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탕한 수면생활에서 벗어나라
잠 19:15 /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 눈에서 잠 떨어질 날 없고, 목구멍에 거미줄 칠 수밖에 없으리라.
잠 20:13 / 쪽박 차지 않으려면 잠자는 것 좋아하지 마라. 잠자리에서 두 눈을 얼른 뜨면 밥그릇 빌 일이 없다.
1. 잠 자체에 대해서 / 잠을 얼마나 자야 할 것인가?
우리가 하루 일상을 아주 바쁘게 일하며 살다가 일로 인해서 많이 힘들 때, 잠시 육신을 쉬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무한정(無限定) 긴장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드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가끔 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쉼의 최고의 방법은 잠을 자는 것으로, 잠을 잘 때 육체와 마음을 푹 쉬게 한다. 그래서 잠은 쉽고 달콤하고 평화롭다. 잠자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편안히 쉬는 시간이다.
그러나 반면 게으름이 배어들기 아주 좋은 때이다. 과도(過度 - 정도에 지나침)하게 잠을 자는 문제는 가책(苛責 - 몹시 심하게 꾸짖음)을 덜 느끼는 죄인 동시에 우리의 영적 생활에 아주 심각한 폐해(弊害 - 폐단으로 생기는 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야 할까? 얼마나 자야 건강한 수면생활이고, 얼마를 자야 방탕한 수면생활일까? 이것은 획일적(劃一的 - 한결 같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질적으로 너무 약해서 잠을 많이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보다 적게 자고도 활기차게 하루를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잠의 문제는 과도한 잠이 문제가 될 때, 그 잠에 대한 예리한 판단이 필요하다. 잠이 쏟아지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육체의 피곤함에서 오는 생리적인 현상인지, 어디까지가 영적인 게으름에서부터 오는 잠인지 정직하게 판단해야 한다.
물론 게으름에서 비롯된 수면 욕구도 몸의 피곤을 동반한다. 그래서 더 자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피곤하지도 않은데 잠자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게으름의 경우는 더 자지 않아도 충분히 재충전이 끝났고, 활기찬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저 수면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고, 쉼을 통해 육신의 편안함과 즐거움 자체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수면욕이 얼마나 클까? 8시간만 자면 충분할까? 아니다. 그러면 10시간이면 충분할까? 아니다. 게으르면 하루의 반나절을 누워있기도 한다. 육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또는 잠이 온다는 이유로 계속 자고, 그래서 피곤하지 않을 때까지 충분히 자는 것은 게으름이고 그런 삶은 동물적인 삶이다. 돼지가 자명종 틀어놓고 자는 것 본적이 있는가? 동물은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본능에 충실하게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 사람이 동물과 차별되는 것은 그 욕구를 절제하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의 수면생활에 대해서 정말 육체의 쉼이 필요해서 피곤을 느끼고 자는 것인지? 그래서 어느 정도 충전이 되었으면 잠을 절제하고 일어나는지? 아니면 게으르게 쉬고 싶고 편안히 자서 수면욕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싶어서 잠을 자는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자기 육체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어느 지점까지 내가 일할 수 있고, 어느 지점까지 긴장을 견딜 수 있고, 내 육체가 어느 지점까지 버텨낼 수 있는지? 또 얼마만큼 휴식을 취하는 것이 재충전을 위한 휴식인지? 그런 것들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몸이 안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디까지가 순수하게 아프기 때문에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게으름이 병합되어서 그것을 핑계로 자는 것인지? 영적으로 잘 분별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다.
어쨌든 건강이 안 좋으면 잠을 푹 자야 한다. 그러나 건강하다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잠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 건강한데도 퍼질러 자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보시라.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는가? 그러나 잠을 자면서 그러한 기회를 낭비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까?
2. 잠언 본문 해설
본문을 보면,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게으름은 잠을 사랑하고, 잠을 많이 잔다.
