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다비다의 갱생
행9:36-43
서 론
“다비다”는 노루 같은 여성 혹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영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 중에는 있으면 안될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 등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는 있으면 안될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징벌로 죽었고 “베드로”는 전도사업에 꼭 필요한고로 천사를 보내어 몇 번이나 구해 주셨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다비다의 부활도 그가 생전에 선한 일을 많이 하였거니와 또 너무나 필요한 인물이기에 베드로의 기도와 성도들의 눈물을 보시고 다시 살려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다비다같이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일상 생활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다비다는 선행가였습니다.
(행9:36)에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했습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녀의 숨은 선행은 그가 공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애도(哀悼)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구제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외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능력이 닿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마6:1, 눅11:41).
그 외에도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구제를 하되 반드시 사랑이 수반되어야 하며(고전13:3) 은밀하게 양심에 꺼리낌없이 행해야 합니다(행24:16-17). 무엇을 하고자 의욕에 불타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자신 사업에 대해 탁상공론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때로 자선 사업에 대해서 어떠한 제안을 하곤 하지만 곧 그것들을 실행하는 일에는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 버리고 맙니다.
반면 다비다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고 고심했을 뿐만 아니라 몸소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면 많은 여성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행과 자선적인 사업을 하는 데에 뛰어 났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리스바”는 죽은 자에 대한 애정 어린 보살핌 때문에 기억된 여인이었고 (삼하3:7, 21:8),
* “사르밧”의 과부는 굶주린 선지자를 잘 대접하므로 기억된 자이고(삼상17:8-16),
* “안나”는 밤낮으로 단식과 기도로 보낸 예언자로서 기억이 되는 자이고,
* “마르다”는 호의적인 환대를 보여준 여왕으로 기억이 되고,
* “마리아”는 값진 향유가 든 옥합 때문에 기억되고,
* “요한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거룩한 사역 때문에 기억이 되고,
* “다비다”는 과부를 보살펴주고 가난한자를 구제한 여성으로 기억되고 더욱 성경에 나오는 몇몇 여성들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고수적인 자신의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방황하는 타락한 젊은 여성을 위한 안식처를 마련했으며 나사로는 병들고 가난한 자를 위한 의료기관을 설치했고 그리고 다비다는 자선 사업 가운데에서 특히 자신의 교회와 단체에 속한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손수 애정 어린 손길로 의복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이 기독교도인 박애가(博愛家)는 실제적이고 희생적인 봉사를 통해서 온 세상을 훈기로 물들였으며 그녀가 가진 탁월한 능력으로 소도시인 욥바를 수많은 자선 단체로 범람케 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저는 가난한 과부였지만 한 세기에서 좋은 점을 남긴 자였습니다. 성도들이여 나의 가진것 작다고만 하지 말고 있는 것 가지고 이 사회에 조명해 봅시다. 그 방면으로 노력만 한다면 주님은 또한 함께 하실 것입니다.
2. 그녀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 받고 헌신적이던 신자 한 사람이 한창 자선사업을 벌이다가 죽어 버리자 욥바에 있는 교회로서는 비통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은 재앙의 한 표시이며 분명한 하나의 타격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비다의 죽음은 비록 그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몸담고 있던 단체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값비싼 약품을 담았던 그릇이 깨져버린 것처럼 그녀가 죽어 버리자 전과 같이 방에는 향기로운 냄새로 피어 오르지 않았습니다. 친절한 손길들이 그녀의 시체를 염(殮)하여 다락방에 안치하면서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詩)로 읊었습니다.
형제여, 여름 미풍처럼 부드러운 너는 온화하고 사랑스런 자 나뭇가지 사이로 살랑거리는 아침 공기처럼 유쾌한 다비다는 집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친척이 없었습니다. 다비다가 자선을 베풀었던 과부나 친구로 삼았던 사람들은 그녀의 입관(入棺)을 준비하면서 비탄에 잠겼습니다. 다비다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런데로 근면 했지만 한창 나이에 죽어 버린 것입니다. 본인은 설교가인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늘 변사(變死)하고 싶다고 말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복음을 설교하다가 그는 끝내 급사(急死)하고 싶다고 말했었습니다. 다비다가 바느질감을 손에 쥔 채 갑작스럽게 주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 이와 같았을까? 다비다가 급사한 사실은 얼마나 놀라울까?
이같은 많은 사연을 남기고 그녀는 죽었습니다. 즉 그녀는 아쉬운 죽음이었습니다.
3. 작은 유산을 남기고 죽은 자
다비다가 남긴 유산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이라고는 값으로 계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속옷과 겉옷 몇 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웬만한 사람이 죽은 후 남긴 유산에 비교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커다란 빌딩과 넓은 땅 그리고 엄청난 액수에 달하는 재물과 방대한 사업을 유산으로 남긴 것과는 비길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을 살펴 본다면 진정한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다비다가 남긴 유산은 얼마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실로 귀중한 가치를 지녔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비다가 생전에 헐벗고 사람들을 위하여 속옷과 겉옷을 손수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은 얼마 안되지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들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이와 같은 구제와 선한 사업의 가치는 그녀의 형편으로 볼 때 더욱 귀중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아하니 그녀는 자식도 없는 외로운 과부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에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는데도 그녀가 가련한 이웃을 도운 것은 이웃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헌신적이었는가를 말해줍니다. 많이 가진 중에 얼마를 적선하는 것과 없는 가운데서 전체를 바치는 것과의 차이는 가난한 과부가 그녀의 생활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사실에서 족히 알 수 있습니다(눅21:1-4).
