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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아래 도산면 가송리(가사리)로 이건하여 복원한 종가집(농암종택)에 선조 농암 선생 불천위 제사(음력 6.13)가 있어 다녀왔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어 후손들이 사당에 신주를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국가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1976년 안동댐 준공(1976.10.28)으로 수몰민이 되어 고향을 잃고 부초 같은 나그네로 살아온지가 어엿 몇 해 였던가. 생각하면 깊어만 가는 상념을 떨칠 수가 없다.
농암聾巖(李賢輔ㆍ1467~1555)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농암가聾巖歌ㆍ어부가漁父歌 등 다수의 강호시가를 남겼으며 현재 농암종택에 있는 숭덕사에 배향되었다(필자의 수필 "분강촌" 참조).
코로나가 오기 전인 2019년 제사에는 전국 종친들이 모여서 함께 하는 제례 의식이 축제 분위기와 다름 없었다. 올해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족친들로 구성된 제관들이 적잖이 줄었지만 여전히 낯익고 반가운 일가들이 많이 참석해서 오뉴월 무더위를 단번에 쫓을 수가 있었다.
종가집에 가서 유년시절 뛰어놀던 배꼽마당(옛날 수몰 전 분강촌 시절, 종가집 구조에서 볼 때 사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 바깥에 있던 넓은 마당, 구인수 아래에 있던 큰 마당, 이건한 가송리 종택에도 바깥 마당이 있지만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음)과 긍구당 분강서원 그리고 애일당과 강각 등을 돌아보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아래 사진 참조: 옛날 1970년대 수몰 전 분강촌 배꼽마당 전경과 ◇◇추억의 아이들 놀이).
도산서원 진입로 아래 넓은 강변 지대에 위치했던 농암 자손들의 원래 터전이었던 분강촌은 안동댐 준공 무렵인 1976년 8월15일 오후 네다섯 시경 무렵에 강물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산너머에 있던 예안은 네 시경에 완전히 수몰됨). 음력으로는 병진년 칠월 스무날이었다. 고려 말엽 1350년경 농암의 고조부인 분강촌 입향시조 이헌 공이 정착한 이래 630여 년 만에 수많은 전설을 뒤로 한 채로 하루 아침에 수몰되는 비운의 역사를 맞이했다.
지금 가송리에 있는 서원과 정자와 종택은 수몰 전과 이후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유적들을 이곳으로 모두 이건하여 2000년대 초반에 복원시킨 모습이다. 종택의 현재 주변 풍광은 낙동강 1300리 가운데 가장 빼어난 선경 지대인 도산팔곡에 해당하지만 수몰 전 우리가 살았던 그 옛날 분강촌과는 사못 달라서 애틋한 추억과 기억을 찾아볼 수는 없다. 다만 유년시절 우리가 오르내리면서 뛰어놀았던 애일당과 강각, 긍구당과 분강서원과 일부 누각들은 여전히 그때의 그 모습으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수몰 전 분강촌은 도산구곡 가운데 도산사곡에 해당하는 수려한 산천으로 둘러쌓인 곳으로 농암과 퇴계가 분강에서 조각배를 타고 어부가를 읊조리며 소요했던 강호시가의 요람 지대였다. 바로 오른편에는 겸재 정선 선생이 71세 되던 1746년에 그린 "계상정거도" 지역인 퇴계 선생(이황 1502~1570: 도산서당 1561년 건립, 도산서원 1574 완공, 1575년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편액 하사 받음)의 도산서원이 있었으며 도산서원 앞에는 도산오곡 지대인 넓은 강물이 고여있는 탁영담이 자리했다. 탁영담 건너 강변 솔밭에는 지금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사단이 고즈넉이 위치하고 있었다.
계상정거도는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 풍광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상수화의 걸작품이다. 그림 속을 자세히 보면 도산서당 속에 앉아서 서책을 읽고 있는 퇴계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 왼편 상단에는 산과 강이 길게 접해 있는 농암의 터전이었던 분강촌이 자리잡고 있다. 겸재는 산수화 속 중앙 상단 바로 좌측 산중턱에 그림처럼 고스란히 걸려 있는 애일당과 그리고 다시 그 좌편 솔나무 숲에 둘러쌓인 농암종택도 잊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계상정거도는 퇴계 사후 177년이 지난 뒤에 그린 작품이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천 원권 지폐의 뒷면 산수화이기도 하다(아래 "계상정거도" 그림 참조).