잠 19:15 /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여기서 ‘깊은 잠에 떨어지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기 위해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창 2:21). 그것은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혼수상태(昏睡狀態 - 완전히 의식을 잃고 인사불성이 된 상태) 또는 무아(無我 - 자기의 존재를 잊는 일)지경, 비몽사몽(非夢似夢 - 깊이 잠들지도 깨지도 않은 어렴풋한 상태)의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은 결국 주리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 해태(懈怠 - 게으름)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해태하다’는 말은 ‘태만, 부주의, 느림, 느슨함’을 말한다. 뭔가 바짝 쪼여오는 긴장이 없으니깐 눈이 풀리고 온 몸이 느슨하게 풀려서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게으름이 잠을 떨어뜨린다’는 말에서 우리는 게으름을 해결해야 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으른 본성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잠을 줄여보겠다고 메스를 꺼내들고 마구 자기 삶을 수술하면, 필시 작심삼일이 될 것이다. 먼저 게으름 마음이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알고, 자신의 게으름의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달아서 깊이 회개하면서 결단하여 그 목표를 향해서 살고자 하는 불붙는 열정이 생겨야 한다. 불붙는 인생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밤에 잠이 안 온다. 아침 일찍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잠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잠을 이길 수 없다.
잠 20:13 / 쪽박 차지 않으려면 잠자는 것 좋아하지 마라. 잠자리에서 두 눈을 얼른 뜨면 밥그릇 빌 일이 없다(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게으른 자는 잠을 사랑하고, 쉬는 것을 좋아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늘 땀이 흐르고 그 눈빛이 초롱초롱 빛이 나지만, 게으른 사람들의 얼굴에는 개기름이 흐르고, 눈은 늘 풀려있고, 잠 오는 눈을 해가지고 다닌다. 게으른 사람은 쉬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일하는 시간이 가끔 있다. 악보에 비유하자면 게으른 사람은 콩나물 대가리는 없고, 쉼표만 계속 나오다가 어쩌다 한 번씩 콩나물이 나오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는 음악이 성립될 수 없다.
그렇게 게으른 사람들은 대부분이 쉬는 시간이고, 간헐적(間歇的 -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으로 일을 한다. 일을 할 때에도 게으름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대충한다. 그런 사람들이 경쟁적인 사회에서 계속해서 도태되어 가는 것이고, 결국에는 가난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성실하게 일하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한 후에 어느 순간에 숨표같이 쉬는 시간이 오면, 그들은 그 쉼 속에서 지리하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그 쉼의 달콤함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의 피로를 알고, 땀을 흘려본 사람만이 쉼의 참된 즐거움과 우리를 새롭게 하는 쇄신하는 힘을 경험할 수 있다.
3. 수면생활이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
왜 수면생활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경건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 경건시간은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정규적인 삶의 끝자락에 방치되어 있다. 오후 2시부터 3시까지를 기도시간으로 정해 놓은 사람이 있는가? 남의 돈 받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기도시간이라고 정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경건생활은 직장에 가기 전으로 앞당겨지든지, 아니면 직장에서 퇴근 한 뒤로 밀리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두 시간 모두 방탕한 수면생활에 의해서 짓밟히기 쉬운 시간들이다. 그래서 잠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요인이다.
졸린 잠을 깨치며 새벽기도를 해야 하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더 배우려고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또는 인터넷 설교를 듣기도 하고, 경건서적들을 붙잡고 밤늦도록 불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을 다 알고 있고,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들어가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우리의 마음과 욕구와 모든 영역에 이미 배어 들어가 있고 그러한 게으름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하나의 삶의 패턴이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그것은 쉽게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4. 습관을 고쳐라
우리가 수면의 방탕함으로 인해 낭비되는 시간 중 단 30분만이라도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매일 투자한다면 삶의 현장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단 30분이 아니라 단 1분도 누리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육체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일을 할 때면 엄청난 고통(?)이 느껴진다. 게으름과의 싸움은 결국 습관과의 싸움이다. 습관을 고치는 것은 피 흘리는 대가와 노력이 필요한데 그러한 대가를 치르고 노력하는 것이 없이는 그 어떤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5. 예수님의 모범
그래서 힘들어서 쉬고 싶을 때 그리고 게으르게 살고 싶을 때마다 우리 인생의 최대 모범이신 예수님의 인생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떤 생애였는가? 예수님도 휴식하신 것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한다. “물러가 쉬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이 게으르셨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그분은 초인적(超人的 - 보통 사람보다도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인 일과를 소화하시면서 사람들을 섬기는 생애를 사셨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하루의 일과가 다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박해받으시는 장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장면, 숙소에 돌아오니까 수많은 병자들이 다 몰려와서 고쳐달라고 하였다. 이때 예수님께서 “근무시간 끝났다. 너무 피곤하다.”라 하시지 않고, 그 사람들을 고쳐주시되 일일이 고쳐주셨다. “다 나아라!”라는 말씀 한마디로 쉽게 하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 만져주셔서 인격적인 돌봄이 있는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주셨다. 그리고 새벽에 잠드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나오는 기사가 무엇인가?
