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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50회. '500년 大工事 조선에 운하가 있었다' (1999.12.11.)
50회 : 500년 大工事 조선에 운하가 있었다
500년 大工事 조선에 운하가 있었다
방송일: 19991211 조회수 : 1333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타이틀 5백년의 대공사 - 조선에 운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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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
-파나마 운하 배다니는
VCR
-옆에서서 보는 MC 지금 보시는 것이 파나마 운하입니다.
이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를 단 8시간만에 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연간 2만척이 넘는 배기 이곳을 이용한다고 하는데 4만여명의 인부가 무려 10년간이나 걸려 완공해낸 대규모
시설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운하가 우리 한반도에도 있었습니다.
지금 한반도에 무슨 운하냐 하실텐데요,
12세기- 그러니까 파나마 운하나 수에즈 운하보다 보다 700여년이나 앞서서 운하 공사를 시작했고
지금도 그 유적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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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인평리에 이상한 유적 그것은 운하다.
-태안반도 헬기 8 복잡한 해안 지형을 이용해 많은 간척 사업이
-태안반도 위치지도 이뤄진 태안 반도 -
SUPER
-인평리 유적 헬기 12 그 한가운데의 마을 인평리에는 이상하게 패인 골이있다.
마을을 둘로 나눈 골이 산등성이를 관통하고 있다
-골로 내려오는 일행 3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소나무 군락PAN 9 가파르게 패인 골짜기 -
-반듯하게 파인곳 물 그곳에는 물이 흐른다.
3 하지만 보통 하천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고교수INT "자연 하천이라고 그러면 굴곡이 심할텐데 완전히 직선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손이 많이 간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군요."
-수로변 소나무 트레킹 7 그 대표적인 예가 수로 바로 옆에 자라는 나무들
-소나무 군락PAN 13 특히 일반적으로 물가에서는 자라지 않는 소나무들이 대부분 수로 안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정상무 "소나무는 원래 윗부분에 자라는데 수로변에 자라지 않는데 우에서 자라는데 밑에까지 소나무가
있다고 하는 것은 개착을 해서 당초의 지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저기 있는 것이 다 쓸려 내려 와서 ...
"식생들이 같이 공존하면서 군락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골 길게 PAN 11 이런 형상은 골짜기를 따라 계속된다.
-높이 자로 재는 2 정밀하게 측량해 본 결과
-폭 재는 7 그것은 거대한 인공수로였다.
-안부 PAN 포크레인 8 과연 무슨 목적으로 판 것일까? 골짜기 입구의 수로 바닥을 파 보았다.
-물과 개흙 5
-포크레인 T.S 10 표충을 걷어내자 눈에 띄는 거뭇거뭇한 토양 갯벌에서나 볼수 있는 개흙이었다.
-시추업자 INT "지표가 2미터 정도 굴포하고 있다."
"그위에 것은 그 이후에 퇴적된 것이고"
"그렇죠"
"원 지형이 뻘이었다고 볼 수 있나요"
"원지형은 과거 바다... 바다 환경에서 퇴적이 됐고 지금 현재는 육상에 노출이 돼 있지만 그 위에 퇴적이 된 것은
그 이후에 욱성안층에 퇴적된 퇴적층이고 요거는 과거 해성안층에서 퇴적된 것이라고 일단 판단이 됩니다."
-마을에 나무 그렇다면 그 인공 수로가 바다에 접해 있었다는 이야기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의외로 분명한 대답
이 나왔다.
우선 주목되는 것이 이 마을의 이름
-PD "요거 어떻게 알고 있어요"
-동네 아저씨1 "저희들이 알기로는 어른들이 파서 판개골. 여기가 파가지고 판개골이예요"
-동네 아저씨2INT "여기까지 다 들어 왔었대요"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곳은 바로 수로의 입구였다
"여기까지 물이 왔었대"
"요 앞에 까지 물이 왔었어요? 바닷물이"
-자갈 밭 F.S 3 그리고 수로 주변의 밭
-PD "여기 왜 이렇게 자갈이 많아요"
-아줌마 "파 내서 얹었다는 것만 알지 모르겠어 배 당기게" "배 다니게?"
"배 다녔다니까 여기서부터 요기 딱 뚫어졌어 저기 저 가면 뚫어 졌다니까...조개도 줍고 했어
결정적인 이야기였다.
배가 다니게 하려고 수로를 팠다면 그것은 운하를 뜻하지 않는가
(여기가 다 바다...배가 다니게 ..."여기로 통하는데? "여기 물이 들어왔어..." )
-마을로 Z.I 길게 8 골짜기 안만 아니라 논으로 쓰이는 저지대가 모두 운하였다는 것이다.