고등학교 한문 수업시간 때 농암가를 배우면서 농암 선조의 자손이라는 것을 얼마나 뿌듯하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겼던가. 이곳 분강촌에서 수몰 전까지 유년시절을 보내며 산과 강과 바위와 벗하면서 농암이 최애했던 자연을 사랑하는 강호지락의 아름다운 가치를 작게나마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후 내 인생에 있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정신적인 자산이 되었다. 선조의 고매한 얼과 빛나는 정신문화는 선생이라는 "업"을 평생 천직으로 여기면서 살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우리 도산골의 청징한 문화 유산이 후대들에게 선물처럼 전해진 축복이자 큰 은혜였다♧.
♤聾巖(李賢輔ㆍ1467~1555)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농암가聾巖歌ㆍ어부가漁父歌 등 다수의 강호시가를 남겼으며 현재 종택에 있는 숭덕사에 배향되었다(필자의 수필 "분강촌" 참조). 영정(보물 872호ㆍ경상도 관찰사 시절의 초상화, 1537년 옥준상인 그림) 사진에서 나타나듯 농암은 수염이 많고 얼굴이 크고 거무스름하여 사헌부 시절 동료들이 "소주도병"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주었다. 소주도병이란 소주를 담는 질그릇을 의미하는데 이는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맑고 엄하다는 말이다. 사진 속에 당당함과 호방함이 함께 느껴진다. 농암은 벼슬을 하는 가운데서도 백성들에게 시종일관 관대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넉넉한 풍채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로 추앙받고 있다.
◇ 수몰 전인 1960년대 분강촌 시절의 종가집 전경. 볏짚단과 곡식 낱갈이가 쌓여 있는 곳이 배꼽마당이다. 사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과 마당 오른쪽에 자리한 구인수(나무 이름)도 보인다. 자세히 보면 두번째 사진, 구인수 뒤로 넘티재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곤재 길도 눈에 들어온다(윗 사진 오른쪽에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아랫 사진 중앙 상단 지점 뒷산을 보면 갈지자형 언덕 길이 보이는데 이곳이 곤재 길이다. 두 개 사진은 같은 사진이다). 곤재 길로 올라가면 지금의 도산서원 진입로에 있는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있는 곳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넓다란 넘티가 펼쳐진다(사진 출처: 농암종택).
◇◇배꼽마당에서 놀던 추억들: 유년시절 이곳 넓은 배꼽마당에서 아이들이 대깡놀이(구슬로 하는 놀이)와 구슬따먹기놀이 자치기놀이 병뚜껑으로 땅따먹기놀이 등을 하며 뛰어 놀았다. 그 당시 유행하던 삼년고개(오징어놀이, 이까놀이, 요즘 오징어 게임)는 놀이터가 일단 넓어야 하고 또 싸움이 험해서 추수(가을걷이)를 마친 늦가을이나 겨울에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아랫마(아랫마을) 신작로 바깥에 있는 넓은 배추밭이나 땅콩밭과 수박밭에서 했다. 두 팀 싸움편은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 아랫마와 윗마(윗마을)로 자연스럽게 나눠졌다. 윗마 대장은 오연이 할배였고 아랫마 대장은 성기 형님 동생인 해기 형님이었다. 우리들은 사마귀처럼 붙어서 웬수 잡듯이 죽자살자 밀고 당기고 싸우다보면 급기야는 우와기(윗돌이)와 나이롱(나일론) 쓰봉(바지)이 마구 너덜거릴 정도로 찢어졌고 빤스 고무줄도 터졌고 윗돌이 꼬맨자리(깁은 자리)가 또 찢어져서 나중에는 아예 타잔 옷이 되곤 했다. 집에서 수타 야단을 맞았지만 우리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이 신나는 전투를 물들 때까지(수몰될 때까지) 철없이 계속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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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날 어른들이 동네에 물이 든다고... 아니 벌써 물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며 다들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며... 충격으로 우리는 동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세상이 무서웠다. 결코 변할 수 없는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 어느날 눈 앞에서 다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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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위 사진 농암종택 바깥마당에 서 있는 "구인수"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 "농암종택 문헌자료"에 나와 있는 원문을 그대로 아래에 옮겼다.
