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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고을의 지명과 별칭 |
영광고을의 지명은 백제시대 이래로 ‘무시이武尸伊 → 무령武靈→ 영광靈光’ 순으로 개칭改稱을 거듭해 왔고, 때에 따라서는 ‘오성筽城, 정주靜州, 옥당玉堂고을’과 같은 별칭別稱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대歷代 지명과 관련된 이야기는 필자가 지난 번에 ‘우리고장의 고유어固有語 지명 탐구’ 라는 글을 본지本紙에 연재連載하면서 일부 소개한 바 있으나, 그 때는 ‘固有語순우리말’ 라는 주제主題에 제한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에 한자식漢子式 지명이나 ‘筽城, 靜州, 玉堂고을’과 같은 별칭에 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펼치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그 글을 읽은 향우鄕友들의 관심과 반응은 고유어 지명 뿐만 아니라 한자식 지명과 별칭에까지 확대되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별칭의 하나인 ‘玉堂고을’에 대해서는 특별히 다양한 관심과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이번에는 향우들의 관심 표명에 호응하고, 의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응답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고유어 지명, 한자식 지명, 별칭 모두에 대하여 어원語源이나 의미, 명명命名 연유緣由, 관련된 역사적 사실 등을 살펴보자 한다. 지명에도 유전인자遺傳因子가... 우리 고을의 역대 지명들은 역사의 변화에 따라 몇 차례 그 표기表記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유사한 음운音韻과 어원語源 요소要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래의 도해圖解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武尸伊’의 첫 음절音節인 ‘武’ 가 수 백년 후의 지명인 ‘武靈’의 첫 음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武靈’의 뒷 음절인 ‘靈’이 또한 수백년 후의 지명인 ‘靈光’의 첫 음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음운전이轉移
음운전이轉移
武尸伊 → 武靈 → 靈光 약300년 牟支 약200년 1000년이상 약60년 백제 ↔ 당 ↔ 신라 ↔ 고려 ↔ 현대 이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서 ‘지명의 표기는 변해도 그 의미는 생명체에서 처럼 유전遺傳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지명은 물론 모든 사물에 대한 명명은 무의미한 문자나 음운의 조합調合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고유의 특성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승하려는 의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武尸伊’는 ‘물’의 의미를 가진 음운의 표기였을 것이라는 점은 지명이나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異見 없이 정설定說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武’는 ‘무’의 음차音借이고 ‘尸’는 그에 연결되는 ‘ㄹ’음을 표기한 문자라는 것이다. 다만 맨 끝의 ‘伊’에 대해서만은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발음도 되지 않는 어조사語助辭로 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물’이 단음절어單音節語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두음절어였다고 하며 ‘武尸伊’는 ‘무리’ 또는 ‘무지’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필자는 이 후자後者의 입장에 동의한다. 서기 660년 당唐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滅하고 옛 백제 지역을 통치할 때 이 고장의 지명을 ‘모지牟支’라 표기했는데 그 음운이 ‘武尸伊’의 ‘무리/무지’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혹或 당시 당군唐軍에서 백제인들의 ‘武尸伊’ 발음을 자기들 문자로 받아 적은 것이 ‘牟支’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당시 다른 지방의 지명에서도 유사한 표기 사례가 나타나는지 잘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확실한 것은 둘 다 모두 ‘물’을 의미한는 음운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武尸伊’와 유사한 짜임새의 지명 표기 사례는 같은 시대의 이웃 고을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오늘날의 장성 땅은 ‘古尸伊’로 표기되었고, 고창 땅은 ‘호시이號尸伊’로 표기되었다. 같은 시대에 인근 지역의 지명 표기가 이처럼 동일한 짜임새를 보이는 것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 사례이다. 매우 의미 있는 연구 자료라 할 수 없다. ‘武靈’은 신라 경덕왕 때에 붙여진 지명이다. 이 또한 앞에서 거론한 ‘무리/무지’와 자음子音의 배열 순서가 ‘ㅁ→ㄹ’로 같고 모음母音의 흐름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고대의 이두吏讀 표기에서 ‘랑/렁/량/령’ 음을 가진 한자들이 그 훈訓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도랑/두렁/고랑/구렁/진량/무령’과 같이 ‘물길/물흐름’을 나타내는 말의 음절에 음차된 사례가 흔히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보다 ‘武靈’도 ‘물도랑/물고랑’을 의미하는 음운 표기로 보는 것이다. ‘靈光’은 고려 초에 붙여진 지명으로 신라 시대의 ‘武靈’과 ‘령’이라는 음운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靈光’에서는 발음되는 위치가 첫 음절이기 때문에 ‘武靈’에서처럼 ‘물’과 관련된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는 없다. 앞서 ‘武靈’에서의 ‘령’음은 첫 음절이 아니고 끝 음절에서 ‘물길/물흐름’을 의미하는 음운이었던 것이다. 1897년에 발행된 읍지邑誌에는 우리靈光의 경승景勝을 예찬禮讚한 시詩가 몇 편 실려 있는데, 그 중 한 편에서는 ‘靈光’이라는 지명 해설에 도움이 될만한 문구文句가 발견되었다. 편의상 글을 번역하여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문斯文이 동방에 있어 노魯나라가 망하지 않으니 천지天地 간에 우뚝 선 *영광靈光이라 아스라한 해망대海望臺는 군룡群龍을 희롱하고 높다란 수퇴산水退山에는 오봉五鳳이 깃든다. 