-차트레킹 6 이러한 사실은 기록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공주대 건물
-연구실 13 태안의 지형적 특성과 그 지역 역사의 정리 작업을 하고 있는 공주대학교 이문종 교수 -
그의 조사에 따르면 이 운하는 500년간 11차례나 시도된 국가적 대공사였다
-책보여주며 11 그 최초 기록은 12세기 고려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책보여 주며 "인종 7월조에 보면은 내시 정습명을 홍주 소대현에 보내서
"시도할려고 했던 것은 무수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고려 인종에서부터 시작이 돼 가지고 고려말을 거쳐서 조선에 넘어 와서는 태조 태종때 활발히
이뤄지게 되고 그다음 현종때 이르기까지 5백년에 걸친 긴 역사를 통해서 운하개착을 시도했던 것으로 기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헬기 골에서Z.O 7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이상한 골 그것은 잊혀진 대운하의 흔적이었다.
-실사+물채워지는C.G 15 그길이가 무려 12킬로미터 -
여기에 물이 흐르고 배가 다녔다.
운하 -그것은 태안 반도 양쪽의 바다를 잇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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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운하 표시된 현대 지도
+ C.G 운하를 뚫으려고 했던 지점은 바로 태안 반도의 잘록하게 들어간 부분 그러니까 목에 해당하는 이 부분
인데요, 지금 이 모습은 간척 사업으로 바다가 많이 메워진 상탭니다.
-간척되기전 표시 운하를 만들 당시에는 간척이 되기 전이니까 여기가
(목이 더 좁아지는) 지금보다 더 좁았던 것이죠.
태안 반도 양쪽의 바다 그러니까
-운하 굴착 표시 그위로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 사이의 뚫어지는 표시 육지에 운하를 뚫어서 뱃길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로림만까지 가는 거리가 불과 12킬로미터 밖에 안됩니다.
원래의 항로를 따라 가면 700여 킬로미터 -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절약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운하를 만들려고 한 것은 단지 이 이유 뿐이었을까요?
인평리 운하를 파지 않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이유 -
그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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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왜 인평리 운하를 만들려고 했을까
-마을트레킹 7 인평리의 북쪽 마을 어송리는 조선시대까지 영풍창면으로 불렸다
-집앞F.S 12 영풍창이 있었다는 민가의 마당
-주춧돌 재는 피디 아직도 거대한 주춧돌들이 남겨져 있다.
-은우뒷에서 재는 피디 11 하나의 길이는 보통 1미터70센치 -
주인은 10톤 트럭 6대분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주인 INT "지금 3배 이상 되는 것을 갖다 버렸어요"
-주인과 밭으로 가는 3 비단 주춧돌 뿐이 아니었다.
집앞의 받에는 엄청난 양으 기와 조각이 묻혀 있었고
-주인 INT ("기와 잖아요 이 바다하고 저바다에 이걸 엄청나게 주었어요")
-축대 뒤지는 9 그 당시의 축대가 집터 주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주인 INT "축대는 일직선으로 쭉 쌓여 있었고 석축은 4-5미터 간격으로 일직선으로 이쪽으로 반듯반듯하게
돼 있었어 ... 일직선 똑바르게...."
-실사영풍창 생기는C.G 13 1700여평의 대지에 꽉차게 들어선 기와 건물-
높은 축대의 아래쪽은 바다 -
그것이 조창의 모습이다.
-이은우 INT "각 세곡의 기점마다 조창을 13창을 건설하는데 그중 하나 당시는 군현마다 중앙에서 관리를
배치하지 못했는데 영풍창에는 정5품 판관 배치한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중요시 했던 것..."
-마을 F.S 2
-볏집 22 농업 국가였던 중세 왕조 시절- 곡식은 바로 세금이었다. 토지에서 나는 곡식과 특산물들은 조창에
모았다가 서울로 운송되었다.
이름하여 조운.
그것은 중세 왕조를 지탱하는 대동맥과 같은 것이었다.
-교수 INT "조운이 마비됐을 경우에 국가의 운영 체계도 동시에 마비될 수 밖에 없다 조운을 통해 들어오는
미곡의 용도가 관리들의 녹봉이라든가 군금 또는 궁궐에서 행사에 쓰이는 비용등 국가로서 모습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미곡들이 조운을 통해서 조달됐기 때문에 조운이 마비됐다 그러면 국가 자체가 마비되는 그런
의미가 되는 거지"
-마을에서 PAN Z.I 11 육지에 도로가 발달도지 않았던 그 시절, 모든 세곡은 바다를 통해서 운송되었다.
일찍이 고려 광종때 전국에 13개의 조창을 설치되고 조운로가 정비된다.
#지도 +전국 조창 C.G 17 조창은 배가 드나들기 쉬운 해안에 위치했다.
삼남의 세곡들은 배에 실린 후 연안 해로를 따라 개경에 들어왔다.
-교수INT "조선시대 해로라는 것이 요즘과 달라서 돛단배인데 바람을 따라서운항하는 것이 일반적 이 선박이
원양으로 나가면 바람을 통제하기 힘들고 파선의 위험 좌초의 위험이 훨씬 많았다.
대부분의 조운선의 항로를 보면 연안에 아주 근접해서 육지에서 그 배가 가는 것을 충분히 감시 감독할 수 있는
그런 항로를 택했다"
-헬기 안흥량 3 그러나 문제는 뱃길에 있었다.
-헬기+지도 10 태안 반도 서쪽끝의 안흥량 전국에서 가장 험한 항로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에 촘촘히 솟은 암초 사이를 조운선이 통과해야 했다.