이처럼 다비다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심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면에서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얻기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큰 건물, 큰 자리, 큰 교회, 무엇이든지 큰 것을 사랑하고 큰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눈에는 다바다와 같이 지극히 작은 것으로 선한 사업을 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매우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칭찬하시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인정을 받도록 봉사하고 충성을 합시다.
4. 진실한 이웃이 된 자이였습니다.
다비다가 남긴 것 중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한 이웃이었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재산이나 사업을 유산으로 남기지 못했으나 그녀의 구제와 선한 행위들이 그녀의 도움을 받은 이웃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돕고 사랑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본을 다비다에게 배운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다비다가 죽었을 때 그녀의 이웃들이 모여 진실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도 베드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데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재물이란 죽은 다음에는 그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는 죽을 때 재물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 재물에 그의 죽음을 변화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여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시49:6-8). 살아 있는 동안 선행과 구제를 쌓은 그녀는 살아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참된 이웃이 함께 하였으니 이것을 복된 인생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상당한 유산을 남기고 가나 진실된 이웃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의 재산과 사업 재물에나 관심이 있을 뿐 그런 사람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실로 사기적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비다의 죽음 앞에서는 진정한 애도였습니다.
5. 다비다는 종교적인 부흥을 일으킨 자
다비다의 회생(回生)은 두 측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하나는 기적을 통하여 그녀가 선행과 자선 사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던 모든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자비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과 동일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기적적인 힘을 통해 입증된 기독교 신앙의 모든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시켰다는 것입니다.
욥바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기적은 단순한 기적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에서 되살아난 다비다는 죄와 불신앙의 무덤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소생(蘇生)시켰습니다. 욥바의 교회가 더욱 결속할 수 있게 된 것은 죽음에서 회생한 다비다로 인해 구원받은 수많은 자를 통해서 였습니다. 다비다의 기적을 행한 베드로가 얼마동안 욥바에 머무름으로 해서 새로운 개종자들을 보강하는 데에 있어 그의 임무가 교회가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6. 다비다는 죽음가운데에서 갱생한 자
(행9:41)에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했습니다. 다비다가 예배를 보던 교회의 동료 사도들은 베드로가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사람을 보내 그에게 간청하여 비탄에 잠겨있는 이 교회를 방문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기적을 행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몹시 사랑하는 다비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확실하게 가졌습니다. 충직한 사역자였던 베드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두 명의 동료를 대동하여 과부들이 모여 죽은 자를 애도하고 있는 욥바의 다락방으로 왔습니다. 과부들이 다비다가 그들을 위해 전에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경건하게 다 내보였을 때 베드로는 분명히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예에 따라서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요청이 주님께 받아들여 졌음을 겪을 때 강력하고 권위 있는 말로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으며 다비다는 삶을 되찾았습니다. 다비다가 일어나 앉자 베드로는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산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로써 당시 성도와 과부들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으며 다시 회생(回生)하여 주님을 위한 봉사를 보다 충실하게 헌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비다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함으로써 그녀가 관여하던 교회에 커다란 유익함을 준 것이 확실합니다. 다비다의 오직 하나의 번민은 혹시나 그녀가 재차 병을 앓아서 또다시 죽음의 문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7. 다비다가 되살아 난 과정은
첫째,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공중 집회를 갖곤 하였던 다락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보려고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어 보냈습니다. 즉 모든 슬퍼하는 과부들을 내어보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 가운데 몇몇 친척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함께 기도할 제자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와 함께 기도 할 교회 지도자 몇 명을 남겨 놓았습니다(마9:25).
이와 같이 베드로는 허영이나 겉치레가 될만한 것들은 다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구경하려고 왔으나 그는 구경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물리친 것은 보다 더 자유스럽게 이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님 앞에 영혼을 기울려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즉 잡담과 소란스러운 통곡으로 말미암아 방해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주님은 골방의 기도도 들어 주시고 엘리야의 갈멜산의 등정에서 850명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가 아니라 혼자 기도하는 그의 제단에 불이 임했습니다. 주님은 벧엘에서 야곱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저는 많은 가족들과 귀국 길에서 모든 자녀와 처를 앞서 보내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또 모세의 기도도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60만 백성들의 시내산 밑의 원성을 피해 혼자 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법을 내리어주시어 그들이 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주님은 은밀한 곳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장소 선택에 시간 보내지 말고 내가 있는 곳 어디든지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갱생의 큰 문제 앞에 무릎을 끓고서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일으키실 때 그런 것처럼 엄숙하게 정성을 기울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들의 권위로 기도하여 그가 원한 사람을 소생시킨데 비하여 베드로는 자신이 복종하려는 종과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므로 죽은 다비다가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 말씀은 소생케하는 말씀으로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는 시체를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이 말은 그가 기도할 때에 시체의 모습이 그의 신앙을 낙심케하지 않도록 시체에서 돌아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마치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소망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체를 향하여 주님의 이름을 빌어 주님께서 하신 본을 따라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시 소생토록 하리라”라고 명하였더니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감겨졌던 눈이 뜨였고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베드로와 기도하는 자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산 것이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위한 신앙은 언제나 큰 일만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다비다의 갱생의 기적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뜻이 계시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죽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다시 살리신 줄로 여겨 집니다. 그것은 저희 하는 선행이 미미하지만 당시 그곳에는 믿는 자들 중에 행을 하는 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선행을 장려하기 위해서 저를 살리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
또한 선하고 좋은 일을 하는 자에게는 불행 속에도 전화위복이 있음을 보여 주심이 아닌가 생각이 되오니 우리 모두는 이 다비다 같이 선행에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만이 나의 생애가 불행이 없는 여생의 길이라고 여겨 집니다.