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 전라도(全羅道) 순창군(淳昌郡) 【누정】
귀래정(歸來亭)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 서거정의 기에, “신후(申侯) 자집(子楫)은 고 상국 고령 문충공(高靈文忠公 신숙주(申叔舟))의 막내 동생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 현관(顯官)을 지내어 성명(聲名)이 자자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이 국정을 맡았을 제, 후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어 조정의 물론(物論)이 그에게로 돌아감이 많았으나, 후의 성품은 충담(沖澹)하여 벼슬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후는 순창군(淳昌郡)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서 산수의 즐거움이 있으니, 토전(土田)은 기름지고 새와 고기가 많으므로 후가 날마다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충공의 우애가 지극하여 조석으로 상종하게 되매 결행하지 못한 지가 몇 년이었다. 후의 전원에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매우 간절하여, 하루는 병을 칭탁하고 물러나기를 고하고서 이후로 나가지 않은지가 7, 8년이 되었으매 종족들이 나가기를 권하여도 따르지 아니하니 문충공으로서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내 일찍 들으니, 순창의 남쪽에 있는 산들은 중첩하고 산세는 매우 기위(寄偉)하여 꿈틀꿈틀 하고 낮게 돌아서 혹은 용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범이 뛰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굽히고 혹은 일어나며 혹은 내려앉아 동봉(東峯)이 되었는데 봉우리의 꼭대기는 땅이 아주 평탄한지라 후가 여기에 서너 칸을 지으니, 정자의 좌우에 만죽(萬竹) 단란(檀欒)이 울창하여 사시절 어느 때나,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달이 뜨나 눈이 오나, 모두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운 경치가 하나둘로 말할 수 없다. 그 가운데 화초를 심으니, 홍백색(紅白色) 주자색(朱紫色)이 서로 이어 피고 져 더위나 추위에 끊임이 없도다. 정자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남원의 보련산(寶蓮山)과 곡성의 동지악(動地岳)의 푸른 것이 연이어 높이 솟아 서로 마주 읍하는 것 같고 그 외에 층층한 봉우리와 첩첩한 산줄기, 긴 수림과 무성한 산록은 연기와 구름이 아련한 가운데 기이한 경치를 가져다가 모두 좌석 아래 와서 제공하고, 물은 그 근원이 적성(磧城)의 북쪽에서 발하여 남쪽으로 꺾여 꾸불꾸불 흘러 두 산협 사이로 나오고 다시 합쳐 동쪽으로 흐른다. 광덕산(廣德山)의 산과 물은 용이 서린 듯 뱀이 또아리를 튼 듯이 봉우리 아래로 감고 돌아 적수(磧水)와 합하니, 그 물이 맑고 깨끗하여 희롱할 만하고 거울삼아 비칠 수도 있고, 촌락과 들판은 백 리가 시원스레 보이는데, 누런 밭둑과 푸른 논이 멀리 가까이 아련히 보이고, 밭가는 자ㆍ소먹이는 자ㆍ나무하는 자ㆍ물고기 잡는 자ㆍ사냥하는 자들이 서로 노래로 화답하며, 행락객ㆍ나그네ㆍ소와 말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것을 또한 앉아서 구경할 수가 있다. 후가 날마다 건(巾)을 쓰고 짚신을 신고 그 가운데서 읊조리어, 그 즐거움이 유유작작 하였다. 때로는 개를 끌고 매를 팔뚝에 얹고서 여우와 토끼를 잡기도 하고, 물에 가선 고기 잡으며, 산에 가선 나물캐고, 죽순과 순채를 철따라 먹으며, 국화를 보내고 매화를 맞으니 강촌 사시의 경개가 무궁하여 후의 즐거움도 무궁하였다. 근래 문충공의 병이 심해져 후가 올라와 서로 만나보게 되니 진신(搢紳) 사대부들이 입을 모아 후의 재능을 가지고 천거하니 성상께서도 그의 재능을 중하게 여겨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제수하여 보냈다. 전주에서 순창까지는 하룻길이다. 