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 지눌스님 53년(1158-1210)의 생애
탄생 및 출가
고려 중엽 제18대 의종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 동주에서 당시 국학國學(지금의 대학이나 대학원과 같은 기관. 신라나 고려에서 쓰던 이름. 조선시대 성균관에 해당)의 학정學正(국학 및 성균관의 정 8품 벼슬)인 정광우鄭光遇를 아버지로 조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8세 또는 15-20세 사이에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闍崛山門(강릉시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굴산사(신라 문성왕 13년인 851년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개산)의 종휘宗暉 선사에게서 출가하였다.
1. 첫째시기 : 개경을 떠나다.
25세(1182)에 개경의 보제사普濟寺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로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여기에서 동료 승려 10여명에게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동사를 결성하고 정과 혜를 고르게 닦자는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지눌이 도반들에게 제시한 새로운 수도 공동체의 이상은 명리의 추구로부터 정혜의 추구로, 도회지의 불교로부터 산림의 불교로, 세간적인 공덕신앙의 불교로부터 출세간적인 해탈 지향적 불교로,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비는 구복불교로부터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수행불교로,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로의 일대전환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약속은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고 홀로 개경을 떠났다.
2. 둘째시기 : 구도와 깨침
1) 육조단경과의 만남
전남 담양군 창평면 청원사淸源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니 비록 육근六根이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만상萬像에 물들지 않고 진성眞性(참된 성품)은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유롭다.” 라는 구절에 이르자 놀라고 기뻐하였다. 여기에서 지눌의 첫 돈오頓悟체험이 살아있는 선사와의 직접적인 대면이 아니라 단경이라는 글을 매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지눌에 있어서는 글과 문자는 진리의 중요한 매개체였다.
2) 대장경과의 만남
청원사에 머문 지 3년 뒤인 1185년에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하가산 보문사普門寺로 옮겨서 3년 동안 반야경般若經, 원각경圓覺經, 능엄경楞嚴經, 기신론起信論, 화엄경 등 많은 경론을 열람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선문에 들어간 사람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경전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그는 사상의 일대전환을 맞게 된다. 화엄경 출현품에 '한 티끌이 대천세계를 머금었다'는 비유,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의 몸 안에 온전히 갖추어져 있지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이익을 얻지 못할 뿐이다.‘는 구절을 읽고는 얼마나 기뻤으면 경전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겠는가? 이것은 단지 문자적·지적 확인이 아니라 오랜 번민과 고투 끝에 얻은 하나의 깨달음의 체험이었다. ’세존이 입으로 설하면 교敎이며 조사들이 마음으로 전하면 선禪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결코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는 독특한 한국적 선교회통적 선의 길을 제시하였다.
3. 셋째시기 :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다.
스님의 나이 31세(1188) 되던 해 봄 대구 팔공산八空山 거조사居組寺에서 옛 동지 3,4인으로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2년 후인 33세 때에 거조사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공포하였다. 결사문에서 어떠한 종파적 편향의 기미도 느낄 수 없다. 선과 교 또는 유가와 도가를 불문하였다. 팔공산 거조사는 도량이 협소한데, 대중은 많아지므로 새 도량을 찾아, 명종 27년(1197년) 스님의 나이 40세에 제자를 보내어 당시 신라의 고찰 송광산 길상사를 확장 중건하기 시작하였다.
4. 넷째 시기 : 또 한 번의 은둔과 수선사修禪社
명종 27년(1197) 스님의 나이 40세 되던 해 시자 2,3인만 데리고 팔공산을 떠나 새로운 절로 가는 도중에 지리산의 상무주암上無住庵에 거하시게 되는데 이때 중국 임제종의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에 의해 대성된 공안선公案禪 곧 간화선看話禪을 만나게 되었다.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용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사에 응하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홀연히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게 되리라.” 여기서 나는 깨우침을 얻어 자연히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았고 원수는 사라져 즉시 안락해졌다. 지눌을 해방시킨 대혜어록의 한구절은 그에게 하나의 공안과 같은 역할을 했다. 지눌은 길상사 개축에 즉시 합류하지 않고 거조사를 떠난 지 3년이 지난 뒤인 1200년에야 그곳에 왔다. 1197년부터 1205년까지 9년이 소요된 개축공사는 희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끝났다. 희종은 명을 내려 산의 이름은 송광산松廣山에서 조계산曹溪山으로 절의 이름은 길상사吉祥寺에서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하도록 하였다. 1210년 3월 20일 병이 들고 8일 뒤 석장을 짚고 평상에 걸터앉은 채 조용히 입적했다.
독후감
1. 진정한 구도자
고려 당시의 불교는 귀족불교였다. 25세에 승과에 합격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대덕이나 중덕, 삼중대사 등으로 승진되어 왕사나 국사로 추대되어 국왕의 최고자문에 응하게 되어 절대특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이러한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동사를 결성하고 정혜를 닦고 노동하고 운력運力(울력)을 하자고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종교계, 불교나 천주교 개신교 등 모든 종교인의 영리추구와 성추문, 대형교회와 교회세습문제에 던지는 진정한 종교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고발장이라 하겠다.
2. 다원주의자
지눌의 정신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통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혜결사문에 나타난 초종파적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정신이 아니겠는가! 선교유도禪敎儒道 즉 선과 교 또는 유가儒家와 도가 道家를 불문하고 초청장을 발송했다는 것은 현재의 용어로 설명한다면 다원주의 종교관이라고 하겠다. 종교 전시장이고도 하는 한국에서 종교전쟁이 없는 것을 보면 모두가 원효의 화쟁이나 지눌의 통합정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한국인 모두는 이 두 분의 통합정신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지눌은 한국의 위대한 선승 정도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이러한 다원주의 종교관을 갖는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지금 시대에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단한 진보적이고도 혁신적인 정신이다.
3. 방황과 갈등의 배움의 길
지눌은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무사독오無師獨悟한 선사였기에 구도역정과정에서 크게는 세 번( 25세 육조단경, 28세 화엄경, 40세 대혜어록) 큰 깨달음을 얻기까지 많은 정신적 방황을 했다. 선에 관한 이론적 저술을 통해서 후학들의 선 수행에 지침을 마련해 주고자 한 것도, 돈오점수론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오점수론은 불교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종교인에게 해당하는 기도나 수행, 수도의 올바른 과정임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