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2장 4절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나오는 믿음 이라는 히브리어 אמֶונה(에무나)는 우리가 아는 ”아멘“ 이 에무나의 원형으로서 에무나는 구약성경에 대부분 신실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이 하박국 본인에게 신실함의 부족함을 질책하는 언어로 본인도 이해했다.
이 "에무나”가 신약에서는 신약의 언어인 헬라어로 피스티스(πίστις)라고 쓰였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신실” 대신 “믿음”으로 번역되고 이해되는 것이 훨씬 압도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믿음이라는 단어와 연결된 성경구절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믿음 대신 신실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면 이해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를 들어 보자.
마태복음 21장 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 그대로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니 다 받았다라고 주장하는 교인이 있다면 그는 허풍쟁이든지 아니면 거짓증인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모순점을 살짝 단어 하나만 바꿔 보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신실하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신실하다(πίστις)는 성경의 정확한 의미는 “한결같다”는 뜻이다. 신실한 사람이 헛것을 구하겠는가. 신실한 사람이 무의미한 세상의 것을 구하겠는가? 신실한 사람이 욕망의 것을 구하겠는가? 신실한 사람은 더 신실한 삶을 위해 기도한다. 다시 번역하면 “너희가 신실한 삶을 위해 기도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뜻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신실하고 한결같이 살게 되어 있다. 어제까지 등한시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좆는 자가 된다.
믿음이라는 명사 헬라어는 πίστις 라고 배웠는데 믿음의 동사형은 πιστεύω(피스튜오)이다. 이 단어는 믿음이라는 마음의 행위가 밖으로 열매 맺어서 보이는 행위 즉 “입증하다”라고 번역 한다. 믿음은 믿음 그 자체로 스스로 입증이 된다.
성령의 열매를 기록한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는 성령의 열매 중에 “믿음”이 포함되는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없다. 그런데 여기서 충성이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πιστεύω이다. 어저께 까지는 내 인생을 허망한 상태로 인생을 허공에 흩날려 버렸는데 성령의 선물로 인쳐진 나의 인생은. 드디어 나의 믿음의 행위로 나타나 주위의 온 천하에 낱낱이 입증되어진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믿음의 열매가 충성이라고 표현되었다.
믿음 즉 이제부터는 영혼을 하늘의 것에 신실하게 그리고 한결 같이 하늘에 고정시킴으로, 그 삶의 신실함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은 우리의 믿음을 다 보고 있다. 단지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안 할 뿐이다. 신명철은 정말 존중 받을 만한 참된 장로인가? 가장 알기 쉬운 상대는 가족이요 다음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 동료 교인이다.
" 신 장로는 교회에서는 장로 비스므레 한데 집에서는 이방인과 다름없는 나쁜 남편이요 일터에서는 이방인과 같은" 그저 그런 CEO의 하나일 뿐임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밖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 일상사가가 우리의 믿음을 입증한다.
정로의 계단은 분명하게 말한다.
정로의 계단 150.151(보급판) “변화는 우리 품성과 습관과 직업에 나타난다. 품성은 일시적 선행이나 악행으로 드러날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말과 행실의 경향(傾向)으로 드러난다 . ... 행위의 개선이 없이는 진정한 회개의 증거가 나타났다고 할 수 없다.”
정로의 계단 144(보급판) “어떻게 하나님께 바칠 것인가? 하고 묻는다... 우리가 하는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와 같다. ... 그러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그 생각이 그대들 마음 속에서 자리 잡아 그대들이 원하고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침내 그대들의 기질과 성품은 그리스도의 신 즉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고 애정은 그리스도께 두게 되고 사상은 그리스도와 조화 된다 ”
믿음은 신실과 동일하고 믿음의 나타나는 행위의 결과는 입증이라고 배웠다. 믿음의 행위 즉 즉 동사로서 나타나는 믿음은 행위로 타인에게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가 분명하게 보여진다.
하나 더 흥미로운 주제로 들어가 보자.
믿음의 형용사형은 πιστός(피스토스)이다 이 πιστός는 한국말로 억지로 번역하지면 “믿을 만한” 혹은 "믿음으로"정도로 이해된다. “저 녀석은 믿을 만해” “저 자는 못 믿을 자야”라고 할 때 믿음을 형용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형용사적인 표현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바울의 예를 들어보자.
바울이 2년 동안 가이사랴 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에 ,성경의 관점에서 믿음 없었지만 그 아내가 유대인 드루실라의 영향을 받고 살았던 이방인 총독 벨릭스가.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의 믿음의 행위를 기이하게 바라보다가. 어느 날 믿음이 무엇인지알고 싶어 옥에 갇힌 바울에게이렇게 질문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요체가 무엇인지 즉 믿음을 어떻게 형용하는지 즉 행동양식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설명을 해 보라고 바울에게 요청했다.