■ 1960년대 농암종택(1370~현재, 위 사진) 전경(부속 긍구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2호)
[이하 원문 출처 : 농암종택 문헌자료, 17대 종손 이성원 박사 작성]
바같마당의 볏단뒤로 대문채와 구인수, 그리고 안채 동편과 그 뒤로 사당이 보인다. 농암종택의 모습은 1526년의 '분천헌연도', 1710년 무렵 월탄 김창석의 '분강촌도' 그림 등에 그 옛 모습들이 보인다.
종택과 ‘분강촌江村’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은 여러 종류인데, 특히 1526년에 그린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
(보물 1202)’는 선생 당시의 풍광이 잘 나타나 있다. 바깥마당에 거목의 '홰나무(槐木)'가 있어 이를 ‘구인수九印樹’라 불렀다. 그 연유는 선생 당시 아들, 사위 등 9남매가 벼슬을 하여 수연壽宴을 하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그 인끈 9개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또 마당에는 ‘옥인석玉印石’, ‘금상석金床石’이라는 우아한 4각형의 단아한 바위가 있었고, 명농당 앞에는 ‘영금당影襟塘’이라는 아담한 연못도 있다. 그러니까 종택 건물 역시 ‘긍구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니, 600년의 역사는 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1992년 종친 화가 도봉 이택 선생이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을 그린 "분강도"이다. 이택 선생(교육자 및 전 화랑교육원 원장)은 농암 17대 종손인 이성원 박사의 사촌 형님이 된다. 옛날 분강촌 농암종택에는 긍구당 별채 사랑채 명농당 구인수 등이 있었고 위로 올라가면 분강서원 신도비각에 이어 애일당 강각 그리고 농암각자바위(농암 선생 정대 구장壟巖 先生 亭臺 舊庄) 농암바위 등이 잇달아 위치했었다. 그림 제일 왼편에 그려 놓은 농암종택이 바로 윗 사진에 있는 종가집과 배꼽마당 전경이 된다. 그림 속을 자세히 보면 옛날 종택 마당에 있던 나무를 매우 잘 그려놓았다. 이 나무가 윗 사진 배꼽마당에 커다랗게 서 있는 "구인수"이다. 농암 당대 사료에도 나오는 전설적인 그 나무이다(위 "구인수" 문헌자료 참조).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으로 통하는 겸재謙齋(鄭敾ㆍ1676~1759)의 "계상정거도(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겸재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며 문신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인왕제색도 등 다수의 명작을 남겼다.
계상정거도는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풍광을 조망한 그림이다. 이 산수화는 서원 마당 오른편 천연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왼편 상단에 산과 강이 길게 접한 분강촌 마을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분강촌은 농암과 일생을 함께 한 선생의 터전인 고향 동네이다. 그림 속에는 도산서원 앞 전경인 도산오곡에 해당하는 탁영담과 함께 그림 왼편 상단 분강촌 앞에 무성하게 적수되어 있는 도산사곡 지대인 분강 주변도 훤히 눈에 들어온다. 겸재는 산수화 속 중앙 상단 바로 좌측 산중턱에 고스란히 그림처럼 걸려 있는 애일당과 그리고 다시 그 옆쪽 솔나무 숲에 둘러쌓인 농암종택도 잊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이지만 유년시절 우리가 뛰어놀았던 그 시절의 산천과 진배없다.
도산서당 속에 앉아서 서책을 대하고 있는 퇴계선생도 보인다. 퇴계退溪(李滉ㆍ1501~1570)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1574년에 건립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농암과 퇴계는 족질간이며 서른네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잊은 채 학문과 문학을 담론하는 등 벗으로서 분강촌에서 강호지락을 나누며 탈속적인 삶을 살았다.