18
- 특히 물속에 숨어 있는 암초들 때문에 이 지역을 밀물때를 기다려야 된다.
-디졸브 물살 17 그러나 밀물때라 해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풍랑이 문제로 등장한다.
서해 바다로 멀리 돌출해 있어 옛부터 원량과 같은 정도의 풍랑이 일기 때문이다.
-이은우 INT "원래 이름은 어려울난 다닐행 난행량이었는데 조운선이 지나가는 선원들이 여기를 지나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 했으므로 나라에서 안전 운행을 비는 뜻에서 안흥량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배 정박 마을 11 지금도 바람이 불고 날씨가 나쁘면 모든 배가 꼼짝 못하고 방파제에 안에 발이 묶인다.
작은 배는 물론 제법 큰 배들도 마찬가지다.
-뱃사람 INT "배가 출항하면 다 죽어요 죽어 못가요.파도 보세요 얼마나 센가 바깥에 나가면 여기는 잔잔한
편이고 바깥에 나가면 엄청 커요"
-조운선 10 당시의 조운선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동력이라곤 바람 뿐이데다 선체는 다른 배에 비해서도 몹시
둔했다.
-이원식 INT "보통 배 어선 옆에 삼판이 7쪽이라고 하면 조운선은 2쪽을 늘려서 9쪽을 했어요 또 늘려서 11쪽을
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곡식을 많이 싣고 가죠 그래 가지고 배가 좀 우둔하죠 그런 것 가지고 전쟁하기는
어렵고 원양은 얼마 못나가죠"
-물살+침몰하는 13 원양이나 마찬가지였던 안흥량의 풍랑- 그 속에서 조운선은 방향을 잃고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기 일쑤였다.
-이원식 INT "바람이 불고 폭풍이 불었을 적에는 배가 자기가 가고자 하는데 못가거든요 밀린단 말이죠.
밀리면 배를 조정 못해 그러면 암초나 바위에 밀려..."
-험한 바다
+자막스크롤 11 엄청난 인명과 세곡의 손실이 잇따랐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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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MC 1S 조선초 전국에서 걷어 들이는 세곡은 한해 10만석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에 만석이나 빠뜨려 잃어버린다고 하면 국가 재정이 휘청 거리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죠..
따라서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해결책이 바로 운하였던 것입니다 ...
-바닥에 깔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태안군의 옛지도입니다.
태안읍 고지도 바다 위에 솟아 있는 숱한 암초와 이 사나워 보이는 물결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는데요
옛사람들이 얼마만큼 이 안흥량 바다를 험한 곳으로 여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적 기록 그런데 이 지도에는 다른 지도와 다른 특징이 하나 타이트 있습니다.
여기 고적이라고 해서 운하의 위치와 이것을 파게된 경위를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운하의 길이가 12킬로미터를 넘었다고 하니 대규모 공사가 불가피했을 텐데요,
-단 아래서 올라온다
-위에 정, 가래 올려져 있고 정드는MC 이게 바로 정입니다, 돌을 쪼는데 사용하는 것이고
이건 가래 - 세사람이 한조가 돼서 흙을 떠 내는데 쓰는 기구이죠.
별다른 장비가 없던 그 당시에 장비라곤 고작 이 정과 가래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기술과 장비로 과연 어떻게 공사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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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1) 운하-어떻게 만들었을까 (운하 공사의 어려움)
-강화 갯골 자막 4 공사는 과연 어떤 조건에서 시작 됐을까
-배가다닌다 7 썰물이 되면 서해안 어디에나 갯벌 사이로 개천이 흐른다
-PD "물이 이렇게 갯벌 사이로 흐르는 것을 뭐라 그런다고요"
주민 INT "갯골요,갯골이라고 그러고 요런게 요쪽에도 있고 저넘어도 있고 잔잔하게 몇 개씩 있어 여기가 좀
큰편이죠"
"다른 포구 같은 경우에도 서해안쪽에는 이런게 많습니까?"
"여러개 있죠"
-헬기 갯골 8 육지를 흐르는 물이 계곡에 모아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했던 인평리 부근도 얼마전까지 이런 갯골이 흘렀다. 바로 인평천이다.
-흥인교 PAN 7 대규모 간척 사업이 있기 전에 만들어진 지도-
-앉아 지도보는 10 그 속에는 갯골이었던 인평천의 모습이 선명하다.
-고교수 INT "평야 부분에서 유일하게 발달한 하천으로서는 흥인천이 있는데 그 흥인천 아래쪽이 되는 거예요
흥인천 아래 쪽에 수로가 돼 있기 때문에"
-정상무INT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공사 순서라든지 공사량이라든지 투입되는 장비라든지 봐서
최대한도로 기존 하천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강 T.S 4 운하는 인평천을 따라 수로를 넓혀 나갔던 것이다
-순성 마을 F.S 자막 3 인평천에 인접한 순성진
-걸어가는 20 운하 공사의 총지휘본부가 여기에 있었다.
이곳의 관아는 변방이었음에도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중앙의 고위 관리들도 여기에 파견돼 상주했다.
