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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점검73: 남전참묘(南泉斬苗) 조주초혜(趙州草鞋)
남전스님이 동당과 서당이 고양이를 놓고 다투는 것을 보고는 대중에게 말하였다.
“말을 하면 고양이를 살려주겠지만 말을 하지 못하면 고양이를 베겠다.”
대중이 아무도 대답을 못하였다.
남전스님이 곧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조주스님이 밖에서 돌아오니 남전스님이 앞의 말을 들려주었다.
조주스님이 이에 짚신을 벗어 머리에 얹고는 나갔다.
남전스님이 말했다.
“그대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南泉因東西兩堂各爭貓兒。師遇之。白眾曰。道得即救取貓兒。道不得即斬卻也。眾無對。師便斬之。趙州自外歸。師舉前語示之。州乃脫草履安頭上而出。師曰。汝適來若在。即救得貓兒也。
이 화두를 살피는 일은 참으로 험난하다고 하겠다.
왜 험난하다고 하는가? 살피는 자마다 스스로의 견해를 세우지만 저 옛 사람에게 다가가는 길을 헤매고서 그저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 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인터넷에는 여러 견해들이 올라왔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이다.
1. 남전스님이 고양이를 벤 것은 자아의 미망을 끊고 망념망상의 근원을 자른 것이다. 일체의 모순과 대립, 자타의 고집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살인도(殺人刀)라고 부른다면 조주의 행위는 활인검(活人劍)이라고 할 수 있다. 진탕에 빠지고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신발이라는 하잘것없는 물건을 한없는 관용으로써 머리위에 모심으로써 보살도를 실천해보인 것이다.
2. 화두는 이와 같이 의문을 지닐 뿐, 정해진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루어야 할 목표나 수치를 화두에 비의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3. 조주선사의 신발은 행(行)을 의미한다. 선사는 ‘한쪽 다리’라는 있음(有), 유위행(有爲行)을 상징하는 신발을 벗음으로 무위행(無爲行)을 보였다.
4. 불살생의 계율을 파계하여 고양이의 목을 벤 남전의 칼은 애욕을 끊기 위한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며, 그것이 분쟁의 원인인 고양이라 할지라도 하찮은 짚신조차 머리 위에 떠받드는 것처럼 섬기겠다는 조주의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活人刀)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어떤 분은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인 것은 곧 죽은 구절을 참구하지 않고 살아있는 활구를 참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남전이 일도양단한 것으로는 완전하지 못하고 조주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완전함이 이루어진다고도 하였다. 말인즉 죽이는 말이다.
또한 어떤 분은 게송하기를, ‘만약 사람들이 몸을 뒤쳐서 이 주장자의 참 진리의 뜻을 아실 것 같으면 맑은 물 호수에 허공의 하늘이 비치니 텅텅 비고 넓어서 또한 그 가운데 달은 밝고 밝음이로다(若也翻身知落處 水天空闊月澄淸).’라고 하였다. 여기서 한자를 다시 번역하면 이러하겠다.
“만약 몸을 뒤집어 저 옛 사람의 뜻을 안다면, 물에 비친 하늘은 비고 드넓고 달은 맑고 깨끗하다.” 여기에서 달이란 곧 물에 비친 달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상의 두 분의 주장은 모두 ‘전기대용(全幾大用)’을 표현하는 다른 말이라고 하겠다.
참고로 경봉스님과 한암스님이 나눈 일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경봉스님이 한암선사께 물었다.
“조주선사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문 밖으로 나간 뜻이 무엇입니까?”
한암선사가 답했다.
“부처와 조사가 함께 두 손을 마주 잡은 곳일세.”
다시 경봉스님이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부처와 조사입니까?”
한암선사, 묵묵히 양구하시다.
(중략)
한암선사가 경봉스님에게 물었다.
“조주스님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간 뜻이 무엇인가?”
경봉스님이 답하였다.
“가로 누우니 발이 하늘을 가리킵니다.”
한암선사, 무대(無對=즉 良久)하시다.
여기에서 두 분의 견해 또한 서로 달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중요한 것은 저 남전선사의 뜻과 조주스님의 뜻을 제대로 살피는 일이다. 그저 무턱대고 궁극의 이치를 들이내고 잣대질 하는 것은 그저 엉성한 탁마이고 점검일 뿐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다시 본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만약 이 화두를 타파한다면 어찌 저 조주스님과 남전선사에게 한 걸음 다가가지 못하겠는가? 수행자로써 옛 사람과 뜻을 합하는 기쁨은 억만금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하겠다.
이 화두는 매우 미끄럽다. 조금만 잘못 내딛어도 천지현격의 견해를 짓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어찌 애초에 바른 견해를 갖추지 못했다면 잘못 내딛는 것이 따로 있을 것인가? 그 자리가 이미 어긋난 것이고 미끄러진 자리일 뿐인 것이다.
