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가 있는 서재12. <다섯 손가락 이야기>
공존
다섯 손가락
프로야구 시즌이 끝나면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열린다. 각 포지션에서 가장 잘 한 선수를 뽑아 말 그대로 황금장갑을 수여하는 것이다. 투수와 포수를 포함해서 외야수까지 전 포지션에 걸쳐 황금장갑을 수여하는 것은 그라운드에 있는 모든 수비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9명의 선수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하고 선수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일 때 경기는 잘 풀리게 되고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야구는 그야말로 9명이 함께 하는 공존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포지션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라운드 안에 서로 다른 포지션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포지션이 존재한다.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들이 존재하며,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아프리카, 아시아 문화들이 존재한다. 지구라는 그라운드에 이러한 여러 포지션들이 조화를 이룰 때 평화와 공존은 가능하다. 자기 종교나 문화만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한 전쟁과 테러는 피할 수 없다. 지구촌이 하나로 연결된 오늘날 공존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여러 동화가 소개된 ‘지니키즈’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이곳에 공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이가영 작가의 <다섯 손가락 이야기>가 그것이다.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다섯 손가락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에서 공존이 어떤 의미인지 되돌아보기로 하자.
다섯 손가락 가운데 엄지는 항상 자신이 최고라고 말한다. 비록 자신은 뚱뚱하지만 아빠 손가락으로 불리며, ‘내가 최고’라고 말할 때도 자신의 손가락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도장도 꽝 찍을 수 있다고 자랑하면서 직접 지장을 찍어 다른 손가락들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옆에서 엄지의 말을 듣고 있던 검지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엄지 너보다 내가 최고야. 유일하게 나만이 뭐든 가리킬 수 있다고. 이것 봐. 난 어디든 가리킬 수 있지? 역시 내가 최고라니까.”
이렇게 엄지와 검지는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하면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다른 손가락들 역시 질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이 제일 멋지다고 나서기 시작하였다. 가운데 중지가 말했다.
“가리키는 게 뭐가 대단해. 키 큰 게 최고지. 우리들 중에 누가 큰 지 대볼까? 내가 제일 크지? 그러니까 내가 최고야”
이번에는 약지가 나서서 말했다.
“애들 좀 봐. 너희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사랑을 맹세하는 아주 귀한 이 보석반지를 어디에 끼우는지 아니? 바로 나야. 이렇게 사랑을 맹세할 만큼 중요한 최고 손가락은 바로 나라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새끼손가락도 질 수 없었다.
“귀가 간지러울 때나 코가 간지러울 때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해? 나는 하는 일이 아주 많아. 약속을 할 때도 내가 꼭 필요하다고. 손가락 중에 제일 작지만 내가 최고야.”
이렇게 다섯 손가락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바닥이 말을 했다.
“애들아 너희들 그렇게 싸우지 마. 아무리 너희가 잘 났다고 해도 손바닥이 없으면 어디 붙어서 살래?”
그랬다. 손바닥이 없으면 다섯 손가락은 존재할 수 없었다. 손바닥의 말을 들은 다섯 손가락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면서 서로가 말을 이어갔다.
“그러네. 손바닥이 없으면 우린 있을 수가 없어.”
“맞아, 맞아.”
“우리 모두가 소중해.”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고.”
“우리의 생각이 짧았어.”
손가락들은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때부터 손가락들은 뒤로는 절대 구부러지지 않고 앞으로만 구부러진다고 한다.
공존의 손바닥, 인격
이가영 작가의 <다섯 손가락 이야기>는 4~5세 아이들을 위해서 쓰인 짧은 동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동화가 아닐까싶다. 왜냐하면 서로가 최고라고 말하는 다섯 손가락의 모습이 어른들을 꼭 닮아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최고라고 말하며, 백인들은 자신의 종족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어디 그뿐인가? 유럽인들은 자신의 문화가 최고라고 하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문명을 비하해왔다. 지역과 세대, 계층, 각종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역시 오늘을 사는 어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언제부턴가 통합이나 융합, 공존과 같은 용어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2012년에 치러진 대선에서도 최대 화두는 통합이었다. 어떻게 하면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가 하는 주제로 각 후보자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지역이나 세대, 정치세력, 노사 간의 공존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서로가 자신만이 옳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한 대립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지역이나 문화, 세대 간에 공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 동화는 단순하지만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자랑하던 다섯 손가락이 손바닥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면서 했던 말 속에 이미 해답이 들어있다. 먼저 필요한 것은 한 손가락의 고백처럼 자신들의 생각이 짧았다는 자성이다. 그럴 때 비로소 손바닥이 없으면 다섯 손가락이 있을 수 없으며, 모두가 소중하다는 성찰을 할 수 있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성과 성찰이 있을 때 비로소 대립과 갈등에서 공존과 융합으로의 질적 전환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자성과 성찰을 뒷받침하는 인문적 사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사유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인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인간이 맺는 관계를 두 가지로 압축하였다. 하나는 ‘나I’와 ‘그것It’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나’와 ‘너Thou’의 관계이다. ‘Thou’는 너를 가리키는 영어 ‘You’의 옛말이다. 물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관계는 나와 너이다. 용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책상이나 컴퓨터와 같은 ‘그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로서 ‘너’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타인인 너를 인격이 아니라 사물로 취급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백인들은 강제로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거나 팔았다. 인격을 가진 인간을 상품처럼 취급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시대까지 노비는 인격이 아니라 조건만 맞으면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였던 것이다.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는 모습만 조금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인간을 ‘그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소비되어도 되는 상품으로 취급된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열약한 환경 속에서 죽어간 노동자를 자본가는 과연 인격으로 바라보았을까? 자본가는 노동자를 자신에게 돈을 벌어주는 대상It으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한때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현아 부사장은 승무원을 ‘너’가 아닌 ‘그것’으로 대했다. 즉, 인격이 아니라 사물로 대했던 것이다. 그녀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적인 입장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너’가 아닌 ‘그것’으로 대한다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 공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백인이 흑인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한 백인과 흑인의 공존은 요원하며, 고용주가 노동자를 나와 너의 관계로 대하지 않는 한 공멸은 피할 수 없다.
야구에서 왜 모든 수비수들에게 골든글러브를 수여하는지 잊지 말기로 하자. 그들 모두는 수비 위치에 관계없이 모두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9명을 있게 한 공존의 그라운드는 바로 인격이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부색이나 국적, 계층,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격은 공존을 위한 바탕, 즉 공존의 손바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