후는 정사의 여가에 남여(藍輿)를 타고 왕복한 것이 여러 번 있었으니, 후의 정자에 대한 흥취는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금년 봄에 임기가 끝나 서울로 불려가 첨지중추가 되니 후의 몸은 비록 서울에 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정자에 왕래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후가 나와 더불어 정자의 승경에 관해서 이야기 하던 차에 누의 이름과 기문을 짓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 서거정이 ‘귀래(歸來)’라 이름짓기를 청하고 그 설명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귀거래(歸去來)〉는 진(晉) 나라의 은사 도잠(陶潛)의 사(辭)이다. 옛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그 관(官)을 돌려주고 직(職)을 떠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하였다. 대저 고인 가운데 진퇴의 바른 것을 얻은 사람은 도잠이 제일이다. 후세에 뜻이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어려서 배우고, 장성해서는 시행하며, 늙어서 온전히 하기를 바라지 않으리오. 그러나 일단 공명이 그 마음을 더럽히고 처자가 그 욕심에 누가 되어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 때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임하(林下)에 사람이 없다는 비난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 또 듣기에, 옛날의 군자는 벼슬하여 일정한 녹이 있고 나와서는 일정한 업(業)이 있기 때문에 그 진퇴에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벼슬하는 이들은 대개 벼슬로서 안살림을 꾸리므로 달리 일정한 업이 없어 일단 그 봉급을 잃게 되면 갈 곳이 없어지므로 배회하고 돌아보아 자리를 탐하고 국록을 도둑질한다는 비방을 부르게 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 비록 내가 돌아갈 데가 없다하더라도 돌아갈 만한 때 돌아가지 못함은 실로 떳떳할 수 없거늘, 하물며 돌아갈 곳이 있는데도 돌아가야 할 때에 돌아가지 아니하는 사람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제 후의 별장에는 전원도 충분하고 부리는 사람도 충분하여 무릇 제사지내는 일, 손님 접대하는 일, 노인을 봉양하고 어린이를 양육하는 일, 그리고 관혼경조(冠婚慶吊)에 필요한 물품을 밖에서 구하지 않고도 넉넉하다. 전에 후는 공명이 한창일 때도 이곳에 돌아와 몇 년간 자득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다시금 조정에 나서서 고관이 되어 청색(淸色), 자색(紫色)의 인끈을 띠고 있지만 훗날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낸 뒤 용퇴하게 되면 이 귀래정이 아니고 어디 가리오. 그러니 귀래라 이름해도 괜찮치 않은가. 내가 탐욕에 끌려 지금껏 쉴 줄 모르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데, 후를 보고서야 전원에 돌아가는 고상한 취미를 고인에게서 얻어, 훗날 돌아갈 뜻을 이루어 유종의 미를 다할 것을 생각하니, 어찌 심히 부끄럽지 아니하랴. 내 만일 벼슬을 사퇴하여 한가함을 얻어서 후를 따라 이 정자에 오게 된다면, 반드시 귀래(歸來)의 사를 읊조리고 지족(止足)을 노래하여 나의 설명을 마치리라.”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돌아가리, 돌아가리, 뽕나무 가래나무 이미 오래되었고, 전원은 황폐하였네. 도연명(陶淵明)은 일찍이 시골 처사 되어 향리의 소인배에게 허리 굽힘 부끄러워 하였네. 심양강(潯陽江 심양은 도연명의 고향) 머리는 참으로 깊숙한 곳인데, 한 칸의 달팽이 같은 집이 머리를 디밀 만하구나. 삼경(三徑)의 솔과 대는 푸르름을 어지러이 펼치고, 동쪽 울타리의 국화는 누렇게 비로소 탐스러워졌네. 거문고에 줄이 없어도 마음이 절로 즐겁고, 갈포(葛布) 두건으로 술을 거르며 술병을 열도다. 산하가 모두 유기노(劉奇奴 유유(劉裕)의 어릴적 이름)에 속하였네. 