남전스님이 동당과 서당이 고양이를 놓고 다투는 것을 보고는 대중에게 말하였다.
“말을 하면 고양이를 살려주겠지만 말을 하지 못하면 고양이를 베겠다.”
그 날은 몹시도 밖이 시끄러웠다. 남전선사가 조실로 있는 선원에는 동당과 서당으로 거처가 있었으며 양당의 수좌들은 고양이를 놓고 논쟁이 치열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오늘 뿐이겠는가? 평소에도 양당의 수좌들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한 사람이 높다고 하면 한 사람은 낮다고 주장하고, 한 사람이 크다고 하면 한 사람은 작다고 하는 식인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한 나절 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저 양당의 스님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귀를 기울어 잘 들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 얘기를 다 듣지 못했다면 역시 남전선사에게 다가가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그러자 남전선사가 대중 앞에 나서서 말했다.
“말을 하면 고양이를 살려주겠다.”
여기에서 ‘말을 하면’이라고 한 것은 곧 ‘내 뜻에 부합하는 말을 한다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했는가? 두 사람의 논쟁이 끝이 없고 선사가 보기에 어긋남이 있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수긍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도대체 저 두 수좌는 무슨 논쟁을 했을까? 여기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지만 귀를 크게 열고 듣는다면 틀림없이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남전선사는 만약 나의 뜻에 부합하는 말을 한다면, 그 상으로 고양이를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대들이 이미 저 고양이를 죽였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이 저 고양이인가? 만약 저 고양이를 알고자 한다면 고양이 뒤를 따라다니면서 고양이의 거동을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중이 아무도 대답을 못하였다.
남전스님이 곧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이는 곧 누구도 남전선사의 뜻에 부합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설령 백 마디 천 마디를 올렸어도 부합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면, 그저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고양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이미 죽은 자를 죽인 것일 뿐이다. 저 스님들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들은 죽은 고양이를 살려낼 재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살아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스스로 죽은 줄도 모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설봉스님이 덕산선사에게 물었다.
“남전이 고양이를 벤 뜻이 무엇입니까?”
덕산이 주장자로 곧 때려서 쫒아냈다.
다시 부르고는 말했다.
“알겠는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이러함을 노파(老婆)도 오히려 모른다.”
雪峰存問德山。南泉斬貓意旨如何。山以拄杖便打趁出。復召云會麼。峰云不會。山云我與麼老婆猶自不會。
조주스님은 저 설봉스님과는 달랐다. 그는 평소 스승 남전선사를 곁에서 모시며 오래도록 선을 참구해왔었다.
조주스님이 밖에서 돌아오니 남전스님이 앞의 말을 들려주었다.
조주스님이 이에 짚신을 벗어 머리에 얹고는 나갔다.
이것을 흔히 ‘조주초혜(趙州草鞋)’라고 부른다. 곧 ‘조주의 짚신’이라는 말이다. 조주스님이 짚신을 머리위에 올린 뜻이 무엇인가?
오늘날도 이 조주초혜를 화두로 삼고 선방에서 행주좌와하는 일상에서 참구에 참구를 거듭하는 선객들도 적지 않다고 하겠다.
도대체 왜 조주스님은 짚신을 머리에 올리고서 나갔을까?
만약 이것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저 동당서당 스님들이 머무는 곳을 지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 어찌 곧장 조주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설령 조주스님을 보았다고 해도 성급하게 단정해서는 안 되리라.
저 옛 사람은 말하기를, ‘울며 피눈물을 흘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입을 봉하고서 남은 봄(春)을 보내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남전스님이 말했다.
“그대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부자의 문답이 서로 척척 부합했는데, 어째서 저 옛 사람은 말하기를, ‘비록 후한 상에는 반드시 용맹한 자가 있다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추한 꼴(醜)을 깨닫지 못했음을 어찌하랴.’라고 말했을까?
또한 옛 사람은 말했다.
보복 전은 말했다.
“비록 그렇더라도 그저 짚신만을 떨어뜨릴 뿐이다.”
保福展云。雖然如是。也只是破草鞋。
취암 지는 말했다.“저 조주는 다만 스스로를 구제하였다.”
翠巖芝云。大小趙州祇可自救。
만약 이것을 안다면 틀림없이 당시 조주스님이 서 있는 자리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지 못했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태평시절은 본래 장군이 초래했어도 장군이 태평을 보는 것은 허락지 않는다.’라고 한 것을.
옛 사람은 여기에 대해 노래하였다.
고양이 머리에 뿔이 거듭 생기니
왕 늙은이 문 앞을 홀로 야행한다.
