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31일 토요일
아내
김미순
내 아내는 장사다. 덩치가 커서가 아니다. 하는 일마다 통크고 딱부러지게 마무리한다. 성격도 괄괄하여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막내로 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오빠와 언니가 하나 씩 있다.홀어머니가 19살 때 돌아가시자 대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에 도전. 이듬해 합격했다. 처음에 동사무소에서 근무했는데 그 때 아버지가 계장이었다 25살 때 아버지는 과장이었고 아내는 멀리 강진으로 전근을 갔다. 아버지와 아내가 다시 만난 건 아내가 27살 때였다. 우리 시청에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내와 인연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나에게 소개했다. 그 때 나는인근 산업단지에 있는 대기업에 다녔다.박사과정까지 마쳤으나 돈을 먼저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벌이를 하면 금방 돈이 많이 들어오리라 확신했다.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들어오니 벌이의 삼분의 이는 저축할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생활비는 부모님이 감당할 거니까~ 그래서 아내의 집형편이나 외모는 보지 않고 단번에 결혼했다. 작은 이불장과 화장대, 실반지가 혼수의 전부였다.
나는 유확을 준비하는 동생 영진이와 같이 잤다. 한 달 후면 영진이가 이국으로 가니까 그날을 기다렸다.
아내는 바로 임신을 했다. 순조롭게 출산했다. 작고 예쁜 여자 아이였다. 정말 예뻤다. 희영이! 희영이는 밋밋했던 우리집을 복이 넘쳐나게 했다. 아버지도 퇴근하자마자 희영이부터 안고 어르고 온갖 좋은 말은 다 해주었다. 하루 종일 희영이를 돌본 어머니도 다른 사람은 안거나 손대지 않게 감시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시기와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어머니가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예비단계라는 판정을 받았다. 먹는 것, 운동하는 것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우리 시로 온 지 2년만에 자진해서 해남으로 갔다. 걷기를 조금 할 정도의 희영이를 데리고~
나는 낡고 허름한 관사에 몇 번 갔다. 살림은 성격답게 정갈하고 단정했다. 몇 개 이가 포족뽀족 보이는 희영이, 나도 같이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직장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또 2년이 흘렀다.정부에서 도농산업단지를 조성해서 글로벌 산업을 조성한는 걸 발표했다. 나는 귀가 벌쩍 뛰었다. 사업을 해 보자.
친구들 두 명과 사업 계획서를 내고 선정되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소액의 퇴직금과 아버지의 후원으로 집을 잡혀 착수했다.
그러나 그때 IMF 가 시작되었다. 모종은 없었고 자잘한 영양제,는 엄첨 비쌌다. 쫄당 망했다. 집도 경매에 붙여졌다. 다행히 매형이 살려줬다.아내의 오빠는 우리 시 한복판에서 의료기계를 취급하는 상점을 운영했다 앞으로 건강산업이 대세일 거라 판단하고 점원에서 사장으로 입지전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새로운 젆환점이 생겼다. 같이 사업을 하려했던 친구 두 명과 매일 술로 밤을 새웠다.
그때까지만해도 술은 어른들과 한 잔 정도 마셨는데, 이젠 술고래가 되었다. 내가 술을 끊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가 유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 아이, 술 끊고 다시 일어서야 할 거 아니냐?"
아내는 다시 우리 시로 왔다. 안에 수엥이른 배고 제법 태동을 할 만큼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산억단지의 대기업 하청업체에 일꾼으로 들어갔다. 안 해본 일이라 몹시 어려웠고 금방미라도 때려 치우고 싶엇다.
대기업 공장에서는 삿다운이라고 일년에 두 번 씩 내부 공사를 한다. 천 명 정도의 일꾼이 투여된다. 나도 자연스럽게 투입되었고 2박 3일로 근무할 때도 있었다.
