런데 저 절 이름이 칠불사던데 무슨 전설이 있다지요?”
“아, 칠불사 전설은 가야 시조인 김수로 임금과 관련되어 있답니다.”
“김수로왕과 관련이 있다니? 그럼 아주 오래된 절이구먼요.”
“맞습니다. 가야 불교는 신라보다 상당히 앞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합디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지 않습디까? 그때 불교도 들어온 거랍니다. 수로 임금님에게 아들이 열 명 있었답니다. 아시겠지만 허황옥 황후가 어머니죠. 서기 42년에 돌배를 타고 범토(梵土)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진해 용원 앞바다에 도착해 수로왕과 결혼을 했다는 얘기는 다들 아실 것이고……. 열 명의 아들들이 태어나고 장성하려면 20여년 이상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이니까 가야 건국 5, 60년쯤 후의 일이라 추정할 수 있지요. 두 살 터울로 잡으면 말입니다. 큰 아들은 수로왕의 후계자가 되고, 둘째 아들은 허황후의 후계자가 되고 그랬을 터인데 늦게 태어난 아들들 4째에서 10째 아들 7명의 왕자는 가야제국의 임금이 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가야산으로 입산했다고 해요. 3째 왕자에 대한 기록은 애매한데 일설에 의하면 신라로 가서 계림의 왕족이 된 김알지라 합니다. 계림의 김알지 전설은 다들 아실 테고……. 칠왕자는 가야산 입산 후에 다시 지리산으로 옮겼다고 해요. 칠왕자가 입산할 때 외삼촌이었던 보옥선사(寶玉禪師) 곧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인도했는데 바로 토끼봉 아래 이곳으로 온 것이지요. 칠왕자는 보옥선사의 도움으로 입산수도를 한 지 3년 만에 ‘생불(生佛)이 되어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갔다(乘雲離去)’ 합니다. 일곱 부처님이 계셨던 곳이란 전설이 전해오기에 칠불사란 이름이 유래되었지요. 다시 말하자면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훨씬 먼저였다는 얘기도 됩니다. 또 가야역사가 김부식이가 신라 중심으로 쓴 <삼국사기>에서 무시당하고 배척되어 한반도 안 같은 시기에 그만 삼국만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가야제국은 부산에서 이곳 하동까지 그 영역이 경상남북도를 아우르고 있을 만큼 대단한 강국, 세력으로 500여년간 존속했던 나라였다는 것도 칠불사가 말해주고 있지요.”
조 선생은 다시 덧붙였다.
“절에 있는 칠불탱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칠왕자가 하루아침에 구름을 타고 부처가 되어 떠났다니, 죽지도 않고 말입니다. 좀 황당한 전설이라 생각이 들겠지만 이 일은 김해김씨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랍니다. 1990년대 초에 부산일보 최성규란 일본주재 기자가 ‘일본 규수 지방은 가야왕국의 분국(分國)’ 이며 ‘일본황실의 조상은 가야왕손이다’란 탐방 기사를 연재했었는데 당시 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나도 그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일본 개국 신화와 관련 있는 얘깁니다. 어떤 일본 학자도 ‘일본의 개국 신화와 육가야의 시조가 구지봉에 강림한 신화와 꼭 같다.’라고 했답니다. 최 기자의 주장에 의하면 칠왕자는 사천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일본 구주(九洲)로 건너간 거랍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걸 ‘하늘에서 천황의 시조가 내려 왔다’고 하는데 바로 일본황조(皇祖)인 천손(天孫; 渡來人)「니니기노미코토」가 칠왕자의 화신이고 강림한 영산(靈山)이 고천수(高千穗 ; 구시후루다케)봉인데 바로 「구시」는 김수로왕의 강림지 구지봉과 똑같이 닮은 지명이란 겁니다.”
칠불사 전설을 듣고 있는 두 사람은 전문 용어를 섞어가며 얘기하는 조 선생의 박학에 찬탄을 보내면서도 생불로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칠왕자가 일본 규슈로 건너가 일본왕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명에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조 선생은 <구주는 가야분국>이란 조그만 책을 꺼내 와서 그들에게 내밀었다.
“이 사장은 심심할 때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제가 한 얘기가 여기 다 있습니다. 여하튼 칠왕자는 이 좁은 경상도, 가야 땅에서 그들의 포부를 펼칠 수가 없었으므로 구주를 가야의 분국으로 신개척하려고 건너갔으리라고 최 기자는 이 책에서 주장을 하는데 참 일리가 있지요. 7왕자의 화신인 니니기노미코토가 고천수봉 곧 구지봉에 강림하여 한국악(韓國岳; 가라구니다케)에 올라 고국을 향하여 참배한 다음 입사(笠沙)에 궁궐을 짓고서 남구주를 통치하였고 그 자손들이 북진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요. 그의 증손자(4세손)가 일본열도의 중부인 나라(奈良)지방 정벌을 시작으로 일본열도 전역을 정벌,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이 사람이 곧 일본 제1대 일본왕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이지요. 또 흥미로운 것은 ‘신무’란 한자 이름이 일본말로는 왕이나 위대한 신을 말하는 ‘가무’인데 바로 김(金)이랍니다. 그러니까 일본왕의 성씨는 바로 김해 김씨란 얘기지요. 재미있지요?”
