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동방박사의 선물
어렸을 때 시골마을의 언덕 위에 있는 예배당에서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감명 깊은 것은 바로 동방박사의 얘기였다. 동방의 박사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예측하고 별의 인도를 받아 몇 달에 걸친 긴 여행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고 예물을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생각하니 전도사는 천부적인 동화 구연가이셨다. 천사와 동방박사와 헤롯왕이 하는 말을 각기 다른 목소리로 말하면서 마치 2천 년 전의 상황이 어린이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동감 있고 박진감 있게 말씀을 하셨다. ‘뚜가닥뚜가닥~’ 예수를 죽이러 가는 기마병들이 탄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어린이들은 손에 땀을 쥐고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방박사는 예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는데 몰약은 모든 병이 낫는다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아버지가 말년에 중풍에 걸려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꼼짝없이 누워 거의 10년을 보내셨다. 어떤 치료도 효과가 없었고 한약이나 침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동방박사의 몰약 이야기가 떠올랐고 이 몰약을 구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선배 의사 중 한 분은 젊었을 때부터 술을 아주 좋아했다. 다른 비용은 아껴도 술 마시는 비용은 전혀 아끼지 않았다. 어느 여름이었다. 부인이 여행 간 사이 선배가 집에서 일주일 이상 혼자 지내면서 식사를 잘 못했는지 하여간 속이 불편하여 내과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내과 의사가 깜짝 놀라면서 간암 같으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였다. 이분은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하였기에 부산까지 달려갔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간암 말기로 수술은 불가능하고 항암약물치료나 해보자고 말했다. 당시 선배는 40대 초반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하여, 한국에서 안되면 미국이라도 데려가서 살려내라고 아내를 닦달하고 머리를 쥐어박기도 했다.
암 병동에는 어디에고 사기꾼들이 득실거린다. 어떤 유명한 한방대학병원에서 만든 조제약으로 한 알에 500만 원하는데 간암에 특효약이라며 간암 말기 환자가 몇 명이나 이 약을 먹고 완치되는 것을 보았다고 병실에 들어와 일부러 환자가 들리도록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면 판단력이 심하게 흐려지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가려서 듣게 되는 경향이 있다. 부인도 사기 약인지 알았지만 환자가 마치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저 약을 구해오라고 닦달을 하여 어처구니없이 비싼 돈을 주고 약을 구해 먹기도 하였다. 약에 마약성분이 들었는지 약을 먹으면 약간 몽롱해지며 하루 이틀 편안해지는데 곧 고통이 몰려오는 것이다. 그 약을 또 구하려고 하니 벌써 사기꾼은 도망치고 없다. 턱도 없이 비싼 조악한 약들을 먹고 간수치가 치솟아 주치 의사를 경악시킨 일도 자주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으면 돈만 잃는 것이 아니라 병을 더 악화시킨다.
이분은 죽기 전 몇 달 사이에 엄청난 돈을 낭비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가장이 죽으니 가정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어 그 후에 보니 부인은 친척이 하는 한의원에서 한약 짜는 일을 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자녀들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면 평소 건강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평소 건강할 때는 정신도 맑아 평안하게 살다가 불치병에 걸리면 깨끗하게 생을 마감하겠다고 생각해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하루라도 더 살려고 이 약, 저 약, 명의를 찾아 전국을 헤매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암 환자들을 대하다 보면 너무 황당하게 헛돈을 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암 환자들은 다른 99%의 환자들은 죽어도 자신만은 살아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고생하여 번 돈 치료비로 다 쓰고 죽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도 없다. 하지만 빚을 내어서까지 약값을 대다 보면 죽고 나서 남은 가족들이 큰 어려움에 처한다. 평소 건강할 때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지혜롭게 생을 마무리하는 훈련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동방박사가 바친 만병통치약 몰약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