이 어려운 과제를 바울은 다음과 믿음(πιστός)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풀었냈다.
사도행전 24장 24-26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πιστός)의 요체를 세 단어로 압축했다. 의와 절제와 심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두 글자를 형용사적으로 풀어 이방인 벨릭스에 설명하기를 “의”와 “절제”와 “심판”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듣은 벨릭스는 “두려워했”(행 24:25 원어 벌벌 떨었다)다. 의가 무엇이기에 절제가 무엇이기에 심판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그는 두려워했을까?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라 칭하신다. 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대상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아름다운 상태를 “의”(義)라고 한다. 지구가 의로운 가? 달은 의로운 가? 사자는 의로운 가? 개미는 의로운 가? 꽃은 어떠한가? 아니 하찮다고 여기는 돌과 흙은 어떠한가? 그리고 공기와 물은 의로운가?
성경에서는 말하는 의는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대상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아름다운 상태를 “의”(δικαιοσύνη)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언급한 전자는 모두 의롭다. 그런데 사람에게 그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갈라다아서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πιστός)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인간은 하나님을 믿으매 즉 하나님께 성실하게 행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믿는 자 즉 신실한 자(믿는자)가 의로운 자란 뜻이다,
다음은 절제(ἐγκράτεια)다. 일반적으로 절제는 다른 열매를 담는 바구니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래서 절제의 성경용어를 우리는 흔히 오해한다. 술 좀 절제해라 하면 술을 먹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덜 먹으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성경의 절제(ἐγκράτεια)는 영어표현으로 ”put aside“ 즉 옆으로 제쳐버림, 끊어버림을 말한다. 칼로 무를 자르듯이 잘라 버리라는 의미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믿음을 가진자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늘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심판은 하늘과의 영원한 절연을 뜻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마태복음 25장에서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셈하심“ 아래 사는 자들이다. 믿는 자들의 행하는 기독교인의 믿음의 행위의 진행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의롭게 되어, 매사에 세상과 구별되는 절제의 생활을 하게 되고 급기야 하나님의 셈하심의 자리에 당당히 동참함이라는 세 가지 사실은 교회에 조금만 다니면 다 아는 공지의 사실이지만, 어이없게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세가지 요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이해가 덜한 이유는 기는 이유는 개인의 믿음의 진행 즉 진전은 의 절제 심판순이 아니라 역순 즉 심판 절제 의의 순으로 신앙화가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간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믿는 자가 절제하고 절제하는 자가 의롭게 되는 순서를 잘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선생님이 갑자기 미리 계획된 기말고사의 계획을 출장관계로 일주일 빠른 날짜로 치른다고 변경하여 학생들에게 고지했다. 이 고지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시험 생은 그날부로 게임을 끊고(ἐγκράτεια) 학생의 본분을 잘 수행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 기말고사를 당겨서 치른다고 했는데 선생의 말을 무시하거나 시험을 경시하는 학생은 여전히 게임을 하고 놀러 다니다가 시험을 망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절제의 생활을 못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무시하고 바른 섬김을 못하는 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셈하심 즉 심판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시작한다. 심판은 무엇인가? 셈하심은 무엇인가?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7)
그 하나님이 결국에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의 삶을 보시고 나의 일상에서의 말함을 들으시고 그 결과로 오는 내 믿음의 행함을 매일매일 셈하심을 안다면 지금으로부터 절제(ἐγκράτεια) 한다면 세상의 염려로부터 절연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실하게 즉 믿음의 관계로 살게 된다.
로마서1장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πίστις)으로 믿음(πιστός)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πιστός)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피스티스πίστις)으로 믿음(피스토스πιστός)에 이르게 하나니”의 정확한 원어적 표현은 표현은 “ἐκ πίστεως ἐις πίστιν” (믿음의 구체적 행위 안에서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가) 믿음의 행위로 나타난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한발짝 더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는 πίστις에서 πιστός로 가야한다.
cf: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πιστός)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다른말로 표현해보자 베드로전서 1장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을 가진자의 결국의 종착지는 신념(信念)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결론 나야 그것이 믿음의 참의미요 가치있는 일이다.
믿음을 명사πίστις 형용사πιστός, 동사πιστεύω 의 세 가지 형태로 해석했다.
명사인 믿음(πίστις)의 “동사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피스튜오 라고 믿음의 행위(πιστεύω)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의 믿음은 형용사(πιστός)적 의미로 이를 굳이 한국말로 쉽게 번역하자면 반응하는 믿음, 고백하는 믿음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미쁘심으로’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정로의 계단 154(보급판) " (진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πίστις)뿐 아니라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πιστεύω) 즉 마음을 바치고 애정을 하나님께 두는 그것이 신앙이다 (그 결과) 신앙은 사랑으로 행하고 심령을 성결하게 한다(πιστό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