중 략 *斯文: 유교의 경전 또는 도의 *靈光: 魯나라의 전각 이름 兵火에도 타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는 故事가 전해짐 이는 1768년부터 2년간 군수로 재임한 朴師海박사해가 군청 안에 있는 운금정雲錦亭에서 바라보이는 경승을 읊은 시의 일부이다. 여기에서 작자는 우리 영광을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처럼 유교 도덕이 지켜지는 고을이라 예찬하고 노나라의 전각에 얽힌 고사를 인용하여 ‘靈光’이 불멸하고 나아가서는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참으로 좋은 지명 풀이이기는 하나 시작詩作 시대와 지명 명명 시대인 고려초 사이에는 8~9백년의 시차가 있어서 애초의 명명 연유가 유교의 도덕이나 노나라의 전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지역의 풍속과 기상을 그 취지에 맞추어 가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지역의 ‘얼’이 재창조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옥당玉堂고을’의 풍속은 ... 우리 고장의 별칭으로는‘오성筽城’과 ‘정주靜州’ 그리고 ‘옥당玉堂고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각각 어떤 명명연유를 가졌는지는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다만 筽城, 靜州에 관한 기록이 옛 읍지邑誌 등에 명칭만 거론한 정도로 나와 있을 뿐이다. ‘玉堂고을’에 관한 기록은 그나마도 없다.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까지는 ‘筽城’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고, 靜州에 관해서는 1530년에 간행된 ‘신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서 다만 두 별칭의 명명 시기를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대략 ‘筽城’은 신라 말에 ‘靜州’는 16세기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파악된다. ‘筽城’의 ‘筽’는 버들고리를 뜻한다. 버들고리는 버드나무 줄기를 다듬어 만든, 수납收納 용기이다. ‘筽城’은 글자의 뜻으로 보아 지형?지세에서 연유된 지명으로 볼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이웃 고을 ‘함평’의 별칭인 ‘기산箕山’과 의미 있게 대비된다. 영광의 지형?지세는 ‘버들고리’에 비유되고, 함평은 농가에서 곡식을 선별할 때 쓰는 ‘키’에 비유된 것이다. ‘筽城’이라는 별칭이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예는 두가지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영성정씨靈城丁氏 도열道列’이 신라현안왕憲安王 때 북방의 오랑캐를 토벌한 공으로 ‘筽城君’에 봉封해진 사실이고, 또 하나는 1597년 ‘임진수성동맹’이 군청의 ‘오성관筽城?’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임진수성록’에 기록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筽城’은 분지형 지형에서 연유된 지명이라 볼 수 있고, 자연 재해와 군사적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꾀하고자하는 소망을 담는 듯 하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새로운 과제가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筽山’이 ‘진산鎭山’ 이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진산은 도읍이나 성의 뒷산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와 관계해서 천정리의 산성터 일대를 조사해 보면 도읍지 흔적 등의 묻혔던 역사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靜州’의 의미는 글자의 뜻으로 보아 ‘조용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고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명명연유는 위의 ‘筽城’과 유사할 것으로 본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되어 사용된 예는 거의 찾지 못했지만, 현대에 와서 지역 기업이나 사회단체 명칭에 사용된 예는 오히려 ‘筽城’에서 보다 많이 나타난다. ‘玉堂고을’은 요즘 별칭이라기보다는 애칭 차원에서 지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직 명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명명연유가 산물이 풍부하여 살기좋은 고장이라는 데에 있다는 견해도 있고, 큰 군세를 가졌던 역사에 있다는 견해도 있다. ‘玉堂’의 사전적 의미는 弘文館의 딴 이름이면서, 동시에 홍문관의 부제학, 교리,부교리, 수찬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홍문관원들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까지 알고 보면 ‘옥당’에 대한 개념이 좀 더 명확해 진다. 홍문관은 궁중의 경적勁籍, 문서 등을 관리하고 매일 경연經筵을 통해 왕과 함께 학문과 정치를 논하면서, 또한 왕의 자문에도 응하는 일을 맡아 보던 기관이다. 학문이 높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야 홍문관원에 뽑힐 수 있었다. 권력과 이권은 적어도 존경과 촉망을 많이 받는 관리들로써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 학자이며 정치가인 김종직이 홍문관 출신 영광군수 기찬奇纘을 기리켜 ‘옥당선玉堂仙’이라 일컬었던 詩가 구 읍지에 전하기도 한다. 위에서는 옥당고을과 관련된 자료들을 몇가지 검토해 보았다. 옥당의 의미는 홍문관 또는 그 관원의 높은 학문, 고결한 인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고 ‘옥당고을’이라는 별칭을 얻은 연유는 영광의 어떤 현상이나 영광 사람들의 기상이 옥당의 의미와 어떻게 관련되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한 관련 사실은 구 읍지의 풍속조 風俗條에 기록되어 있다. ‘선비들은 문예文藝를 숭상하고 백성들은 농상에 힘쓰며 아름다운 풍속이 예로부터 이어져왔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玉堂고을’이라는 별칭을 얻은 연유가 군세가 크고, 산물이 풍부한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군민들이 학문과 생업에 근면하며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풍속이 홍문관원에 비유되어 옥당고을 별칭을 얻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정신은 우리의 전통 정신인 선비 정신에 해당된다. 선비정신의 결과로 살기 좋은 고장 풍부한 고장이 것은 당연하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자~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