그는 홀로 오류(五柳)에 기대어 서리같은 흰 수염을 꼬았네. 자양(紫陽 주자(朱子)의 별호)의 의필(義筆)에 빛나고 소생하게 하였으니 천년의 맑은 바람이 경박한 사람을 돈후하게 만들었네. 지금 성군의 교화가 당우(唐虞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를 능가하니 기룡(夔龍) 같은 신하가 벼슬길에 붙어 있네. 그대의 뛰어난 재주는 문무를 겸했는데, 급한 흐름에서 용퇴하다니 그 아니 어리석은가. 그대가 말했던가, 벼슬길 고통스럽고 기구하여 잰걸음 치다가 그 몸을 상한 자 몇 사람인고. 평생에 본래 성품이 강호에 있으니 지금 아니 가면 장차 어찌 한단 말인가. 보련산(寶連山)은 높아 푸르고 울창하며, 적성(赤城)의 물은 합하여 맑기가 젖빛 같네. 도구(菟裘 고향 별장)의 승지는 기뻐 거할 만하니 헌면(軒冕)을 버리기를 진흙같이 하도다. 천 휴(畦 논 50묘(畝)가 1휴(畦))의 논에는 벼가 익어 누런 구름이 펼쳐졌고, 만 그루의 배와 대추나무 붉은 끈에 꿰어진 구슬이로다. 사방 이웃이 말술로써 서로 노래 부르고 전옹(田翁)과 야로(野老)들은 자리를 함께 하였네. 흔연히 양(壤 흙으로 만든 악기의 일종)을 치며 강구(康衢 요(堯) 임금 때 그의 덕을 노래한 동요)를 노래하니 그 시절이 태평하여 세금을 거두러 떠들며 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였네. 이 즐거움을 끝내 지켜 변함없기 바라노니, 알지 못할게라, 연명도 이 즐거움이 있었던지를. 가을바람 소소히 황려(黃藘) 위에 부리니, 귀흥(歸興)은 홀연히 강동(江東)의 농어(장한(張翰)의 강동 농어 고사)를 생각하네. 갈림길에 이르러 소매를 부여잡고 이별곡을 부르니, 친구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와서 붙드네. 아직 술을 사랑하여 머뭇거리니, 종남산(終南山)이 솜털같은 구름 사이에 외롭구나. 의연히 꿈길은 서울에 가 있는데 때로는 돌아와 지방관을 하였네. 그대를 보내고 붕새가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뜻을 앙모하며, 시를 완성하고 한번 웃으며 부질없이 길게 탄식을 하노라.”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돌아와서 하는 일은 무엇인고, 전원의 세 길이 거칠어 있구나. 봄이 오면 솔과 국화를 돌보고, 손이 오면 술잔을 기울이네. 샘물 줄기는 졸졸 흐르고, 꽃가지는 세세한 향기를 풍기네.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거니, 헌상(軒裳 고관의 수레와 관복)을 반드시 사모할 것 없어라. ○ 돌아와서 하는 일은 무엇인고, 유거(幽居)의 긴 여름날이 맑구나. 죽림 깊은 곳에 사슴을 보겠고, 마을 언덕 멀리 꾀꼬리 소리 듣겠네. 집 짓는 제비가 쌍쌍이 바삐 날아 다니는데, 강에 뜬 갈매기 저마다 가볍구나.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거니, 어찌 헛된 이름에 얽매이랴. ○ 돌아와서 하는 일 무엇인고, 들판에 기운 드높구나. 날 저물어 기러기는 바닷가를 날고, 한 마리 두루미는 수풀 언덕에 있도다. 솥이 매끄러우니 순채나물 삶음이요, 밥상이 향기로우니 게와 새우 나눔일세.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니, 흥이 다시 도도하여라. ○ 돌아와 하는 일 무엇인고, 겨울 기운 처음으로 엉키었도다. 토끼는 추워 굴 속에 숨고, 고기는 얼음 아래 숨었네. 마른 가지는 봄에 다시 무성해질 것을 노리고, 관솔은 밤에 등불이 되었네.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거니, 농사일은 모두 다 끝이 났도다. ○ 돌아와 하는 일 무엇인고, 천석(泉石)을 즐기는 고질병 된 것이 기이하네. 강물은 멀리 넓은 들을 내닫고, 산은 위태롭게 작은 정자를 끼고 있네. 대가 있는 뜰은 고요하기만 한데, 꽃을 사랑해 자리 다시 옮기노라.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거니, 어찌하여 세상과 서로 배치되랴. ○ 돌아와서 하는 일이 무엇인고, 고향에 좋은 자리 얻어서 노네. 산은 푸른데 흰 물이 더 있고, 봄은 따스한데 또 서늘한 가을이 있네. 이미 평생의 일을 결단했거니, 어찌 일찍이 만호후(萬戶侯)를 바랐던가.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나니, 득의한 마음 또한 휴휴(休休 너그러운 모양)하여라.” 하였다.