♤첫번째 사진은 불천위 제사를 올리기 전에 종택 사랑채 사랑방에 걸려있는 선조 임금이 하사한 '적선(積善)' 앞에서 전국에서 모인 종친인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첫번째 사진은 참가한 족친들이 제사 때 올릴 제문을 쓰는 모습이고 두번째 사진은 참석한 제관들의 이름을 창호지에 적는 과정이다. 일종의 방명록 작성이다. 이렇게 한문으로 쓰여진 이름판을 벽에 붙여서 제관들이 왔다는 것을 고하는 의식이다. 벽에 걸린 "적선"은 영천이씨들의 가훈이기도 하다. 선조 임금은 선성삼필(宣城三筆: 매헌 금보, 춘당 오수영)로 알려진 농암의 여섯째 아들인 매암 이숙량(1519~1592)이 왕자사부로 임명되어 인사차 알현하러 갔을 때 농암가문의 가훈이 되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여덟 글자를 즉석에서 써서 내려주었다. "적선을 많이 하는 집안은 후대 자손들에게 필히 경사가 난다"는 말이다. 매암은 왕자사부로 임명은 되었으나 실제 부임하지는 않았다. 세번째 사진은 지난 7월8일 개원한 "농암 孝(효) 문화원" 설립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사진이다(관련 사진 네번째 참조). 필자도 이사로 참여했다. 필자는 농암선생의 16대 손이다. 효 문화원은 농암 선조의 아름다운 효 사상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 차원에서 설립되었다. 농암의 시호는 효절공이다. 농암은 효와 관련되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애일당愛日堂(1512년 건립)과 효빈가效嚬歌, 구로회九老會 등은 농암의 효 사상과 직결되는 유무형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애일당은 "하루 하루 가는 날들이 안타까워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농암이 분강촌 강가 언덕 위에 지은 정자이다. 이곳에서 마을 노인들이 모여 즐거운 여생을 보냈다(사진1~3은 7.30 촬영/ 사진4는 7.8 촬영).
♤불천위 제사를 올리는 광경이다. 모든 족친들이 경건하게 농암과 선대 어른들을 기리며 조상이 남긴 빛나는 얼을 받잡고 계승하기 위해 농암의 신위를 모셔 놓고 불천위 제사를 올리는 아름다운 제례 전경이다(사진1~2, 7.30 촬영).
♤제례 의식이 끝나고 신위를 다시 사당인 숭덕사로 모셔가기 위해 제관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다. 농암선생의 신위는 숭덕사에 배향돼 있다(7.30 촬영).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사진은 농암 선생의 아름다운 효 사상을 태동시킨 정자인 애일당의 옛날 모습이다. 첫번째 두번째 사진 속 애일당 위의 소각은 "강각"이다. 첫번째 사진은 분강촌의 애일당과 강각 주변 풍광을 강 건너 즉, 섬마 아랫 지역에서 촬영한 것이다(애일당 강 건너에서 촬영한 전경). 일제강점기 때 관청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작가는 미상이다. 애일당 아래 긴 수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인(의촌리) 앤떼이(보막이 혹은 물막이)에서 시작된 수로를 분강촌까지 완성한 후 준공 자료를 남기기 위해 촬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두번째 사진은 안동 대륙사진관 월파 윤수암 선생이 1960년대 촬영한 전경이다. 세번째 사진은 작가 미상인 1970년대 애일당 풍경이다. 수려한 산천이 감탄을 자아낸다. 애일당 앞에는 아름다운 분강이 흥건하게 흘러갔다. 네번째 다섯번째 사진은 1976년 안동댐 수몰로 2007년 가송리로 옮겨서 지은 애일당 앞마당과 강각 난간에서 2019년 불천위 제사 때 아내와 함께 한 사진이다. 유년시절 애일당 난간에 올라가서 왼쪽을 쳐다보면 멀지 않는 곳에 도산서원과 섬마 시사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위 다섯 개의 사진은 시대별로 애일당을 전개시킨 모습이다. 첫번째는 일제강점기, 두번째는 1960년대, 세번째는 1970년대, 네번째 다섯번째는 2019년 전경이다.
강각은 1544년 농암이 농암바위 조금 위에 강가에 지은 소각 명칭이다. 강각은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누각이다. 영남가단은 시를 쓰는 모임이었다. 이 가단의 심지 속에서 농암가, 어부가 등이 탄생하였으니 강각은 필시 영남가단과 농암의 대표적인 시작을 탄생시키는 단초 역할을 한 시상의 요람이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강각은 퇴계와 김안국 주세붕 이언적 이해 황준량 조사수 임내신 등의 당대 걸출한 유학자들이 함께 한 명소이기도 하다. 부엌에서 제사상 차림을 도와주던 아내와 함께 잠시 강각 난간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첫번째 두번째 애일당 위에 보이는 강각은 수몰 전 옛 분강촌 에 있던 강각의 모습이다. 사진 다섯번째 필자가 걸터 앉아 있는 정자의 난간은 지금의 강각 모습이다. 세월의 간격이 어림잡아도 80여 년이나 된다. 차종손(이병각ㆍ현 tvN joy Producer)이 멋지게 담아주었다.