조 선생이 더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고대 일본인들은 미개상태였으므로 선진 문물을 가지고 위세당당하게 도항(渡航)해 간 가야 선조들을 보고 천손이라 했거나 하늘에서 강림한 신으로 받들어 모셨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일본 구주 여러 곳에 가야, 우리말을 어원으로 한 지명들이 도처에 있고, 칠왕자와 그의 후손들의 능묘가 가야식 무덤이기도 하며, 모두 일본 천황가에서 신성(神城) 성역으로 여기면서 지금도 궁내청이 직접 관리하고 있음도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었다. 또 녹아도(鹿兒島 : 가고시마) 지방에는 칠왕자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七>자가 든 신사가 일곱 곳 있어 칠왕자의 강림을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일본역사의 고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황조 니니기노미코토는 일향(日向 : 히유가)의 고천수봉에 천손으로 강림하여 일향의 오전(吾田 : 아타)촌으로 가서 오전촌을 다스리는 신인 오전진희(吾田津姬: 아타쓰히매)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오전(아타)은 지금의 녹아도(가고시마)지방의 총칭이었다. 이곳에는 가야국의 전신인 구야국(狗耶國)과 같은 이름의 구노국(狗奴國)의 왕도가 있었던 곳이었으니 일찍이 가야 사람들이 건너가 터전을 잡은 곳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 글쎄. 그럴 듯한 얘기입니다만…….”
“칠불사의 아자방도 유명하지만 영지(影池)란 둥근 연못 보셨지요? 바로 김수로왕이 허황후와 함께 출가하여 수도하는 일곱 왕자들을 만나러 김해에서 이곳까지 왔더랍니다. 허황후는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지리산으로 찾아왔다고도 합니다. 부모님이 왔는데도 수도에 정신을 기울이던 아들들이지만 만나기를 어찌 거절했겠어요? 보옥선사가 중간에 가로 막은 거지요. 어느 해인가 허황후가 찾아오니까 보옥선사가 허황후를 못에 데려가서,
‘봐라! 이 못을…… 너의 자식들이 산부치가 되어 성불했다.’ 했더래요,
그래서 허황후가 못을 들여다보니 일곱 명의 아들들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물 위에 비치더랍니다. 그래서 그 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물에 비친 아들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많은 가솔을 거느리고 떠나가며 건너간 일본과 한국의 사이를 흐르는 ‘조선해협’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고, 또 불교적인 뜻으로는 영지는 곧 죽은 자의 영혼이 수면에 반사된다는 거울:경지(鏡池)를 상징하기도 한 답니다. 사실 이곳 범왕리(凡王里)란 지명은 수로왕이 이곳에 오자 칠왕자의 외삼촌 장유화상(보옥선사)이 마중을 나온 것에서 연유되었지요. 범왕은 곧 범토(梵土) 인도의 사람 보옥선사가 왕과 왕후를 맞이해 머물게 한 곳, ‘범왕’이란 유래가 있어요. 예전에는 이곳에 범왕사(梵王寺)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어요. 화개장터로 내려가는 곳, 쌍계사를 지나면 정금리 대비동(大妃洞)이란 곳이 있는데 허황후가 머물렀던 마을이라 전해옵니다. 자주 와 머물면서 그때 대비암을 세웠다고도 전해옵니다.”
이 사장과 황지니 여사는 조 선생의 해박한 이곳과 가야에 얽힌 역사 얘기에 탄복을 하는 눈치를 보이면서 그가 주는 책을 받아 들었다.
“이곳 전설이 그냥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군요. 전 그저 칠불사 안내판에 적힌 그대로 칠왕자가 성불한 곳이거니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요. 선생님 얘기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가야 역사가 뿌리가 깊구나 하고요.”
“벽안당 아자방도 참 우리나라 온돌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기도 하지요. 한번 불을 때서 방구들을 뜨겁게 달구어 놓으면 그 열기가 49일을 간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선조들의 지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황 여사가 그런 얘길 해서 알고 있습니다. 참 보기 드문 기술입니다. 아궁이 봇돌도 그렇지만 구들을 놓으면서 시근담은 어떻게 놓고 불목이나 방고래를 어떻게 만들었기에…… 온도가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참 믿어지지 않습니다. 벽안당에 가서 방을 구경했습니다만.”