歸來亭。在郡南三里。○徐居正記:“申侯子楫,故相國高靈文忠公之季也。早擢科第,揚歷淸顯,聲名藉甚。方文忠當國,侯抱奇才,朝廷物論多歸之。然侯雅性沖澹,不樂仕宦。侯有別墅在淳昌郡。淳,湖南之勝地,有山水之樂,土田之饒,禽魚之富。侯日思歸,而文忠友于款至,晨夕相從,未能決然者有年。侯之思歸甚切,則一日謝病告去,因而不起者七八年。宗族勸之起,不從,雖文忠亦不能强也。嘗聞淳之南有山,磅礴扶輿,勢甚奇偉,蜿蜒低回,若龍躍,若虎擲,若屈若起若下而爲東峯,峯之頭地甚坦夷。侯構亭三四楹,亭之左右,萬竹檀欒,蒼然蓊然,四時一節,宜風宜雨,宜月宜雪,其爲勝不一。列植花卉於其中,紅白朱紫相續開謝,貫炎涼而無窮矣。登而望之,則南原之寶蓮山、谷城之動地嶽,攢靑繚碧,拱揖相朝;其他層巒疊嶂、長林茂麓,賈奇眩異於煙雲杳靄之間,而畢呈於几席之下。有水發源於磧城北,折而南流,逶迤演漾,出於兩峽之間,又匯而東。廣德山水龍盤蛇屈,環繞於峯下,與磧水合,泓澄綠淨,可掬可鑑。至如村墟野壟,一望百里,黃畦綠塍隱映遠近,耕者、牧者、樵者、漁者、獵者謳歌互答,遊人、行旅、來牛、去馬絡繹於前後者,亦可坐而見也。侯日巾屨嘯詠於其中,自適其適,而其樂囂囂然者矣。或時牽黃臂蒼,以伐狐兔,釣水而擊鮮,採山而茹芳,燒筍討蓴,送菊迎梅,江村四時之景無窮,而侯之樂亦與之無窮矣。頃者文忠病劇,侯來相見。搢紳士大夫交口薦侯之賢,聖上亦器其才,授全州府尹遣之。全距淳又一日程,侯於剸治之暇,籃輿往復者屢,侯之得於亭者猶舊也。今年春秩滿,召還爲僉樞,侯之身雖在輦轂之下,而侯之心日往來乎亭矣。一日侯與居正語亭之勝槪,而求名與記。居正請扁以歸來,仍演其說曰:‘歸去來者,晉徵士陶潛之辭也。前輩釋之曰:「歸其官,去其職,來其家。」 蓋古人之得出處進退之正者莫如潛。後之有志之士,孰不欲幼而學,壯而行,老而退以全終始者哉?一有功名玷其心,妻子累其欲,當歸去,而不歸去者,滔滔皆是,遂有以來林下無人之誚。予又聞古之君子,仕有常祿,居有常業,故其進退綽綽。今之仕者大抵以官爲家,居無常業,一失其俸,無所於歸,徘徊顧望,以招貪位之譏、竊祿之謗,惜哉。嗚呼!雖曰無所於歸,可歸而不歸,則固未可謂之得。況有所於歸,可歸而不歸者,復何論哉?今侯別業足田園,足使令,凡祭祀賓客、養老慈幼、冠婚慶弔之具者,不待外求而足。侯曩在功名急流之中,歸來自得者有年。今雖復立於朝,紆靑曳紫,他日功成名遂,勇退者,非斯亭而何耶?名曰歸來,不亦可乎?居正因循貪冒,尙不知止,頭髮已種種矣。其視侯得歸來之趣於古人,遂歸來之志於他日,以全終始者,豈不深可愧耶?居正儻得乞骸求閑,從侯於斯亭,則必當詠歸來之辭,歌止足之篇,以畢吾說云。’” 〔新增〕 成俔詩:“歸來乎歸來乎,桑梓已老田園蕪。淵明早作山澤臞,折腰羞向鄕兒徒。潯陽江頭眞奧區,一間蝸舍容頭顱。三徑松竹靑紛敷,東籬甘菊黃初腴。琴中無絃心自娛,起洗葛巾開酒壺。山河盡屬劉寄奴,獨倚五柳撚霜胡。紫陽義筆光昭蘇,千載淸風敦薄夫。當今聖化超唐、虞,夔、龍攀附靑雲途。以君奇才文武俱,急流勇退何其愚?君言宦路苦崎嶇,幾人窘步喪厥軀?生平雅性在江湖,今者不去將何須?寶蓮山高靑鬱紆,赤城水合澄如酥。菟裘勝地喜可居,脫屣軒冕如泥塗。千畦䆉稏黃雲鋪,萬樹梨棗紅纓珠。四隣斗酒相嗚嗚,田翁野老同團蒲。欣然擊壤謠《康衢》,時平不見差科呼。願保此樂終無渝,不知淵明有此無。秋風策策吹黃蘆,歸興忽憶江東鱸。臨岐摻袖歌《驪駒》,親朋觴酒來相扶。尙憐淸渭少踟躕,終南一髮雲間孤。依然夢想在淸都,有時來作雙飛鳧。送君仰慕鵬南圖,詩成一笑空長吁。” ○姜希孟詩:“歸去來何事?