-이은우 INT "서산 태안 해미 까지의 인구가 불과 3천2백명밖에 안되는데 많은 인원이 외부에서 유입됐을 것
으로 보입니다 일일간 공사 인원 5천명 이라고 하는데 수용하자면 큰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 ..."
-고려사 책 6 그러나 대규모로 단행된 운하 공사는 매번 실패를 거듭 한다.
-한자 14 "인근 백성과 군졸 수천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게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강화도 갯골 PAN 무엇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일차적인 어려움은 갯뻘에서의 작업 그 자체에 있었다
파낸 개흙을 처리할 곳이 없음은 물론 거동조차 힘이 들었다.
-발빠진 "어우 ... 죽겠다 거동이 안되네"
그나마 썰물때나 작업이 가능했다
-김의원교수INT "요즘 같으면 뻘 자체를 개량하죠 모래 기둥을 집어 넣어 가지고 뻘의 기능을 죽이는 또는 가
물막이를 한다던가 요즘 같으면 시멘트를 넣고 옛날 그런 것이 없을 때, 애로 였을 것이다"
-하늘 2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걸어가는 13 취재팀이 전날 썰물 때 파 놓았던 규격 1미터의 구덩이 -
그것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 새 들어 왔던 밀물의 작용이었다.
-이장 INT "옛날 같으면 더 조류가 심해가지고 더 빨리 흙들이 없어졌을 거예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
여기는 해안선이 짧기 때문에 더 넓은 곳은 더 심했다고 볼 수 있죠"
-고려사 당시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바닷물이 들락 날락 하면서 파내면 막히고 다시 파내도 계속 막혀 공사가 어려웠다.'
# 이문종 교수 INT "육지보다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에서 바닷물이 들락거리면서 뚫어 놓은 것을 자꾸 메꿔
놓아서 공사가 진척이 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현지에 가보면 주민들에게 전해 내려 오는 얘기 낮에 뚫어 놓으면 도깨비가 와서 메꿔 놓았다
그런 얘기도 바로 이런데가 기록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을 현장 T.D 6 그리고 공사가 실패 할 수 밖에 없던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었다
-발앞에 파는 4 취재팀은 수로 주변의 지질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 징후가 느껴졌다 시추봉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멀리 파는 F.S 13 바닥에 거대한 암반층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앉아서 시추 여는 7 밑으로 내려 갈수록 촘촘해지는 암반층 4.8미터 이하는 화강암 지대였다.
-시추 T.D 10 아래로 내려 갈수록 암질은 단단한 화강암질-
-시추 업자INT "이 3.4미터부터4.8미터 구간은 작업을 할 수 있어요.
가능할 것 같애요 절리층이 있으니까 무른 부분도 있고 그런데 좀 내려가서 4.8미터 아래는 완전히 기반암이 닿아
가지고 정으로 쳐도 정이 탁탁 치는 상태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작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정으로 깨는 14 화강암은 당시 정으로 깨는 작업-
정은 계속 튕겨 나가고 몇번을 쳐야 겨우 한조각을 떼어 낼수 있다.
-시추 샘플 F.S 12 그리고 수로 한가운데에서 행한 지질 조사.
상당한 깊이까지 암반이 나오지 않았다
-기계 돌아가는 2 그러나 5미터를 넘어서는 순간.
-부르는 "저 상무님 -"
-시추 퇴적 6 지질이 달라졌다
부서진 암석 조각이 섞여 나왔다.
-정종진 INT "코아링 한 상태를 보면 요 지점을 경계로 해서 상부에는 인위적으로 퇴적된 층으로 나타나 있고
그 하부는 지금 암반으로 돼 있는 경계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걸 보면은 이 지역은 인위적으로 굴착을해서
수로로 사용된 이후에 지금은 사용을 안해서 퇴적이 된 걸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다가 바로 여기가 돌에 걸렸다, 암반에 걸렸다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이 암반 약간 단단한 것으로 보이는 데 개착을 했을 때 그 이후로 6-700년 이상 경과된
것으로 약간 풍화된 것으로 판단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질도 14 결국 수로는 목표한 깊이까지 파지 못했던 것이다 천수만쪽에서 갯골을 따라 진행된 공사는 골짜기
근처에서 결정적 난관에 부딪힌다 주변 일대가 모두 암반층이었다.
-정+피디 "여기는 암결이 지금 현재도 단단하게 보이고요 아마 이런 암들이 바닥 굴착 할 때도 상당히 어렵다고
판단되는 그런 지역이 될 것 같습니다"
-암석 스케치 14 골짜기 안에는 지금도 절개된 암반층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오직 정과 망치만 가지고 깨들어 가야했던 암반 아무리 많은 인력을 동원해도 그것은 넘어 설 수없는 장애였다.
-석양 12 조선조에 들어 운하 공사는 다시 의욕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암반의 벽을 넘어 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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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운하 안부 실사 이곳이 바로 공사의 최대 난코스 지점입니다.