황 여사가 끼어들었다.
“전 영지 전설에 가슴 아파요. 김수로왕 내외가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겨우 못에 비친 아들들의 그림자만 보고서 돌아갔다니 말이 돼요? 아무리 성불하려고 도를 닦고 잡스런 일을 멀리 한다고 하지만 부모님이 찾아 왔는데…….”
그러자 철주 스님이 말했다.
“오매불망 그리던 부모님을 왜 만나지 않으려 했을까? 하고 나도 의문이 갑니다만, 아마 깊은 정진을 하려면 수도 중에는 멀리 하는 것이 많지요. 특히 세속의 인연이야말로 득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면벽수도란 거 들어보셨지요? 면벽하고 앉으면 입을 닫고 귀도 닫고 오로지 화두에만 내 정신과 생각을 모으고 집중하거든요.”
“아무리 수도 중이더라도 부모님이 천리 먼 길을 오셨는데……. 그럼 스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저야 땡중으로 아직 세속 인연을 딱 끊지 못하고 이리 내려와 세상 잡인과 바둑을 두며 노닐고 있지만 예전 고승들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듯 초연하게 몰아 경지에 들어 세속을 벗어났지요.”
그때 산귀신 박태산이 한 마디 툭 던졌다.
“황 여사님이야말로 조선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 이름도 닮은 지니이니 서로 비슷하고 풍기는 기품이나 인상이 고급스럽고 고상해 보여 어쩌면 서로 닮지 않았나? 예전의 황진이가 지금 이 세상에 왔다면 마치 황 여사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내 말이 직설적이고 자존심 상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말입니다.”
박태산의 흰소리에 황 여사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정말 닮고 싶은 사람이 바로 황진이였어요. 노류장화 기생이면서도 시와 가무에 뛰어났고 기품(氣稟) 있고 쉽게 꺾이지 않는 절조를 지녔었거든요. 사실 제가 술장사한 거 아시죠? 그러면서도 저는 황진이처럼 살자고 애썼어요. 멋지게 도도하게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위해 즐기면서 살자고요. 하지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만사가 시들해졌어요. ‘돈이 많다고 해서 인생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하더니 이젠 돈도 귀찮고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도 부질없고 더더구나 한 남자 붙들고 아옹다옹 산다는 것도 시들하고 말예요.”
황 여사의 말에 박태산은 더욱 엇지르는 소리를 내뱉었다.
“복에 겨웠네. 못 먹고 못 입고 아등바등 살지를 않았으니 그런 소리를 하죠! 돈 몇 푼 벌자고 어깨 뻘게지도록 짐을 지고 허리가 휘도록 땅을 파고 용광로 앞에서 팥죽 땀을 흘리는 노동자들이 꽉 찬 세상에!”
“허어! 산구신이 오버하네? 세상 사람들이 천층만층 구만 층이란 소릴 못 들었나?”
조 선생이 나서서 손을 저어 박태산의 말을 제지하는데 이 사장이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는 듯 자신의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황 여사님 말도 옳고 박 사장 말도 옳습니다. 그런데 나는 두 분 말씀에 토를 달고 싶은 마음이 통 없습니다. 그건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허어! 이 사장이 웬 흰소리요? 산청에 사는 명의를 만나 치료를 받으면 분명 차도가 있을 터인데?”
“그게 마지막 몸부림 아니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요.”
“아녜요. 정말 소문난 명의라고 합디다. 말기 암 환자들 여러 명을 완치 시켰다던데!”
조 선생이 급히 이 사장의 낙망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장은 힘없는 어투로 가쁜 숨을 쉬며 토로했다.
“내 인생에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데 비극이 있죠.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동물사회에서는 늙은 수컷의 종말은 정말 비장하거나 비참하답니다. 항상 무리를 적으로부터 보호하던 역할을 도맡았던 수컷 사자가 늙어서 사냥할 힘을 잃게 되면 젊은 수컷에게 쫓겨나 외진 곳에 가서 혼자 죽는답니다. 그게 외로운 죽음이지요. 늙은 고양이도 그렇답니다. 대게 수놈들은 죽을 때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죽는다고 합니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어허! 낙담은 아직 이릅니다.”
“사실 건강을 회복한 들 예전의 체력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결국 자식들에게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고 말 걸요.”
이 사장의 체념 섞인 말에 아무도 위로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로가 비참할 지 어떨지 모르지만 또 그의 몸에 실은 중병을 산청의 명의가 살려낼지 어떨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황지니 여사가 한 마디 했다.