막 1:35 / 다음날 이른 새벽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나가 기도하고 계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이다. 죄도 없으시고 순결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신 그분이 이렇게 초분을 아껴 쓰시면서 사셨다면, 하물며 우리야 얼마나 더 잠을 줄이고 기도에 힘써야 하겠는가? 우리에게 탁월한 능력이나 천재적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결함도 없고, 엄청난 영성을 가진 것도 아닌데, 우리가 뭘 믿고 이렇게 안일하게 살고 있는지? 우리는 이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도전을 받아야 한다.
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우리에게 높은 도전을 보여주셨다.
막 1:36-38 / 그때 시몬과 일행 몇 명이 예수를 찾아 나와서 37) 예수를 만나자 이렇게 말하였다. `모두가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38)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리는 다른 이웃 마을에 가서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몸의 연약함을 가지셨다. 그분도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복음 전하는 것보다는 쉬시는 것이 그분의 육신에는 더 편했고, 밤늦도록 병자를 고치고 핍박과 모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대와 영광과 칭송을 받으시면서 안전한 환경에 계시는 것이 그분의 육신에도 그것이 훨씬 더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리고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그런 꿈과 사명과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 꿈을 위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모든 혼신을 쏟아 부으시면서 3년의 공생애를 불꽃처럼 사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닮아야 한다, 그분의 성품을 닮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 바로 그런 삶을 가능하게 경건생활의 모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이 경건생활의 모본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밤에 한적한 곳을 가셔서 기도하셨다. 밤 기도를 말한다. 그리고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다. 새벽기도이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고자 할 때,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 경건시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벽기도와 밤 기도이며, 그것은 잠을 줄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6.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실천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게으름과 작별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이 경건시간을 갖기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방안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안 하고를 분명하게 정해야 비로소 삶의 습관을 고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두루 뭉실하게 “부지런하게 살아야지..”라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찔끔하는 것으로 끝낼 때가 많다. 그러면 집으로 가서는 재미있는 드라마 한편 보고 나면 다 잊어버린다. 그러고 또 주일날 와서 게으름 강의를 들으면서 “아참... 그렇구나... 부지런하게 살아야겠구나!” 그리고 나서 다시 잊어버리고 일주일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안 고치고도 게으름에 관한 수많은 가르침에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말씀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나 말씀에 충격만 받으면 뭐하는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돌아와서 올바르게 살아야하는데 몇 일 안 되어서 그 충격이 사라진다. 그것은 충격 받은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수면방해를 받은 것이다.
깊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데, 영적수면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적수면을 방해한 것이다. 깊이 잠들어서 숙명처럼 잠들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팍 찌르니깐 “으악... 누구야? 하나님이신가? 말씀이 날 찔리네... 되게 찔린다...” 한 후에 다시 잔다. 말씀이 자신의 영적 수면을 방해한 것이다. 변한 게 없고,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그런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불결한 삶이다. 돼지가 씻었던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삶을 반복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에 빠져 있는 상태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인지 상상해보시라. 어린아이가 자는 것은 참 예쁜데, 어른들이 잠자는 것은 추하다.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입에서는 이빨 썩은 냄새나고, 자다가 방구 뀌고, 코를 골고, 이를 갈고, 말도 안 되는 잠꼬대하고... 등등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모습인가?