+C.G 말안장처럼 높다해서 안부라고도 하는데요 해발 고도가 28미터나 됩니다.이런 곳에 수로를 파내려면
지대가 높은 만큼 더 깊이 파낼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 일대 전체가 지금 보시는 것처럼 암반으로 덮여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화약을 써서 발파하면 되니까 별 어려움은 없겠지만 당시에는 화약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화약 제조 기술은 국가 기밀이었고 군사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신터리봉 실사
VCR 저쪽을 보시면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요, 운하 공사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이름이 신터리봉이라고 하는데요, 공사를 마친 인부들이 그곳에서 신에 묻은 흙을 털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이 봉우리라는 것입니다.
운하는 반드시 뚫어야겠는데 아무리 많은 인력을 동원해도 공사는 진척이 안되고 참 갑갑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종때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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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2) 운하-어떻게 만들었을까
(운하 공사의 새로운 돌파구)
-동네 트레킹 3 경상남도 진주의 외딴 골짜기
-제가 F.S 4 진양 하씨 종친들이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다.
-제사 올리는 6 이 제사의 주인공은 하륜-
-사람1S 4 그는 조선의 개국 공신이며 태종의 오른팔이었다.
-현장 EFFECT INT "PD:이 비석입니까
후손:이 비석 맞습니다
이 비석에 아주 ... 중국에서 온 빗돌입니다.
돌 자체가 태종대왕때 중국에서 이 빗돌이 2개가 들어 왔다는데 하나는 여기에 오고 하나는 함흥을갔다고
그랬습니다
이:태조 이성계?
후손:이성계 어른한테 갔다고 돼 있습니다
-비각스케치 14 애써 구한 비석을 선뜻 내줄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하륜 -
-마루 F.S 6 그는 건국의 기틀을 잡았고 특히 조운의 편의를 들어 한양 천도를 관철시켰다.
-후손 책 읽는 EFFECT "단단하고 굳어서 팔 수가 없었다 이겁니다. 이것을 둑을 쌓는다 이겁니다"
그리고 안흥량으로 인해 조운에 문제가 생기자 운하 공사에 뛰어 들었다.
-책 10 천문과 지리에 능했던 그는 마침내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했다
'축제저수'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부 골짜기 Z.I 4 이 골짜기 어디에 저수지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운하에 이용했을까?
-취재팀 찾아가는 4 안부 안쪽의 한 골짜기 -
-바위사이 물 흐르는 10 바위 사이로 제법 센 물줄기가 흐른다.
-제방 Z.I 4 그리고 그 전방
-제방 트레킹 10 꽤 높은 둑이 발견된다. 골짜기 안을 따라 계속되는 둑 높이는 1.5미터,폭은 2미터를 넘는다.
-둥근제방 PAN 4 둑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가운데 터진 7 둑은 수로 안쪽을 둥그렇게 막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막혀 있던 것이다
-물 막대기로 찌르는 13 제방 위쪽은 물이 얕은데 안쪽은 물의 깊이가 상당하게 깊다
-정상무 INT "전에는 둑이 이렇게 연결돼 있던 게 유실되면서 물이 갑자기 이쪽으로 치우쳐 가지고 물이 유실
방향으로 여기가 깊어지고 자연적으로 침식이 된 것 같습니다. ...막혀 있었습니다"
-나무에 물 14 제방위에는 많은 돌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옆으로 허물어져 있는 형상도 이것이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 준다.
-가종희INT "요거 옛날부터 우리 할아버지 때부텀 내가 들은 걸로 있었어요 ... 높이가 조금 높았는디 지금은
여기 물이 많이 내려갔어 조금 얕아진 것 같애, 바닥도 좀 올라오고"
-둑둥글게 앉아 PAN 14 이 둥근 제방안에 물이 공급된다면 저수지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저수지 똑같은 형태의 둑이 또 있었다 언뜻 보면 넓은 논두렁처럼 보이는 모습.
그러나
-가종희INT "원래 여기가 굉장히 깊었어요 깊었는데 산사태로 인해서 이게 좀 메꿔 졌어요.
그래서 요 아래는 좀 메꿔 졌지만"
-아래에 둑 7 안쪽으로는 제방의 모습이 선명하다
-가종희INT "먼저 저 위에 둑하고 비슷한 둑이 됐어요 옛날 그대로 둑이 그렇게 돼 있었어요"
-햇빛 안각 9 첫 번째 둑까지 거리는 70미터 해발고도는 1.5 미터 차이가 난다.
-갈대 안부 PAN 5 그렇다면 이 경사진 갈대밭이 물로 채워 질 수 있을까
-이은우 INT "기록에 보면은 저수지가 남측에 3개 북측에 2개 나와 있습니다 그 5개의 저수지를 통과하는 작동
하는데 있어서 6번씩 전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분명 저수지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정종진 INT "지금 현재의 이 지형 상당히 양쪽에 평평한 지형을 깊이 굴착해서 만들어진 지형이 돼 가지고
저면에 암이 나올때마다 높이를 전부 일률적으로 맞출 수가 없어서 암반의 높이라든가 인력으로 팔 수 있는
심도를 한 세군데 정도로 구분해 가지고 연못 그러니까 물을 담을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들어서 그렇게 해서
계단으로 해서 배가 계단 저수지 내에서만 움직여서 전재를 옮겨 싣는 방법을 선택한것 같습니다"
-건국대 외경 Z.I 16 그 전체적인 모습과 이용 방식은 과연 어떠했을까
정밀 측량한 결과와 현기록을 토대로 안부안 수로의 도면을 그려 보기로 했다.