田園三徑荒。春還問松菊,客至引壺觴。泉脈涓涓動,花枝細細香。委心聊自樂,不必慕軒裳。” ○“歸去來何事?幽居長夏淸。竹林深見鹿,村塢遠聞鸎。巢燕雙雙急,江鷗箇箇輕。委心聊自樂,何用絆虛名?” ○“歸去來何事?郊原秋氣高。冥鴻遵海渚,獨鶴在林皐。鼎滑烹蓴菜,盤香斫蟹螯。委心聊自樂,逸興更陶陶。” ○“歸去來何事?玄冬氣始凝。兔寒藏土窟,魚下負河氷。榾柮偸春盎,松明當夜燈。委心聊自樂,我稼已登場。” ○“歸去來何事?膏肓泉石奇。江奔平野遠,山擁小亭危。得竹庭偏靜,憐花席更移。委心聊自樂,豈與世相違?” ○“歸去來何事?鄕關得勝遊。山靑兼白水,春煖又淸秋。已斷平生計,何曾萬戶侯?委心聊自樂,得意更休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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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집(四佳集) 서거정(徐居正)생년1420년(세종 2)몰년1488년(성종 19)자강중(剛中)호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본관달성(達城)초자자원(子元)시호문충(文忠)
四佳文集卷之二 / 記 / 歸來亭記
申侯子楫。故相國高靈文忠公之季也。侯早擢第。揚歷淸顯。聲名籍甚。方文忠當國。侯抱奇才。朝廷物論多歸之。然侯雅性冲澹。不樂仕宦。侯有別墅在淳昌郡。淳。湖南之勝地。有山水之樂。土田之饒。禽魚之富。侯日思歸。而文忠友于款至。晨夕相從。未能決然者有年。侯之思歸甚切。則一日謝病告去。因而不起者七八年。宗族勸之起。不從。雖文忠。亦不能強也。嘗聞淳之南有山。磅礴扶輿。勢甚奇偉。蜿蜒低回。若龍躍。若虎擲。若屈若起。若下而爲東峯。峯之頂。地甚坦夷。侯構亭三四楹。亭之左右。萬竹檀𣡵。蒼然蓊然。四時一節。宜風宜雨。宜月宜雪。其爲勝不一。列植花卉於其中。紅白朱紫。相續開謝。貫炎凉而無窮矣。登而望之。則南原之寶蓮山。谷城之動地岳。攢靑繚碧。拱揖相朝。其他層巒疊嶂。長林茂麓。賈奇眩異於烟雲杳靄之間。而畢呈於几席之下。有水發源於磧城北。折而南。逶迤演漾。出於兩峽之間。又匯而東。廣德山水。龍盤蛇屈。環繞於峯下。與磧水合。泓澄綠淨。可掬可鑑。至如村墟野壠。一望百里。黃畦綠塍。隱映遠近。耕者,牧者,樵者,漁者,獵者。謳謌互答。遊人行旅。來牛去馬。絡繹於前後者。亦可坐而見也。侯日巾屨嘯咏於其中。自適其適。而其樂囂囂然矣。或時牽黃臂蒼。以伐狐兔。釣水而擊鮮。採山而茹芳。燒筍討蓴。送菊迎梅。江村四時之景無窮。而侯之樂。亦與之無窮矣。頃者。文忠病劇。侯來相見。縉紳士大夫交口薦侯之賢。聖上亦器其才。授全州府尹遣之。全距淳。又一日程。侯於剸治之暇。籃輿往復者屢。侯之得於亭者。猶舊也。今年春。秩滿。召還爲僉樞。侯之身。雖在輦轂之下。而侯之心。日往來乎亭。一日。侯與居正語亭之勝槩。而求名與記。居正請扁以歸來。仍演其說曰。歸去來者。晉徵士陶潛之辭也。前輩釋之曰。歸其官。去其職。來其家。盖古人得出處進退之正者。莫如潛。後之有志之士。孰不欲幼而學。壯而行。老而退。以全終始者哉。一有功名玷其心。妻子累其欲。當歸去。而不歸去者。滔滔皆是。遂有以來林下無人之誚。予又聞古之君子。仕有常祿。居有常業。故其進退綽綽。今之仕者。大抵以官爲家。居無常業。一失其俸。無所於歸。俳佪顧望。