천효(天曉: 동이 틀 무렵)에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면서
초산(楚山)의 쟁영(崢嶸: 가파르고 험준함)을 한없이 업신여긴다. (보녕 용)
狸奴頭上角重生。王老門前獨夜行。
天曉不知何處去。楚山無限謾崢嶸。
어째서 저 고양이는 밤에는 그토록 기세등등하더니 날이 밝아오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했는가? 만약 알았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알았다고 해야 할까? 초산은 곧 초나라의 산들이다. 저 초산들의 험준함을 한없이 업신여기며 저 죽은 고양이를 지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죽은 고양이라고 하는가?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봉화의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서 병기(兵機: 적군의 동향)를 살피는 일은
장군이 아니면 누가 가려내리오.
변방의 법령을 일도양단하는
늠름한 바람은 천고패웅(千古霸雄)의 터전이다. (원통 선)
狼煙起處看兵機。不是將軍孰辨伊。
兩段一刀垓下令。威風千古霸雄基。(圓通僊)。
봉화의 연기는 곧 저 동당서당의 선객들이 다투는 것을 일컫는다. 병기(兵機: 적군의 동향)를 살피는 일이란 곧 저 무리를 모조리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천고패웅(千古霸雄)의 터전이란 향상의 기틀을 온전히 제기해보였다는 것이다.
돌 속에 감추어진 금을 누가 가려내리오.
유인(遊人: 유람하는 사람)은 그저 희미한 흔적을 볼 뿐이다.
도리어 석인(石人)에게 간파를 당했으니
철선(鐵船)에 (몸을) 실고 동정산(洞庭山)으로 들어갔다. (설두 종)
石裏藏金誰辨別。遊人但見蘚痕斑。
卻被石人窺得破。鐵船載入洞庭山。(雪竇宗)。
※동정산(洞庭山) - 태호(太湖)의 중심에 있는 동정동산(洞庭東山)을 일컫는다.
돌 속의 벽옥을 희미하게 보는 자는 그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유랑인에 그칠 뿐이다. 동정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늙은 어부가 허리띠로 배를 끌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늙은 어부라고 하고, 무엇을 유랑인이라고 할까?
『무문관』에서 무문혜개선사는 노래하였다.
조주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법령을 뒤집고
도리어 칼(刀)을 빼앗아서
남전이 목숨을 구걸했으리라. (무문 개)
趙州若在。倒行此令。
奪卻刀子。南泉乞命。(無門開)。
이 구절을 잘못 알면 마치 남전선사를 저 조주스님이 능가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저 조주스님은 여전히 남전선사의 도(刀)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조주의 이빨은 마치 검수(劍樹: 무수한 칼날처럼 서 있는 바위 숲)와도 같고
남전의 입은 흡사 혈분(血盆: 피를 담는 제사그릇)과도 같다.
두 자의 무공철추(無孔鐵槌: 구멍 없는 쇠뭉치)로
건곤(乾坤)을 하나로 합해서는
석가늙은이도 알지 못하니
미륵세존에게 물으라. (남당 흥)
趙州牙如劍樹。南泉口似血盆。
兩箇無孔鐵槌。打就一合乾坤。
釋迦老子不會。問取彌勒世尊。
화두를 참구하려면 오직 저 옛 사람을 참구해야 한다. 만약 절반쯤 살핀 자를 통한다면 그저 절반쯤을 얻을 뿐일 것이다.
또한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싼 가격으로 승당 앞에서는 반점(飯店)을 열고
고굉(股肱: 다리와 팔, 신하)에게는 방안에서 양주(揚州)를 팔았다.
짚신을 머리에 이며 추하고 졸렬함을 올렸지만
긁어모아서는 한 단락의 좋은 풍류를 이루리라. (혹암 체)
克己堂前開飯店。股肱屋裏販揚州。
頭戴草鞋呈醜拙。湊成一段好風流。(或菴體)。
참으로 적절하고 좋은 구절이다.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고갱(股肱)이란 곧 용상(龍象)을 의미한다. 어째서 추하고 졸렬하다고 했을까? 만약 이것을 살피지 못한다면 그저 용두사미일 뿐이다. 어찌 이 화두를 제대로 살폈다고 하겠는가?
“긁어모아서는 한 단락의 좋은 풍류를 이루리라.”
‘긁어모은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것을 뚫을 수 있다면 어찌 풍류 없는 가운데 풍류가 아니리오.
끝으로 한 구절 보탠다.
옛 사람이 칼을 드니
꽃잎이 날리고 솜털이 행인의 빰을 때린다.
짚신을 머리고 이고 감이여
은혜를 아는 자는 적고 은혜를 등지는 자는 많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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