-PD+ 교수들 5개의 저수지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그것은 현재의 지형과 일치한다.
-도면 그림 T.S 9 기록을 통해 고증한 운하와 지도상에 표시된 5개의 저수지가 운하가 그대로 일치했다.
-고교수 INT "영조측에 1척에 지금 현단위 기준이 31.21센치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환산 그때 기록으로 환산해
가지고 평면도상에 그대로 운하를 표시했더니 아주 완전히 일치가 됐습니다."
-저수지 F.S 5 횡단면도를 그리자 나타나는 계단형의 저수지들
-그림 남착지 PAN 8 이렇게 안부안에 6개의 둑을 쌓고 수위가 서로 다른 저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운하 저수지 C.G 37 암반지대가 아닌 첫 번째 저수지까지 250석을 실은 평저선이 들어오고 거기서
두 번째 저수지 안에 있는 작은 배로 옮겨 싣는다
같은 방식으로 세 번째 저수지 즉 가장 높은 지대를 통과한다.
그리고 마지막 저수지를 거쳐 큰배에 옮겨 실어 가로림만으로 나아간다.
-고교수 INT "지금처럼 갑문이라든지 수문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안되어서 흙으로 저수지를 막았다고 하는
고 차이뿐이지 공학적인 원리 자체는 라인강이라 든지 아니면 많은 나라들에서 수로에서 운하에서 많이 활용
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운하 현대의 운하 건설 공법인 갑문식과 유사한 하륜의 창조적 발상 -그에 힘입어 배는 마침내 그토록 어려
웠던 안부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안흥량을 거치지 않는 새로운 물길이 열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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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태안의 인평리 운하 공사에는 온나라의 지혜가 다 동원이 됐고 공사 책임자도 당대에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맡았습니다.
-하륜영정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천문과 지리 수학에 능통했던 하륜에 의해 인평리 운하가 개통되게 된 것입
니다 암반 지대에다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어서 배를 통과시켰던 그 방식은 지금 운하 공사에 도입하고 있는
공법과 아주 유사한데요,
그런 발상을 조선초기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점이 있었습니다.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저수지 입구까지 배가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았고
갈수기에는 저수지에 채울 물이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단점 때문에 인평리 운하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맙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태종은 자신이 직접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 태안까지 두차례나 내려가 보기도 합니다.
-신숙주 영정 여기 이 인물 신숙주 -
영의정을 지낸 다재 다능한 인물이었죠.
세조때 그가 다시 암반지대를 뚫어 보려고 시도 합니다.
-신숙주 영정 옆 공사의 총책임자로 태안 반도에 내려가는데요, 하루 5천명씩 동원해 4년간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한탄하는 시 한자로 그러나 공사는 역시 마음 먹은 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겼습니다,
-한자시 "땅을 판지 그 몇 년이뇨 성과가 없으니 하나식 변색 뻗어 나오는 산줄기 파고 또 파도 계속되네
누가 나에게 운하 파는 법을 일러 주리오 술동이를 앞에두고 망연자실할 뿐이로다"
공사는 역시 이전과 똑같은 이유로 실패하고 맙니다.
암반을 뚫기는 어렵고 하륜의 방식은 너무나 번거롭고 그렇다고 안흥량으로 가자니 난파를 당하겠고 ...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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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산 구름낀 항공 2
-산 항공 10 답답한 상황에 숨통을 트는 실마리는 바다가 아닌 강에서 찾아졌다.
-남한강 줄기 문경 새재만 넘으면 낙동강과 남한강이 연결된다는 지도 SUPER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가흥창 찾는 사람들 22 태종대 이후 남한강 수운의 기능이 대폭 강화되기 시작한다
-피디 묻는 특히 충주 인근의 남한강변은 엄청난 양의 세곡들이 야적되기 시작한다.
충청도와 경상도 세곡을 이곳에 모았다가 한양으로 옮겼다.
-김현길 INT "경상도 지역의 세곡이 낙동강 상류를 따라서 문경새재를 넘어가 가지고 이리 운반이 되고 실질적
으로 이 한강 유역의 세곡은 중간 중간 작은 창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창들에 저장했다가 최종적으로는 여기에 집결이 되는 거죠"
-강가 전경 10 세조때에는 전국 세곡의 26%가 이곳에 있던 평저선에 실려 서울로 운송됐다.
-여울 트래킹 5 하지만 남한강의 물길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마을사람+PD 여울쪽가는 5 "어딥니까 ..."
-여울목PAN 4 곳곳에 산재한 여울과 암초 때문이었다 - 가흥창터 건너편 막희락탄
-암초들 7 수심은 얕은데 수 많은 암초가 강물 속에 산재해 있다.