以招貪位之譏。竊祿之謗。惜哉。嗚呼。雖曰無所於歸。可歸而不歸。則固未可謂之得。况有所於歸。可歸而不歸者。復何論哉。今侯別業。足田園。足使令。凡祭祀賓客。養老慈幼。冠婚慶吊之具。無不外求而足。侯曩在功名急流之中。歸來自得者有年。今雖復立於朝。紆靑曳紫。他日功成名遂勇退者。非斯亭而何耶。名曰歸來。不亦可乎。居正因循貪冐。尙不知止。頭髮已種種矣。其視侯得歸來之趣於古人。遂歸來之志於他日。以全終始者。豈不深可愧耶。居正倘得乞骸求閑。從侯於斯亭。則必當詠歸來之辭。謌止足之篇。以畢吾說云。己亥中秋節。
성종 | 10 | 1479 | 기해 | 成化 | 15 | 60 | 가을, 이조판서가 되다. |
[주-D001] 無不 : 不待
사가문집 제2권 / 기(記) / 귀래정(歸來亭) 기문
신후 자즙(申侯子楫)은 돌아가신 정승 고령(高靈) 문충공(文忠公)의 막냇동생이다. 신후는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직을 역임하며 명성이 자자하였다. 바야흐로 문충공이 정승으로 있고, 신후가 뛰어난 재주를 품고 있어서 조정의 여론이 대부분 그에게로 쏠렸으나, 신후는 욕심이 없고 맑은 천성을 지녀서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신후는 순창군(淳昌郡)에 별장이 있었다. 순창은 호남의 명승지로서, 즐길 만한 산수와 기름진 토지가 있고 많은 새와 물고기가 있는 고장이다. 신후가 그곳으로 갈 생각을 매일 하였으나 문충공의 우애가 정성스럽고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신후가 내려갈 생각이 아주 간절해지자, 하루는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고 내려가서는 그길로 벼슬길에 나오지 않은 지가 7, 8년이 되었다. 종족들이 벼슬길에 나오라 권하여도 따르지 않았다. 문충공도 억지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신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순창 남쪽에 산이 하나 있는데 넓고 크며 높이 솟아 그 산세가 아주 기이하고 대단하였다. 꾸불꾸불 감돌아 마치 용이 차고 오르는 듯 범이 뛰는 듯하며, 불쑥 솟았다가 아래로 내려가 동쪽 봉우리가 되었는데, 봉우리의 꼭대기는 지형이 매우 평평하였다. 신후가 이곳에 서너 칸의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좌우에는 쭉쭉 뻗은 무수한 대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사시사철 절개가 한결같다. 바람이 불 때에도 좋고 비가 내릴 때에도 좋고 달이 뜰 때에도 좋고 눈이 올 때에도 좋아서, 그 좋은 경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안에다 꽃을 죽 심으니, 분홍색, 흰색, 붉은색, 보라색 꽃들이 잇달아 피고 져서 여름과 가을까지 이어진다.