♤2019년 농암선생 불천위 제사(음 6.13)때 종택에 있는 농암 선조 영정 앞에서 아내와 함께 한 기념 사진이다. 우리 종손(이성원 박사ㆍ2023년 71세)이 촬영했다.
♤첫번째 그림은 수몰 전 옛 분강촌 전경
인 "분강도"이다. 이 "분강도(1992년 작)"를 그린 족친 도봉道峯 이택李澤 선생(경북교육청 장학관ㆍ경주 전 화랑교육원 원장ㆍ국민훈장 홍조근정훈장 수상ㆍ2023년 78세)과 불천위 제사 때 처음 만났다(7.30 촬영). 도봉선생은 농암 17대 현 종손 (이성원 박사)의 사촌 형님이다. 필자 보다 연세가 훨씬 더 많아서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선생은 항렬이 높은 필자를 족숙이라는 이유로 극구 아재라고 부른다. 필자의 수필 속에는 형님의 "분강도" 그림이 자주 나온다. 형님은 안동댐 준공 무렵인 1976년 8월15일 오후 네 시경에서부터 여섯 시경에 걸쳐 예안(옛날 예안 즉, 구예안)과 고향 분강촌(분천동, 부내)이 수몰되는 서글픈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다.
♤애일당과 강각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수몰 전 유년시절 분강촌 이 곳 정자 마루에서 뛰어놀던 그 세월이 생각나서 깊은 상념에 젖곤 한다. 반세기가 흘러갔지만 누각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수몰 후 가송리로 이건한 애일당과 강각의 전경이다(7.30 촬영).
♤농암종택 사랑채 난간에서 바라본 주변 산천 풍광이다. 멀리 학소대가 작게나마 눈에 들어온다(7.30 촬영).
♤청량산은 영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릴 만큼 풍광이 수려하다. 그 청량산 줄기가 협곡 속에 산수화처럼 펼쳐진 가사리를 품고 있다. 온동네가 비경 속에 둘러쌓여 있지만 역설적으로 가사리는 천옥이라 할 만큼 매우 폐쇄적인 지형이다. 인간의 발길이 드물었던 이곳은 산과 강과 바위들이 터전을 일구며 도산팔곡의 아름다운 비경을 낳았다. 퇴계의 "예던길" 강 건너편 왼쪽 강변에 하얀 띠 모양으로 길게 줄지어서 고즈넉이 자리한 농암종택과 애일당 강각 분강서원 긍구당 등 농암의 아름다운 문화 유적들이 시야에 확연히 들어온다(♤사진: 때때옷의 선비 농암 이현보, 국립중앙박물관, 2007: 농암종택 주변 산천의 풍광).
♤농암 선생 묘소 전경이다. 농암은 도산 운곡에 묻혔으나(1555년) 1791년 10월(사후 237년) 신남리 정자골 현재 위치로 이장했다. 농암 사후 선생의 행장과 묘비 전면은 퇴계가 썼으며 1791년 10월 도산 운곡에 있던 산소를 신남 정자골로 이장한 후 개갈 때 묘비 전면은 번암樊巖(채제공蔡濟恭ㆍ1720~1799)이 했다. 조선 후기 정조 때 명재상이었던 채제공은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도산서원 강 건너에 있는 시사단의 비문도 번암이 썼다. 시사단은 퇴계의 유업과 얼이 배여 있는 도산골을 대표하는 기품있는 소각 정자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듯 번암 채제공은 도산골과도 인연이 깊은 재상이었다. 사진은 지난 2020년 구정 다음날에 농암 선조 묘소에 새해 인사를 가서 담은 전경이다. 두 분의 문인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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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76년 안동댐 담수을 시작하면서 부터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들. 그 유서 깊은 터전들이 수장 되다니~
옛날이었으니 가능 했겠지
요즘 같으면 불가능 할텐데
상념이 깊어질 때는 가끔씩
"요즘 시대 같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네.
도산골 수몰민들 모두가 생각하는 마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