나는 다시 순을 입에 대었다. 집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술을 찾았고 예전보다 양이 많아졌다. 아내가 희영이를 데리고 집에 올 때쯤이면 나는 쿨쿨 자고 있곤 했다. 아내는 아무말 없이 이불을 목까지 올려주었다.
그런데 사고가 있었다. 3층 높이에서 추락했다. 다리가 부러졌다. 정말 놀랐으나 쉬고 싶은 마음에 딱 맞춘 사고 였다. 두 달 동안 나는 순 먹는 데 고수가 되엇다..의사와 간호사가 없는 밤 시간에 매점에서 술을 사서 옥싱으로 간다. 교통사고 당한 사람, 보험금 타려고 가짜 환자가 된 사람, 가족이 들이 멀리 있어 외로운사람. 우리는 한 가족이 되어 밤을 새고 먹었다.
퇴원해서는 아예 집에 술도가를 차렸다. 동네 여러 어르신, 젊은 취준생, 심지어 부랑자까지 불러들여 판을 벌였다.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출산휴직을 하고 병휴직을 삼 개월 내었다. 오빠집에서 거의 육 개월을 지내고 우리집으로 왔다.
아내가 말했다.
"내일 절 따라 오세요. "
아내 앞에서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나는아내의 명령에 따랐다.
술 중독증, 술 의존증 전문병원이었다. 천주교 제단에서 운영하였는데 아주 깔끔하고거룩해 보였다.
아내는한 달을 나와 같이 지냈다. 가족이 함께 지내야 치료 효과가 100프로 달성된다는 신부님의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천주교 신자가되었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는 성호경도 배우고 주님의 기도도 배뭤다. 아내는 감격하여 희영이와 수영이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했다. 물론 자신도 세례를 받았는데 본명은 카타리나였다.
나는 점점 회복이 되었다.전혀 먹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밥 먹으면서 한잔 정도만 먹고 싶었다. 신부님께서는 일거에 싹 끊어 버려야 한다고 아쉽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내가 속을 썪이니 어째 몸이 편했겠는가? 대장암으로 판정 받자마자 삼 개월만에 돌아가셨다. 그 때 유언도 금주였다.
하지만 이번엔 불발이었다. 예전부다 더 말이 먹었다. 미국에서 급히 달려온 영진이가 손에 들려준 금주의 효과적인 알약이 부직용을 일으켰을까,?
더 많이 먹고 더 깊이 잤다.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했다. 나도 세례를 받았다,본명은 비오였다. 그리고다시 병원에 입원, 아내도 함께 갔다. 아이들은 모두 사돈집에서 돏봤다.
그런데 이번엔 같이 입원한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막대먹은 사람들이었다. 미친놈, 개새끼, 쌍놈, 쌍년, 개잡년, 미친년, 잡년~ 매일 싸우고 쥐뜯고 할키고 소리 지르면서 중증 정신병자들의 아지트같았다.
아내는 저러다 사람 버리겠다며 퇴원을 결정했다. 집에서 치료하겠다고 입원하고 일주일만에 집으로 왔다.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교회 관련 책을 읽고 성경을 쓰고 가끔 성딩 소모임에 참석한다. 그렇지만 어찌 술을 끊으랴?
아내가 시청에 가 있을 시간엔 소주 반병정도 먹는다. 서가 밑에 구석진 곳에 꼭꼭 숨겨두고 홀짝홀짝 먹는다.
그런데 우리 시청이 전남에서 청념도 평가에서 일등을 했다. 포상으로 열 명씩 돌아가며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아내는 싱가포르로 간다고 하였다. 멋진 여행지를 보고 행정도 돌아보고 다섯 밤 잔다고 하니 아샤, 내 세상이다 싶었다.
아내뵤다 내가 더 설렜다. 아내는 절대 술은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면서 신풍공항 버스를 타고 떠났다. 나는 버스머리까지 배웅을 히였다.
바로 소줏병을 꺼냈다.. 방문을 활짝 열고 달달한 소주를 한 모금 삼키려는데, 갑자기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잡는다. 고개를 돌리니 아내의 언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