올라서 바라보면, 남원(南原)의 보련산(寶蓮山)과 곡성(谷城)의 동지악(動地岳)이 푸르고 푸른 빛으로 서로 공수(拱手)하고 읍(揖)을 하며 조회하듯이 마주 서 있고, 그 나머지 올망졸망한 많은 봉우리와 무성한 숲과 울창한 산기슭이 아득한 안개구름 속에서 기묘한 경관들을 뽐내는데, 그러한 풍경이 이 정자에서 다 보인다.
강물은 적성(磧城) 북쪽에서 발원하여 꺾어 남쪽으로 흘러 구불구불 넘실대며 두 골짜기 사이를 통해 흘러나와서는 또 빙 돌아서 동쪽으로 흐른다. 광덕산(廣德山)의 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봉우리 아래를 휘감아, 적성에서 온 물과 합쳐진다. 푸른 물이 깊고 맑아서 손으로 떠 마셔도 될 만하며 얼굴을 비춰 보아도 좋을 만하다.
또한 시골 마을과 들 언덕이 백 리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누렇고 푸른 논밭들이 눈앞에 은은히 펼쳐져 있다. 밭갈이 하는 사람, 소 먹이는 사람, 나무하는 사람, 고기 잡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들이 노래를 서로 주고받고, 여행하는 사람, 길 가는 사람, 오가는 소와 말들이 앞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도 또한 앉아서 모두 볼 수가 있다.
신후가 날마다 간소한 차림으로 그곳에서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는데 그 즐거움이 만족스러웠다. 때로는 사냥개나 매와 함께 여우나 토끼를 사냥하며, 물에서 물고기를 낚고 산에서 나물을 캐며, 죽순도 쪄 먹고 순채도 따 먹으며, 국화를 전송하고 매화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강촌의 사철 풍경은 변화가 끝이 없었고 신후의 즐거움도 그와 더불어 끝이 없었다.
저번에 문충공의 병환이 심하자 신후가 와서 뵈었다.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신후의 현능함을 말하며 천거하였고, 성상께서도 그 재능을 크게 여겨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하여 보냈다. 전주는 순창과의 거리가 또 하룻길이다. 신후가 공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남여(籃輿)를 타고 오간 것이 수차례였다. 신후가 정자에서 얻은 흥취가 예전과 같았다.
올해 봄에 임기가 만료되어 소환되어 첨추(僉樞)가 되었다. 신후의 몸은 비록 서울에 있었으나 신후의 마음은 날마다 정자를 왕래하였다.
하루는 신후가 거정과 더불어 정자의 좋은 경치를 이야기하다가 이름과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거정이 ‘귀래정(歸來亭)’으로 편액하기를 청하고, 이어 그에 대한 뜻풀이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귀거래(歸去來)’라는 것은 진(晉)나라의 징사(徵士) 도잠(陶潛)이 쓴 말이다. 선배가 그것을 해석하기를, ‘그 벼슬을 돌려주고 그 직임을 버리고 그 집으로 돌아온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대개 옛사람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벼슬을 버리고 들어앉기를 제대로 한 이로는 도잠만 한 이가 없다. 후대의 뜻있는 선비라면 누군들 어려서는 배우고 장성해서는 시행하고 늙으면 물러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번 공명에 그 마음이 오염되고 처자(妻子)에 그 사욕이 얽매여, 돌아가야 하는데도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세상에 즐비하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산림에 사람이 없다는 비난이 있게 되었다.
내가 또 들으니, 옛날의 군자는 관직에 일정한 녹봉이 있고 집에는 일정한 생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나아가고 물러남에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벼슬하는 사람들은 대저 관직으로 집을 삼고 실제 집에는 일정한 생업이 없어서, 한번 그 녹봉을 잃으면 돌아갈 데가 없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대하며 돌아보다가 관직을 탐한다는 비난을 초래하고 녹봉을 도둑질한다는 비방을 불러오니, 안타깝다.
아! 비록 돌아갈 데가 없다고 하더라도 돌아가야 할 때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참으로 옳다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돌아갈 데가 있는데도 돌아가야 할 때에 돌아가지 않는 자라면 다시 무엇을 논하랴.