▶ 그러므로 우리가 두루 뭉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방안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진단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게으르다면, 뭐가 어디가 게으르게 살았는지, 진단하고, 파악해야 한다. 매일 매일 하루를 돌아보면서 일기를 쓰는 것도 중요한 방도가 될 수 있다. 영적인 거장들은 대부분 일기를 썼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래서 진단을 해서, 잠이 많으면 자신의 건강상태를 생각하면서 ‘잠을 몇 시간 이상 자는 것은 죄다.’ 그렇게 정해서 잠을 줄이고, 또 쓸데없는 바보상자에 앉아서 한없이 시간을 보냈다거나 밤새도록 인터넷이나 게임하면서 시간을 낭비했으면, 그런 시간을 없애거나 줄일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내일부터 새벽기도를 하겠다, 아니면 밤 기도를 하겠다.” 그렇게 경건시간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으면서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부터 실천하려고 몸부림 쳐야 한다. 여기에는 피를 흘리며 몸부림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각오까지 하라.
물론 우리 각자에게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고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연약한 육신을 가졌다든지, 정신없이 밀려오는 직업적인 노동으로 인한 피곤함이나, 여러 가지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든지... 등등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까지도 그리고 환경까지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어서는 안되고, 그것과 싸우며 투쟁해야 한다. 이러한 몸부림치는 삶이 없이는 우리 삶에 어떠한 신령한 것이나 어떠한 성화의 삶도 기대할 수 없다. 땀 흘리고 자기를 쏟아 붓는 실천이 없이, 우리들이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들에게 주신 회심의 감격을 은혜 가운데 보존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가 게으름과 화목하게 지내는 한 복음과 화목할 수 없고, 게으름과 화해하고 살아가는 한 영적 생명의 풍성함은 누릴 수 없다.
▶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의 길이 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 길이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자신의 인생으로 친히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믿음의 길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죽을 각오로 걸어가야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셨다. 일사각오의 신앙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영원한 안식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때는 잠과의 싸움도 필요 없고, 알람시계 맞추며 새벽 기도 시간에 일어나지 못할까봐 긴장해야 할 필요도 없다. 참된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것이 없고, 맘껏 쉬는 때이다. 쉬는 것은 그때 마음껏 쉬면 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아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할 때이고, 허리띠를 동이고 살아야 할 때이다.
그래서 나태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고3이다’라고 스스로 쇠뇌를 시켜야 한다. 고3은 여행을 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하자...”,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하자”, 마음껏 놀고 싶어도, 마음껏 자고 싶어도, “대학갈 때까지만 참자” 그렇게 다짐한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쉬고 싶고, 놀고 싶어도 ‘천국 가서 하자’하며 참아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종말론적 긴장이다.
고3이 모든 즐거움을 뒤로 하고 공부에 매진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사는 동안 이 세상의 즐거움과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 곧 이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온전히 매진하고 몰두해야 한다. 반드시 우리가 잠을 줄이고, 경건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잠을 줄이는 것이 쉽지 않고, 잠을 줄이는 것 때문에 평소보다 더 큰 피로감에 시달릴 수 있고, 심지어는 그것이 무리가 되어서 건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헌신해서 육신이 쇠패하고 나약해진 것이, 게으른 채로 살아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낫다. 조지 휫 필드는 “썩은 채로 오래 살다 죽느니, 차라리 닳아서 죽겠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셨고 또 피 흘려 구원해주셨는데, 우리가 이 은혜를 생각하면 마땅히 나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물질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시간들을 다 하나님을 위해서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잠을 줄이고, 경건시간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어떤 사람의 간증처럼 사는 게 바쁘고, 너무 고달파서 새벽기도까지 했다가는 쓰러질 것 같고, 건강이 나빠질 것 같아서 망설였다. 그러나 목사님의 강권으로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을 때, 그는 피곤이 사자와 같이 자신을 찢을 줄 알았는데, 막상 1-2주를 해보니깐 놀라운 체험하였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힘들 거라는 것만 알았지, 힘든 것을 극복하고 나오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사 40:29-31 / 그는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고 약한 이들을 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30) 젊은이들도 지쳐서 피곤해지고 용사들도 비틀거리고 넘어지지만 31) 오랫동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다시 새 힘을 얻어서 마치 강풍을 타고 창공으로 치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영에게 이끌려 올라갈 것입니다. 그들은 뛰고 달려도 피곤한 줄을 모르며 아무리 먼 길을 걸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건강한 장정이라도 피곤하지만,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듯이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활기차고 힘 있게 걸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공적으로 새벽기도가 없을지라도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새벽기도를 꼭 하시기 바란다. 밤늦게까지 인터넷하지 말고,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