-동네 할아버지INT "여기가 막희락이라고 했어요.막희락탄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내려가는 것을 너무 마음놓고
내려가지 말라는 뜻이거든 그러니까 아주 내려가는 수로가 험상궃고 그러니까 좀 조심해서 가란 뜻인데 기뻐
하지 말고 그렇게 해란 얘기로 알고 있어요"
-강 햇빛 암초 12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 가자면 숱하게 부딪혀야 하는 암초 지대 -물길을 모르거나 잠시 한눈을
팔면 나무로 만든 배가 어김없이 바위에 부딪혀 깨지고 만다.
-흔들리는 강
-고동환교수INT "한강을 거쳐 올라 갈 때는 반드시 그 지역 주민들 물길에 상당히 익숙한 사람들을 조운선 맨
앞에 태워서 암초를 피하고 토사가 높아진 곳을 피할 수 있게끔 그렇게 조치를 취했습니다."
-경기지책 표지 강의 수로 역시 사람의 힘으로 개척해야 했다.
"세조때 구달충을 시켜 암초를 파게 하였다.
물 가운데에 있는 돌의 둘레를 나무로 막고 물을 퍼내면서 암초를 팠다"
-강가 암석 F.S 3 작업은 남한강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강가쪽에 암석트레킹 10 강변쪽 수로 바깥으로 치워져 있는 크고 작은 암석들 -
-암석 쫀 흔적 Z.I 16 바위 곳곳에 정으로 쪼은 흔적이 남아 있다
-쫀 흔적 스케치 조선조 내내 이 작업에 인근 주민이 동원됐다
-할아버지 INT "가물때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바위를 징으로 찍고 찍어내고 사람들이 좀 적은 것은 지렛대로
여럿이 물에서는 돌들도 좀 가벼워요 여럿이 굴려서 치우기도 하고 그랬어요"
-수운 판관 비석Z.I 6 작업은 별도의 행정 계통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비석PAN 24 가흥창터 뒤편 언덕에 있는 충주 지방 수령들의 비석들 -
조창에 세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리하고 감독했던 수운 판관이 수로 관리 작업을 총괄하며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김현길 INT "여러가지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충주에는 수운 판관과 충주 목사가 있는데 목사보다도 상위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사실상 가흥창의 역할을
짐작 할 수 있겠죠"
-남한강 트래킹 5 수로 개척은 단순히 암초만 깬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조운선이 빈번하게 드나들던 경기도 여주군 이포리
-배타고 가다 시동끄는 "이젠 못가요"
"저기까지"
"땅이 보이잖아요, 저기 땅"
-낮은 강물 4 강물 사이에 바닥이 드러나 있다-.
-배사공 할아버지 "저기가 닿는다니까 얕아서 닿아서 못간다니까"
-낮은 지역강가 12 강은 모래 톱이 형성될 정도로 얕고 물살이 빠르다.홍수때 토사가 떠내려와 쌓이기 때문이다.
-집찾아가는PD 7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 방안이 뱃골이었다
-주민 INT " 배가 못갑니다. 배가 이래봬도 3백가마 4백가마 싣고 와요,골을 파줘야 내려가지"
"배가 돛단배 건너서 빠져 나갈 정도지"
-실사 +뱃골 C.G 15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수로를 파내는 뱃골
그 길이는 보통 100미터-200미터 정도였지만 가장 긴 것은 4킬로미터나 됐다.
보통 물이 줄어든 가뭄때나 홍수뒤에 가래를 파는데 길이가 2-3미터,폭은 20-30미터 정도.
사실상 작은 운하였다
뱃길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운하가 필요했던 셈이다 이러한 수로 개척의 노력을 통해 남한강의 수운은
날로 발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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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 태안 반도에 운하를 건설하려 했던 끈질긴 국토 개발 노력은 강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다길을 이용하는 대신 강을 이용하는 내륙 수운의 기능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죠.
-평저선 지금 보시는 이 배가 세곡을 싣고 한강을 누비고 다니던 평저선입니다. 강배죠.
가볍고 날렵해서 바람을 타면 매우 빠르게 오고 가고 했는데요,
조운을 끝내고 나면 이 강배들은 세곡 대신 소금이나 젓갈 특산물 등을 실어 날랐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남한강을 통해 한양을 드나들던 배가 하루에만도 500여척이나 됐다고 합니다.
운하의 개척 노력이 내륙 수운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한강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바다길을 개척하는 것은 이제 그만둬 버린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운하도 계속 뚫었습니다.
태안 반도는 물론 다른 지역에도 운하를 뚫으려는 시도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됐고
18세기 들어서는 마침내 성공을 거둡니다.
과연 어디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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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6 성공한 운하 안면도
-안면도 전경 4
-해변 PAN 10 크고 작은 섬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갯벌 -
천혜의 비경인 이 지역도 조운선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연안 항로다.
-바위 넘어가는 5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
-파도 세게 치는 보고 2
-파도 치고 바위에 파도 23 거세게 몰아치는 높은 파도와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암초 지대 -
이곳에 조운선이 들어오게 되면 사실상 출구가 막히는 형국이다
휘몰아 치는 파도에 배는 방향을 잃고 실었던 세곡은 물속에 빠져 썩어가게 된다.