지금 신후의 별장은 전원(田園)도 충분하고 일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어서, 무릇 제사를 지내거나 손님을 접대하거나 노인을 봉양하거나 어린이를 잘 기르는 등의 일과 관례나 혼례와 경조(慶弔) 등을 준비하는 것이 밖에서 구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신후가 지난번에 공명의 급류 안에 있다가 돌아와 즐겁게 지낸 것이 여러 해였다. 지금 비록 다시 조정에 서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나 뒷날 공적을 이루고 명성을 이루고서 흔쾌히 물러갈 곳이 이 정자가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이름을 귀래정이라 한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거정은 벼슬살이를 단호히 떨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멈출 곳을 알지 못한 채 머리털이 이미 다 짧아졌다. 신후는 옛사람에게서 귀래의 정취를 얻었고 뒷날 귀래의 의지를 이룰 터이니 처음부터 끝까지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 나를 이러한 신후와 견주어 보자면, 어찌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정이 혹시 사직을 허락받아 한가롭게 되어서 이 정자에서 신후와 함께 노닐게 된다면, 반드시 〈귀거래사〉를 읊고 지족편(止足篇)을 노래하여 내 이야기를 마무리하리라.”
기해년(1479, 성종10) 중추절.
[주-D001] 신후 자즙(申侯子楫) : 신말주(申末舟, 1429~1503)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즙(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대사간, 형조 참의, 전주 부윤, 진주 목사, 창원 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첨지중추부사, 전라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다.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이다.[주-D002] 귀거래(歸去來) : 진(晉)나라 도잠(陶潛, 365~427)이 지은 〈귀거래사〉에 나오는 ‘귀거래’를 말한다.[주-D003] 그 벼슬을 …… 돌아온다 : 서거정 이전의 시대에 ‘귀거래’를 이와 같이 풀이한 사람이 있었던 듯하나 미상이다. 이 내용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권4 〈관직부(官職部) 치사(致仕)〉에 채집되어 실려 있는데, 그곳에, “도연명은 을축년(365)에 태어났다. 을사년(405)에 〈귀거래사〉를 지었는데, 당시에 나이가 41세였으니 대개 강사(彊仕)의 나이였다. ‘귀거래(歸去來)’라고 한 것은, 그 벼슬을 돌려주고[歸其官] 그 직임을 버리고[去其職] 그 집으로 돌아온다[來其家]는 의미이다.” 하였다.[주-D004] 밖에서 …… 충분하다 : 대본에는 ‘無不外求而足’으로 되어 있는데, 문리가 통하지 않으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 〈전라도 순창군(淳昌郡)〉에 의거하여, ‘無不’을 ‘不待’로 고쳐서 번역하였다.[주-D005] 지족편(止足篇) : 《노자》 제44장에 “만족할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하였다. 지족편이란 이 구절을 말하는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9
申叔舟 | 1417 | 1475 | | | 高靈 | 泛翁 | 保閑齋, 希賢堂 | 文忠 | 高靈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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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문화재자료
귀래정 (歸來亭)
귀래정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
1동 |
1975.02.05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538-1 |
고령신씨귀래정공파종중 |
순창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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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은 조선 세조 2년(1456)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가 지은 정자로, 지금 있는 건물은 1974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신말주는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서거정이 지은 귀래정기와 강희맹의 시문을 보존하고 있다.
귀래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가 1470년경에 지은 정자이다. 귀래정이라는 이름은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은 당시 가깝게 교유하였던 서거정이 지어 준 것인데 신말주는 귀래정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신말주는 세종(1418∼1450 재위)과 세조(1455∼1468 재위) 때의 대표적 명신인 신숙주의 막냇동생이다. 그는 단종 2년(1454) 과거에 급제하였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크게 기여하여 공신이 된 후 연산군 4년(1498) 70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부인 설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성종 원년(1470)부터 성종 7년(1476)까지 약 7년간 부인의 고향인 순창에 머물렀고, 은퇴한 후에도 순창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현재의 건물은 1974년에 고쳐 지은 것으로 정자의 중앙에는 방을 두었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다. 내부에는 서거정이 ‘귀래’라는 이름을 지은 연유를 기록한 『귀래정기(歸來亭記)』와 당대의 문장가였던 강희맹이 쓴 시문 등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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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전주부윤, 진주목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