“황진이 시조가 생각나요. 임금 집안의 세도가 양반 한 분이 황진이를 만나러 거드름을 피우고 왔다가 퇴짜 맞은 거. 시조 있잖아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사장님도 벽계수처럼 너무 빨리 가시려고 하지 마시고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여기 한량들이랑 저랑 여유 있게 한 판 놀아보시는 게 어떠세요?”
“어어! 황 보살님, 누구 또 말에서 떨어지게 만들려고 그러오?”
황지니 여사의 말에 뚱뚱한 몸을 흔들며 철주 스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이 말은 뭐고 떨어지는 건 또 뭐요?”
박태산이 스님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민박집 주인인 조남칠 선생이 철주 스님을 대신해 설명했다.
“야담집에 나오는 얘기지. 벽계수란 왕실 출신 사내가 송도 삼절 황진이를 품에 안아 보려고 잔꾀를 부렸지. 달밤에 거문고를 타면서 도도하기로 소문난 기생 황진이라도 그에게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넌지시 호기를 부리며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하고 시조 한 수 읊으니까 그 절창, 절색에 놀라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아 사람들에게 우스갯감이 되었다는 얘기지. 그런데 이 사장도 혹시 전주 이씨가 아니요? 황 여사 같은 미인이 쉬어가라 하는데 사장님 먼 일가 벽계수 할배처럼 시치미 뚝 떼고 저승 빨리 가려고해서야…….”
“아이구! 농담도!”
이 사장은 힘없는 표정이었지만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이 사장도 황진이에 대한 시조 한 수를 읊조렸다.
“이거 뭐 앞에 요령 흔드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만 내 팔자가 이러니 저도 시조가 생각나네요. 임제란 선비가 벼슬길에 올라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술 한 잔 올리고 지었다지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워 하노라
이게 인생이란 생각이 듭니다. 조 선생님이나 스님 앞에서 뭐 주름 잡는 얘기지요?”
조 선생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칠불사 절 아래 살면서 나도 반쯤 중이 되었소. 나도 철주 스님 법문을 많이 들어서인지 서당개 삼년에 풍월 읊는다는 속담처럼 수로임금 일곱 왕자들이 부처가 되기까지 수도하기에 좀 힘들었겠소? 그러나 인생의 모든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인생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하고 내 자신에게 묻고 생각했더니 괴로움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오고, 행복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에서 옴을 알게 되었지요. 이 선생이나 황 여사나 잘 알겠지만 부처가 되는 거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 말고 남을 사랑하고 배려한다면…….”
“칠불사 그늘이 십리가 아니라 천리 만리에 뻗었구만. 나무아미타불……. 이 선생, 소승도한 마디 거들겠소. 혼자 있을 때는 자기 마음의 흐름을 살피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것이요. 나도 황진이 시조 한 수 읊조리지요.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 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자, 물처럼 우리도 흘러갑시다.”
“그 시조는 서화담 선생이 돌아가시자 황진이가 조시(弔詩)로 지은 것이지요? 그러니 인생은 물 흘러가는 것처럼 허무한 겁니다. 스님께서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장이 철주 스님의 말에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이 되었다.
*
이 사장은 일주일에 한 번 쯤 산청으로 암을 고친다는 명의에게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차편이 여의치 않으면 조 선생이나 박태산이 그를 태워 다니기도 하고 어떨 때는 황 여사가 지원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 사장과 그녀 사이에 친밀감이랄까? 애정이랄까? 동정심이 아닌 그런 다정한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황지니 여사는 칠불사를 열심히 드나들더니 드디어 공양간 조리사로 봉사하러 다녔다.
이 사장은 조 선생 민박집에 머문 지 두서너 달을 넘기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의 병원으로 떠났다. 이 사장이 떠나자 황지니 여사도 허탈한 표정으로 며칠을 보내더니 그녀도 서울로 떠나갔다. 언젠가 다시 칠불사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
다시 두서너 달이 지난 늦가을, 조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황 여사였다.
“이 사장님이 끝내 돌아 가셨어요. 칠불사에 혼백을 모시고 간답니다. 유언이래요, 칠불사에 위패를 봉안하라고……. 저도 칠불사로 가려고 서울 살림 정리하고 있어요. 정리되는 대로 갈 테니 전에 묵었던 방 꼭 남겨두세요.”
김현우
창녕군 남지읍에서 1939년 태어났다.
1966년 경남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장편소설 <하늘에 기를 올려라> 창작소설집 <욱개명물전> <먼 산 아지랑이> <완벽한 실종> 등이 있으며 동화집 <산메아리> 외 다수가 있다. 한국문협,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며 경남아동문학상, 경남도문화상, 황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첫댓글 재미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손님이 오시니까...읽다가 나갔다가 ㅎㅎㅎ
설거지하러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