-이은우 INT "이 일대를 이 지역 주민들은 쌀썩은 여라고 합니다
쌀썩은 여란 이름은 여기에 배가 들어오게 되면 보다시피 여기에서는 빠져 나갈 수 없이 난파되도록 돼 있습
니다.그만큼 여기로 조운선이 와서 많은 난파가 있으므로 해서 그 쌀이 다 썩어 가지고 그게 이름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이유로 해 가지고 세곡선을 운반하는 책임자들이 중간에 세곡을 챙기기 위해서
쌀을 많이 빼돌리고서 거의 빈배로 와서 여기다가 일부러 부딪혀서 난파하고도 보고하면 중앙 정부에서는
그것을 믿을 만큼 이 지역은 상당히 운항하는데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복도PAN 되고 3
-이교수+PD책보는 7 안흥량에 버금가는 골치거리였던 쌀썩은 여 -
이 문제는 어떻게 풀었을까
-책가르키며 두사람 17 옛 기록에 그 단서가 있다.17세기 중반에 그 일대 지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책에 안면곶 숙종 실록에는 안면곶 그러나 40여년 후에는 안면도로 기록돼 있다.
-이문종 INT "곶이라고 하는 것은 육지가 좁고 길게 뻗어 나가는 그런 곳을 곳이라고 하고 섬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로 둘러 싸여 있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인데
기록에 보면 인조 16년 1638년까지는 곶으로 표현돼 있는데 숙종3년 기록을 보면 안면도가 도로 표시가 돼
있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인조16년인 1638년에서 숙종 3년인 1677년 요사이에 곶에서 도로 변하지 않았을까
뚫어서 섬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측이 됩니다"
-차트레킹 9 그렇다면 과연 어디를 뚫었을까
이 문종 교수가 지목하는 곳은
-연륙 다리 지금의 안면 대교 -
-연륙섬Z.I 4 바로 여기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절벽처럼 잘린 8 절멱 표면의 암석들이 인위적으로 절개된 모습을 띄고 있다
-아래 다른 해안PAN 8 경사가 완만한 인근 지역과 뚜렷이 구분될 뿐 아니라 지명 또한 특이하다
-이은우 INT "이지역에 사는 현지분들은 이곳을 목탄계, 판목,판목계 굴항포 등 여러 가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명은 모두가 이곳을 굴착했다는 내용의 지명입니다 따라서 이 안면도는 옛날에 섬이 아니고 육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을 모두 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연륙아래 바다 10 그렇다면 주변 지역에서 바닷물들이 밀려 들어 왔을텐데 어떻게 작업이 가능했을까
-건너편에서 연륙교 14 서로 200미터나 벌어진 양측 연안의 사이를 그것도 2미터 이상의 깊이로 암석을 파내는
작업이 가능할까
-돌치는 손 그러나 의문은 곧 풀리고 만다 이 일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 암석은 편마암 화강암과 달리 결대로
잘라내지는 성질을 갖고있다
-정종진 INT "이건 풍화돼서 이래 풍화 안되면 안된 상태는 틈에 이렇게 끼어 가지고 정이나 이런 걸로 쪼면
떨어져 나간다 이거죠."
"아 이렇게..."
그렇다면 작업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절벽 PAN 12 정과 망치만 갖고도 캐낼 수 있는 편마암이 대부분이고 화강암보다는 강도가 약한 사암과
규암이 조금 섞여 있는 것이다
-건너편 절벽 7 반대편 연안도 마찬가지 작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는 진단이다
-정종진 INT "암편 하나를 제거하고 또 암편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을 것 암편 자체 띄어 내는 것 화강암
보다 쉽게 작업 ... 쉬운 말로 하면 떡 시루에서 떡을 떼내고 또 그 다음 떡을 eP내는 방식 ...
최저 간조때 작업을 2-3시간 정도는 수심을 어느정도 유지하는 선까지 작업이 가능.성과도 어느정도 몇리방
정도 떼낼 수 있을 것 ..."
-석양낀 물결 2 게다가 이미 500년간 11번이나 시도 시도했던
-석양+바다 13 태안 반도 운하의 공사 경험이 축적돼 있었다
-저녁구름+ 바다PAN 5 인평리 운하의 연장선상에서 이곳에 운하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우리 앞에 안면도가 있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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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7
-안면도 연륙 실사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라 육지였던 것입니다.
운하가 뚫려서 섬이 된 것이죠.
지금 경기도 김포에도 운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운하를 뚫으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비록 완공은 못했지만 전체 길이 20킬로미터 중
불과 400미터만 남겨 둔 상태였습니다.
-바다에 조운선 마치 요즘 우리가 고속도로를 건설하 듯 당시엔 운하를 뚫으려 했습니다.
조선은 물길을 통해 대부분의 물산이 교환되고 문화 교류가 이루어 졌던 수상 교통의 나라였던 것이죠.
오늘 우리는 중세 최대의 국토 건설 프로젝트였던 태안 반도의 운하를 살펴 봤는데요 -
그것은 우리 국토가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던 우리 선조들의 국토개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통의 정체와 운송난 환경오염 등 우리 국토의 수용능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또다른 차원의 국토개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오늘 태안 반도의 운하를 다시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